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155. 돌발 제의
다소 먼 거리에서 시도한 준영의 헤딩슛.
멋진 포물선을 그으며 떨어진 공을 향해 알론소가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 손은 헛되이 허공만 긁어 버렸고, 공은 그대로 골대 왼쪽 상단 구석으로 떨어졌다.
“들어갔다아-!”
“멋져요, 주장!”
골인을 확인한 맨유 선수들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신나게 만세를 부르며 준영과 함께 골 셀레브레이션을 펼쳤다.
이 와중에 제일 어린 알렉스가 막춤을 추며 까불자, 피식 웃던 준영도 가볍게 스텝을 밟으며 둠칫둠칫 댄스를 추었다.
“이상한 춤이네?”
“이거? 트위스트.”
“Twist? 하하, 이 상황에 딱 맞는 말이구만!”
방금 전의 선제골로 레알 마드리드 선수들의 표정이 단체로 일그러졌다(Twist).
표정이 구겨진 건 레알을 응원하던 관중들도 마찬가지.
노란 원숭이라고 깔보던 녀석이 보란 듯이 골을 넣은 것도 모자라, 괴상한 춤까지 추자 안면 온도는 곧장 급상승했다.
마치 자신들을 조롱하는 것 같았으니까.
“우-! 우우!”
“끌어내! 퇴장시켜!”
“신성한 헤이젤 경기장에서 감히 저질스런 춤을 추다니!”
관중석에서 거센 야유와 욕설이 쏟아졌지만, 준영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건 심판도 마찬가지.
그는 준영을 퇴장시키는 대신 가볍게 경고를 해 주고 갔다.
“자네, 관중들을 너무 자극하진 말게.”
“이 정도 자극은 자극 축에도 안 듭니다만.”
“아무튼 적당히 해 둬. 난동이 벌어져서 좋을 건 없잖나.”
심판의 점잖은 충고에 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뒤늦게 이곳이 훗날 대참사가 일어난 헤이젤이란 사실이 떠올랐던 것.
‘일부러 그 참사를 수십 년 앞당겨서 좋을 건 하나도 없겠지.
한편, 선제골을 허용한 레알 선수들은 터덜터덜 센터 서클로 와서 경기를 재개할 준비를 했다.
“쩝, 예감이 안 좋다 싶었는데 진짜 먹힐 줄이야.”
“저 정도 신장은 반칙 같아.”
호세이토의 말에 디 스테파노는 피식 웃음을 지었다.
“키 크다고 축구를 못하게 할 순 없잖아. 장신 선수 하나에게 농락당해서는 유럽 최강팀이라고 할 수 없지.”
미소를 짓고 있지만, 디 스테파노의 눈은 웃지 않았다.
선제골까지 내주고 쓸개 빠진 웃음을 흘리며 경기를 할 순 없는 노릇.
상대가 보통내기가 아니란 걸 확인했으니 이제 제대로 플레이해야 한다.
아무리 흥미진진해도, 우승 트로피를 놓치게 된다면 기분을 잡치게 될 테니까.
“빠르게 동점 골을 만들자고. 그럼 경기가 더 재밌어질 테니까.”
“저 녀석들, 수비가 만만찮은데?”
“만만찮은 거 한두 번 경험해 봤나? 두드리면 뚫리게 되어 있어.”
심판의 휘슬이 울리자 디 스테파노는 잽싸게 동료에게 공을 건네고 맨유 진영으로 달려갔다.
준영은 사뭇 다른 기세로 돌진해 오는 레알 선수들을 보며 선제골로 들뜬 동료들을 다그쳤다.
“다들 집중해! 아직 전반전도 안 끝났어! 간격 유지하고, 마크할 상대를 놓치지 마!”
들뜨긴 했지만, 선제골로 사기가 오른 맨유 선수들은 과감하게 상대에게 맞섰다.
하지만 노련한 레알의 공격수들은 그 마크를 따돌려 버리고 디 스테파노에게 패스를 건네줬다.
그러자 바비 찰튼이 곧장 찰거머리처럼 디 스테파노에게 달라붙었다.
디 스테파노는 적극적으로 어깨를 들이밀며 공을 빼앗으려는 바비의 시도에 너털웃음을 지었다.
“확실히 끈질긴 친구로군. 하지만 이 정도로 날 잡기는 힘들걸.”
바비는 스테파노가 내뱉는 스페인어를 알아듣지 못했다.
하지만 여유 만만한 그의 미소를 보자니 은근히 불쾌감이 들었다.
‘날 아주 얕보는군!’
무엇보다 거슬리는 건 마치 자신을 처음 만난 선수 취급한다는 점이다.
이미 지난 시즌 유러피언 컵 준결승에서 본 적이 있을 텐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산소 수준으로 아무런 활약이 없었다면 모를까, 그 경기에서 바비는 골까지 넣었다.
그런데도 모른 척하는 것은 아예 관심이 없었거나 의도적으로 무시하려 들거나,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
‘이번엔 날 잊지 않게 해 주겠어!’
이를 악문 바비는 끈질기게 디 스테파노를 쫓아다녔다.
디 스테파노의 페인팅에 몇 번이나 속아 넘어갈 뻔했지만 그럼에도 놓치지 않고 따라붙었다.
마치 그림자가 된 것처럼 따라붙는 그의 모습에 레알 선수들도 혀를 내둘렀다.
“놀랍군. 투쟁심과 집중력이 정말 대단해! 자넨 몇 년 후에 분명히 발롱도르를 받을 거야.”
디 스테파노의 칭찬에도 바비는 흔들리지 않았다.
어차피 뭐라고 지껄이는지 알아듣지도 못하는데 신경 쓸 이유가 없었다.
그저 표적을 쫓는 사냥개처럼 끈질기게 따라다닐 뿐.
“하지만 아직은 멀었지. 표적만 보지 말고 좀 더 주변으로 시야를 넓게 가지라고.”
‘……!’
투웅-
디 스테파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바비는 엑토르 리알과 부딪쳤다.
화들짝 놀란 바비는 심판을 바라봤다.
하지만 파울은 아니라는 듯, 알베르트 심판은 고개를 저었다.
먼저 위치를 선점하고 있던 건 리알이었기에.
“바비가 스테파노를 놓쳤다!”
“막아! 슛을 쏘게 두지 마!”
빌 포크스가 황급히 튀어나와 마크에 나섰다.
가벼운 턴 동작으로 빌을 멈칫하게 만든 스테파노는 번개같이 공을 감아 찼다.
제대로 스핀을 먹은 슈팅은 정확하게 골대 왼쪽 상단 구석으로 들어갔다.
“Gooooo-al!”
“Stéfano! Stéfano! Stéfano!”
레알 마드리드의 동점 골.
헤이젤에 흥분한 관중들의 함성이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조금 전에 맨유의 선제골이 터졌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열광적인 분위기였다.
“쳇, 누가 보면 여기가 베르나베우(* Estadio Santiago Bernabéu, 레알 마드리드 홈구장)인 줄 알겠네.”
투덜거리던 준영에게 바비가 다가와 사과를 했다.
“미안. 제대로 막지 못했어.”
“아냐. 넌 최선을 다했어.”
그냥 상황이 나빴을 뿐이다. 하필이면 마크 중에 상대 공격수와 충돌하다니.
‘잠깐, 혹시 그거 일부러 그렇게 유도한 건가?’
사실 준영이 아까 선제골을 넣을 때도 맨유 공격수들이 문전에서 적절하게 진로를 막으며 레알 수비수들에게 훼방을 놓았다.
‘혹시 디 스테파노가 그 상황을 응용했던 걸까?’
준영이 생각에 잠겨 있을 때, 골 셀레브레이션을 마친 디 스테파노가 다가와서 말을 건네고 갔다.
뭐라고 하는지는 곁에 있던 레몽 코파가 해석해 주었다.
“너랑 똑같이 왼쪽 상단 구석으로 넣어 봤대.”
“하, 진짜…….”
일부러 똑같은 위치를 노리고 찬 거라고?
진담인지 허세인지는 알 수 없지만, 감탄이 나오거나 어처구니없지는 않았다.
‘레전드고 뭐고, 콧대를 납작하게 만들어 주겠어!’
준영의 전의가 활활 타올랐다.
***
맨유의 선제골이 터지고 5분 후, 레알의 동점 골.
장군 멍군을 주고받은 양 팀은 이후에도 팽팽한 경기를 진행해 나갔다.
주로 레알의 공격이 많았지만, 간간이 나타나는 맨유의 역습도 만만찮았다.
최전방에서 확실히 포스트 플레이를 해 주는 숀 코너리.
과감하고 왕성한 활동력으로 수비진을 흔드는 알렉스 퍼거슨.
그리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날카로운 돌파와 슛을 보여 주는 데니스 바이올렛.
이 3인방의 공격이 무척이나 효율적이고 날카로워서 레알 수비진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곤 했다.
“뭐 하고 있어? 경합을 해야 헤딩을 제대로 못할 거 아냐!”
“애송이가 설치게 두지 말라고!”
레알 수비진이 또 한 번 들썩였다.
준영의 롱 패스를 받은 숀이 바이올렛 쪽으로 공을 내어 줬고, 이것은 다시 문전으로 뛰어들던 알렉스의 발리슛으로 이어졌다.
아쉽게도 그 발리슛은 골대 옆으로 흘러 나가고 말았다.
“유나이티드가 호락호락하게 당하진 않는군.”
“그야 레알이 제대로 골을 못 넣고 있으니까.”
기자들이 본 대로 레알은 디 스테파노의 동점 골 이후 역전 골을 만들진 못했다.
5명의 공격수들이 기대할 만한 찬스를 연달아 만들어 내긴 했지만, 마침표를 찍기 전에 저지당하고 말았다.
여전히 디 스테파노를 그림자처럼 쫓아다니는 바비 찰튼이나 연달아 선방을 해내는 해리 그렉도 볼만했지만, 가장 눈에 띄는 건 이준영.
전후좌우로 쏘다니며 레알 공격수들의 돌파나 슛을 막아 내고, 수비수들을 진두지휘하며 골문 앞을 든든하게 지켰다.
「레몽 코파, 엑토르 리알에게 패스. 하지만 페널티 아크로 뛰어나온 존 Y. 리에게 공을 빼앗기고 맙니다.」
라디오 중계 캐스터의 말대로 삽시간에 털린 리알은 곧장 인터셉트를 시도했다.
하지만 준영이 드래그 백으로 간단하게 따돌리고는 공을 미드필드 지역에 있던 프레디에게 보냈다.
“빌어먹을 치노(Chino) 새끼!”
득점 기회를 날려 버린 리알이 홧김에 거칠게 몸을 부딪쳤다.
하지만 준영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서늘하게 노려보는 눈길에 되레 움찔 놀란 리알이 슬그머니 딴청을 피우며 물러났다.
그 모습에 빌 포크스가 버럭 화를 냈다.
“저 개자식, 사과도 안 하고 가다니!”
“놔둬요. 다음에 까불면 담가 버릴 테니까.”
준영의 엄포를 듣기라도 한 건지, 이후 리알은 맨유 페널티 박스 쪽으로 얼씬도 하지 않았다.
이렇게 레알의 맹공을 연거푸 막아 내는 준영의 모습은 기자들의 눈길을 끌 수밖에 없었다.
“저 동양인은 진짜 난공불락이군.”
“하지만 디 스테파노가 나선다면 어떨까?”
잠시 후, 기자들이 기대하던 상황이 곧 벌어졌다.
턴 동작으로 슬쩍 바비 찰튼을 뿌리친 디 스테파노가 페널티 박스로 들어왔던 것.
슬쩍 몸을 낮춘 준영이 그의 앞을 떡하니 막아섰다.
그 모습에 디 스테파노는 어린 시절 서커스단에서 본 커다란 호랑이가 떠올랐다.
하지만 철창 안에서 맥없이 웅크리고 있던 호랑이와 달리, 눈앞에 있는 녀석은 투지가 흘러넘쳤다.
‘장난이 아니군. 잡아먹으려고 덤빌 기세야.’
슬쩍 몸을 흔들며 양발 사이에서 공을 놀리던 디 스테파노는 준영의 다리 사이로 공을 통과시켰다.
그러고는 옆으로 슬쩍 돌아서 통과하려는 순간, 준영이 바싹 붙어서 어깨로 밀어 냈다.
그 바람에 놓친 공은 그대로 해리 그렉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쩝, 이건 안 통하는군.’
‘그 정도에 뚫릴 거 같냐.’
날카롭게 시선을 교환하고 있을 때, 알베르트 심판이 전반 종료를 알리는 휘슬을 울렸다.
준영이 동료들과 함께 라커룸으로 돌아갈 때, 레알의 감독 루이스 카르니글리아 곁에 있던 풍채 좋은 노인이 슬쩍 다가와서는 말을 건넸다.
“이분, 누구시죠? 뭐라는 겁니까?”
준영의 물음에 레몽 코파가 피식 웃음을 지으며 해석해 주었다.
“우리 팀 구단주님이셔. 혹시 우리 팀에 올 생각 없냐고 묻는데?”
“엥? 거, 무슨 농담을…….”
어이없어하던 준영의 미소가 굳었다.
농담이라고 여길 수 없을 정도로 상대 팀 구단주의 눈빛은 진지했으니까.
마치 백화점에서 유니크한 명품을 발견한 명품족과 비슷해 보였다.
‘내가 레알 마드리드에?’
그런 선택지는 생각해 본 적도 없건만.
잠시 레알의 하얀 유니폼을 입은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 보던 준영은 손을 내저었다.
“거참, 뜬금없이……. 말씀만 고맙게 받아들이겠다고 전해 줘요.”
지금은 경기에만 집중해야 할 상황.
준영은 레알의 돌발 제의를 곧장 흘려버리고 자리를 떴다.
레알의 구단주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회장이 여전히 진지한 기색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은 모른 채.
***
레알 마드리드의 홈구장 베르나베우 경기장은 1945년에 구단주로 취임한 산티아고 베르나베우(1895~1978)의 이름에서 따왔습니다.
그는 스페인 내전 이후 피폐해진 축구 인프라를 재건하고 레알 마드리드의 유소년 아카데미를 설립하면서 세계 곳곳에서 유명한 선수들을 데려왔지요. 디 스테파노나 푸스카스 등을 말입니다.
그가 재임하는 동안 레알 마드리드는 16번의 리그 우승, 유러피언 컵 6회 우승, 코파 델 레이 6회 우승을 거두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프랑스, 스페인, 포르투갈, 이탈리아 클럽들이 참여하는 토너먼트를 구상했는데, 이게 나중에 유러피언 컵, 지금의 UEFA 챔피언스리그로 발전했습니다.
레알 마드리드뿐만 아니라 유럽 축구 발전에도 공로가 커서 사후인 2002년엔 FIFA 공로 훈장을 받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