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152. 쿼리멘
불이 꺼진 방 안에 영사기가 돌기 시작했다.
옹기종기 모인 맨유 선수들의 시선은 한쪽 벽에 펼쳐 놓은 스크린에 쏠려 있었다.
지금 스크린에 비춰지고 있는 건 레알 마드리드의 경기 영상.
이틀 전에 준영이 머피 코치에게 이야기한 대로 스페인에 갔던 사람이 이를 수집해 왔다.
극장 뉴스로 소개된 하이라이트 영상들이 담긴 필름들.
맷 버스비 감독의 아들 샌디가 이 필름들을 접착제로 이어 붙여 디 스테파노 스페셜 동영상을 만들었다.
준영이 볼 땐 엉성하기 짝이 없는 짜깁기 영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수들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와, 또 디 스테파노인가?”
“세상에! 공 다루는 것 좀 봐.”
“득점 능력뿐만 아니라 어시스트도 잘하는군.”
모든 영역에 영향력을 미치며, 모든 포지션을 소화하면서 팀뿐만 아니라 경기를 지배하는 선수.
그가 바로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였다.
그의 플레이를 보고 단순히 감탄에 그치지 않고, 경악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저런 괴물이 있는 팀이랑 맞붙는다고? 결승전에서?”
“아아… 잘못하면 진짜 박살이 나겠네.”
현재 맨유 스쿼드 중에서 작년에 레알 마드리드와 맞붙어 본 선수는 빌 포크스와 바비 찰튼, 데니스 바이올렛 정도였다.
직접 맞붙어 본 선수들도 혀를 내두르는 판이었으니, 경험이 부족한 풋내기들에게서 우려의 말이 쏟아져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준영은 잠시 영사기를 멈췄다.
“이런, 맞붙기도 전에 겁부터 먹으면 어쩌자는 거야?”
“하지만 주장, 주장도 봤으면 알 거 아니에요?”
“그래, 봤지. 소문대로 진짜 잘하긴 해.”
미래에서 레전드로 꼽힐 정도로 월드 클래스 선수라는 것은 분명하다.
플레이하는 걸 보면 당장 21세기 축구판에 던져 놔도 금방 적응해서 뛸 정도로 상당한 센스와 경기 보는 안목을 갖고 있으니까.
그렇다 보니 혹시 디 스테파노도 자신처럼 미래에서 온 게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였다.
“확실히 뛰어난 선수야. 하지만 저만한 기량을 발휘할 수 있는 건 그를 받쳐 줄 선수들이 레알 마드리드에 많기 때문이야.”
레몽 코파, 프란시스코 헨토, 엑토르 리알 등등.
명문 팀에서 에이스로 날리고 있어도 전혀 손색이 없는 톱 플레이어들이 협력을 잘하고 있었다.
예를 들자면 이런 식이었다.
디 스테파노가 상대 수비를 끌어내면 그만큼 생겨난 공간으로 코파나 헨토가 파고들거나, 돌파 과정에서 두세 명의 선수가 간격을 이루면서 원활히 패스를 주고받으며 수비진을 뚫고 나가거나.
“자, 최대한 천천히 돌릴 테니까 똑똑히 봐. 디 스테파노는 혼자서 해결하는 때보다 주변 동료들을 이용하는 경우가 더 많아.”
영사기 앞으로 간 준영은 수동으로 천천히 필름을 돌렸다.
21세기의 초고속 카메라를 이용한 슬로 모션처럼 보여 줄 순 없었다.
하지만 프레임을 천천히 돌리자, 디 스테파노가 펼치는 플레이를 좀 더 명확히 살펴볼 수 있었다.
“자, 조금 전과 비슷한 상황이야. 수비수는 저렇게 디 스테파노를 견제하고 있고 말이지.”
“아하, 저러면 또 접겠군요!”
알렉스 퍼거슨의 말대로 다음 동작에서 디 스테파노는 크게 방향을 전환하면서 침투하는 동료에게 패스를 넣어 주었다.
“접는 것도 동료들이 침투할 때에 맞춰서 접고 있어. 저러면 수비수는 순간적으로 움직임을 빼앗겨 버리지.”
디 스테파노는 소위 접기, 즉 방향 전환을 상당히 능수능란하게 사용했다.
마치 수비수들을 농락하는 재미로 축구를 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물론 하이라이트 부분만 모아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주특기가 아니면 저렇게 영상으로 찍히지 않았을 것이다.
“축구는 수학이 아니야. 하지만 분명히 패턴이라는 게 있어.”
준영의 말에 함께 영상을 본 지미 머피 코치도 맞장구를 쳤다.
“그래, 그 패턴을 파악해 둘 수 있다면 그만큼 상대 공격을 막는 게 쉬워지겠지.”
머피 코치는 영상을 보면서 생각하고 있던 계획을 선수들에게 말했다.
“다행히 우리 팀에는 디 스테파노만큼 발재간이 좋은 선수가 있어. 앞으로 그 녀석이 가상의 디 스테파노가 될 거다.”
“주장을 말하는 겁니까?”
존 레논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머피 코치가 준영을 보며 말했다.
“존, 남아 있는 시간 동안 선수들을 최대한 훈련시켜 줘.”
“알겠습니다. 맡겨만 주십쇼.”
방 안에 다시 불이 들어오고, 선수들은 다음 훈련을 진행할 준비를 하러 갔다.
그때 준영은 레논에게 다가가 말을 건넸다.
“어때? 새로운 집은 맘에 들어?”
“예, 정말 좋아요.”
알렉스 퍼거슨처럼 존 레논도 구단 숙소에서 나와 맨체스터 근교에 새집을 구했다.
레논은 친척집이나 남의 집에서 눈칫밥 먹던 것에서 벗어나 직접 번 돈으로 자기 집을 마련한 걸 몹시 뿌듯하게 여겼다.
“주장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그렇게 좋은 집을 구하기 힘들었을 거예요. 어머니도 몹시 좋아하세요.”
“좋아하신다니 다행이구나.”
준영은 알고 있었다.
존 레논의 어린 시절 가정환경이 개막장인 데다, 어머니 줄리아마저 교통사고로 일찍 죽어 그의 정서가 불안정해졌다는 것을.
그 정서를 안정시킬 수 있다면 장차 레논의 삶이나 행보도 어긋나지 않으리라.
그래서 그나 그의 어머니가 정착하고 안정을 누릴 수 있게 도와준 것이다.
‘근데 이러다 이 녀석, 가수로 유명해지지 못하는 거 아닌가?’
다 그런 건 아니지만, 보통 예술로 명성을 떨쳤다는 사람들을 보면 가난했다거나,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었으니까.
이런 우려도 있었지만, 레논은 음악에 대한 열정을 여전히 불태우고 있었다.
“근데 딱 하나 문제가 있는 게, 노래 연습을 하면 이웃 사람들이 싫어하더라고요.”
“그거 해결할 방법 있어. 계란 담는 계란판 있지? 그걸 벽면에 두껍게 붙여 놓으면 방음에 도움이 돼.”
“진짜요? 집에 가면 당장 해 봐야겠네요.”
이젠 진짜 콩으로 치즈를 만든다고 해도 믿을 기세.
점점 자신을 따르는 미래의 슈퍼스타를 보며 준영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
5월의 네 번째 토요일.
유러피언 컵 준비로 바쁜 와중이었지만, 준영은 시간을 내서 나들이를 나왔다.
레논이 쿼리멘의 공연이 있다며 꼭 보러 와 달라고 부탁했기 때문.
‘가야 해! 분명히 역사에 남을 공연이 될 거야!’
준영보다 그 이야기를 전해 들은 앤지가 더욱 흥분했다.
내버려 두면 혼자라도 갈 기세였기에 준영과 리즈, 그리고 경호원으로 저택 고용인인 체트리가 따라왔다.
“공연 장소가 어디라고요?”
리즈의 물음에 준영이 대답했다.
“리버풀의 스탠리 파크 가든. 근데 초행이라 제시간에 찾아갈 수 있을지 모르겠군.”
“걱정 마십쇼. 제가 아니까.”
체트리가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고향 인도에서 영국으로 처음 왔을 때 한동안 리버풀에서 지냈다고 했다.
거기다 알버트의 운전기사로 리버풀이나 맨체스터 인근 도시들도 자주 다녔다.
덕분에 준영은 인간 내비게이션의 도움을 얻어 스탠리 파크 가든에 제때 당도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맙소사, 안필드 옆이었잖아.”
저편에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리버풀 FC의 성지를 본 준영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길진 않았지만, 허더스필드 유니폼을 입고 리버풀을 농락한 적이 있었다.
아마 아직 그 일을 기억하는 콥스가 있을 터.
눈에 띄어서 좋을 게 없기에 준영은 모자를 눌러쓰고 코트의 옷깃까지 세웠다.
“저긴가 봐. 사람들이 잔뜩 모여 있어!”
“앤지야, 같이 가야지!”
일행은 날아갈 듯이 뛰어가는 앤지를 쫓아갔다.
공원 한편에 마련된 야외무대 앞에는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슥 한 번 둘러본 준영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딱히 역사에 남을 공연 같진 않군.’
아마 훗날 비틀즈가 전설급이 되면 쿼리멘이라는 밴드로 여기서 공연을 했다는 정도로 알려질 터.
물론 앤지 같은 열성 팬들에게는 반드시 기억해야 할 이벤트일 것이다.
‘근데 리즈나 앤지 또래의 소녀들이 굉장히 많군. 아이돌 밴드로 떡잎을 펼치고 있는 건가?’
잠시 후, 존 레논을 비롯한 쿼리멘 멤버들이 무대 위로 올라왔다.
준영은 고개를 쭉 빼고 멤버들을 바라보았다.
‘가운데 있는 녀석은 레논이고, 저쪽은 폴 메카트니에 조지 해리슨…….’
흑백 사진으로 보던 비틀즈의 풋풋한 시절의 모습이 두 눈에 그대로 들어왔다.
그런데 드러머는 준영이 아는 사람이 아니었다.
‘누구지? 링고 스타가 아니잖아. 혹시 역사가 바뀌어서 멤버에도 변동이 생겼나?’
준영이 의아해하는 사이, 팬들에게 간단한 인사를 건넨 그들이 흥겹게 연주를 시작하자 여기저기서 소녀들의 자지러지는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쿼리멘! 쿼리메- 엔!”
“꺄악! 폴이 날 봤어! 내 눈을 똑바로 봤다고!”
“아니야. 날 본 거야! 날 선택한 거라고!”
참으로 열성적인 팬덤.
정말이지 이런 건 21세기랑 다를 게 없었다.
‘그건 그렇고, 이 가락은 분명 디스코풍인데?’
아마 지난번에 불러 줬던 BTS의 Dynamite를 참고해서 작곡한 모양이다.
재즈와 로큰롤이 한창 유행하던 시대와 맞지 않는 이질적인 스타일의 곡이었지만, 그 흥겨운 리듬에 남녀를 불문하고 다들 어깨를 둠칫둠칫했다.
앤지나 체트리는 물론, 준영의 곁에서 가만히 지켜보던 리즈도 흥을 탈 정도였다.
“확실히 실력이 있네요. 앤지가 왜 좋아하는지 알겠어요.”
“그래? 리즈도 이젠 팬이 되려나?”
“후후훗, 그럴 리가요. 저는 ABBA가 더 좋은걸요.”
리즈는 준영의 스마트폰에 담겨 있는 미래의 노래들 중에 ABBA의 Dancing Queen을 제일 좋아했다.
듣다 보면 저도 모르게 춤을 출 것 같은 느낌이라고.
“아쉬워요. 그들의 다른 노래를 듣자면 아직 10년도 넘게 기다려야 한다니…….”
진짜 조지 웰즈의 소설에 나오는 타임머신이 있었으면.
그럼 ABBA의 라이브를 보는 것은 물론이고, 준영이 온 21세기도 가 볼 수 있을 텐데.
이렇게 아쉬워하는 리즈의 모습에 준영은 그녀의 손을 꼭 잡아 주며 말했다.
“기대감을 품고 있으면 기다리는 것도 마냥 지루하진 않아.”
“그래요? 준도 그랬어요?”
“응, 어릴 때 월드컵 시즌이 오기를 기다릴 때 그랬지.”
이번엔 어떤 나라가 우승할까? 누가 어떤 플레이를 보여 줄까? 어떤 깜짝 스타가 나타날까?
이런 생각에 가슴이 설레곤 했다.
“그러다 진짜 월드컵에 나가게 될 줄은 몰랐지만.”
“피, 자랑하는 거예요?”
이렇게 정답게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이, 몇 곡의 노래가 흘러갔다.
흘러내리는 땀을 손등으로 훔친 존 레논이 마이크를 잡고 말했다.
“감사합니다. 오늘도 이렇게 찾아와서 성원해 줘서 모두에게 진심으로 감사해요.”
그와 동시에 환호성과 박수가 쏟아져 나왔다.
미소를 지으며 그 환호에 답한 레논이 다시 말을 이어 나갔다.
“밴드와 축구, 제가 이렇게 2개의 길을 걸어갈 수 있게 맏형처럼 든든하게 도움을 준 사람이 있어요. 노래도 잘 부르고 공도 정말 잘 차는 형님이죠.”
‘녀석, 내 얘기를 하다니…….’
좀 뜬금없긴 하지만, 준영은 저도 모르게 으쓱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그때…….
“오늘 공연도 보러 와 줬어요. 저기 저쪽에서 보고 계시네요.”
레논의 손끝을 따라 사람들의 시선이 준영에게 쏠렸다.
화들짝 놀란 준영은 난감한 기색을 보였다.
극성맞은 콥스의 본거지 옆이라 가급적이면 눈에 띄지 않으려 했건만, 이렇게 지목을 하다니!
이런 준영의 심정을 알 리 없는 레논이 싱긋 미소를 지었다.
“주장! 구경하지만 말고 여기 올라와서 한 곡 하는 건 어때요?”
이거 괜히 왔구나.
준영은 후회감이 들었지만 되돌릴 수가 없었다.
***
저 시대 영국 청년 문화가 축구와 로큰롤로 대표되는 음악과 끈끈한 연관 관계를 맺고 있더군요.
그 영향 때문인지 리버풀 대학교는 음대와 스포츠 경영학과가 유명하다고 하고요.
당시에 축구는 서민들이 가장 좋아하는 스포츠였고, 로큰롤이나 자마이카 스카에 심취한 테디 보이나 모드족은 이후 스킨헤드나 펑크, 히피 등등의 서브컬처 집단을 탄생시켰습니다.
그리고 그 집단들은 훌리건이란 이름으로 난동을 부리고요.
하지만 이후 스포츠 관련 산업의 발전과 다양한 장르의 음악과 서브컬처가 탄생된 걸 생각하면 마냥 부정적으로 볼 건 아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