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전드 1957-158화 (158/400)

Round 158. 나는 전설이다

디 스테파노의 패스가 전해지기 직전.

준영은 빌 포크스, 이안 그리브스와 눈빛을 교환했다.

‘침투 패스가 들어올 겁니다. 함정을 파죠.’

‘알았어. 동시에 전진하지.’

‘나도.’

세 사람은 약속을 한 것처럼 앞으로 나아가며 오프사이드 트랩을 만들었다.

그 바람에 맨유 3백 뒤쪽에 있던 프란시스코 헨토는 순식간에 그들의 앞쪽으로 가게 되었다.

‘어라, 지금 이 위치면 오프사이드잖아.’

헨토는 순간 당황했다.

여기서 공을 잡으면 그대로 파울.

시간도 없는 상황에서 맨유에게 공이 넘어가 버린다.

그는 황급히 자리를 옮기려 했지만, 그보다 앞서 디 스테파노에게서 패스가 전달되었다.

‘망했… 어?’

헨토는 어리둥절했다.

분명히 오프사이드인데 휘슬도 울리지 않고, 부심이 깃발을 들지도 않고.

‘그럼 이거 차도 되나?’

“뭐 해! 얼른 갈겨!”

잠시 머뭇거리고 있을 때, 벼락같이 터져 나온 동료 리알의 외침.

번쩍 정신을 차린 헨토가 공을 차는 순간, 뭔가 커다란 놈이 앞으로 달려들었다.

‘존 Y. 리!’

태클로 막으려 한 모양이지만, 슈팅을 저지하지 못했다.

살짝 방향을 굴절시켰을 뿐.

터엉-!

회심의 슈팅이 크로스바를 맞고 튀어 올랐다.

사색이 되었던 맨유 선수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 지 못했다.

“뭐 해! 바보들아! 아직 안 나갔다고!”

“우아아! 잡아! 잡아!”

페널티 박스로 떨어지는 공을 잡기 위해 한바탕 아수라장이 벌어졌다.

이리저리 들이민 양 팀 선수들의 머리에 부딪친 공이 몇 번이고 공중으로 튀어 올랐다.

“내가 잡는… 커윽!”

자리에서 일어나 공을 향해 뛰어오르던 준영은 팔꿈치에 얻어맞았다.

덕분에 입술이 터지고 말았다.

‘젠장, 파울… 이 아니네.’

팔꿈치로 친 건 같은 편인 프레디 굿윈.

워낙 상황이 정신없다 보니 준영인 줄 모르고 경합했던 것.

아무튼 아수라장 같은 볼 경합의 최종 승자는 골키퍼 해리 그렉이었다.

그는 숀 코너리의 머리에 맞고 튄 공을 낚아채서 가슴에 품었다.

해리 그렉 주변으로 몰려왔던 레알 선수들은 분통한 표정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젠장, 막판에 이게 무슨 난리람.”

“수명이 10년은 깎인 것 같아.”

맨유 선수들은 이제 진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준영은 알베르트 심판과 선심을 번갈아 가며 째려보았다.

막판의 대환장 파티를 만든 주범이니까.

‘못 본 거야, 아님 넘어가려고 했던 거야?’

아무튼 진짜 큰일 날 뻔했다.

괜히 섕클리 감독이 오프사이드 트랩을 양날의 검이라고 했던 게 아니었다.

삐익- 삑!

해리 그렉이 멀리 내찬 공이 레알 진영에 떨어졌을 때, 심판이 경기를 종료시켰다.

“이겼다!”

“우리가 우승이야!”

“Manchester is Wonderful!”

신나게 함성을 지르거나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있는 준영과 맨유 선수들을 바라보던 디 스테파노는 질끈 눈을 감았다.

패배, 대회 3연패 실패.

승부에 절대라는 것은 없다지만, 쓰린 마음은 쉬이 진정되지 않았다.

“미안해요. 머뭇거리지 않고 바로 찼어야 했는데…….”

헨토의 사과에 디 스테파노는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오프사이드였어.”

그걸로 동점 골을 얻어 연장전으로 가고, 거기서 역전을 시킨다 해도 구설수에 올랐을 게 틀림없다.

명예롭지 못한 우승을 거두느니 차라리 깔끔하게 지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축구 한두 해 하는 거 아니잖아. 다음 시즌에 또 기회가 있어. 나보다 네가 더 기회가 많을 거고.”

디 스테파노는 앞으로 레알을 짊어지고 나갈 후배의 어깨를 다독여 주었다.

***

경기가 끝난 후, 시상식이 진행되었다.

벨기에의 젊은 왕제(王弟) 알베르가 선수들에게 메달을 수여했다.

시무룩한 표정으로 준우승 메달을 받아들인 레알 마드리드 선수들과 달리, 맨유 선수들은 여전히 흥분과 감격을 진정시키지 못한 상태였다.

무릎 부상으로 후반전에 퇴장했던 어니 테일러도 아픔을 완전히 잊었는지 싱글벙글했다.

“하하, 정말이지 선수 생활 말년에 이런 엄청난 명예를 얻을 줄이야!”

“어니 아저씨, 주장이 그러는데 울다 웃으면 뿔 난대요.”

“울긴 누가 울었다고 그래?”

“다쳐서 퇴장할 때 울었잖아요.”

“안 울었어!”

준영은 동료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어니 테일러나 알렉스 퍼거슨처럼 신이 난 부류가 있는가 하면, 숀처럼 각본 없는 드라마를 완성한 것에 감동을 느끼는 이들도 있었다.

한편으로 해리 그렉이나 바비 찰튼같이 연방 눈시울을 붉히는 이들도 있었다.

갑작스러운 사고로 인한 고난, 그리고 그로 인해 낙마한 친구들이 떠올랐던 모양이다.

반응들은 제각기 달랐지만, 벅찬 기쁨을 느끼고 있는 건 같았다.

그 점은 준영도 마찬가지였다.

‘거참, 내가 빅 이어를 들어 보는 날이 올 줄이야!’

챔피언(Champion).

21세기에서도 얻지 못했던 왕중왕의 타이틀을 얻었다.

그것도 체사레 말디니나 디 스테파노 같은 당대 레전드 선수들을 물리치고 축구 역사를 바꾸는 대형 사고를 쳤다.

이만하면 이제 레전드라 할 만하지 않을까?

‘그래, 나는 전설이다!’

감격에 차 있는 준영.

그는 사회자의 외침에 번쩍 정신을 차렸다.

“우승 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선수 일동, 입장하십시오!”

준영과 맨유 선수들은 줄줄이 알베르 왕제 앞으로 다가가 악수를 나누고 우승 메달을 받았다.

마지막에 메달을 받은 건 준영.

마치 조각상같이 준수한 외모를 가진 알베르 왕제는 신기한 표정으로 연방 준영을 바라보았다.

“중국인이 주장이라…….”

프랑스어로 중얼거리는 왕제의 말에 준영이 대답했다.

“저는 한국인입니다, 전하.”

“Coree? 아, 부왕께서 군대를 보냈던 극동 아시아의 반도 국가 말이군.”

고개를 끄덕인 왕제가 다시 말을 건넸다.

“그대가 주장을 맡은 것에 대해 반대하는 이들이 많았을 것 같은데?”

“그래서 실력으로 증명했습니다.”

준영의 말에 왕제는 가늘게 웃음을 지었다.

그러고는 유러피언 컵 우승 트로피를 들어 준영에게 건넸다.

‘이게 우승컵인가? 21세기의 빅 이어하곤 좀 다르네.’

빅 이어라고 부르기엔 귀가 좀 작아 보였다.

어쨌거나 유럽 클럽 축구 왕중왕의 자리에 올랐음을 증명하는 보물.

준영은 우승컵을 번쩍 들어 올렸다.

카메라 플래시가 눈부시게 터지며, 환호성과 박수가 쏟아졌다.

역사적인 영광의 순간.

레전드 플레이어가 된 준영은 그 영광을 한껏 만끽했다.

***

“호외요, 호외!”

서울은 물론 대한민국 전역이 또 한 번 들썩였다.

이준영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유러피언 컵에서 우승한 소식이 전해진 것.

이 소식은 마침 해외 법인과 공장 설립 문제로 한국에 와 있던 조셉 포스터도 듣게 되었다.

“훗, 형님이 끝내 해낸 모양입니다.”

“그러게요. 정말 장한 일이죠.”

이억관도 기뻐했지만, 이번에 설립되는 승리제화의 고문을 맡은 양우조는 썩 기뻐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장한 일이긴 한데… 영국 대표팀을 선택한 게 아쉽구만.”

사실 양우조뿐만 아니라 많은 국민들이 이를 아쉬워했다.

이억관도 처음에 그 소식을 들었을 때 실망하고 준영에게 전화로 푸념을 늘어놓은 일이 있었다.

나중에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납득하게 되었지만.

“준영이 그 친구는 축구를 하게 해 준 빚을 갚겠다고 영국 대표팀 유니폼을 입은 겁니다. 이번 월드컵이 끝나면 한국 대표팀으로 뛸 테니 염려 마십시오.”

“그렇다면 다행이구먼.”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조셉이 좀 더 설명을 덧붙였다.

“피파에선 현재 해당 국적의 대표팀에서 뛰도록 명시되어 있습니다. 제가 알기로 형님은 한국 국적이 없다고 들었습니다.”

만약 한국 국적, 그러니까 여권도 없이 한국 대표팀 경기를 뛰었다면 곧장 징계를 당했을지 모른다.

예전에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가 징계를 당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렇구려. 이 늙은이는 그런 사정까지는 잘 몰라서 말이지.”

어쨌거나 다음번엔 대한민국 대표로 뛰어 주기를.

유럽 챔피언 팀의 주장을 맡고 있는 이가 대한민국 대표라는 사실만으로 국민들은 뿌듯함과 자부심을 느낄 것이다.

“아 참, 포스터 사장, 한 가지 부탁이 있소.”

“무슨 부탁 말입니까?”

이미 법인과 공장 설립은 순조롭게 추진되고 있는 중이다.

관련 인력 채용도 거의 완료했다고 들었고.

“혹시 기술 이전 문제 말입니까? 확실히 소재 쪽은 저희가 알려 줄 만한 부분이 있지만, 그 밖의 제작 기술 노하우는 한국 제화공들도 충분히 뛰어나서…….”

“아니, 그건 아니오.”

고개를 내저은 양우조는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 갔다.

“이번에 인력 채용에서 떨어진 사람들이 많소. 그중에 능력이 아까운 젊은이들도 한둘이 아니지.”

이건 승리제화 쪽만 그런 게 아니다.

이억관의 라면 공장, 미스터리 푸드 컴퍼니 한국 지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마음 같아서는 모두 받아 주고 싶어도, 채용 한도가 있으니 이들을 전부 고용할 수는 없었다.

“지금 한국의 경제 상황이 영 좋지 않소. 전후 무분별한 미국의 원조로 농촌은 파탄 났고, 도시에선 고학력자들도 룸펜(* Lumpen, 실업자와 노숙자를 일컫는 당시 용어)으로 전락한 상황이고.”

“혹시 해외 노동 이민을 부탁하시는 겁니까?”

조셉의 물음에 양우조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국에 있기보다 해외로 나가 새로운 삶을 개척해 보겠다고 생각하는 젊은이들이 있어서 말이오. 준영 군의 성공에 자극을 받은 것 같았소.”

“아메리칸드림 같은 거군요.”

그런 건 과거에 유럽에도 있었다.

아일랜드나 이탈리아 사람들이 신세계에서의 성공을 꿈꾸며 미국이나 아르헨티나로 많이 건너갔다.

아무튼 거기에 대해서 조셉이 자신의 의사를 밝혔다.

“전후에 영국은 신분 증명 제도가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여권 발급도 간단하죠. 하지만 취업 문제는 만만치 않습니다.”

여러 가지 증명서들이 필요한 데다, 이걸 구비한다 해도 문제가 있었다.

바로 외국인에 대한 차별과 경계가 심하다는 점.

폴란드나 이탈리아, 독일 등 외국인뿐만 아니라, 카리브나 인도, 아프리카 등 과거 대영제국 시절 시민권자들에 대한 차별도 만만찮았다.

“존 형님이 잘된 걸 두고 낙관하는 모양입니다만, 솔직히 말해 존 형님은 좋은 분을 만난 덕분에 잘 풀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럴 거라 생각하오. 하지만 하루하루 연명하는 걸 걱정하느니 차별 정도는 감수하겠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소.”

생각하면 안타까운 일이다.

나라에서 기본적인 삶조차 보장해 주지 못하다 보니, 이런 일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위정자들은 이를 마땅히 해결하려는 노력보다 자신들의 권력에만 집착하는 답답한 형편이다.

“알겠습니다. 저도 딱한 사람을 못 본 척할 정도로 냉혈한은 아닙니다. 어느 정도까진 도와 드릴 수 있습니다.”

“고맙소. 정말 고맙소.”

“다만 지원자들에게 미리 알려 주고 싶군요. 낯선 땅에서 맨손으로 자신이 바라는 걸 쟁취하는 건 힘들다는 걸 말입니다.”

조셉도 조부의 회사에서 나와 직접 사업체를 꾸리면서 고생을 해 봤기에 홀로서기가 얼마나 힘든지 알고 있었다.

하물며 인종도, 문화도 다른 낯선 땅에서 무일푼으로 시작이라니!

‘꿈을 안고 영국에 온다 해도 그나마 할 만한 건 농장이나 탄광의 노동자 정도겠지.’

과연 신세계에서 성공을 꿈꾸는 이 나라의 젊은이들은 이를 감수할 수 있을지?

조셉은 그저 그들이 굳세게 이겨 나가기를 기원할 뿐이었다.

그들이 동경하는 스타플레이어처럼.

***

알베르 왕제는 훗날 벨기에 국왕이 되는 알베르 2세입니다.

형님인 보두앵 국왕이 자식이 없어, 노년에 왕위를 물려받았다고 하네요. 현재는 본인도 퇴위했습니다. 고령의 나이 때문이라는데 실제론 스캔들 탓이란 얘기도 있네요.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젊은 시절 엄청 잘생긴 걸로 유명했습니다.

아무튼 이 사람이 다스렸던 벨기에라는 나라는 유럽의 종교, 정치적인 문제로 뜬금없이 19세기에 갑툭튀한 국가이다 보니 내부적으로 문제가 많았습니다.

언어도 다르고, 소득 격차 때문에 남북 간에 알력도 있고.

이렇다 보니 왕실과 맥주, 그리고 축구가 국가를 단합시켜 준다는 평도 있을 정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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