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전드 1957-147화 (147/400)

Round 147. 삼사자 군단 입성

“어떻게 이런 터무니없는 결정을 할 수 있나!”

웸블리의 축구협회 사무실에서는 스탠리 루스 총무의 고함이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그를 격분하게 만든 것은 존 Y. 리의 대표 선발.

아무리 땜빵이라 해도 그렇지, 선수 선정위원회가 어찌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자네들 때문에 대영제국의 위신이 바닥까지 떨어지게 생겼어! 퍼스트 디비전에서 뛰는 수백 명의 선수를 제쳐 놓고 노란 원숭이를 뽑다니!”

루스의 비난에 선정위원회 위원들은 낯빛을 딱딱하게 굳혔다.

자신들의 고충을 알아주지 않고 비난만 퍼붓는 루스의 태도가 영 맘에 들지 않았다.

“존 Y. 리는 그 수백 명의 선수 중에서 단연 톱 수준의 플레이어입니다. 그래서 뽑지 않을 수 없었죠.”

대놓고 반박하며 나선 인물도 있었다.

바로 와트 어스라는 50대 행정가였다.

“2월에 뮌헨에서 벌어진 비행기 사고로 타격을 입은 건 유나이티드뿐만이 아닙니다. 대표팀 역시 전력 피해가 컸단 말입니다.”

수비수인 로저 바인, 전천후 플레이어인 던컨 에드워즈, 특급 골잡이 토미 테일러.

기존에 대표팀에서 핵심 선수로 활약하고 있던 이들은 선수 생명이 끝났거나, 회복과 재활을 위한 인고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렇다 보니 선정위원회도 뾰족한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월터 윈터보텀 감독의 요청을 거절했지만, 대안이 없었기에 결국 거듭된 요청을 수락하게 된 것.

“그리고 국가의 위신을 말씀하셨는데, 그럴수록 우수한 선수를 선발하는 게 마땅하지 않습니까?”

“뭐가 어째?”

“총무님이 싫어하는 그 녀석도 법적으로 이 나라 시민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얼마든지 선발될 자격이 있단 말입니다.”

루스가 눈을 치켜떴지만, 와트 어스는 조금도 주눅 들지 않고 뻣뻣한 태도를 보였다.

“불만이시라면 당장 FA컵 결승전 MVP보다 더 뛰어난 선수를 데려와 보시든가요.”

“크윽……!”

결국 루스 총무는 물러나고 말았다.

신경질을 부리며 회의실을 떠난 그는 쉬이 분을 풀지 못했다.

“빌어먹을 것들! 자존심도 없는 저런 것들이 자리를 꿰차고 있으니 나라 꼴이 이 지경이지!”

분통을 터트리던 그는 이내 화살을 대표팀 감독 월터 윈터보텀에게 돌렸다.

“월터 이 망할 자식! 제 놈을 전임 감독으로 임명해 준 게 누군데! 이딴 식으로 배신을 하다니!”

연방 투덜거리던 그에게 젊은 서기관 하나가 다가왔다.

이 서기관은 루스의 측근으로 정보원 노릇을 하고 있었다.

“그래, 알아봤나?”

“예, 총무님. 선정위원회가 결정을 번복한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처음엔 거절했다가 대안이 없으니 수락했다.

이런 이유 말고 또 다른 까닭이 있었던 걸까?

“번복하기 전에 선수 선정위원회가 시끄럽다는 연락을 받고 글로스터 공작 각하께서 직접 찾아왔다고 합니다.”

“협회장이?”

“예, 대표팀 대체 발탁에 대해서 듣고 참견을 했다고 합니다.”

“거참, 평소답지 않게 어째서?”

얼굴마담, 바지 사장.

현재 영국 축구협회 협회장은 이런 단어로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실권은 없는 존재다.

아니, 명패만 갖고 있을 뿐 직무를 수행하거나 간섭하지 않는다는 게 맞았다.

그런데 무슨 바람이 불어서 대표팀 선수 선발에 참견을 했단 말인가?

“FA컵 우승 다음 날, 존 Y. 리가 버킹엄 궁에 초청을 받았다고 하는데 그와 관련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니까, 여왕 폐하의 의도일 수 있다?”

“예. 그럴 수도 있고, 폐하의 눈에 띈 놈이니 챙겨 주려 하는 것일 수도 있죠. 어디까지나 추정일 뿐입니다만…….”

그래도 왕족인 글로스터 공작까지 나선 것을 생각하면 영 근거 없는 이야기는 아닌 듯싶었다.

“가능성이 있긴 하겠군. 높으신 분이 보기엔 희든, 검든, 누렇든 다 같은 아랫것들일 뿐이니까.”

전쟁에서 인도 구르카족이나 뉴질랜드 마오리족을 대영제국의 용병으로 동원한 적이 있지 않았던가.

그 점을 생각하면 버킹엄 궁의 존귀하신 분도 월드컵과 같은 국가 대항전에서도 용병을 쓰지 말란 법은 없다고 판단하셨을지 모른다.

“하지만 용병은 어디까지나 용병이지. 애국심도 없는 부랑자 놈이 삼사자 군단에 제대로 헌신하겠나?”

“그 논란은 확실히 언론에서 좋아할 듯싶습니다.”

서기관의 말에 루스는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좋아하면 던져 주는 게 마땅하겠지.”

일이 시끄러워지면 골치 아파지는 것은 당사자와 놈을 선발한 감독, 그리고 선정위원회 녀석들이 될 터.

루스는 느긋하게 그 난장판을 지켜보기로 했다.

***

삼사자 군단의 부름에 응한 준영은 함께 추가 발탁된 바비 찰튼과 함께 유고슬라비아로 떠났다.

“정말이지 국가대표팀에서… 그것도 존이랑 같이 뛰게 될 거라곤 상상도 못했어요.”

“나도 바비 찰튼 경이랑 함께할 거라곤 상상도 못했지.”

“하하, 낯간지러운 소린 관둬요.”

비행하는 내내 밝은 표정으로 바비와 대화를 나누던 준영.

그는 베오그라드 공항에 도착하자 표정이 달라졌다.

“두 사람 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선수요?”

“그렇소.”

힐끔 준영과 바비를 살펴보던 공항 검색 요원이 뭔가 떠오른 표정으로 말했다.

“I’m not really happy with Munich air disaste.”

“유감 좋아하네, 개새끼들!”

저도 모르게 입에서 욕이 튀어나왔다.

더 욱했으면 진짜 손찌검을 날렸을지 모른다.

이놈들이 맨유의 전용기를 고의로 막지 않았다면 다들 참혹한 일은 당하지 않았을 테니까.

바비도 같은 생각을 했던지 눈빛이 곱지 않았다.

두 사람의 분노한 기색에 검색 요원도 애써 눈을 피하며 서둘러 통과시켰다.

그렇게 공항에 들어와 기다리고 있을 때, 얼마 후 낯익은 얼굴들이 잔뜩 나타났다.

울버햄프턴의 빌리 라이트, 웨스트 브롬위치의 바비 롭슨과 데릭 케반, 풀럼의 조니 헤인스, FA컵 결승전에서 만났던 볼턴의 수문장 에디 홉킨스, 토트넘의 모리스 노먼과 바비 스미스 등등.

“와, 존 Y. 리잖아!”

“진짜 왔군!”

“잘 왔다, 이 개자식아.”

“네 녀석 따위 필요 없지만, 주전자 담당으로 써 주지!”

준영에게 뼈아프게 당한 이들은 반가움을 담은 악담을 건네며 어깨를 툭 쳤다.

그렇게 해후한 후, 40대 중반의 신사가 준영에게 악수를 건넸다.

“반갑군. 난 대표팀 감독인 월터 윈터보텀이야.”

“예, 처음 뵙습니다.”

준영이 꾸벅 허리를 숙이자, 윈터보텀 감독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요즘 유나이티드에는 정말 대단한 후배가 뛰고 있구만.”

“후배? 감독님도 맨유 출신이십니까?”

“준프로 계약으로 3시즌을 뛰었지. 부상 때문에 일찍 은퇴해 버렸지만.”

살짝 씁쓸한 표정을 짓던 윈터보텀은 이내 다시 반가운 표정으로 말을 건넸다.

“프레드로 남작님께 자네 얘기를 많이 들었어. 정말 대단한 선수라고 말이야.”

“아니, 남작님을 아세요?”

“지난 대전 때 루이스랑 왕립 공군에서 같이 복무했거든. 안부 차 남작님께도 곧잘 연락을 하곤 하지.”

그 과정에서 준영에 대해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듣고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축구협회의 완고한 분위기 때문에 섣불리 발탁하지 못했다고.

“그 뮌헨 사고 때문에 핵심 선수들이 빠졌지. 그 공백을 메우는 게 쉽지 않아서 결국 자네의 발탁을 요청하게 된 거지.”

처음에 거절당했을 땐 역시나 했다.

그래도 재차 요청했는데 의외로 수락해서 굉장히 놀랐다고.

“아마 높으신 분들도 생각이 바뀌는 게 아닌가 싶어. 달라져야 한다고, 외국과 교류하며 배우고 발전시켜야 한다고 말이지.”

‘깨어 있는 생각을 가진 분인가 보군.’

변화와 교류를 중시하는 걸 보면 맷 버스비, 빌 섕클리 감독과 비슷한 사람인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열심히 하라고. 스웨덴행의 티켓은 아직 남아 있으니까.”

“네, 반드시 막차에 승선하겠습니다.”

준영이 훈훈하게 첫 대면을 마쳤을 때였다.

대표팀 주장인 빌리 라이트가 버럭 호통을 터트렸다.

“뭐 해, 신참! 빨리 짐 날라!”

‘엥?’

어이없어하던 준영은 자신과 비슷하게 새내기로 발탁된 바비 찰튼과 몇몇 젊은 선수들이 선배들의 가방을 드는 것을 보았다.

‘무슨 쌍팔년도도 아니고… 아니, 지금이 쌍팔년도 시대구나.’

맨유에선 이런 풍조가 없었다.

다들 형제처럼 선후배가 잘 챙기는 분위기였던 것.

하지만 잉글랜드 대표팀은 전혀 달랐다.

감독인 윈터보텀도 이를 보고도 당연하다는 듯 아무런 간섭도 하지 않았다.

‘깨어난 게 아니라 덜 깨어난 것 같구만.’

섣불리 평가하진 말아야겠다.

판단을 유보하기로 결심한 준영은 일단 신참 동지들과 함께 선배 놈들의 가방을 들었다.

“근데 우리 어디로 가는 겁니까?”

“다음 평가전 상대 말이야? 빨갱이 두목 나라야.”

“예?”

“소련이라고. 우린 모스크바로 갈 거야.”

하필 소련이라니!

체코슬로바키아 프라하에 갔을 때 벌어진 소동을 똑똑히 기억하는 준영은 떨떠름하지 않을 수 없었다.

***

베오그라드에서 모스크바행 비행기를 탄 삼사자 군단은 모스크바 서남쪽 브누코보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젠장, 이번엔 KGB가 찾아오는 거 아냐?’

또 북한 놈들이 수작을 부리는 건 아닐까.

하지만 우려와 달리 브누코보 공항에서는 아무 일도 없었다.

매의 눈으로 노려보는 공항 요원들보다 대표팀 선배 놈들이 더 성가시게 굴었다.

“야, 신참, 목마르니 물 좀 떠 와.”

“이따 내 가방 챙겨서 와.”

“야 인마! 조심해서 옮겨! 안에 위스키 병이 들었다고!”

다른 신참 선수들보다 준영에겐 유달리 요구가 많고 잔소리도 잦았다.

참을 인 자를 새기던 준영도 점점 인내심이 바닥남을 느꼈다.

‘이것들이 나한테 물먹었다고 보복하는 건가?’

아니, 빌리 라이트나 바비 롭슨같이 진짜 물먹은 각 팀의 실력자들은 그나마 덜했다.

시합에서 존재감도 없던, 출전했었는지 의문스럽기도 한 녀석들이 더욱 괄시했다.

‘그렇군. 이것들은 주전이 아니야. 그러니까 유난을 떨지.’

어설프게 대표팀에 박혀 있는 후보 녀석들은 굴러온 돌에게 튕겨 나갈까 봐 은근히 걱정이 되는 모양.

아무튼 준영은 쩨쩨한 놈들을 지목해 뒀다.

나중에 훈련할 때 단단히 담가 주리라 마음먹으면서.

공항에서 나오자 소련 축구협회에서 보낸 버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준영이 버스 트렁크에 선배 선수들의 가방을 차곡차곡 싣고 있을 때.

한쪽에서 담배를 피우던 후보 녀석들이 눈빛을 교환하다 한꺼번에 준영에게 달려들었다.

“뭐야? 무슨 짓이야?”

“네 자리는 여기다, 쿨리야.”

그들은 준영을 붙들어 트렁크 안으로 집어넣으려 했다.

하지만 힘으로 떡 버틴 준영은 왼팔을 잡고 있던 녀석을 도리어 트렁크 안으로 던져 버렸다.

그러곤 바로 오른쪽에 붙은 놈도 멱살을 잡아 그대로 바닥에 메쳤다.

“커억!”

“아니, 이 자식이……!”

발끈하며 달려들던 금발에게로 준영의 돌려차기가 날아갔다.

마치 칼날 같은 발차기는 정확히 그가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날려 버렸다.

금발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방금 발차기가 조금만 더 깊이 들어왔다면 턱이 남아나지 않았을 테니까.

***

월터 윈터보텀 감독 이전에는 잉글랜드 대표팀에 전임 감독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냥 국제 경기 시합할 일이 있으면 잘하는 프로팀 감독을 불러다 맡기고 그랬다고 하네요.

아무튼 윈터보텀은 잉글랜드 최초의 전임 감독으로, 1946~1962년까지 16년간 대표팀을 지휘했습니다.

사실 성적은 썩 좋지 않았지만 연령별 대표팀 운용이나 유망주 육성, 지도자 양성 등등, 그때까지 세계 수준에서 뒤떨어진 행정과 선수 운용 체계를 갖고 있던 잉글랜드 대표팀을 개선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고 하죠.

하지만 이런 개혁적인 행보와 선진적인 사고관과 달리, 구태스러운 기질도 남아 있어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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