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153. What a Wonderful World
“누구……?”
“잠깐, 레논의 주장이라면 맨유의 존 Y. 리 아냐?”
“맞아, 존 Y. 리야!”
“저 망할 자식! 여기가 어딘 줄 알고!”
관객들의 분위기가 금세 술렁였다.
콥스로 추정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야유와 욕설이 튀어나오기도 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잠깐 생각에 잠겼던 준영은 리즈와 앤지를 체트리에게 맡겨 두고 무대 쪽으로 향했다.
“죄송합니다. 비켜 주세요. 좀 지나가겠습니다.”
“개자식! 뻔뻔하게 잘도 찾아왔구나!”
“예, 오랜만입니다. 반갑네요.”
워낙 천연덕스러운 태도를 보이는 준영의 반응에 관객들은 기가 막힌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새 무대 위로 올라간 준영은 존 레논이 건네는 마이크를 받았다.
“예, 안녕하십니까. 존 Y. 리입니다. 절친한 동생이 한 곡 청하는데 가만히 구경만 하고 있을 수 없어서 올라왔습니다.”
“우-! 우!”
“꺼져, 새끼야!”
야유와 함께 무대로 맥주 캔이 날아들었다.
보딩톤의 맥주가 리버풀에서도 잘 팔리고 있음을 확인한 준영은 날아드는 맥주 캔을 곧장 무대 옆으로 걷어차 냈다.
과연 축구 선수!
능숙한 발놀림에 쿼리멘 밴드 멤버들은 혀를 내둘렀다.
“진정들 하시고, 동생 부탁이니까 한 곡만 하고 내려가겠습니다.”
레논에게 기타를 달라는 듯 손짓한 준영은 이 상황에서 무슨 노래를 부르면 좋을까 생각해 보았다.
그러다 주변의 공원 풍경을 보게 되었다.
파란 하늘과 새하얀 구름, 그 아래 녹음이 짙은 나무들과 활짝 핀 장미들.
그것을 보는 순간 딱 생각난 노래가 있었다.
‘그래, 그 곡을 부르면 되겠어. 루이 암스트롱의…….’
레논이 넘겨준 일렉트릭 기타를 살짝 조정한 준영은 천천히 연주를 시작했다.
“I see trees of green, red roses too~ I see them bloom, for me and you~”
준영의 연주와 노래를 들은 레논은 고개를 갸웃했다.
평소에 준영이 부르던 신나고 흥겨운 곡들과 다르게 느리고 조용했다.
하지만…….
‘무척 감미롭군. 세상이 달라 보이는 느낌이야.’
그렇게 느낀 것은 레논뿐만이 아니었다.
방금 전까지 야유와 욕설을 퍼붓던 관객들도 어느새 조용히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흔해 빠진 사랑 노래도, 사회와 현실을 조롱하거나 분노하는 노래도 아니다.
하지만 담담하게 아름다운 세상을 찬양하는 노래에 저도 모르게 매료되고 말았다.
“진짜 멋진 곡이야.”
“그러게. 이런 노래도 있었구나.”
앤지의 말에 동의하던 리즈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노래 자체는 분명 미래의 것.
하지만 험악하던 분위기 자체를 바꿔 버리는 준영의 선곡 능력은 탁월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Yes, I think to myself, what a wonderful world~”
노래가 거의 마무리되었다 싶을 때, 다들 저도 모르게 박수갈채를 보내려고 했다.
그때, 갑자기 준영이 방금 전과 사뭇 다르게 빠르고 격렬하게 기타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와, 뭐지? 뭐야, 이건!’
가만히 듣고 있던 폴 메카트니는 깜짝 놀랐다.
분명히 방금 전과 같은 곡이다. 그런데 그 느낌은 완전히 달랐다.
좀 전에는 공원에서 한가롭게 누워 노래하는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마치 대자연 속을 질주하며 우렁차게 외치는 것 같지 않은가!
“I see trees of green-! red roses too-!”
빠르고 격렬한 리듬에 홀렸는지, 베이스와 드럼이 저도 모르게 맞춰서 쫓아갔다.
관객들도 덩달아 박수를 치거나 환호성을 보냈다.
“노래가 이상하게 변했어.”
“그래도 나쁘지 않은걸?”
앤지와 리즈도 펑크록 풍으로 리믹스된 곡에 매료되었다.
세상을 찬미하던 노래. 그 노래는 세상을, 사람들을 바꿔 버렸다.
***
준영은 약속대로 한 곡만 하고 물러났다.
그러자 그에게로 사람들이 몰려와 아우성을 쳤다.
“야, 어디 가!”
“인마! 한 곡만 더 하라고!”
“그냥 가면 진짜 죽인다!”
그 성화에 못 이긴 준영은 다시 무대로 올라갔다.
그리고 올해 초에 발매되어 인기를 끌고 있는 프랭크 시나트라의 ‘Come Fly With Me’를 불렀다.
그것으로 관객들을 만족시켜 주고 무대에서 내려온 준영은 쿼리멘의 남은 공연을 느긋하게 즐겼다.
그리고 공연이 끝난 후, 레논을 비롯한 쿼리멘 멤버들과 만났다.
“무리한 요구를 들어줘서 고마워요, 주장.”
“얀마, 무리인 걸 알면 시키질 마.”
가볍게 레논을 쥐어박는 준영에게 쿼리멘 멤버 하나가 상기된 표정으로 다가왔다.
“처음 뵙겠습니다, 리 선수. 제 이름은…….”
“알아. 제임스 폴 메카트니지?”
“어? 알고 계셨어요? 레논에게 들은 건가요?”
“하하, 뭐… 유명하잖아, 너희들.”
준영과 악수를 나누던 폴 메카트니는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물음을 건넸다.
“저기, 혹시 예전에 기차에서 노래를 부르지 않았어요?”
“기차에서? 응, 멀리 원정 갈 때 곧잘 불러.”
“그랬군요! 역시 그때 그 노래는 리 선수가 부른 거였군요!”
“그 노래라니?”
의아해하는 준영에게 폴은 그때 외우고 있던 가사 한 구절을 불렀다.
“Obladi Oblada, life goes on bra- Lala how the life goes on~ …이 노래요.”
“아, 그 노래…….”
10년 후의 네 노래.
그렇게 밝힐 수는 없었기에, 준영은 적당히 둘러댔다.
“그게, 어쩌다 들은 노래를 대충 개작한 건데… 맘에 들면 너 줄게.”
“어, 진짜요?”
“그래. 맘에 들어 하는 사람이 부르는 편이 더 나을 것 같으니까.”
이로써 노래는 원래 주인에게 돌아갔다.
상황을 수습한 것에 준영이 안도하고 있을 때, 슬쩍 앤지가 끼어들었다.
“저기, 사인 좀…….”
“아, 네. 해 줄게요.”
폴 메카트니는 앤지가 내미는 수첩에 냉큼 사인을 해 주었다.
평소의 무뚝뚝한 모습과 달리 몹시 기뻐하는 그녀의 모습에 준영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앤지가 조지 해리슨에게 사인을 받는 걸 보고 있던 폴이 준영에게 다시 물음을 건넸다.
“저 아가씨는 누구죠?”
“저기 있는 우리 여왕님의 동생.”
“예? 아……!”
무슨 말인지 냉큼 이해한 폴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앤지를 바라보았다.
준영은 그 모습이 신경 쓰일 수밖에 없었다.
‘이 녀석, 설마 앤지에게 반한 건가?’
한창 이성에 관심이 많을 10대 소년이니 그럴 만하다.
아마 쿼리멘의 열성 팬인 앤지도 싫어하지는 않을 터.
‘하지만 남작 어르신이 용납하지 않을걸.’
아무리 훗날 대중음악 세계의 레전드급 슈퍼스타가 되고 성격도 좋다지만, 나이 많은 분 입장에선 그저 ‘딴따라’일 뿐.
거기다 나중에 대마초와 약물에도 손을 댔다고 하면 펄쩍 뛸 게 틀림없다.
‘뭐, 얼마든지 달라질 순 있을 거야. 역사는 달라지고 있으니까.’
다들 부디 좋은 쪽으로 변해서, 보다 멋진 세상을 살아가기를.
준영은 마음속으로 기원했다.
***
1958년 5월 28일.
오후 6시에 시작되는 유러피언 컵 결승전을 보기 위해 벨기에 브뤼셀의 헤이젤 스타디움에 67,000명의 관중들이 몰려들었다.
경기장으로 나가는 복도에 대기하고 있던 준영은 상대 팀 레알 마드리드 선수들을 바라보았다.
‘확실히 강해 보이는군.’
AC 밀란도 만만찮긴 했지만, 이들은 눈빛 자체가 달랐다.
새하얀 유니폼을 걸친 저들은 유럽 최강, 2년 연속 챔피언다운 자신감으로 가득했다.
그에 비하면 붉은 저지의 맨유 선수들은 하나같이 긴장한 표정들.
그래도 지나치게 굳어 있거나 겁먹은 녀석들은 없었다.
그때, 9번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가 준영을 보며 말을 건넸다.
“뭐라는 건지…….”
난감해하던 준영은 상대 팀에 프랑스 선수 레몽 코파가 있다는 걸 떠올리고는 프랑스어로 말을 건넸다.
“방금 스테파노가 뭐라고 말한 거죠?”
“프랑스 말을 할 줄 아나?”
반색을 한 레몽 코파의 물음에 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레몽은 디 스테파노가 했던 말을 통역해 주었다.
“너희는 왜 상의를 밖으로 내서 입었냐는데?”
“그렇게 입으면 안 된다는 법이 있어요?”
“뭐, 딱히 그렇진 않지만…….”
레알 마드리드뿐만 아니라, 이 시대 선수들은 상의를 하의에 집어넣은 차림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21세기에서 온 준영은 상의를 밖으로 내놓고 다녔고, 그가 주장이 된 후론 다른 선수들도 이를 따라 했다.
사실 현재 맨유의 유니폼 자체는 상당히 세련되고 소재도 혁신적이었다.
준영이 21세기에서 가져온 샘플을 기반으로 조셉 포스터가 만들었기 때문.
그에 비하면 레알 마드리드의 유니폼은 후줄근해 보였다.
이렇다 보니 레알 마드리드 선수들은 부러운 눈길로 맨유 선수들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우리도 내년엔 유니폼 바꿔 달라고 해야겠어.”
“발렌시아가(* Cristóbal Balenciaga, 1950년대 스페인 출신의 유명 패션 디자이너)에게 해 달라고 할까?”
“해 주겠냐, 멍청아.”
잡담을 나누는 사이, 심판과 선심들이 나왔다.
양 팀 선수들은 이들을 따라 필드로 나갔다.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던 수만의 관중들은 선수들이 입장하자 크게 환호성을 질렀다.
골대 뒤쪽에 자리 잡고 플래시를 터트리던 기자들은 오늘 출전한 선수들을 살펴보았다.
<레알 마드리드>
GK:후안 알론소(주장)
DF:앙겔 아티엔자, 라파엘 레스메스, 호세 산타마리아
MF:호세 마리아 사라가, 후안 산티스테반
FW:엑토르 리알, 호세이토, 레몽 코파, 프란시스코 헨토,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GK:해리 그렉
DF:빌 포크스, 이준영(주장), 이안 그리브스
MF:로니 코프, 바비 찰튼, 프레디 굿윈
FW:숀 코너리, 데니스 바이올렛, 알렉스 퍼거슨, 어니 테일러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엔 무명 선수가 많군.”
“그 무명 선수들이 AC 밀란을 깨고 올라왔어. 얕보면 곤란해.”
과연 오늘 시합은 어떻게 될까?
모두가 기대감을 품고 지켜보는 가운데, 벨기에 출신의 알베르트 알스틴 심판이 킥오프 휘슬을 불었다.
‘드디어 시작이다!’
유럽 최강팀과의 맞대결.
쿵쿵 뛰는 심장과 달리 준영의 머리는 냉정하게 움직였다.
두 눈은 연방 레알 마드리드 공격수들의 움직임을 좇으면서, 입과 양손을 부지런히 놀리며 동료들의 움직임을 조정했다.
“퍼기, 내려와서 수비 거들어! 바비는 디 스테파노를 놓치지 마!”
오늘 바비 찰튼은 디 스테파노 전담으로 나왔다.
사전에 지미 머피 코치에게 지시받은 대로 그는 디 스테파노의 뒤를 그림자처럼 쫓아다녔다.
“제법 끈질긴 구석이 있는 친구군. 하지만 언제까지 쫓아올 수 있을까?”
맨유 페널티 박스로 공을 몰고 가던 디 스테파노는 이안 그리브스가 가세해 오자, 한순간 방향 전환을 시도했다.
그러고는 측면에서 잽싸게 달려온 레몽 코파에게 곧장 패스를 보냈다.
“흥, 그럴 줄 알았지!”
이미 필름을 몇 번이나 돌리며 보았던 수법.
빌 포크스가 달려 나오며 그 패스를 끊어 냈다.
그리고 레몽이 공을 빼앗으러 오기 전에 곧바로 준영에게 보냈다.
‘역습!’
맨유의 공격수들이 재빠르게 움직였다.
이어서 준영이 길고 빠르게 내찬 롱 패스가 레알 마드리드 진영을 향해 날아갔다.
‘맙소사, 저렇게 정확하게……!’
자로 잰 것처럼 배달된 롱 패스는 데니스 바이올렛의 앞쪽 빈 공간에 정확히 떨어졌다.
순식간에 공수가 바뀐 상황에 레알 선수들의 낯빛이 딱딱하게 굳었다.
***
오늘 소개된 레알 스쿼드 중에 특이한 이력을 가진 선수가 있더군요.
바로 수비수인 앙겔 아티엔자인데, 그는 1958년까지 선수 생활을 잘 하다가, 그해 유러피언 컵 결승전을 위해 브뤼셀에 와서 미술 작품들을 보았습니다.
여기에 완전히 꽂혀서 이후 선수 생활과 예술가 활동을 겸업하기 시작했답니다.
그리고 아예 1960년부터는 선수 생활도 그만두고 조형 예술가로 전업해 버렸다네요.
출전 기록은 그렇게 많지는 않은데, 그래도 중요한 경기들은 뛰어서 세 번의 리그 우승, 세 번의 유러피언 컵 우승을 경험한 이력이 있습니다.
아무튼 이 사람 이력을 보니 뼈 빠지게 뛰면서 변변한 우승컵 하나 못 든 선수들이 참 불쌍해 보이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