Round 159. 만국 박람회
유러피언 컵 결승전 다음 날 아침.
준영은 숙취로 지끈거리는 머리를 움켜쥐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휴, 용케 살아 있구나.”
어젯밤 우승 파티는 도가 좀 지나쳤다.
맷 버스비 감독이나 옛 동료들도 합류해서 흥겹게 놀고 마시는 것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갈수록 분위기가 광란으로 치달았고, 권주 역시 거부할 수 없게 되었다.
주장 하느라 고생했다고 한 잔.
우승까지 오느라 수고했다고 또 한 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위하여 다시 한 잔.
그렇게 쭉쭉 들이켜다 보니 어느새 필름이 뚝 끊겼다.
“거참, 호텔방으론 어떻게 돌아온 건지…….”
그 의문을 접어 둔 준영은 샤워부터 한 후, 옷을 갈아입고 아침을 먹으러 호텔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에는 데니스 바이올렛과 바비 찰튼을 비롯한 몇몇 동료들이 이미 식사를 하는 중이었다.
“어서 와, 존. 속은 좀 어때?”
“위장보다 머리가 더 문제죠. 근데 다른 사람들은? 벌써 다 먹고 제 방으로 돌아간 겁니까?”
준영의 물음에 바이올렛은 고개를 저었다.
“어제 거의 다 전멸당했어. 아직 일어나지도 못한 녀석들이 태반이야.”
“예? 아니, 무슨 일이 있었는데요?”
혹시 자신도 모르게 2차, 3차라도 간 것일까.
어리둥절해하는 준영을 바이올렛과 바비가 어처구니없다는 눈길로 바라보았다.
“진짜 생각 안 나?”
“내가 무슨 짓이라도 저질렀어요?”
바비가 한숨을 푹 내쉬며 진상을 말했다.
“위스키랑 럼, 브랜디를 잡히는 대로 섞어서 폭탄주를 만들었잖아요. 그것도 우승컵에다 가득 부어 가지곤 전원에게 골고루 돌렸지. 그것도 몇 번씩이나.”
“설마…….”
“진짜라고요. 나만 당할 수 없다는 둥, 오늘 너희들 다 죽여 준다는 둥 그랬다고.”
그런 추태를 부렸다니!
아무래도 맛이 가도 단단히 갔던 모양이다.
“내 생전에 유러피언 우승컵에 입을 맞추게 될 줄은 몰랐지만, 그걸 통째로 술잔으로 쓰게 될 줄은 진짜 몰랐어.”
“하아, 미안해요.”
“하하하, 됐어. 평생 기억에 남을 한 잔이었으니까.”
무안한 마음에 준영은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서 호텔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불이나 차면서 킥 연습을 할까 자책하고 있을 때,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청소하러 온 사람인가?’
그런데 문을 열었더니 낯익은 이들이 들어오는 게 아닌가.
“오빠야, 우리 왔어!”
“어라? 너희가 여긴 어떻게……?”
눈앞에 나타난 프레드로 남작가의 자매들을 보며 준영은 반가움과 의문이 뒤섞인 표정을 지었다.
그런 그에게 리즈가 말했다.
“어떻게 오긴요. 준을 응원하러 왔죠.”
“어르신이 용케 허락하셨구나.”
앤지와 카린은 몰라도 리즈는 대학 입시가 바로 코앞.
그런데 축구 응원을 하러 외국에 다녀오는 걸 허락하실 줄이야.
“브뤼셀에서 만국 박람회가 열리고 있잖아요. 그걸 꼭 보고 싶다고 하니 허락해 주셨어요.”
‘알면서 허락하신 것 같군.’
1958 브뤼셀 만국 박람회는 4월 17일에 개막해, 10월 19일까지 진행된다.
즉, 입시가 끝난 후에도 얼마든지 보러 올 수 있는 것.
더구나 박람회가 열리는 장소는 헤이젤 스타디움이 있는 헤이젤 파크였다.
‘눈 가리고 아웅 한다는 게 이런 거겠지?’
결국 알버트도 리즈의 속셈을 알고 보낸 게 틀림없다.
물론 자매들만 보낸 건 아니고, 수행할 고용인들도 함께 보냈다.
“체트리랑 카밀도 왔구나.”
“네, 안 그래도 어제 체트리를 보내서 우리가 온 걸 알리라고 했는데… 준이 많이 취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얘기는 전하지 못하고 호텔 방에 데려다주고 왔다고.
“음, 어떻게 방으로 왔나 했더니……. 그나저나 만국 박람회라면 구경할 게 많겠지?”
“준도 같이 구경 갈래요? 어차피 선수단 귀국도 내일이라면서요?”
준영은 쾌히 승낙했다.
박람회 같은 행사는 21세기에도 구경하지 못했기에, 상당히 기대되었다.
***
브뤼셀 북서쪽 헤이젤 파크.
이곳은 1935년에도 만국 박람회가 개최된 장소로, 아토미움이라는 기념물을 비롯해 여러 가지 예술품과 전시관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관람객들은 도보 혹은 박람회장 내에 마련된 케이블카나 모노레일을 타고 구경을 다녔다.
‘이게 뭐지? 안에 레코드판 같은 게 잔뜩 들어 있네.’
IBM의 전시관에 온 준영과 자매들은 최첨단 컴퓨터들을 구경했다.
연방 신기한 눈길로 바라보는 그들에게 전시관 큐레이터가 으스대듯이 설명했다.
“이건 RAMAC이라는 컴퓨터 기록 장치죠. 자기 디스크를 사용해서 많은 데이터를 저장할 수 있는데, 앞으로 컴퓨터의 핵심 장비가 될 겁니다.”
“뭔가 했더니 하드 디스크로구만. 저장 용량은 얼마나 되죠?”
준영의 말에 큐레이터는 깜짝 놀랐다.
그냥 동양에서 온 구경꾼이라고 생각했는데, 기록 저장 용량을 묻는 걸 봐서는 제법 컴퓨터에 대한 전문 지식을 알고 있는 사람 같았다.
“아, 용량 말입니까? 놀라지 마세요. 무려 5백만 바이트나 됩니다!”
“5백만 바이트면… 5메가란 얘기인가.”
계산해 보던 준영의 말에 큐레이터는 맞장구를 쳤다.
“맞습니다! 이게 얼마나 많은 용량인가 하면, 천공 카드 6만 장이 이 안에 들어간 거나 마찬가지이지요.”
그래 봤자 노래 한 곡.
아니, 음질이 높은 파일이면 그보다 용량이 더 나간다.
‘내 주머니 속에 있는 스마트폰 저장 용량만 해도 수백 기가에 달한다고 하면 기절하겠군.’
그뿐만 아니라 집에 두고 온 노트북은 그 몇 배나 된다.
그렇다 보니 침을 튀기며 첨단 기술 운운하는 큐레이터가 어째 딱해 보였다.
‘SF 영화 같은 데서 외계인이 미개한 지구 문명을 보는 기분이 이럴까나.’
그때 준영에게 가까이 다가온 리즈가 나지막하게 물었다.
“준은 재미없겠네요. 최첨단 기술이라고 해도 준의 입장에선 구닥다리니까.”
“아니, 레트로 박물관 견학하는 것 같아서 재밌어. 근데 리즈는 이런 데 관심이 많은가 봐?”
그냥 구경하는 카린이나 앤지와 다르게 리즈는 전시물을 유심히 보고 큐레이터들의 말도 꼼꼼히 기록했다.
“준이 저번에 그랬잖아요. 미래는 개인용 컴퓨터랑 모바일 기기가 인터넷이란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유비…….”
“유비쿼터스?”
“네, 언제 어디서든 컴퓨터를 활용한다고 했었죠.”
리즈는 준영이 사용하는 스마트폰이나 노트북에 관심이 많았다.
이전까지 그녀가 아는 컴퓨터라는 건 연구실에서 복잡한 수식을 계산하거나, 수많은 기록들을 분류하는 도구에 불과했다.
하지만 준영이 보여 준 미래의 컴퓨터들은 정말 다양한 기능이 있었다.
사진을 보거나 노래나 영화를 틀기도 했다. 여기에 간단한 메모는 물론 책 수십, 수백 권을 기록해 저장할 수 있었다.
과거에 와서 되지 않지만, 화상 전화나 사진이나 문서 등도 교환할 수 있다고.
리즈는 이런 미래 기술의 무궁무진함에 홀딱 빠졌다.
“앞으로 그쪽 분야가 많이 발전할 거라니까 나도 대학에 가면 그쪽으로 공부해 보려고요.”
“소프트웨어 개발자나 프로그래머가 되려는 거야? 나중에 빌 게이츠나 잡스처럼 될지도 모르겠네?”
“그 두 사람 다 유명한 사람이에요?”
“응. 지금은 걸음마나 하고 있으려나? 아무튼 미래 IT 업계의 거목들이지. 세상을 바꾼 사람들이기도 하고.”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던 둘은 카린이 한쪽에서 어떤 남자와 말다툼을 하는 것을 보았다.
“하하하, 꼬마 아가씨, 상상력이 기발하구나. 하지만 아무리 미래라도 그런 건 무리야.”
“가능해요! 카린은 알아요. 아저씨네 나라에서 외계인을 잡아 두고 고문해서 과학 기술을 빼내고 있는 걸.”
“로즈웰 사건? 하하핫! 얘야, 그건 헛소문이야.”
껄껄 웃음을 짓는 사내에게 다가간 리즈는 정중히 사과를 했다.
“죄송합니다. 동생이 어려서 철이 없어서 실례를 끼쳤네요.”
“아뇨. 오히려 재미있었습니다. 화상 전화에 계산기, 물어보면 무엇이든 대답해 주는 요정까지 들어 있는 기계라니……. 정말 아이들은 상상력이 풍부해요.”
사내의 말에 준영과 리즈는 카린을 슬쩍 째려보았다.
요 말괄량이가 스마트폰에 대해서 떠벌린 것 같았으니까.
“그래도 들고 다니는 휴대용 전화는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우리 회사는 워키토키 같은 무전기도 만들어 봤기에 확신할 수 있어요.”
“통신 업계 종사자셨군요.”
준영의 말에 사내는 빙긋 웃음을 지었다.
“로버트 W. 갤빈이라고 합니다. 라디오나 통신 장비를 만드는 회사를 운영하고 있죠. 이번 박람회에도 전시관을 열었으니 관심 있으면 방문해 주세요.”
그러면서 사내, 아니 갤빈은 일행에게 명함을 건네주고 갔다.
준영은 명함에 선명하게 찍힌 M자 문양을 보고 눈을 둥그렇게 떴다.
‘모토로라!’
휴대폰을 최초로 만들고 서비스한 통신 업체.
세상에 혁신을 일으킨 주역과의 짧은 만남이었다.
***
1958 브뤼셀 만국 박람회의 모토는 ‘보다 인간적인 세상을 위한 세계의 평가’였다.
주최 측은 그 평가를 첨단 기술과 과학 발전으로 보여 주고자 했다.
하지만 발전한 세상에도 구시대의 야만적인 행태는 남아 있었다.
“저걸 봐. 사람을 우리 속에 가둬 놨어.”
“세상에, 어떻게 저런…….”
앤지가 가리키는 곳을 본 일행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콩고 마을이라고 이름 지어진 전시관에는 나무로 담장을 쳐 놓고 그 안에 아프리카인들을 단어 그대로 전시해 놓았다.
민속촌이나 문화 체험관 같은 것과는 전혀 달랐다.
그냥 사람을 동물원의 짐승처럼 가둬 두고 구경하고 있었던 것.
심지어 몇몇 관람객들은 과자 같은 걸 던지기도 했다.
이를 비난하는 사람들이 없진 않았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이들이 훨씬 많았다.
‘진짜 미친 시대야.’
지금이 인종 차별이 심하다는 건 알고 있지만, 설마 저런 짓을 할 줄이야!
엄청난 불쾌감에 준영은 발걸음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모습에 자매들의 마음도 착잡해졌다.
“미안해요.”
“왜 사과를 해? 리즈가 그런 게 아니잖아.”
“그래도 괜히 구경 가자고 부추겨서 언짢게 했잖아요.”
“그래도 다른 재밌는 것도 구경 많이 했는걸. 너무 신경 쓰지 마.”
기분도 풀 겸, 일행은 근처에 있는 예술품 전시관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거기엔 착잡한 기분을 풀러 온 또 다른 무리들이 있었다.
바로 어제 경기했던 레알 마드리드 선수단이었다.
“어, 저 녀석,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주장 녀석 아냐?”
“맞아. 존 Y. 리야.”
“으, 하필 여기서 마주치냐.”
“그러게. 어제의 악몽이 다시 떠오르는 것 같아.”
준영의 가벼운 인사에 그들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을 뿐.
하지만 다가와서 반갑게 악수를 건네는 이들도 있었다.
바로 레몽 코파와 레알의 구단주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였다.
“이런 데서 다시 만날 줄이야! 아무래도 신이 각별한 인연을 맺어 주려는 모양이구먼!”
‘각별한 인연이라…….’
레몽 코파의 통역을 들은 준영은 베르나베우 회장이 무엇 때문에 살갑게 구는지 냉큼 눈치챘다.
‘정말 날 영입하려고?’
베르나베우 회장의 눈빛은 어제 잠깐 봤을 때보다 훨씬 더 진지해 보였다.
마치 거절하지 못할 제안을 할 것처럼 보였다.
***
1. 트로피에 술 부어서 마시는 건 우리나라만 그런 줄 알았는데, 찾아보니 사람 사는 동네는 다 똑같더군요(…).
2. 브뤼셀 박람회의 ‘콩고 마을’은 벨기에가 콩고를 서구화시켰다는 선전용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나 의도는 정말 불순했고, 심지어 콩고에 대학살을 저지른 레오폴트 2세의 흉상을 떡하니 전시해 놓기도 했습니다.
결국 국내외로 비난에 시달렸고, 박람회 기간 중에 철거되고 말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