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전드 1957-148화 (148/400)

Round 148. 원조 거미손

준영의 칼날 같은 발차기에 다른 녀석들도 얼어붙었다.

근처에 있던 바비 찰튼이나 다른 신참들은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설마 준영이 선배들을 상대로 손찌검을 할 줄은 생각지 못했으니까.

물론 준영도 일을 더 키울 생각은 없었다.

웬만하면 여기서 끝내고 싶었다.

“재미없으니 장난은 여기까지만 하지?”

“이 자식! 감히 선배에게 손을 대고 무사할 것 같아?”

후보 패거리들의 공갈에 준영은 가늘게 웃음을 지었다.

“무사하지 않으면 어쩔 건데? 여길 붉은 광장으로 만들 건가?”

“이런 개자식…….”

“아아아아악!”

발끈하며 달려들려던 후보 패거리는 갑자기 울리는 비명에 움찔 물러났다.

비명의 주인공은 아까 준영에게 메쳐진 녀석.

그의 손가락이 준영의 구두에 밟힌 상태였다.

“괜찮아? 고의는 아니었어.”

자세를 바꾸면서 살짝 뒷걸음질을 치다 밟아 버린 모양.

하지만 준영은 미안한 감정이 없었다.

녀석이 애초에 덤비지 않았으면 이런 꼴을 당하지 않았을 테니까.

“뭣들 하는 거야!”

소란을 듣고 찾아온 고참 선수가 버럭 호통을 쳤다.

그는 바로 대표팀 최고 연장자인 톰 피니였다.

“피니 씨, 그게 말입니다, 저 원숭이 녀석이…….”

“얼른 버스에 타! 너희 때문에 출발을 못하고 있잖아!”

찍소리도 못한 후보들은 어깨를 늘어뜨리고는 버스에 올라탔다.

마지막에 버스에 오르는 준영에게 피니가 말을 건넸다.

“얌전하다 싶더니만, 역시 사고뭉치 쪽이었나?”

“안 건드리면 얌전하죠.”

준영의 대꾸에 피니는 너털웃음을 지었다.

프레스턴 노스 엔드의 에이스인 톰 피니는 이번 시즌 준영과 맞대결을 한 적이 없었다.

한 번은 준영이 선발에서 빠졌고, 또 한 번은 그가 부상으로 출전하지 못했으므로.

그는 그 점을 아쉽게 여겼다.

빌리 라이트나 바비 롭슨 등 쟁쟁한 후배 선수들을 쓰러트린 이단아의 실력이 궁금했으니까.

‘스탠리 씨나 섕클리 감독의 말대로군. 확실히 특별한 뭔가가 있어.’

대표팀에 처음 뽑혔음에도 불구하고 그리 긴장하지도 않고, 유일한 비백인 선수라 해서 주눅이 든 기색도 없었다.

과연 훈련이나 평가전에서는 어떤 모습을 보여 줄까?

‘지켜볼 맛이 나겠구만.’

사자 무리 속에 들어온 아시아의 호랑이.

그 행보가 꽤 흥미진진하게 느껴졌다.

***

모스크바의 호텔에 여장을 푼 잉글랜드 대표팀은 다음 날 곧장 훈련을 시작했다.

“빨리 뛰어!”

“그따위로 해서 빨갱이들을 이길 수 있겠나!”

연방 선수들을 독려하던 윈터보텀 감독은 준영을 연신 바라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몸놀림이 선수들 중에 제일 좋았으니까.

처음에는 유고슬라비아에서 평가전을 뛰지 않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경기에 뛰지 않은 선수들과 비교해도 상당히 날랜 움직임이었다.

‘더구나 저 녀석도 유러피언 컵 경기를 뛰고 왔잖아. 피곤한 건 마찬가지일 텐데…….’

의아해하고 있던 그와 달리, 준영은 선수들의 상태가 별로인 이유를 파악하고 있었다.

‘잘 때 안 자고 술판을 벌였으니 그렇지.’

피로 회복과 시차 적응에 좋은 방법은 커피나 음주를 멀리하고, 충분히 자고 물과 식사를 섭취하는 것.

그러나 담배 잘 피우고 술 많이 마셔야 사내답다는 사고방식이 일반적인 이 시대 선수나 지도자들이 그걸 알 리 만무했다.

사실 영국에서도 빌 섕클리같이 금주를 권장하는 지도자가 없진 않았다.

하지만 선수 컨디션 관리 측면보다 팀의 기강을 잡기 위한 목적이 컸다. 술로 인한 일탈이나 사고가 벌어져서는 곤란하니까.

아무튼 준영의 컨디션은 이후 미니 게임에서 더욱 빛을 발했다.

공중 장악, 패스 차단, 거기다 공격진을 향한 빠르고 정확한 어시스트까지.

“저놈, 정말 잘하는군요.”

“실력이 있는 데다, 자신감도 높으니까.”

윈터보텀은 만족한 듯 연방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가 제일 만족한 것은 준영이 대표팀에 잘 맞춰 들어간다는 점.

기존 대표팀 선수들과 손발이 척척 맞는 건 아니었지만, 제 역할을 잘하고, 빈틈이 생기면 바로 메울 줄 알았다.

딱히 튀는 행동이나 번득이는 개인기는 보이지 않았다.

팀이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는 든든하고 헌신적인 플레이를 하는 데 열심이었다.

“과연! 맷 버스비나 지미 머피가 왜 녀석을 중용하는지 알 것 같군.”

저 정도면 5월 18일 벌어지는 소련과의 평가전에 곧장 투입해도 문제는 없을 것 같았다.

이렇게 본 건 윈터보텀 감독뿐만 아니라 대표팀을 취재하러 온 영국 기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훈련이 끝난 후, 자연히 준영에게로 모여들었다.

“리 선수, 처음 대표팀에 와서 낯설지 않습니까?”

“딱히 그렇진 않아요. 리그에서 한 번씩 만났던 선수들이니까.”

“대표팀에선 어떤 포지션을 맡게 될 것 같습니까?”

“그건 감독님이 결정하실 일이라서요. 공격이든 수비든, 어느 포지션을 맡더라도 자신 있습니다.”

“골키퍼도 말입니까?”

“아, 그건 좀…….”

한 차례 웃음이 흐르는 가운데, 더 타임즈(The Times)의 외신 기자가 진지한 기색으로 질문을 건넸다.

“리 선수, 잉글랜드 대표 선수로 헌신적이고 충성스러운 모습을 보여 줄 각오는 되어 있습니까?”

역시나 이런 질문을 할 줄 알았다.

미리 생각을 해 두었던 준영은 스스로 적절하다 싶은 대답을 내놓았다.

“전 원래 한국인입니다. 홍콩 시민권자 자격이 있어서 잉글랜드 대표로 뽑혔죠. 그래서 많은 분들이 의심하고 염려하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살짝 숨을 돌린 그는 곧장 말을 이어 갔다.

“제 고국의 성현들은 참된 도리를 중시하셨죠. 무국적자가 될 뻔한 저를 받아 주고, 축구를 할 수 있게 기회를 준 나라에 은혜를 갚는 게 참된 도리라 봅니다.”

준영의 말에 타임즈의 특파원은 물론, 다른 기자들의 표정도 한결 부드러워졌다.

새로운 조국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둥, 여왕 폐하께 충성을 다하겠다는 둥 입발림 말보다 훨씬 진심이라고 느낄 수 있었으니까.

“알겠습니다. 리 선수가 참된 도리를 다할 수 있기를 기원하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준영은 만족스럽게 인터뷰를 마쳤다.

악의를 품고 왜곡하지 않는 이상, 오늘 인터뷰는 그대로 언론에 나올 것이다.

보은을 하겠다는데 불만을 품거나 질타하지는 않을 터.

이만하면 레전드로 남기 위한 명예를 지켰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

모스크바 카모브니키 구에 자리한 레닌 스타디움.

오늘 이곳에서 벌어지는 소련과 잉글랜드의 경기를 보기 위해 8만 명의 관중들이 모였다.

모스크바에선 오늘 경기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그도 그럴 것이 소련은 스웨덴 월드컵에서 잉글랜드와 같은 4조에 속해 있었으니까.

그렇기에 오늘 경기는 월드컵을 대비한 전초전이나 마찬가지였다.

“과연 어느 팀이 이길까?”

“당연히 우리 붉은 혁명 전사들이지! 부르주아 제국주의자들에게 지지 않아!”

“하지만 저쪽은 축구 종가라고.”

“이놈 이거 반동이구만! 전위대 어딨나?”

관중석 한쪽에서 뜬금없는 사상 검증(?)이 이뤄지는 가운데, 필드로 양 팀 선수들이 입장했다.

“헉, 저 녀석 봐!”

“우리 골키퍼보다 더 크잖아!”

“제국주의자 놈들, 괴물을 데려왔군!”

삼사자 엠블럼이 박힌 하얀 상의에 짙푸른 하의의 유니폼을 걸친 준영.

오늘 잉글랜드 대표로 선발 출장한 그에게 관중들의 시선이 쏠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준영은 ‘CCCP’라는 글자가 박힌 붉은 유니폼의 소련 선수들과 악수를 주고받았다.

현 소련 팀의 간판 공격수 아나톨리 일린, 세르게이 살리코프, 콘스탄틴 크리체브스키, 주장인 이고르 네토 등등.

‘죄송해요. 나한텐 다들 듣보세요.’

이들도 훗날 러시아 축구의 레전드 선수들일 터.

그러나 준영은 대부분 알지 못했다.

딱 한 명만 제외하고.

“Nice to meet you.”

러시아 억양을 잔뜩 머금고서 인사말을 건네는 장신의 골키퍼.

준영이 유일하게 알아본 네임드 플레이어였다.

‘이 사람이 바로 야신!’

원조 거미손 레프 이바노비치 야신.

21세기까지도 골키퍼로는 유일했던 발롱도르 수상자다.

오늘 경기에서 잉글랜드가 승리하기 위해서는 이 축신급 레전드 골키퍼를 뚫어야 할 것이다.

‘우리 팀 공격진이 톰 피니 아재에 데릭 케반, 바비 롭슨과 조니 헤인스인가? 과연 이들이 야신을 뚫을 수 있을까?’

다들 영국에서 유명한 선수들이지만, 천하의 야신을 뚫기에는 약해 보였다.

물론 시합이 어떻게 될지는 뚜껑을 열어 봐야 알 수 있다.

삐익-!

심판의 휘슬이 울리며 경기가 시작되었다.

잉글랜드 대표팀은 초반부터 적극적인 공세를 펼치며 득점을 노렸다.

기회는 상당히 일찍 왔다.

전반 1분이 채 가기도 전에 조니 헤인스가 밀어 준 패스를 데릭 케반이 잡아 소련 페널티 지역으로 몰고 간 것.

특유의 탱크 같은 돌파력을 선보인 데릭은 수비수를 밀쳐 내곤 강력한 슛을 날렸다.

하지만 이 슛은 야신의 손아귀에 간단히 잡히고 말았다.

“쳇, 저 불곰 자식!”

“상단 구석을 노려야 해! 안 그러면 녀석을 상대로 승산이 없어.”

야신의 이름은 영국에도 꽤 알려져 있었다.

1956년 호주 멜버른 올림픽 축구에서 소련이 금메달을 따는 데 한몫했으므로.

야신은 금메달을 따낸 선방 능력을 보란 듯이 선보였다.

톰 피니가 공을 몰고 문전으로 들어오자 재빨리 몸을 날려 공을 가로챘고, 바비 롭슨이 구석을 노려 찬 슈팅을 펀칭으로 튕겨 내기도 했다.

이 밖에도 페널티 지역으로 날아오는 크로스나 침투 패스들을 죄다 잡아챘다.

“하하핫! 그런 공격은 야신에겐 어림도 없다고!”

“축구 종가도 별거 아니구만!”

소련 축구 챔피언 디나모 모스크바의 최강의 수문장 레프 야신.

그가 선방을 펼칠 때마다 관중들은 신나게 환호성을 터트렸다.

물론 그럴 때마다 잉글랜드 공격수들의 혈압이 높아졌다.

“젠장, 콧대를 납작하게 해 주지 않으면…….”

칼을 싹싹 갈고 있던 차에 또다시 기회가 왔다.

전반 18분, 단짝인 바비 롭슨이 올려 준 크로스를 데릭 케반이 뛰어들며 강력한 헤딩슛을 날린 것이다.

워낙에 골대와 가까워서 누가 봐도 들어갈 것 같았다.

그러나 짐승같이 몸을 날린 야신은 그 헤딩슛을 쳐 냈다.

“이런 망할 자식!”

“리바운드 볼은……?”

조니 헤인스가 박스 외곽에 떨어지는 볼을 쫓았다.

그의 눈에 비호같이 뛰어드는 준영이 보였다.

저도 모르게 그는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때려!’

뻐엉-!

조니 헤인스의 바람대로 준영이 논스톱으로 슈팅을 날렸다.

달려온 추진력에 거구의 몸이 가진 탄력까지 담은 축구공은 레이저처럼 쭉 뻗어 소련 골대로 날아갔다.

‘들어갔다!’

득점을 확신한 그 순간, 거짓말처럼 뻗은 야신의 손이 그 슈팅을 공중으로 쳐 냈다!

그러고는 펄쩍 뛰어올라 떨어지는 공을 잡아챘다.

‘헐, 저게 진짜 사람이냐?’

준영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방금 전 데릭의 헤딩슛이나 자신의 다이렉트 슛은 분명 들어간다고 확신할 수 있는 슈팅이었다.

그런데 그걸 다 막아 내다니!

‘마치 골문 앞에 거인이 서 있는 것 같군.’

연속된 선방 능력이 상대를 그렇게 커 보이게 만들었다.

준영도 그렇게 느낄 정도였으니, 가까이 있는 공격수들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다들 귀신에 홀린 듯한 표정으로 야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

야신은 선방 능력도 대단했지만, 당시 골키퍼들과 달리 상당히 적극적으로 선수들을 컨트롤했습니다.

사진을 보면 진짜 진중하고 무게감 있는 사람으로 보이지만 실제론 정말 말 많은 사람이었고, 90분 내내 자기 편 선수들에게 고함을 치고 닦달했다고 합니다.

심지어 경기를 보러 온 그의 아내도 남편이 너무 시끄럽다고 비난할 정도였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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