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145. 얄궂은 운명
“으아악!”
지안카를로가 무릎을 잡고 쓰러지자, 경기가 곧장 중지되었다.
공을 라인 밖으로 차 낸 준영은 심판이 굳은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손을 내저었다.
“난 아무 짓도 안 했어요. 저 녀석이 제풀에 쓰러졌다고요.”
사실 아무 짓을 안 한 건 아니다.
이 시대 선수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개인기를 쓰면서 급한 방향 전환을 유도했으니까.
그러다 인대 쪽에 문제가 생겨 자멸하게 된 것.
아무튼 준영의 부정에 심판은 근처에 있던 부심에게도 다가가서 자세한 상황을 물어봤다.
“뭔가 접촉이 있었냐고요? 아뇨. 전혀 없었어요.”
“보복 행위는 없었다 이거군.”
“보복이고 뭐고 쓰러진 녀석이 계속 덤벼드는 동안, 저 친구는 피하기만 했어요.”
부심의 이야기를 들은 심판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곧바로 다친 선수를 내보내고 경기를 이어 갈 것을 지시했다.
“아, 이거 망했다.”
“지안카를로 이 멍청한 자식! 다칠 거면 같이 다쳐야지!”
망연자실하거나 분통을 터트리는 관중들.
필드에 있는 AC 밀란 선수들은 그들보다 더욱 표정이 어두워졌다.
아직 동점 골도 넣지 못했는데, 공격수 한 명이 빠지다니!
“이렇게 된 이상 저 영국 놈들도 한 명 내보내게 만들어야 해!”
“발을 밟든, 발목을 걷어차 버리면…….”
노매너 파이터들이 여전히 암살(?) 행위를 포기하지 못하자, 말디니가 버럭 호통을 날렸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마! 10명이 아니라 9명이 경기를 하게 만들 셈이야?”
“하지만 이대로 아무것도 안 하면 우리가 불리…….”
“시끄러. 아무것도 하지 마! 축구장에선 축구나 하라고!”
상대를 거칠게 다루면 주눅이 들어 플레이가 위축되기 마련.
그건 맞지만, 그런 거친 마크에도 정도가 있는 법이다.
도를 지나치게 되면 시합은 안중에 없고 완전히 난장판으로 변해 버린다.
이겨도 좋은 소리를 듣지 못하는 건 물론이고.
“젠장, 아무것도 안 하고 어떻게 이기자는 거야?”
“신경 쓰지 마. 우리 방식대로 하자고.”
잠시 중단되었던 경기는 재개되었다.
말디니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그의 말을 흘려버린 녀석들은 계속해서 맨유 선수들에게 위협적인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
높은 태클이라든지, 발등 밟기, 팔꿈치 치기나 잡아채 쓰러트리기 등등.
하지만 그건 오히려 화를 자초하는 짓이었다.
쓸데없는 파울로 겨우 얻어 낸 공격 기회를 날려 버리거나, 위험 지역에서 상대에게 기회를 내준 것이다.
거기다 맨유 선수들이라고 얌전히, 신사답게 행동하지는 않았다.
“이거 놔! 저 쓰레기 자식, 당장 태워 버릴 테니까!”
“참아, 데니스! 진정하라고!”
“심판은 뭐 하는 겁니까. 저런 개자식은 당장 퇴장시키라고요!”
보복 행위까지는 아니지만, 거칠게 항의하고 금방이라도 싸울 것처럼 욕설을 퍼부어 댔다.
한편으론 자신만의 방식으로 앙갚음하는 선수들도 있었다.
“으으윽… 틀렸어. 난 더 이상…….”
“안 돼요, 숀. 힘을 내라고요!”
진짜 못 일어날 정도는 아니지만, 일어나기 힘든 척.
할리우드 액션에 더해진 과학적인 침대 축구는 어김없이 경기 흐름을 끊어 버렸다.
항의와 엄살.
이 두 가지 방식의 공통점은 쓸데없이 시간을 잡아먹는다는 것이다.
물론 리드해 가는 맨유 입장에선 쓸데없는 게 아니라 유용한 대응이었지만.
“휴우, 내 이럴 줄 알았지!”
경기는 안 풀리고, 쓸데없이 시간만 흘러가자 말디니는 속이 터질 지경이었다.
더 답답한 건 원인을 자기 팀 선수들이 제공했으니, 뭐라고 하기도 힘들다는 점.
‘아무튼 이 위기를 잘 넘겨야 해.’
방금 전 자니에르가 파울성 태클로 숀 코너리를 쓰러트리는 바람에 맨유는 프리킥 찬스를 얻었다.
물론 AC 밀란 입장에선 위기 상황이었다.
맨유에는 엄청난 정확성과 위력을 가진 키커가 있으니까.
“자, 이걸 어떻게 처리할까?”
공 앞에 선 준영은 생각에 잠겼다.
무회전으로 강력하게 찰지, 아니면 감아서 구석을 노릴지.
아니면 쇄도하는 동료를 노려 패스나 크로스를 넣는 것도 괜찮으리라.
“저 자식들 거시기를 겨냥하는 건 어때? 한 놈 더 골로 보내 버리는 거야!”
“오, 그것도 좋은 방법이군요.”
빌 포크스의 제안에 준영은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벽을 선 밀란 선수들은 두 사람의 말을 알아듣진 못했다.
하지만 무엇을 의도하는지는 냉큼 눈치채고는 곧장 두 손으로 국부를 가렸다.
“어쩔꼬, 어찌할꼬…….”
느긋하게 생각에 잠긴 준영을 향해 야유가 쏟아졌다.
“우- 우우-!”
“빨리 차라, 원숭아!”
“시간 낭비 하지 마!”
짜증이 난 관중들은 경기장에 깡통과 음식물을 집어 던졌다.
당연하지만 그 바람에 다시 경기는 중단.
경찰과 경기장 관리요원들이 관중들을 진정시키는 사이, 준영과 빌은 어떤 팔 힘이 센 관중이 던져 준(?) 오렌지를 주워서 느긋하게 까먹었다.
“너무 시큼하군요.”
“맛있는 걸 버리진 않을 거 아냐.”
“하긴, 그것도 그렇겠네요.”
장내가 정리된 후, 심판은 준영에게 다가와 구두 경고를 했다.
계속 시간을 지연시키면 퇴장당할 수 있다고.
정중히 허리를 굽혀 사과한 준영은 심판이 휘슬을 불자, 곧장 프리킥을 찼다.
직접 슈팅이 아닌 쇄도하는 동료를 노리고 찔러 준 패스.
분명히 슛을 갈길 거라 여기고 대응하던 AC 밀란 입장에선 완전히 허를 찔렸다.
“나이스 패스, 주장!”
마침 공 가는 쪽으로 케니 모건스가 딱 맞게 달려 들어갔다.
그는 곧장 다이렉트 슛을 시도했다.
그런데 바로 그 직전, 말디니가 번개 같은 태클로 먼저 공을 걷어 냈다.
‘어?’
공이 없는 상황.
브레이크를 걸지 못한 케니의 킥이 말디니의 뒤통수를 그대로 걷어찼다!
“아악!”
머리를 움켜쥐고 쓰러진 말디니.
낯빛이 하얗게 변한 케니는 열심히 손을 내저었다.
“앗! 으아아아! 이, 이건 고의가 아닌데…….”
삐익-!
심판은 주저 없이 그에게 퇴장을 명령했다.
안 그래도 과열된 경기이다 보니, 고의성이 없더라도 그냥 내버려 둘 수 없었다.
“크윽! 왜 나한테 화풀이야!”
말디니는 정말 억울했다.
제멋대로 날뛰는 망나니들을 어떻게든 말리려 애썼다.
그런데 왜 망나니들이 아니라 지신이 얻어맞게 된 건지!
준영 또한 황당함을 금치 못했다.
방금 전 상황은 44년 후, 파울로 말디니가 당한 상황과 거의 똑같았으니까.
‘이 무슨 얄궂은 운명이람.’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
역사를 비튼 한국인 때문일까? 그 때문에 말디니는 아들이 겪을 수모를 자신이 당하게 된 것인지?
‘아무튼 다시 10 대 10이군.’
맨유도 한 명 내보내자는 노매너 망나니들의 바람은 엉뚱하게 이루어졌다.
하지만 그것으로 AC 밀란이 유리해졌다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여전히 점수는 1 대 0.
쓸데없이 시간이 축난 덕분에 후반전 정규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
스코어보드의 시계는 이미 5분 전에 멈췄다.
그러나 경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워낙에 이리저리 지연된 상황들이 있다 보니 심판이 추가 시간을 넉넉하게 주었기 때문.
“이거 언제 끝나는 거야?”
“한 5~6분 정도 더 있다 끝날 것 같네요.”
준영도 단지 추정을 했을 뿐이다.
지금은 정확하게 추가 시간을 몇 분 준다고 정하는 시대가 아니니까.
분명한 건 승리가 코앞까지 왔다는 것이다.
정규 시간뿐만 아니라 추가 시간에도 AC 밀란은 동점 골 획득에 실패했다.
갑자기 공격수들이 호나우두나 메시급으로 각성하지 않는 이상, 경기를 뒤집기는 힘들어 보였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실망한 관중들이 산 시로를 떠나고 있었다.
“우린 안 될 거야. 아마…….”
“멍청한 놈들, 쫄딱 망한 팀도 못 잡다니!”
“저런 놈들 승리에 걸었다니, 내가 바보지!”
이렇게 떠나는 관중들도 있었지만, 기적을 바라며 남아 있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러나 현실은 냉혹했다.
과감하게 공격에 나선 말디니의 중거리 슛이 해리 그렉의 품에 안기는 것을 마지막으로 경기 종료를 알리는 휘슬이 길게 울렸다.
“이겼다! 결승 진출이야!”
“맙소사, 정말 우리가 해낸 거 맞아?”
“왜? 꼬집어 줄까, 데니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선수들이 환희와 감격에 흠뻑 젖어 있을 때.
홈에서도 일격을 당한 AC 밀란 선수들은 망연자실하여 주저앉아 버렸다.
풀이 죽은 것은 체사레 말디니도 마찬가지.
팀의 망나니들이 하라는 축구는 안 하고 격투기를 할 때 예감은 했지만, 이런 쓰디쓴 결과를 맞이할 줄이야!
‘꿈에선 4 대 0 대승으로 이겼는데… 개꿈이었던가.’
길게 한숨을 내쉬는 그에게 준영이 다가와 말을 건넸다.
“머리는 괜찮습니까?”
“이제부터 아파 오려 하는군요.”
씁쓸한 표정을 짓던 그에게 준영은 자신의 유니폼을 건넸다.
무슨 의미인지 이해한 말디니도 곧장 자신의 유니폼을 벗어 준영에게 주었다.
“결승 진출 축하합니다.”
“고마워요. 우리가 운이 따랐던 것 같네요.”
준영과 악수를 나눈 말디니는 충고하듯이 말했다.
“레알 마드리드는 강합니다. 우리 팀보다 훨씬.”
“알고 있습니다. 항상 강자로 꼽히는 팀이니까.”
21세기에도 레알 마드리드는 신계 팀.
하지만 준영은 겁나지 않았다.
21세기에 이미 그들의 챔피언스리그 3연패를 좌절시킨 경험이 있으니까.
분명 힘든 경기가 되겠지만, 그만큼 흥미진진한 경기가 될 것 같았다.
“그쪽 몫까지 열심히 뛸게요. 아 참, 그리고…….”
뭔가 잊은 것이 떠올랐다는 듯, 준영은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알파 로메오 줄리에타 스파이더, 잘 받아 가겠습니다.”
“아, 그건…….”
이 존 Y. 리란 녀석은 진심으로 자신의 애마를 받아 갈 기세였다.
그냥 농담이었다고, 경기를 흥미진진하게 할 의도였다고 하고 내기를 없던 걸로 하면 안 되나.
그러나 남자가 자존심이 있지, 어떻게 그런 비굴한 말을 내뱉겠는가!
‘후후후, 말디니와의 대결에서 얻은 전리품을 놓칠 수 없지!’
흐뭇한 미소를 짓는 준영과 달리, 말디니는 뼈아픈 타격에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제길, 이게 다 지안카를로와 그 망나니 자식들 탓이다!’
정말이지 오늘 경기는 평생 잊히지 않을 것 같았다.
***
스페인 마드리드.
도시 북쪽의 파세오 데 라 카스테야나의 훈련장에서 한 무리의 선수들이 구슬땀을 흘리고 있었다.
이들은 최근 프리메라 디비시온(* Primera División, 현재 La Liga) 2연패를 달성한 챔피언, 레알 마드리드.
5월 18일 시작되는 코파 델 레이, 스페인의 FA컵 대회를 준비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만! 수고했다. 오늘 훈련은 여기까지!”
감독 루이스 카르니글리아는 훈련 종료 후, 선수들을 정렬시켜 놓고 방금 들어온 뉴스를 전했다.
“유러피언 컵 결승 상대가 정해졌다. 영국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다.”
“예? 맨체스터라고요?”
레알 선수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맨유라면 비행기 사고로 전력이 풍비박산이 난 팀이 아닌가.
어찌나 딱한 형편이 되었는지, 구단에서 푸스카스를 임대해 주겠다는 제안까지 했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런 팀이 AC 밀란을 꺾고 결승에 올라왔다고?
“거참, 도대체 무슨 마법이 일어난 거죠?”
프랑스 출신의 미드필더 레몽 코파의 물음에 카르니글리아 감독이 가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키 큰 동양인에게 당했다더군. 1, 2차전 전부 그놈이 공격 포인트를 기록했대.”
“동양인이요?”
어리둥절해하는 레몽 코파와 달리, 그 동양인의 정체를 아는 선수가 있었다.
“존 Y. 리로군. 지금 맨체스터에서 마법을 부릴 놈은 그 녀석뿐이지.”
아직 만나지도 않은 상대를 알고 있는 남자.
그는 바로 현재 레알 마드리드를 대표하는 완전무결한 플레이어,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였다.
***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1957, 1959년 발롱도르 수상.
프리메라 디비시온 4연속 득점왕.
레알 마드리드 282경기 227골.
아르헨티나, 콜롬비아, 스페인 3개국 국가대표 역임.
유러피언 컵 5연패 달성 등등.
이 사람, 1940~60년대를 주름잡은 당대 축구의 신입니다. 아직 풋내기라 할 수 있는 펠레에 비하면 진짜 끝판왕이라 할 수 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