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전드 1957-154화 (154/400)

Round 154. 필드의 고인물들

레알 마드리드는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를 필두로 막강한 공격력을 자랑하는 팀이다.

물론 수비나 미드필더들의 기량도 결코 손색이 없다.

문제는 팀이 상당히 공격적인 전술로 나온다는 점.

이 때문에 레알 진영에는 빈 공간이 꽤 있었다.

특히 미드필드 지역에서.

그 때문에 준영의 롱 패스를 받은 데니스 바이올렛을 막아 세우는 게 늦었다.

그 바람에 바이올렛은 거의 방해를 받지 않고 레알 페널티 박스에 다다랐다.

‘여기서 슈팅을 날릴까? 아니면 다른 녀석들이 오기를 기다릴까?’

아주 잠시 망설이는 사이, 레알 수비수들이 마크에 나섰다.

호세 산타마리아가 차징을 시도하자, 바이올렛은 이를 슬쩍 흘려 내고는 그대로 문전으로 파고들어갔다.

‘이제 슈팅을… 이런!’

공격에 마침표를 찍을 참인데, 골키퍼 후안 알론소가 바람같이 달려 나오며 공을 잡아챘다.

바이올렛이 산타마리아를 제치는 찰나의 순간을 알론소가 놓치지 않았던 것.

경기 초반 아까운 기회를 놓치고 분통해하는 바이올렛을 알론소가 가만히 바라보았다.

‘작년에 본 적이 있는 놈이군. 그때 준결승 1차전에 나왔었지.’

비록 그때 골을 넣진 못했지만 상당히 날카로운 모습을 보여 줬다.

그래서 2차전 때도 경계를 게을리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이게 웬일.

올드 트래퍼드에서 벌어진 2차전에 바이올렛은 출전하지 않았다.

맷 버스비 감독이 2차전에서 공격 전술을 바꾸었기 때문.

‘아무튼 방심은 금물이지.’

오늘 경기는 단판전이다.

거기다 오늘 레알은 상당히 공격적인 전술로 나왔으니, 맨유에서는 계속 뒷공간을 노리려 들 것이다.

‘안 그래도 패스가 정확한 놈까지 있으니까 말이야.’

저 멀리 있는 준영을 바라보던 알론소는 맨유 진영 쪽으로 길게 공을 날려 보냈다.

“내가 잡을게!”

프레디 굿윈이 떨어지는 공을 헤딩으로 따냈다.

하지만 바비 찰튼에게 연결하려 했던 패스를 호세이토가 가로채 맨유 문전으로 몰고 갔다.

‘디 스테파노 쪽인가?’

‘헨토 아니면 리알?’

‘그렇지 않으면 직접?’

맨유 수비수들이 부지런히 상대 선수들의 움직임을 살피며 대응하는 가운데, 공을 잡은 호세이토도 내심 난감함을 느끼고 있었다.

‘수비 간격이 촘촘해. 어설프게 찔러 넣다간 뺏기겠어.’

준영이 중심이 된 3백 수비뿐만 아니라, 로니 코프와 바비 찰튼도 내려와 촘촘한 5백 수비를 구성하고 있었다.

‘중앙은 확실히 촘촘해. 하지만 측면이 헐겁군.’

호세이토는 측면으로 들어간 헨토에게 패스를 건넸다.

프레디 굿윈이 따라붙었지만, 헨토는 그를 따돌리고 문전을 향해 날카로운 크로스를 올렸다.

“소용없어. 공중전은 우리가 우위다.”

지켜보던 머피 코치의 자신감대로, 준영이 잽싸게 뛰어올라 크로스를 걷어 냈다.

이후 다시 인터셉트에 성공한 레알이 재차 크로스를 올렸지만, 이번에도 준영이 견제에 나서면서 공은 그대로 골키퍼 해리 그렉의 손에 잡혔다.

“확실히 키가 장식은 아니군.”

“저 정도면 경기하는 내내 골치겠어.”

레몽 코파와 엑토르 리알이 곤란한 기색을 보였다.

사실 키가 얼마나 크든 상관없다.

문제는 크기만 한 게 아니라 포착 능력이 좋고, 몸놀림까지 재빠르다는 거였다.

거기다 괜히 완장을 찬 건 아닌지 동료들의 움직임을 딱딱 조율해 가면서 레알의 공격을 저지했다.

이렇다 보니 예상과 달리 경기가 피곤하게 전개되었다.

심지어 디 스테파노는 맨유 문전에서 공을 제대로 건드려 보지도 못했다.

“후후후, 역시! 후후후!”

자존심이 상할 만한 상황에서도 디 스테파노는 짜증이나 불쾌감을 비치기는커녕 오히려 들떠 있었다.

심상찮은 실력을 가진 동양의 선수와 일사불란하게 대응을 잘하는 맨유의 수비.

지금까지 경험한 팀들보다 난이도가 높았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의욕이 솟구치고 있었다.

‘와, 공격 작업이 안 되는데도 웃고 있네.’

디 스테파노가 웃는 모습을 본 준영은 저도 모르게 섬뜩한 기분을 느꼈다.

산전수전 다 겪어 본 베테랑 플레이어.

그의 눈빛은 마치 새로운 이벤트나 콘텐츠가 업데이트되기를 갈구하는 골수 게이머와 비슷했다.

‘고인물이구만. 이 시대 필드의 고인물.’

내복과 단검 하나 들고도 어지간한 몹은 다 때려잡는 고인물 유저.

준영이 보는 디 스테파노가 딱 그랬다.

***

유럽 최강, 최고의 스타플레이어들로 구성된 저승사자 군단 레알 마드리드.

2연속 챔피언에 걸맞게 오늘 경기도 쉽게 풀어 가겠지.

대다수의 관중들이 이렇게 예상했지만, 전반 20분이 지났음에도 경기는 팽팽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분명히 레알이 볼 점유율을 2배 이상 가지고 공격을 주도하는, 맨유가 수세에 놓인 상황이었다.

하지만 날카로운 5개의 칼날은 두꺼운 방패를 뚫지 못했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맨유 측의 자신감이 높아져 가고 있었다.

「레몽 코파, 코너 플래그 부근에서 상대를 제치고 들어갑니다. 그리고 헨토에게 낮고 빠른 크로스! 하지만 이번에도 존 Y. 리가 발을 내밀어 걷어 냅니다.」

잠시 목을 축이던 라디오 중계 캐스터는 외곽으로 흐른 공을 디 스테파노가 잡자 황급히 물을 삼키고 입을 놀렸다.

「스테파노, 슛! …아니, 한 번 접고 슈… 또 제치고, 이번에야말로 슛!」

스테파노가 페인트를 걸 때마다 맨유 수비수들이 우수수 쓰러져 나갔다.

준영도 두 번째 페인트 동작에 속아 넘어질 뻔하다 가까스로 몸을 날려 스테파노의 슈팅을 튕겨 냈다.

덕분에 슈팅에 맞은 뒤통수가 얼얼했다.

“하하핫! 이야, 이것까지 막아 낼 줄은 몰랐는걸?”

스테파노는 준영에게 엄지 척을 해 보였다.

그러나 준영은 뿌듯하기는커녕 황당할 지경이었다.

‘젠장, 어떻게 돼먹은 작자야?’

방금 페인트를 걸 때 볼 터치는 기가 막혔다.

발바닥과 발뒤꿈치를 이용해서 능숙하게 방향을 전환하는데, 템포도 상당히 빨랐다.

21세기의 내로라하는 크랙들과 비교해도 손색없는, 아니 그 이상으로 보일 정도였다.

‘잘한다고 얘기를 들었고 플레이 영상도 봤다만… 직접 붙어 보니 또 다르군.’

정말이지 실점을 하지 않은 게 다행.

만약 방금 전에 골을 내줬다면 분위기는 완전히 돌변해 버렸을 것이다.

잘 막고 있다가 문 하나가 뚫려서 좀비들이 밀려드는 아수라장같이 되었을 터.

‘정신 차려야 해. 아직 공은 저쪽에 있으니까.’

오늘 레알은 공격수만 5명을 포진시켰다.

하지만 그 5명은 누가 공을 갖다 주기를 바라며 멀뚱히 있는 부류는 절대 아니었다.

활발히 움직이며 서로에게 패스를 이어 주고, 수비수를 견제해 가며 인터셉트를 해냈다.

거기다 리바운드 볼을 잘 따내고 실수도 적었다.

‘분명히 저들은 전방 압박이라고 할 만큼 타이트하게 붙지는 않아. 그런데도 손쉽게 공을 확보해 나가고 있어.’

마치 맨유 선수들이 어디로 패스할지, 그리고 어떤 식으로 대처하려는지 들여다보고 있는 느낌이었다.

‘디 스테파노 정도는 아니지만, 다른 작자들도 고인물 수준인 건 분명하군.’

이 고인물들을 뿌리치고 제대로 공격 전환을 할 수 있는 이들은 둘밖에 되지 않았다.

바로 준영과 바비 찰튼.

하지만 선택지가 뻔하니 레알 입장에서도 그만큼 대처가 쉬웠다.

‘그 녀석이… 던컨이 있었다면 또 다른 돌파구가 되었을 텐데.’

그러나 아직도 다리 깁스를 풀지 못한 녀석에게 미련을 둘 수는 없는 상황.

준영은 한번 저질러 보기로 했다.

개인기는 충분히 자신 있으니까.

“까짓것 해 보자!”

준영은 달려 나오며 헨토에게 연결되는 패스를 끊어 냈다.

그리고 계속 몰고 가며 호세이토의 태클도 뛰어넘었다.

“우우우!”

“우ㅋ 우키 우키키-!”

준영이 공을 몰고 치고 나오자 관중석에서 심한 야유가 쏟아져 나왔다.

대놓고 원숭이 울음소리를 내는 놈들도 한둘이 아니었다.

아니, 경기장에 들어온 관중 전체가 조롱하는 것 같았다.

어지간한 야유는 무시하던 준영도 거슬릴 정도.

‘쓰레기 것들! 오냐, 그래, 보여 주마!’

센터 서클을 지난 준영은 곧장 측면으로 달려가는 알렉스 퍼거슨에게 패스를 보냈다.

‘리턴!’

준영의 사인에 알렉스는 곧장 리턴 패스를 보냈다.

다시 공을 잡아 전방을 주시하던 준영은 숀 코너리가 슬쩍 수비수 진로를 막으며 슈팅 루트를 열어 준 것을 보았다.

‘때려!’

‘OK!’

뻐- 엉!

준영은 살짝 앞으로 굴려 보낸 공에 달려온 가속도와 체중을 담아 슈팅을 날렸다.

시원하게 좍 뻗어 날아오는 슈팅을 본 알론소 골키퍼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정면?’

확실히 정면이다. 수월하게 막을 수 있다는 생각은 순식간에 코앞까지 날아온 슛을 보고 깡그리 사라져 버렸다.

퍼억-!

‘커억!’

저도 모르게 양팔로 안면을 막은 알론소.

뒤이어 무지막지한 충격이 양팔에 전해졌다.

“큭, 막았나?”

리바운드 볼을 향해 달려드는 맨유의 공격수가 보였다.

하지만 그가 공을 잡기 전에 산타마리아가 황급히 골라인 밖으로 걷어 냈다.

“맙소사, 무슨 슈팅이…….”

벌겋게 부어오른 팔을 매만지던 알론소는 깜짝 놀랐다.

자신의 몸이 골대 안에 쓰러져 있었기 때문이다.

‘방금 전 슈팅에 내 몸이 밀렸다는 건가?’

그야말로 단어 그대로 캐논슛.

만약에 양팔로 막지 못하고 그대로 안면을 맞았다면 어땠을까?

오싹한 상상을 하던 알론소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방금 슛 봤어?”

“골키퍼를 골인시키다니!”

“원숭이 주제에 저런 중거리 슛을……!”

놀란 것은 관중들도 마찬가지.

어느새 야유가 거짓말처럼 사그라들었다.

맨유의 유효 슈팅은 방금 전 그게 처음.

하지만 그 슈팅은 지금까지 레알이 날린 그 어떤 슈팅들보다 선명하게 관중들에게 각인되었다.

그건 레알 선수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대단한 놈이로군.”

“아시아에 저런 선수도 있었구나.”

“바르셀로나에 입단했던 파울리노 알칸타라(* Paulino Alcantara(1896~1964), 스페인계 필리핀 축구 선수) 같은 부류도 있잖아.”

“그건 30년도 넘은 옛날얘기잖아. 어쨌든 코너킥 막을 준비나 하자고.”

전반전에 맨유가 처음으로 따낸 코너킥.

맨유 입장에선 어떻게든 이 소중한 기회를 살리고 싶었다.

당연하지만, 레알 입장에선 막아 내야 하는 상황.

레알 선수들이 준영의 주변으로 하얗게 모여들었다.

분명히 공중전 상황에서 그의 머리를 이용할 것이라고 본 것.

물론 숀이나 프레디 등, 다른 장신 선수에 대한 견제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예상대로 대응하는군. 연습한 대로만 진행이 된다면……!’

그동안 맨유는 코너킥과 같은 세트 피스 상황의 공격 연습을 집중적으로 했다.

그나마 레알을 상대로 득점할 수 있는 찬스니까.

삑-!

휘슬이 울리자 준영을 비롯한 장신 선수들이 슬쩍 페널티 박스 외곽으로 빠졌다.

이와 달리 2선 공격수들이 문전으로 쇄도했다.

‘장신 선수들은 유인용이었나?’

레알 선수들이 그리 생각하며 멈칫할 때, 코너킥이 높고 빠르게 문전을 지나쳤다.

그리고 반대편으로 떨어지는 공을 데니스 바이올렛이 곧장 다시 띄워 올렸다.

“속임수를 쓴 건가?”

“얼른 걷어 내!”

알론소 골키퍼와 레알 선수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하지만 어느새 먼저 자리를 잡은 맨유 선수들이 그들을 막아섰고, 공은 준영이 있는 쪽으로 떨어졌다.

산타마리아가 마크를 했지만, 준영이 머리에 공을 맞히는 걸 막지는 못했다.

***

호세이토라는 선수의 본명은 ‘호세 이글레시아스 페르난데스’입니다. 이름이 너무 길어서 별명인 호세이토라고 불렸다고 하네요.

실제 스페인이나 포르투갈, 그리고 남미 선수들 중에는 이름이 너무 길어서 별명으로 알려진 선수들이 꽤 있습니다.

펠레만 해도 본명이 ‘이드송 아란치스 두나시멘투’이고, 작은 호나우두라고 불린 호나우지뉴의 경우도 ‘호나우두 지아시스 모레이라’가 본명입니다.

사실 이런 건 멀리 갈 거 없이 K리그만 봐도 그렇습니다.

유럽이든 남미든 용병 선수를 등록할 때 이름이 너무 길다고 확 줄여서 등록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요새 유명한 대구 FC 세징야만 해도 본명이 ‘세자르 페르난두 시우바 멜루’라고, 무척 깁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