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150. 레전드로 남는 방법
‘할 수 있어!’
‘어림없다!’
공중볼을 향해 달려든 이준영, 그리고 레프 야신.
피할 생각이 전혀 없던 두 사람은 공중에서 그대로 충돌했다.
퍼억-!
“큭!”
‘멍청한 녀석, 손을 쓸 수 있는 골키퍼를 이길 수 있을 것 같냐?’
야신이 공을 향해 두 팔을 뻗은 순간, 준영은 야신의 오른쪽 팔꿈치에 얼굴을 맞았다.
헤딩슛은 실패.
하지만 준영의 쇄도가 마냥 헛된 것은 아니었다.
준영과 부딪친 순간, 야신도 밸런스가 흐트러지면서 공을 제대로 잡지 못했으니까.
‘이런, 실수했다!’
야신이 놓친 공을 향해 톰 피니가 달려들었다.
그리고 그의 무릎에 맞은 공은 그대로 골대 안으로 떨어졌다.
“Go-ooooal!”
“잘했어요, 피니!”
“드디어 저 악마 같은 거미손을 뚫었어!”
마침내 선제골을 넣은 잉글랜드 선수들은 방방 뛰면서 톰 피니에게 달려갔다.
동료들의 축하를 받던 톰 피니는 준영을 바라보았다.
방금 전의 골은 그가 야신과 과감히 맞선 덕분에 만들어진 것이었기에.
“아, 피나네. 이거…….”
“Are you okay?”
흘러내리는 코피를 닦던 준영에게 야신이 손을 내밀어 일으켜 주었다.
“Ты действительно в порядке? Ваши кости сломаны? Как насчет того, чтобы пойти в больницу?”
“괜찮아요. 이 정도는 문제없어요.”
뭐라고 하는지 몰라도 걱정해 주는 기색이었기에 준영은 연방 ‘I am OK.’와 ‘No problem.’을 연발했다.
‘좀 시끄럽긴 해도 매너는 좋은 사람이구나.’
아군 진영으로 내려가는 준영에게 톰 피니가 다가와 어깨를 툭 쳤다.
“잘했다, 터프가이. 많이 다친 거 아니지?”
“예, 쌩쌩하게 뛸 수 있어요.”
“다행이군. 남은 시간도 잘 부탁한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준영은 서둘러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수비에 집중했다.
득점에 기여했다고 하지만 직접 넣은 골도 아니고, 이제 겨우 1골을 앞서갈 뿐이다.
따라잡히거나 역전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그러니 수비에 집중해야 돼. 경기를 깔끔하게 끝내야 평가가 더 좋을 테니까.’
반드시 월드컵으로 가는 막차를 탄다.
그러면 만날 수 있을 테니까.
잉글랜드와 같은 4조에 속한 브라질.
그 브라질을 우승으로 이끈 축구 황제 펠레를!
‘레전드로 남으려면 축구 황제하고도 맞짱을 떠 봐야 하지 않겠어?’
대서양 건너편에 있는 월드컵 끝판왕과 겨룰 기회는 놓칠 수 없다.
준영은 한 달 후 벌어질 꿈의 무대를 위해 더욱 힘차게 뛰었다.
***
실점 후 소련은 만회를 위해 총공세를 펼쳤다.
하지만 삼사자 군단의 호랑이, 이준영은 번번이 그들의 공격을 저지해 버렸다.
결국 시합은 잉글랜드가 1 대 0으로 승리. 한 달 후 월드컵을 앞두고 벌어진 전초전에서 기분 좋은 승리를 거두었다.
<삼사자 군단의 새로운 방패!>
<유혈 투혼으로 증명한 이방인의 참된 도리!>
<유나이티드의 마법사, 잉글랜드에 우승컵을 안겨 줄까?>
승전보가 영국으로 전해진 후, 각 신문마다 준영의 활약이 커다랗게 실렸다.
프랭크 수 이후로 두 번째 비백인 대표 선수.
거기다 철벽 수비로 돋보이는 활약까지 벌이면서, 대중의 관심이 뜨겁게 불타올랐다.
“거참, 윈터보텀 감독의 도박이 성공했군.”
“역시 FA컵 결승전 MVP는 달라!”
“그래도 대표팀에 노란 원숭이를 뽑는 건 좀…….”
“흥, 하얀 얼간이보다 공 잘 차는 노란 원숭이가 훨씬 낫지.”
대중의 반응은 호의적이었다.
사실 대체 발탁이 알려지면서 논란이 있었지만, 깔끔한 활약을 보인 뒤로 부정적인 여론은 많이 가라앉았다.
유고슬라비아에 0 대 5의 참패를 당했던 대표팀이 준영이 합류한 뒤에 1 대 0 승리를 거두었으므로.
제대로 발 맞춰 볼 시간이 부족한 상황에서 거둔 승리라 더욱 준영의 활약이 부각될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정체가 뭘까?”
“축구계에 나타난 지 얼마 안 되는데 벌써 국가대표라니…….”
공원에서 캔 맥주를 마시고 치킨을 뜯던 청년들은 신문 스포츠란에 대문짝만하게 나온 준영을 신기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깜짝 입단에 주전 멤버 확정, 뮌헨 사고 후 주장 선임, FA컵 우승 이후 국가대표 발탁까지.
모두 1년도 안 돼서 일어난 일이었다.
거기다 식품과 의류, 광고 사업에 투자해서 막대한 수익까지 얻었다.
“소문으로 들은 건데, 최근에 진행 중인 고속도로 건설 사업에도 투자를 했다고 하더군.”
“뭔지 몰라도 평범한 작자는 아니라는 거지.”
“이런저런 말들이 많잖아. 동양의 왕족이라는 둥, 어떤 나라 대통령의 친척이라는 둥…….”
“혹시 그래서 밀어주는 건가?”
의아해하던 청년들의 시선은 한 사람에게 쏠렸다.
“보스, 보스는 존 Y. 리의 공장에 있다고 했죠?”
“그래. 사장이랑 이야기도 해 봤어.”
“오오! 역시 우리 보스!”
청년들의 감탄에 윌리엄 터너는 가늘게 웃음을 지었다.
“보스가 보기엔 어떤 작자 같았어요? 시건방지진 않던가요? 부자에 스포츠 스타니까…….”
“글쎄, 그렇진 않았어. 항상 먼저 인사를 건네면서 안부를 물어보더군.”
사실 무시하는 게 일반적이다.
미스터리 푸드 컴퍼니에서 존 Y. 리는 오너, 그리고 윌리엄 터너는 일개 직원일 뿐이니까.
물론 친부가 사교계에서 유명한 제라르 드 보그이다 보니, 이를 두고 관심을 보이는 걸 수도 있다.
‘그래도 딱히 꼰대를 편들거나 날 이용하려 드는 것 같진 않았지.’
정말 예전에 말한 대로 자신이 아는 신부와 이름이 같아서 외면할 수 없었던 걸까?
“한 가지는 확실히 알 수 있어. 오지랖이 넓은 인간이라는 거 말이야.”
이미 맨체스터의 스포츠 스타로 명성을 누리고 있는데, 여러 가지 일에 손을 뻗고 있었다.
사업뿐만 아니라 자선 활동이나 장학 재단 운영에도 관심이 많았다.
“노동자 처우 개선 같은 것도 많이 신경 쓰더라고. 급료 문제뿐만 아니라 숙소나 식사도 잘 챙겨 주고, 최근엔 공장 내에 강습소 같은 것도 만들었어.”
아직 영어가 서툰 폴란드인 직원들을 가르칠 목적인데, 문맹자들도 덩달아 배운다고 했다.
“자기가 외국인이니 잘 보이려고 그런 거 아닐까요?”
“그런 거라면 높으신 놈팡이들이나 돈 많은 돼지들하고만 알고 지내면 그만이지, 굳이 아랫것들한테 잘해 줄 필요는 없다고.”
어쩌면 잘 보이려는 목적이 맞을지 모른다.
입단한 지 1년도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맨체스터 시민들은 이 낯선 이방인 선수에게 호의를 느끼고 있었으니까.
“솔직히 좋아할 수밖에 없잖아. 피시 앤 칩스보다 훨씬 맛있는 치킨을 알려 줬으니 말이야.”
“하하하! 맞아요, 맞아!”
터너와 그의 부하들이 키득거리고 있을 때였다.
잔뜩 치장한 스쿠터들이 줄줄이 몰려오더니 그들의 앞에 쭉 늘어섰다.
그 무리를 본 터너 일행은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와일드 테리어라고, 터너의 조직과 가깝게 지내던 이들이었으므로.
“여, 이게 누군가? 사생아 윌리엄 아니야?”
“어디 있었던 거야, 더그. 뒤졌거나 감방에 간 줄 알았다고.”
“잠시 런던 구경 좀 하고 왔지.”
더그라고 불린 새하얀 정장의 장발 사내는 씨익 미소를 지으며 터너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곤 살짝 정색한 눈길로 터너를 바라보았다.
“돌아와서 들었어. 요즘 쿨리의 공장에서 일하고 있다면서?”
“아, 그거 말이야? 앙리 놈이랑 싸웠다가 경찰을 피하느라…….”
“그런 것치곤 꽤 오래 일하고 있는 거 아냐? 애들까지 공장으로 끌어들이고 말이야.”
더그의 말에 터너는 언짢은 기색으로 쏘아붙였다.
“그게 뭐? 일 좀 해야 먹고살지, 폼이나 잡다가 굶어 죽으라고? 아니면 애들 코 묻은 돈이나 노인네들 용돈이라도 뜯으란 거야?”
“일할 곳이야 널렸잖아. 왜 하필 원숭이의 공장이냐고? 넌 자존심도 없냐?”
“뭐? 자존심? 그걸 말하는 자식이 보스랍시고 애들 푼돈이나 뜯고 사냐?”
언성이 높아질수록 분위기는 점점 험악해졌다.
보다 못한 두 사람의 부하들이 만류하고 나섰다.
“그만해요. 우리끼리 싸워서 뭣 하게!”
“저 사생아 새끼가 사람 말을 들어 처먹질 않잖아! 골통까지 마늘 냄새가 스며들어 가지곤!”
더그의 말에 격분한 터너가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하지만 부하의 간곡한 만류 어린 눈길에 결국 휘두르지 못했다.
“다들 가자! 마늘 냄새가 지독해서 못 있겠다.”
잔뜩 불쾌한 눈길로 터너를 쏘아본 더그는 다시 스쿠터에 올라 부하들을 데리고 떠나 버렸다.
뜬금없이 폭언을 들은 터너는 분을 참지 못하고 침을 탁 뱉었다.
“빌어먹을, 왜 시비를 걸고 자빠졌어? 남이 어디서 일하든 무슨 상관인데?”
“보스는 모르겠지만, 더그는 중국인이나 일본인을 싫어해요.”
“왜? 그 사람들한테 사기라도 당했대?”
“중국에서 살 때 안 좋은 일이 있어서 그렇다고 들었어요.”
원래 더그의 가족들은 증조부 때부터 중국 상하이에 살면서 물류 사업을 하며 풍요로운 생활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2차 세계 대전이 터지면서 일본군에게 재산을 압류당하고 수용소로 끌려갔다.
“그 수용소에서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돌아가셨대요. 전쟁이 끝나고 돌아와서 가세를 일으켰지만, 이번엔 중국 빨갱이들에게 쫓겨났다고…….”
“그래서 빈털터리가 되어 영국으로 돌아왔다 이거구만.”
어린 시절의 고난은 쉽게 잊을 수 없다.
그건 터너도 비슷하게 겪어 봐서 잘 알았다.
“하지만 자기랑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는 사람까지 싸잡아서 미워할 필요는 없잖아.”
“보스도 저번에 앙리가 생각난다면서 프랑스 녀석을 두들겨 팼었잖아요.”
“그, 그거야 그놈이 올리버의 여친에게 껄떡거렸으니 그런 거고!”
“껄떡인 게 아니라 길만 물었던 거였는데요.”
“모르는 소리! 그러면서 수작질을 하는 거야!”
과거 일이 까발려지자 터너의 얼굴이 벌겋게 물들었다.
정말이지 그때는 부끄러운 짓인 줄 몰랐다.
그런데 지금은 왜 달라진 걸까?
의아하긴 했지만, 생각 없이 싸움질이나 해 대며 울분을 터트리던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
“다녀왔습니다!”
준영이 귀가하자, 프레드로 일가가 집 밖으로 나와 그를 맞았다.
누구보다 먼저 달려 나온 것은 리즈.
하지만 막내에게 선수를 뺏겨 버렸다.
고양이처럼 날쌔게 달려온 카린은 준영의 품에 덥석 안겼다.
“오빠야, 왜 이리 늦은 거야! 카린이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
“하하하, 미안. 갑자기 국가대표로 뽑혀서……. 사과의 뜻에서 러시아 전통 인형을 사 왔어.”
“러시아 인형?”
“응, 마트료시카라고 해서 인형 속에서 인형이 계속 나와.”
카린을 달래 준 준영은 리즈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고 손등에 입을 맞췄다.
“다녀왔습니다, 여왕님.”
“어서 오세요, 기사님. 무사히 돌아와서 기뻐요.”
마음 같아서는 살포시 안고 키스라도 나누고 싶건만.
보는 눈이 너무도 많았다.
특히 알버트는 매의 눈으로 노려보는 중이다.
준영은 냉큼 그에게 다가가 허리를 숙였다.
“그동안 별일 없으셨습니까?”
“별일이라……. 한 가지 있긴 하군. 자네 앞으로 차가 한 대 왔어.”
“자동차가요?”
“그래, 꽤 근사한 로드스터더군.”
준영은 체사레 말디니와 자동차 내기를 했던 게 생각났다.
말디니의 알파 로메오 줄리에타 스파이더가 벌써 배송이 된 걸까?
‘그럴 리가. 21세기라면 몰라도 이 시대에 벌써 배송이 되었으려고?’
궁금한 마음에 준영은 여장을 푼 다음 차고로 가 보았다.
“아니, 이건……!”
예상치 못한 물건에 준영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
더그와 비슷하게 개고생을 한 소년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든 것이 있습니다.
‘태양의 제국’이라고, 크리스찬 베일이 주연이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