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151. 시작이 반이다
차고에 있는 은색의 자동차.
그것은 준영에게 낯익은 차량이었다.
바로 애S턴 마틴 DB5.
007 제임스 본드의 애마였다.
“아니, 이게 왜……?”
의아해하는 준영에게 리즈가 알려 주었다.
“브라운 회장님이 전해 주고 간 거예요. 늦었지만 FA컵 우승 기념 선물이라고 하시면서요.”
데이비드 브라운은 준영이 이탈리아에서 귀국하는 날짜에 맞춰 선물을 가져왔다.
하지만 정작 준영은 잉글랜드 국대에 추가 발탁이 되어 모스크바로 가 버려서 직접 전달하지 못했다고.
“결국 FA컵 우승 기념 선물 및 국가대표 선발 기념 선물이 된 거예요.”
“그런가? 아무튼 거참…….”
“왜요? 뭔가 이상해요?”
“응. 정확한 연도는 몰라도 분명 1960년은 넘어야 나오는 모델이야.”
그런데 1958년에 벌써 등장하다니! 시간 이동을 해 온 것은 아닐 테고?
의아했던 준영은 일단 차를 한번 살펴보았다.
겉모양은 분명히 클래식한 느낌이 드는 DB5.
하지만 내부는 달랐다.
핸들과 시트를 비롯한 내장은 준영이 21세기에서 타고 온 DB12와 흡사했다.
심지어 내비게이션이 있을 자리에는 소형 브라운관 TV까지 장착되어 있었다.
‘설마 이게 내비게이션은 아닐 테고… 음, 역시 그냥 TV로군.’
차에 딱히 필요한 장비는 아닌데, 그냥 ‘이 정도 기술은 된다!’라는 의미로 붙여 놓은 듯했다.
“단순한 선물은 아니군. 미래 자동차의 기술을 응용해서 만들었다는 걸 보여 줄 목적일지도?”
“아무튼 선물을 받았으니 고맙다는 인사를 해야죠.”
“맞아. 그래야지.”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준영은 곧장 데이비드 브라운을 만나러 가기로 했다.
***
“안녕하십니까, 회장님.”
“어서 오게, 존. 요즘은 만나기가 좀 힘들구만.”
데이비드 브라운은 자신의 저택에 찾아온 준영을 반갑게 맞았다.
준영은 정중히 선물에 대한 감사 인사를 건넸다.
“굉장한 선물을 주셔서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후후후, 그거 말인가? 맘에 딱 든 모양이군.”
“물론이죠.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차라고 불리는 모델이잖아요. 로망 그 자체죠!”
“오! DB4가 그렇게 유명해진단 말인가?”
반색하는 브라운 회장과 달리 준영은 의아한 표정을 보였다.
“그게 DB4라고요? DB5가 아니고요?”
“뭐? 미래엔 그 모델이 DB5라고 불리는 건가?”
뭔가 있구나 싶었던 브라운 회장은 자세한 이야기를 물었고, 이후 너털웃음을 지었다.
“거참, 기존에 설계된 DB4의 외형을 자네의 미래 자동차처럼 좀 더 날렵하게 개량했을 뿐인데, 다음 단계 모델이 나올 줄이야!”
황당한 건 준영도 마찬가지.
지금 브라운 회장이 보여 주는 DB4 원본의 설계도나 스케치를 보니 확실히 DB5와 꽤 많이 닮아 있었다.
“이렇게 된 이상 이름을 DB5로 바꿔야겠구만.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차 이름을 함부로 바꿀 순 없지.”
“그럼 DB4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어찌 되긴. 프로토타입으로 남는 거지.”
별거 아니라는 투로 손을 내저은 브라운 회장이 포트에서 홍차를 따라 주며 말을 이었다.
“원래 정식 공개는 10월 런던 모터쇼에서 하려고 했는데, 좀 이르게 진행할 예정이야.”
“저 때문에 그런 건 아닐 테고, 다른 이유가 있는 겁니까?”
“음, 자동차 시장 경쟁이 상당히 치열해서 말이지.”
전쟁이 끝나고 유럽과 미국의 경기가 호전되면서 자연히 소비도 늘어났다.
주머니가 두둑해진 사람들이 가전제품이나 자동차에 관심이 많아진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자네가 왔으니 묻는 말인데, 미래의 자동차 시장은 어떤가? 분명히 크게 확대되리라고는 보고 있네만…….”
“네, 분명 그렇게 됩니다. 자가용족이라 불릴 정도로 마이카 시대가 열리죠.”
“1가구 1차량의 시대가 곧 올 거라는 예상이 맞는 게로군.”
“여유가 되면 2∼3대씩도 보유하니까요. 굳이 상류층이 아니라도요.”
그러면서 준영은 우려 섞인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제 업체가 아니니 간섭하긴 그렇지만, 전 회장님의 회사가 좀 걱정됩니다. 너무 고사양 자동차만 만들려고 하는 것 같아서 말이죠.”
과거에는 그게 당연했다.
승용차는 단순한 운송 도구가 아닌, 과시적인 목적의 사치품으로 여겨졌으니까.
귀족이나 부자들이 주 고객이다 보니 그들의 시선을 끌기 위해서는 뛰어난 디자인과 성능이 필수였다.
자동차 경주 대회들도 결국 성능을 자랑하기 위한 홍보 차원에서 시작된 것이다.
“근데 앞으로는, 미래에는 그렇지 않다는 거죠. 보다 많은 사람들이 자동차를 찾을 거고, 이 사람들은 성능이나 디자인보다 내구성이나 편의성을 중시할 겁니다.”
“95퍼센트의 사람들을 위한 물건을 만들어야 한다는 헨리 포드의 말이 옳았다 이거군.”
“바로 그겁니다.”
사실 브라운 회장도 준영이 지적한 문제를 인식하고 있었다.
실제 자신의 계열사에서 트랙터나 트럭 같은 것은 꾸준히 판매하고 있지만, 자동차는 그렇지 못한 상황이니까.
‘너무 고사양 자동차만 만들려고 한다… 라. 따지고 보면 그건 내 회사만 그런 것도 아니야.’
롤스로이스나 그 산하로 들어간 벤틀리, 재규어, 울즐리 등등 내로라하는 영국 자동차 업체들이 그랬다.
예외가 있다면 최근에 모리스 모터스와 합병한 오스틴.
이들은 예전부터 저렴한 소형차 위주로 생산을 했다.
최근에도 그리스 출신의 자동차 디자이너 알렉산더 이시고니스를 중심으로 새로운 소형차 설계를 하고 있단 이야기가 있었다.
준영의 말대로라면 앞으로 그들이 만드는 자동차가 영국에서 가장 대중적인 차량이 될지도 모른다.
‘존은 DB4, 아니 DB5가 세계인의 로망이 된다고 했어. 하지만 그게 많이 판매되었다는 이야기는 아니지.’
구입할 수 없으니 로망이 된 것이다.
즉, 유명해지긴 해도 회사에 큰 수익을 안겨 주진 못한다는 소리.
수익이 크지 않으면 연구 개발 비용도 줄어든다.
그럼 자연히 뒤처지게 마련.
벤틀리처럼 다른 회사에 먹히거나 문을 닫게 될 터.
그걸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수익을 낼 만한 모델을 만들어 내야 할 것이다.
“대중적인 승용차 생산이라……. 이제 와서 시작하는 건 너무 늦지 않나 싶군.”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리고 고급차라는 브랜드 이미지를 이어 갈 것 같으면, 대중적인 브랜드로 새로운 계열사를 만들어도 될 텐데요?”
“하긴, 이미 늦었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그대로 몰락해 버리고 말겠지.”
존의 말대로 지금이라도 시작하자.
브라운 회장은 결심을 내렸다.
***
맨체스터로 돌아온 다음 날.
준영은 곧장 구단 훈련에 합류하여 5월 28일 치러지는 유러피언 컵 결승전에 대비했다.
“빨리! 패스는 좀 더 빠르고 간결하게!”
“배후로 파고드는 공격수를 놓치지 마!”
훈련은 선수비 후역습 전술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아무래도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가 중심이 된 레알 마드리드의 막강한 공격력을 막아 내기 위해서는 현실적으로 이 방법밖에 없었으니까.
“너무 움츠리는 것도 좋진 않지만, 아무래도 상대가 상대이니 말이지.”
“거기다 결승전은 단판전이니까…….”
현재 공수에서 레알 마드리드는 맨유보다 단연 우위.
그나마 맨유는 일정이나 체력 유지적인 측면에서 레알 마드리드보다 유리했다.
5월 18일 코파 델 레이 16강 1차전에서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를 4 대 0으로 격파한 레알 마드리드는 25일 2차전 경기가 남아 있었다.
그리고 3일 후에 브뤼셀로 이동해서 유러피언 컵 결승 경기를 치러야 했다.
“우린 그때까지 최대한 체력을 비축하면서 조직력을 다져 놓아야 합니다. 레알 마드리드 전력 자료도 모아 가면서요.”
훈련이 끝난 후, 준영이 건넨 말에 지미 머피 코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 그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맨유의 감독 대행으로 유러피언 컵 결승도 준비해야 하고, 웨일즈 대표팀 감독으로 6월부터 시작되는 월드컵도 대비해야 하니까.
“몸뚱이가 두 개라면 좋겠는데……. 근데 레알 마드리드 전력 자료를 모은다고?”
“네, 스페인으로 사람을 보내 경기 영상 자료를 수집해 오라고 했습니다. 2∼3일 안에 자료가 올 겁니다.”
경기 영상 자료라고 해 봤자 뉴스나 기록 용도로 찍힌 영화 필름 정도다.
그래도 아예 없는 것보다는 나으니, 그거라도 보면 상대가 어떤 플레이를 하는지, 어떤 식으로 공격해 들어오는지 알 수 있다.
“조금이라도 알고 나가면 상대에게 대응하기 쉬우니까요.”
“후후, 넌 그 조금을 위해서라도 비용을 아끼지 않는구나.”
“1퍼센트라도 승률을 높일 수 있다면 해야죠.”
“그래, 들어 보니 그 말이 맞는 것 같아.”
구단이나 머피 코치 입장에선 반대할 까닭이 없었다.
그 자료 수집이라는 게 준영이 자기 돈을 들여서 진행하고 있는 거니까.
‘하긴 이 녀석 입장에선 그리할 만한 이유가 있으니까.’
준영은 현재 선수로서 맨유에서 뛰고 있기도 하지만, 구단의 주식을 보유한 투자자이기도 했다.
그는 뮌헨 사고 이후로 꾸준히 구단 주식을 매입하고 있었다.
세간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까닭이, 클럽 이사로 활동하기보다 선수로서 더 활발히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본인이 선수 활동 쪽을 더 선호하기도 했고.
“아무튼 귀화 문제로 푸스카스가 출전하지 않아서 다행이야. 그 악마의 왼발까지 나왔으면… 으, 생각하기도 싫군.”
“예, 뭐 아쉽긴 해도 다행이란 생각도 들어요.”
머피와 대화를 마친 후, 준영은 트래퍼드 파크에 있는 미스터리 푸드 컴퍼니 공장을 방문했다.
언제나처럼 공장을 둘러보던 그의 눈에 낯익은 이들이 들어왔다.
로저 바인, 재키 블란치플라워, 마크 존스 등등.
과거에 함께 붉은 저지를 입고 필드를 누볐던 듬직한 동료들은 부상에서 회복한 후, 지금 이곳에서 일하고 있었다.
더는 축구를 할 수 있는 몸이 아니었고, 언제까지 구단에 손을 벌리거나 저금을 까먹고 있을 수 없었기에.
몸이 불편한 이들을 선뜻 고용하는 곳도 없어서 준영은 자신의 공장에 받아 주었다.
더구나 이들은 라면 사업을 처음 시작할 때 주식을 구매해 준 투자자이기도 했으므로 외면할 수 없었다.
“어때요? 좀 할 만해요?”
“그래, 기계를 조작하는 단순 작업이니까. 그보다 큰일이야. 계속 살이 찌고 있다고.”
로저의 하소연에 막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던 준영은 어이없어했다.
“그게 무슨 큰일이라고요?”
“입던 옷이 안 들어가는데 큰일이지. 거기다 배까지 나오고 있다고!”
확실히 로저뿐만 아니라 재키나 마크 등도 선수 시절에 비하면 체중이 좀 늘어난 것처럼 보였다.
그래도 건강이 나빠 보이진 않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일이야 그렇다 치고, 공부는 어때요?”
이들은 낮에는 일하고 저녁에는 시내 학원에서 강의를 듣고 있었다.
좀 더 나은 직장을 구하거나, 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게 지원을 해 주고 있는 것.
하지만 공장 일과 달리 공부는 영 익숙하지 않은지, 대부분 한숨을 쉬었다.
“난 이미 머리가 굳어 버린 것 같아. 강사가 무슨 말을 하는지 도통 모르겠더라고.”
“그래, 수학 수식 같은 건 독일 놈들 군사 암호 같았어.”
옛 동료들의 하소연에 준영도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도 학력 인증 시험을 위해 공부를 하고 있어서 그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으니까.
그래도 차차 나아질 거라고 보았다.
시작이 반이니까.
바늘구멍 같은 경쟁을 통과해 프로 선수가 된 이들의 끈기라면 잘 해낼 수 있을 거라 믿었다.
***
1. 본문에서 언급된 알렉산더 이시고니스가 설계한 자동차가 그 유명한 미니(Mini)입니다. 폴 메카트니를 비롯한 비틀즈 멤버들도 몹시 좋아했다죠.
2. 재키 블란치플라워는 실제로 뮌헨 참사 때 살아남아 정육 공장에서 일하다가, 열심히 공부해서 금융학을 전공하고 회계사가 되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