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149. 까마귀와 호랑이
가공할 선방 능력을 보인 레프 야신.
와락 눈살을 찌푸린 그는 이내 불만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이런 반동 새끼들! 똑바로 수비 안 할 거야? 가만히 있으니 내가 만만해 보이디? 멀뚱히 구경만 할 거면 관중석으로 올라가, 이 썩어 빠진 등신들아!”
‘응?’
갑자기 야신이 말을 쏟아 내자, 준영과 잉글랜드 선수들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와 달리 소련 선수들은 ‘드디어 시작했구나.’ 하는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올 블랙의 묵직한 차림과 과묵한 인상과는 전혀 안 맞게 그는 엄청난 수다쟁이였으니까.
“케사레프 이 쌍놈의 새끼야! 공중볼이 오면 헤딩해서 경쟁해 줘야지. 네놈 대가리는 장식으로 쓸 셈이냐?”
“야, 네토! 주장이란 새끼가 어리바리하면 어쩌자는 거야! 내가 꼭 목 아프게 잔소리해야겠냐! 마누라한테 시끄럽다고 욕 처먹어 가면서?”
“일린! 이 개똥 같은 머저리 시키야! 좀 떴다 싶으니 정신 못 차리지? 누가 공 주길 기다리지 말고 네가 먼저 공을 따내!”
동료들에 대한 불만과 질책.
그 속사포 같은 말은 러시아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준영과 잉글랜드 선수들조차 질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알아듣는 소련 선수들은 고막에서 피가 나지 않을지 염려스러울 정도.
‘저렇게 시끄러운 사람이었나? 정신 사나워서 시합을 제대로 못하겠군.’
레전드의 숨겨진 면모를 본 준영이 고개를 내저으며 수비로 돌아갈 즈음, 야신이 길게 공을 내차면서 소련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팀의 최고참 공격수인 세르게이 살리코프가 그 공을 받아 내서 측면을 돌파했다.
정석적으로 크로스를 올리는 척하던 그는 잽싼 페인팅 동작으로 수비수를 제치고 잉글랜드 문전으로 들어갔다.
“때려요, 세르게이!”
“그래야 레프의 주둥이를 잠글 수 있어!”
동료 공격수의 성원에도 불구하고, 살리코프의 공격은 슛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잉글랜드의 주장 빌리 라이트의 강력한 태클에 막혔기 때문.
“아아… 와아!”
기대하다 실망한 관중들은 다시 급흥분했다.
빌리 라이트가 태클로 걷어 낸 공을 아나톨리 일린이 잡았기 때문이다.
멜버른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스트라이커는 거침없이 슈팅을 날렸다.
하지만 그의 슛은 번개같이 끼어든 준영의 몸에 가로막혔다.
“나이스 컷, 리틀 존!”
준영이 튕겨 낸 공은 바비 찰튼이 잡았다.
그가 공을 몰고 소련 진영으로 들어오자, 야신이 다시 바쁘게 움직였다. 아니, 떠들었다.
“막아! 막아! 막아!”
“유리 인마, 뭐 해! 얼른 붙어!”
“측면! 왼쪽 측면이 비었다고! 저리로 공 간다! 빨리 잡아!”
8만 관중들의 함성 속에서도 버럭버럭 울려 퍼지는 야신의 고함.
쉬지 않고 쏟아지는 지적과 질타는 효과가 있었다.
소련 선수들이 잉글랜드의 공격을 저지하며 공을 가로챈 것이다.
사실 그들은 필사적일 수밖에 없었다.
공을 잉글랜드 진영으로 내보내기 전까지는 야신의 입이 멈추지 않을 테니까.
“젠장, 시끄러워서 공격에 집중하질 못하겠어.”
“아까 주둥이 닫고 있을 때 넣었어야 했는데.”
“거미손이 아니라 까마귀 주둥이였구만.”
필드의 소음 공해(?)에 불만이었던 잉글랜드 선수들은 연방 투덜댔다.
자신들이 소련 진영에서 공을 잡을 때마다 야신이 까마귀처럼 시끄럽게 울어 댔기에.
보다 못한 톰 피니가 심판에게 이렇게 물어볼 정도였다.
“저기, 혹시 너무 시끄러우면 퇴장시키는 규정은 없나요?”
“유감스럽게도.”
심판도 답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야신의 고함에 머리가 아픈 건 그 역시 마찬가지니까.
상황을 보자니 저놈의 주둥이는 소련이 한 5 대 0쯤으로 이기고 있지 않은 이상 그치지 않을 것으로 보였다.
“시끄럽다고 일부러 져 줄 수는 없는 노릇이야.”
“아무렴. 월드컵 전초전부터 질 수 없지!”
잉글랜드 선수들은 전의를 불태웠다.
앞서 유고슬라비아에서 있었던 평가전에서는 패배, 그것도 0 대 5의 참패를 했기에 오늘 경기는 반드시 승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승리에 대한 의지를 가장 뜨겁게 불태우는 사람은 최고참인 톰 피니였다.
그는 조니 헤인스가 찔러 준 패스를 받아 소련 수비수들을 연달아 제치며 소련 페널티 박스로 돌파해 갔다.
“이런 썩을 놈들! 대체 수비를 어떻게 하는 거야!”
분통을 터트린 레프 야신.
그는 표범같이 날렵하게 톰 피니에게 달려들었다.
순식간에 톰 피니의 눈앞은 골대가 아닌 검은 거인이 꽉 채웠다.
그럼에도 그는 머뭇거리지 않고 슈팅을 날렸다.
그리고 공은 야신의 선방을 뚫고 골대를 향해 굴러갔다.
‘좋았어! 들어갔다!’
괴물 같은 수다쟁이 골키퍼를 뚫었다!
그리 확신한 순간, 수비수 보리스 쿠즈네초프가 골대로 들어가던 공을 멀리 걷어 냈다.
들어갔다고 확신하던 톰 피니와 잉글랜드 선수들은 땅을 치지 않을 수 없었다.
“잘했어, 보리스! 기가 막힌 선방이었어!”
야신이 어깨를 툭 치며 칭찬하자 보리스는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흥, 방금 전까지 수비 못한다고 뭐랄 때는 언제고.”
“기분 풀어. 끝나고 보드카 살 테니까.”
“오냐, 그 보드카로 너한테 욕먹은 귀나 소독해야겠다.”
잠시 농담 따먹기를 하던 둘은 잉글랜드 선수들이 재차 공격해 오자 다시 수비에 몰두했다.
얼마 남지 않은 전반전은 되도록 깔끔하게 마치고 싶었으므로.
***
전반전은 0 대 0.
소련과 잉글랜드 어느 쪽도 점수를 얻지 못했다.
준영은 후반전을 준비하면서 야신의 플레이를 차분히 분석해 보았다.
‘생각하던 것과 다르긴 했지만, 중요한 건 야신이 굉장히 선진적인 골키퍼라는 거야.’
놀라운 선방 능력도 대단했지만, 그보다 주목할 점은 수비에 있어 컨트롤 타워 역할을 해 준다는 점이다.
최후방에서 경기를 보면서 상대 공격수들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동료들에게 끊임없이 지시를 내렸다.
이는 여느 1950년대 골키퍼들과 달랐다.
야신은 거의 21세기의 골키퍼들 이상으로 팀의 수비를 조율하고 있었다.
당연히 수비수들을 잘 움직이게 만들면 문전에서 일어나는 위험도 적어진다.
골키퍼의 수고가 적어지거니와, 실점 확률도 그만큼 낮아지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야신의 노력에 대해서 잉글랜드 선수들은 물론, 그의 동료들도 짜증 나고 성가신 것으로 취급하지만.
‘거기다 활동 반경도 넓고 과감해. 어지간한 공격 시도로는 어림도 없겠지.’
그렇지 않아도 하프타임에 윈터보텀 감독이 그 문제로 공격수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상대 박스 안에서 패스를 좀 더 빠르고 간결하게 처리해. 슈팅도 마찬가지야. 일단 문전에서는 망설이지 말고 때려.”
어느 곳으로 찰지 생각하고 행동하다간 야신에게 막히고 만다.
이미 전반에 충분히 당해 봤기에 공격수들은 감독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존 Y. 리, 그리고 바비 찰튼, 자네들 둘은 전반전보다 좀 더 전진해서 공격적으로 플레이하도록 노력해 봐.”
“공격에 숫자를 더하라는 겁니까?”
“그래, 공격 숫자라도 많아야 득점 확률이 그만큼 올라가지.”
승리를 위해서는 공격이 중요.
물론 그렇다고 수비를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후반전, 소련은 분명 역습을 펼칠 테니까.
“수비하랴, 공격하랴… 엄청 바쁘겠어요.”
바비 찰튼의 푸념에 준영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그게 미드필더, 하프백의 숙명이지. 우리의 활약에 따라 승패가 좌우되니까.”
스웨덴행 막차를 타기 위해선 최선을 다해 좋은 활약을 보여야 한다.
월드컵이 한 달도 안 남은 상황에서 이 경기 말고 다른 평가전이 있을지, 그때도 대표로 선발될지 장담할 수 없으니까.
***
하프타임이 끝나고 후반전이 시작되려는 때.
소련에서 하프백을 한 명 바꿨다.
‘선수 교체라……. 저런 건 진짜 오랜만에 보는걸.’
정식 경기가 아닌 평가전이다 보니 교체가 허용되고 있었다.
하지만 소련과 달리 잉글랜드는 일단 전반전 멤버를 그대로 유지했다.
“자, 다들 정신 바짝 차려! 여기가 우리 홈이라는 걸 잊지 말라고!”
‘네가 그냥 주장 해라.’
소련 대표팀의 주장 이고르 네토는 휘슬이 울리기 무섭게 잔소리를 날리는 야신을 슬쩍 째려보았다가 공을 몰고 앞으로 나갔다.
전반에는 거의 공격을 하지 못했던 소련 선수들은 아주 과감하게 공격을 펼쳤다.
그들의 공격은 비교적 단순했지만, 끊임없이 공격해 오는 폼은 예사롭지 않았다.
“일단 공만 잡으면 최전방으로 보내기 바쁘군요.”
“우리도 차고 달리는 데는 이력이 나 있지만…….”
중요한 건 이런 상황에서 절대 실수를 하면 안 된다는 것.
뚫렸다가는 곧장 실점 위기로 이어질 수 있었다.
“이런, 뱅크스가 공을 놓쳤어!”
‘어이구, 생각하자마자…….’
수비수 토미 뱅크스가 공중으로 가로질러 오는 볼의 낙하지점을 잘못 판단했다.
그 바람에 소련의 공격수 일린은 골키퍼와 일대일이라는 절호의 찬스를 잡았다.
“맙소사, 거기서 저질러 버리면 어쩌라고요!”
토미 뱅크스와 같은 볼턴 소속인 에디 홉킨스 골키퍼가 황급히 달려 나왔다.
그러자 일린은 한 번 더 공을 치며 에디를 제쳐 버렸다.
‘이제 골대는 무인지경… 앗!’
일린이 마침표를 찍으려는 찰나, 황급히 달려온 준영이 그의 발치에 있던 공을 라인 밖으로 걷어 내 버렸다.
그 바람에 기대 어린 표정을 짓고 있던 관중들은 아쉬운 탄식을 내뱉었다.
“아, 좋은 기회였는데!”
“저 중국인, 엄청 빠른걸.”
“그러게 말이야. 저런 큰 체격에 발까지 빠르다니…….”
위기를 모면한 잉글랜드 선수들은 준영을 도닥이고 가거나, 엄지를 치켜들었다.
토미 뱅크스나 에디 홉킨스도 마찬가지였다.
“저 녀석, FA컵 결승에선 굉장히 얄미웠는데.”
“같은 편이 되니 엄청 든든한걸.”
그 든든함은 이어지는 코너킥 상황에서 다시 한 번 보여 주었다.
누구보다 높이 뛰어올라 헤딩으로 공을 걷어 내고는 아군이 공을 잡은 것을 확인하자 곧장 속공에 가담했다.
마치 방금 전 잉글랜드의 위기를 그대로 갚아 주겠다는 듯이.
“돌아와! 멍청이들아, 얼른 돌아오라고!”
야신의 닦달에 한껏 라인을 올렸던 소련 선수들이 허둥지둥 자기 진영으로 돌아왔다.
그사이 공은 바비 찰튼을 거쳐 측면을 내달리는 바비 롭슨에게 이어졌다.
터치라인 바로 앞에서 방향을 꺾은 롭슨은 중앙으로 들어오는 동료 공격수들을 바라보며 크로스를 올렸다.
하지만 그 크로스는 중앙의 공격수들 쪽으로 향하지 않았다.
골대 쪽으로 바싹 붙는다 싶더니 그대로 상단 구석을 향해 떨어졌다.
‘크로스가 아니라 슈팅이었나?’
빗맞은 걸까, 의도한 걸까.
아무튼 황급히 몸을 날린 야신은 떨어지는 공을 손끝으로 살짝 밀어냈다.
터엉-!
살짝 방향이 틀어진 공이 골대를 맞고 튀어 올랐다.
‘휴, 아슬아슬했어!’
안도의 미소를 지은 야신은 떨어지는 공을 잡기 위해 다시 한 번 뛰어올랐다.
그런데 떨어지는 공을 향해 달려든 건 야신 혼자만이 아니었다.
‘저 녀석은……!’
잉글랜드 대표팀에서 유독 눈에 띄던 장신의 동양인 선수.
삼사자 군단의 호랑이는 포착한 사냥감을 향해 힘차게 뛰어올랐다.
***
레프 야신은 적극적으로 팀원들을 다그치며 지시를 내렸지만, 정작 주장을 맡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필요 이상으로 부담을 느끼는 걸 꺼렸던 것 같은데, 그래서인지 경기 전에 긴장을 풀기 위해서 담배를 피우거나 보드카를 한잔하는 일도 있었다고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