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전드 1957-157화 (157/400)

Round 157. 헤이젤의 기적

어니 테일러가 부상으로 나간 후, 레알 선수들은 수적으로 부족해진 맨유를 마구 몰아붙였다.

중원을 지키던 사라가나 산티스테반도 번갈아 가며 올라와서 공격에 무게를 더했다.

그리고 효과는 곧장 드러났다.

그 덕분에 라디오 중계 캐스터는 혓바닥을 바쁘게 놀려야 했다.

「프란시스코 헨토, 빌 포크스를 제치고 슛! 아, 해리 그렉이 펀칭으로 쳐 냅니다. 이를 잡은 사라가가 다시 슛- …을 하는 순간에 존 Y. 리가 멀리 걷어 냅니다.」

볼 점유율은 거의 9 대 1 수준에 이를 정도로 레알이 압도적.

맨유에게 버거운 상황에서 디 스테파노까지 활개 쳤다.

그는 악착같이 따라오는 바비 찰튼을 제치고, 양발 사이에 공을 끼운 상태로 로니 코프와 이안 그리브스 사이를 껑충 뛰어넘었다.

“젠장, 개구리 점프잖아!”

블랑코 바운드, 혹은 쿠아테미나.

1998년 프랑스 월드컵 때 멕시코 공격수 블랑코가 한국 대표팀을 농락할 때 썼던 기술이다.

수비수를 아주 얕잡아 보는 테크닉이다 보니, 지켜보는 준영의 혈압도 상승했다.

‘디 스테파노가 저 망할 기술을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하지만 지금은 그런 의문과 분노를 억누르지 않으면 안 된다.

자신까지 뚫리게 되면 골문은 활짝 열리게 될 테니까.

‘레전드면 다냐! 절대 못 지나간다!’

‘굉장한 집중력이군. 하지만 혼자서 다 막기는 힘들지.’

슬쩍 접는 척하던 디 스테파노는 자신의 배후로 돌아 들어오던 엑토르 리알에게 슬쩍 패스를 건넸다.

‘당했다!’

낯빛이 하얗게 굳은 준영이 황급히 달려가 봤지만, 리알을 막기는 무리.

슛을 하는 리알을 보며 디 스테파노는 역전을 확신했다.

그런데 리알의 발이 공에 걸리기 직전, 뒤에서 날아든 날카로운 태클이 공을 라인 밖으로 밀어냈다.

‘아니, 대체 누가…….’

화들짝 놀란 디 스테파노는 의기양양하게 미소 짓고 있는 맨유의 애송이 공격수를 보았다.

“어때요, 주장? 이만하면 2인분으로 뛰는 거 맞죠?”

가슴을 쓸어내린 준영은 으스대는 알렉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잘했다. 하지만 백태클은 위험하니까 함부로 쓰면 안 돼.”

“쳇, 칭찬을 하려면 확실히 해 줘요.”

“시끄러. 시합 아직 안 끝났어.”

핀잔을 건넨 준영은 곧이어 날아든 레알의 코너킥을 헤딩으로 힘차게 밀어냈다.

후반 25분.

여전히 점수는 1 대 1이었고, 승리의 여신은 아직 어느 쪽에도 손을 들어 주지 않았다.

***

“퍼기 녀석이 수비 가담을 많이 하는군요.”

“이럴 게 아니라 나도 내려가 봐야겠어.”

데니스 바이올렛은 숀 코너리가 수비를 거들러 가는 것을 보고 당황했다.

“잠깐! 전부 수비로 가면 공격은 어떻게 하라고요! 나 혼자는 무리란 말이야!”

바이올렛은 한숨을 짧게 내쉬었다.

알렉스와 숀이 가세한 덕분에 일단 수비는 안정을 되찾았다.

멋대로 공격에 가세하던 상대 하프백들이 견제를 받았기 때문.

하지만 바이올렛의 예상대로 공격은 난항에 빠지고 말았다.

다소 전진해 있다곤 하지만, 여전히 레알 진영에는 아티엔자, 레스메스, 산타마리아 3백이 굳건하게 자리하고 있었으니까.

“이런 상황에선 제대로 된 역습이 불가능하다고.”

최전방에 홀로 남겨진 데니스 바이올렛 혼자서는 역습이 원활하게 이뤄지지 않았다.

혼자서는 레알 3백의 협력 수비를 뚫기 힘들었다.

그렇다고 공을 잡고 있다가 수비에 가담했던 동료 공격수들이 오기를 기다리다 보면 속공 찬스는 그대로 무산되곤 했다.

‘다른 방법은 없어. 나 혼자라도 해내지 않으면 안 돼!’

공격만 힘든 게 아니라, 지금은 수비도 어렵다.

다 같이 어려운 상황이니 극복하며 헤쳐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쳇, 유럽 최강이라고? 그럼 나는 세계 최강이다!”

일부러 큰소리를 친 바이올렛은 과감한 드리블로 치고 나갔다.

비록 슈팅은 못하더라도 어떻게든 상대 문전에 가깝게 접근해 가는 게 그의 목적이었다.

그리고 그 속셈을 레알 수비수들도 눈치챘다.

“조심해. 이 녀석이 지금 파울을 유도하려 들고 있어!”

“파울하지 말고 막아!”

문전 앞 프리킥은 약팀의 입장에선 아주 좋은 공격 찬스.

더구나 맨유에는 킥력이 뛰어난 존 Y. 리가 있다.

그러니 절대 섣부른 차징이나 태클을 해선 안 된다.

이렇게 판단한 레알 수비수들은 노련하게 슛이나 드리블 루트를 차단하는 방식으로 바이올렛의 전진을 막았다.

‘젠장, 문전 가까이 가야 하는데!’

길목을 가로막힌 바이올렛은 상대 골대가 아닌 코너 쪽으로 점점 밀려갔다.

당연히 골대와 멀어질수록 수비수들도 훨씬 더 거세게 달려들었다.

‘공을 뺏기면 안 돼! 뺏기면 놈들에게 찬스를 주게 될 뿐!’

바이올렛은 2명에게 둘러싸인 상황에서도 악착같이 공을 지켜 냈다.

한 번 중심을 잃고 넘어졌지만, 이내 다시 일어나서 상대 수비가 들이대는 발을 막아 냈다.

‘차라리 이대로 코너킥이나 드로잉이라도 따내 볼까?’

그리 생각한 순간, 번득이는 외침들이 들려왔다.

“데니스, 이쪽으로 패스해!”

“나도 왔어요!”

버티고 있는 사이, 숀과 알렉스가 공격에 가담했다. 바비 찰튼과 준영이 그 뒤를 받치듯이 뒤따라왔고.

“참 나, 다들 왜 이리 늦었어?”

반색을 한 바이올렛은 하마터면 아티엔자에게 공을 빼앗겨 버릴 뻔했다.

이런 상황이라면 마법사 리틀 존은 어떤 발재간을 보였을까.

‘쩝, 난 그 녀석 흉내를 낼 만큼 발재간이 좋지 않잖아.’

하지만 순간적인 몸놀림은 누구 못지않다!

이에 바이올렛은 등진 상태에서 힐킥으로 아티엔자의 가랑이 사이로 공을 빼냈다.

“앗!”

아티엔자는 공이 빠진 것보다 번개같이 등을 돌린 바이올렛이 자신과 레스메스 사이를 뚫고 가려는 것에 더 당황했다.

급한 마음에 유니폼을 잡았지만, 바이올렛은 이마저도 뿌리치고 나왔다.

“저런 멍청이들! 둘이서 하나를 못 잡다니!”

“수비! 얼른 수비해!”

허둥지둥 자기 진영으로 돌아온 레알 선수들은 황급히 빈 공간을 메웠다.

엄청나게 빨리 수비로 전환하는 속도에 준영도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디 스테파노도 벌써 왔군.’

확실히 전환은 빠르다.

하지만 수비진이 온전하게 자리를 잡지는 못한 상태.

분명 지금은 찬스라 할 만했다.

“존! 때려 넣어!”

숀이 산타마리아를 유인해 가는 것을 본 바이올렛이 준영에게 패스를 건넸다.

곧장 다이렉트 슛을 때리려던 준영은 뒤에서 날아드는 태클에 깜짝 놀라 주춤했다.

‘디 스테파노!’

공격만 잘하는 게 아니라 수비도 일품.

면도칼 같은 태클은 깔끔하게 준영의 앞에서 공을 밀어냈다.

“근데 좀 실수하셨군.”

슛에 실패하고도 웃는 준영과 달리 스테파노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방금 전에 태클로 밀어낸 공을 바비 찰튼이 잡아서 페널티 박스로 달려 들어갔으니까.

산티스테반이 기를 쓰고 쫓아갔지만, 따라잡지 못했다.

바비는 달려 나오는 알론소 골키퍼를 상대로 슈팅을 날렸다.

이를 악물고 날린 슈팅은 알론소의 옆구리를 지나, 레알 마드리드 골대에 그대로 꽂혔다.

“우와아아아-!”

경악의 탄성.

헤이젤 스타디움에 모여 있던 67,000명의 관중들은 눈앞에서 벌어진 대형 사고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한 명이 부족한 팀이 오히려 다시 앞서가는 득점을 만들어 내다니!

그것도 2연패 챔피언인 레알 마드리드를 상대로!

“맙소사,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는 거지?”

“이건 말도 안 돼…….”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주저앉은 레알 선수들은 미친 듯이 날뛰며 골 셀레브레이션을 펼치는 맨유 선수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바비 찰튼에게 어시스트를 밀어준 치명적인 실책을 저지른 디 스테파노 역시 허탈한 표정을 지을 따름.

“진짜 악마에게 홀린 것 같군.”

믿을 수 없다는 듯 연방 고개를 내젓는 그는 맨유 선수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필드의 붉은 악마들.

그들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기적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

“저게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인가?”

“진짜 대단한 놈들이군!”

“원래도 강했어! 지난 시즌 유러피언 컵에서도 4강에 올랐다고!”

연방 경탄하는 관중들의 반응을 즐겁게 감상하는 이들이 있었다.

바로 영국인들.

이들은 대부분 1958년 브뤼셀 박람회 건으로 찾아온 관광객들이었다.

하지만 맨체스터에서 온 소수의 서포터들도 있고, 이 중에는 유나이티드 구단 관계자들도 있었다.

“오, 세상에! 신이시여,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이 정녕 사실입니까?”

맷 버스비 감독은 믿기지 않는 결과에 목이 메었다.

완전히 무너져 버렸던 팀이 다시 일어나 유럽 최강의 저승사자 군단에게 앞서가고 있었다.

몇 번이나 눈을 비비고 봐도 분명한 현실!

벅차오르는 가슴은 정말 터져 버릴 것 같았다.

“사실이에요, 감독님. 우리 팀이 이기고 있다고요.”

“우리가 뛴 것이 헛되지 않았어요.”

로저 바인과 재키 블란치플라워.

버스비 감독을 모시고 브뤼셀에 온 2명의 주전 선수들도 시큰해지는 코를 매만졌다.

“자자, 감동은 거기까지 하시고 얼른 응원해야죠. 아직 경기 끝나지 않았어요.”

붉은 레플리카를 입은 소녀의 말에 세 사람은 번쩍 정신을 차렸다.

바로 재킷을 벗어 던진 로저와 재키는 크게 함성을 질렀다.

“Go! Go! United!”

“Manchester is Wonderful!”

버스비 감독 역시 질세라 목소리를 높이고 박수를 쳤다.

그 모습을 보며 빙그레 미소 짓던 소녀, 아니 리즈도 응원에 힘을 보탰다.

앞으로 10분, 눈앞에 온 기적이 부디 허망하게 날아가지 않기를 기대하면서.

***

시간은 멈추지 않고 흘러갔다.

더 이상 여유라곤 남아 있지 않은 레알 마드리드는 총공세를 펼쳤다.

이런 그들의 맹공에 맨유는 우주 방어 기세에 돌입했다.

견제용으로 최전방에 데니스 바이올렛만 박아 둔 상태로 모든 선수가 수비 라인에 모여 농성전에 돌입했던 것.

상대의 맹공에 시달리고 있었지만, 다들 기운이 넘쳤다.

쩔쩔매는 상대나, 전후반 내내 희미하던 맨유의 응원 함성이 점점 커지는 걸 보면 승리가, 그리고 우승이 다가옴을 느낄 수 있었다.

“버텨! 이제 얼마 안 남았어!”

“오른쪽! 오른쪽으로 온다! 얼른 가서 붙어!”

“반드시 이긴다! 죽기 살기로 막아!”

준영은 연신 사방을 살피며 수비를 진두지휘했다.

터질 듯한 목청도 바빴지만, 그보다 두 다리는 더욱 바빴다.

여기저기 쏘다니며 크로스를 걷어 내고, 침투 패스를 잘라 내야 했으니까.

거기다 돌파해 오는 상대 공격수도 침착하게 따라붙어 공을 빼앗아 냈다.

그 철벽같은 방어에 레알 선수들은 물론 필드 밖에 있던 감독 카르니글리아도 분통을 터트렸다.

“젠장, 도대체 저놈은 뭐냐! 대체 뭐냐고!”

자신의 팀에는 유럽과 남미 최고의 공격수들이 포진되어 있다.

그런데 오늘 그들이 넣은 골은 단 1점.

그 원흉은 맨유 수비 중심에 있는 저 키 큰 동양인이었다.

방금 상황만 해도 놈은 디 스테파노의 돌파를 저지하고, 슈팅을 몸으로 막아 냈다.

“감독님, 시계가 멎었습니다.”

코치의 말에 카르니글리아는 깜짝 놀라 스코어보드의 시계를 바라보았다.

정말 정규 시간 45분이 다 지났다.

물론 아직 경기는 끝나지 않았다. 심판의 재량 아래 몇 분 정도 시간이 더 주어지니까.

‘제발, 제발 동점 골을 넣어 줘!’

카르니글리아 감독이 애원하던 그 순간.

디 스테파노의 패스가 수비수보다 앞서 있던 헨토에게 연결되었다.

‘오프사이드다!’

준영은 확신의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깃발은 올라가지 않았고, 휘슬도 울리지 않았다.

***

실제 역사에선 1957-58 유러피언 컵 결승에서 레알이 굉장히 고전했습니다.

AC 밀란의 스키아피노에게 선제 실점을 하고, 디 스테파노가 동점 골을 넣었으나 다시 실점.

2분 후, 엑토르 리알이 다시 동점 골을 넣고 연장전에 가서 프란시스코 헨토가 결승 골을 넣었죠.

만약에 연장전 갔으면 재시합을 했었을 겁니다. 왜냐하면 저때는 승부차기가 없던 시절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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