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144. 노매너 파이트
“이, 이런!”
“누가 저놈을 막아!”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상황.
비호같이 쇄도한 준영은 순식간에 골키퍼와 일대일의 상황을 만들었다.
뒤늦게 따라붙었던 말디니는 황급히 준영의 유니폼을 잡아챘다.
찌지직-
유니폼이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벌렁 자빠졌지만, 그 상황에서도 준영은 슈팅을 날렸다.
각을 좁히고 나온 로렌초가 막아섰지만, 이미 공은 그의 등 뒤로 굴러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대로 골라인을 넘어 그물 속에 파묻혔다.
“들어갔다아-!”
“하하핫! 역시 우리 마법사 리틀 존! 한 건 해 줄 줄 알았어!”
산 시로가 삽시간에 적막에 잠긴 상황에서 맨유 선수들은 준영과 엉겨서 골 셀레브레이션을 즐겼다.
1 대 0, 합산 스코어는 3 대 1.
아직 시간이 남아 있다곤 하지만, 불의의 일격을 맞은 AC 밀란 입장에선 당황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또 저 중국 놈에게 당했군.”
“한국 놈이래.”
“젠장, 그게 무슨 상관이야. 아무튼 우린 또 당한 거라고! 그것도 세 번이나!”
1차전에서도 놈은 2골을 어시스트했다.
그리고 2차전에선 아예 직접 골을 넣기까지!
“그냥 내버려 둬선 안 돼. 쓴맛을 보여 주고 필드에서 끌어내야지!”
“제정신이야? 저 덩치에게 싸움을 걸겠다고?”
“크든 작든 맞으면 뻗기 마련이야!”
찬물, 더운물 가릴 상황이 아니다.
AC 밀란의 일부 선수들이 살벌한 논의를 하고 있는 가운데, 준영은 알베르트 심판의 호출을 받았다.
“왜 그러십니까?”
“유니폼. 그대로는 안 돼.”
심판은 짤막한 영어로 말하면서 보디랭귀지를 보탰다.
찢어진 유니폼을 입고 경기를 하기는 좀 그러니 대충 수선이라도 하고 오라는 것.
‘그러고 보니 심하게 찢어졌구나.’
득점 상황에서 말디니가 얼마나 당황했는지 알 수 있었다.
일단 필드 밖으로 나온 준영은 오늘 선발에서 제외되어 관전을 하고 있던 존 레논에게 말했다.
“라커룸에 가면 내 가방에 예비 유니폼이 있을 거야. 얼른 가서 가져와.”
“알겠어요.”
레논은 부리나케 라커룸으로 달려갔다.
21세기라면 벤치에 이미 준비되어 있을 테지만, 교체 규정도 없는 이 시대에는 벤치조차 없었다.
‘그나저나 천하의 존 레논을 부려 먹다니. 나중에 열성 팬들이 날 잡아먹으려 들겠구만.’
역사가 바뀐 상황에서 레논이 가수로 성공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도 없지만.
아무튼 라커룸에 부리나케 다녀왔던 레논은 준영에게 예비 유니폼을 건네줬다.
“수고했어.”
“예, 주장. 꼭 이겨요!”
레논이 돌아간 사이, 준영은 곧장 찢어진 유니폼을 벗어 던지고 예비 유니폼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다시 필드로 들어갈 준비를 했다.
‘몇 분 안 지났지만, 나 없이도 잘 버티고 있군.’
공격수인 숀이나 데니스도 내려와서 수비를 거들어 주고 있었다.
그만큼 다들 오늘 경기를 놓치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근데 왜 심판은 들어오라는 사인을 안 보내 주지?’
준영이 어리둥절해할 때, 선심이 그에게 말을 건넸다.
“뭐 해? 경기 안 뛸 건가?”
“심판의 사인이 있어야 들어가죠.”
당연하다는 듯한 준영의 표정에 선심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허, 그건 어느 나라 축구 규칙이야? 괜찮으니까 얼른 들어가 봐. 동료들이 기다리고 있잖아.”
21세기 축구 규정입니다.
속으로 대꾸한 준영은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필드 안으로 들어갔다.
이 시대 축구에 대해서 많이 이해했다고 생각했지만, 아직 부족한 점이 있는 것 같았다.
***
선제골을 내준 AC 밀란은 총공세를 펼치며 동점 골 사냥에 나섰다.
특히 리베로인 체사레 말디니는 적극적으로 전진해서 맨유의 공격 패스를 차단하고 동료들에게 공격 찬스를 만들어 주었다.
“좋았어! 거기서 때려!”
“악, 그걸 왜 또 띄우는 거야!”
팬들의 질책 어린 응원이 이어지는 가운데, AC 밀란은 좋은 기회들을 연거푸 만들어 냈다.
전반 23분, 닐스 리드홀름이 찔러 준 패스를 받은 스키아피노가 슛을 날렸지만, 해리 그렉의 양손에 잡혔다.
4분 후에는 말디니의 긴 롱 패스가 맨유 페널티 박스로 들어간 쿠치아로니에게 연결되었다.
그러나 쿠치아로니의 논스톱 슛은 공 밑쪽을 차는 바람에 홈런 볼이 되고 말았다.
31분에는 자니에르의 패스가 지안카를로에게 전달되었지만, 볼 컨트롤 실수로 아쉽게 라인 밖으로 나갔다.
이렇게 연거푸 좋은 찬스들이 무산되자, AC 밀란 선수들의 마음은 점점 급해졌다.
전반전이 끝나기 전에는 동점 골을 넣고 싶건만, 그게 쉽게 되지 않았다.
마음이 급해지자 패스도, 돌파도 빨라지고 그만큼 급해졌다.
당연히 맨유 입장에선 대응하기 편했다.
준영이 아니라 다른 선수들도 AC 밀란의 공격을 쉽게 차단할 수 있을 정도.
“후후후, 이 녀석들, 창끝이 무뎌졌구만.”
“이러면 후반전도 볼 거 없겠는데요?”
전반 막바지로 가는 가운데, 맨유 선수들의 얼굴에는 자신감과 함께 여유가 떠올랐다.
이에 반해 마음이 급해졌던 밀란 쪽은 점점 짜증이 늘어났다.
그 짜증은 선제골의 주인공에게로 향했다.
“퉤!”
‘아니, 저 썅노무 시키가!’
준영과의 몸싸움에서 밀린 지안카를로가 침을 탁 뱉고 갔다.
순식간에 혈압이 오른 준영이 쏘아붙이려는 순간, 심판이 휘슬을 불고 다가와 지안카를로에게 구두 경고를 하고 갔다.
그의 더티 플레이를 봤던 것이다.
‘꽤 거리가 멀었는데, 그걸 알아보다니!’
어쩌면 데니스 바이올렛의 논란 있는 슛도 제대로 본 것일지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뭐, 그건 그거고. 지금은 이 치졸한 수작을 어떻게 할지 생각해 봐야겠군.’
지안카를로가 침을 뱉은 것을 시작으로 몇몇 선수들, 특히 이탈리아 출신 선수들이 계속 시비를 걸어 댔다.
일부러 툭 치고 간다든가, 역습을 막겠답시고 높은 태클을 날린다든가.
심지어…
“우왓! 뭐 하는 짓이야!”
헤딩을 하려는 순간에 상대가 거침없이 발을 들어 올렸다.
하마터면 머리가 찍힐 뻔한 준영은 버럭 소리를 내지르고 말았다.
“미쳤냐, 이 파스타 새끼야! 사람 잡으려고 작정했어!”
“Ma vaffanculo!”
“뭐라고? 야! 내가 못 알아들을 줄 알았냐, 이 Minchione!”
준영에게 욕설을 날리고 가던 자니에르는 방금 준영이 날린 단어에 발끈하며 도로 달려들었다.
아니, 달려들려고 했다.
“뭐 하는 거야. 그만둬!”
말디니가 만류하고, 심판도 달려와서 준영과 자니에르 둘에게 구두 경고를 건넸다.
상황이 진정되자, 빌 포크스는 준영에게 물음을 건넸다.
“너 이탈리아 말도 할 줄 아냐?”
“욕만 알아요.”
21세기 AS 모나코 팀에 있을 때 배웠다.
당시 팀에 이탈리아 선수들도 2명 있었고, 모나코 바로 코앞이 이탈리아이다 보니 거리나 해변에서 이탈리아인들과 종종 마주치곤 했다.
보통은 소 닭 보듯이 지나치지만, 개중에 꼭 이상한 놈들이 있기 마련.
그런 놈들과 시비가 붙으면 서로 전통 있는 욕설을 주고받으며 익히곤 했다.
“아무튼 조심해. 저 녀석들, 작정하고 널 노리는 것 같더라.”
“알아요. 물귀신 작전에 당하진 않을 겁니다.”
실력으로 안 된다 싶으면 대놓고 상대 선수를 담그거나, 퇴장을 유도시키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이런 파이트에서 이탈리아는 꽤 유명했다.
그들은 과거 영국에서 하이버리 전투를 벌였으며, 1962년 월드컵에서는 개최국 칠레를 상대로 산티아고 전투를 벌인 노매너 파이터들이다.
21세기가 되어도 딱히 달라지진 않았다.
2002년 대전에서 벌어진 한국과 이탈리아의 16강전에서도 엘보가 난무했으니까.
‘그러다 저기 있는 말디니의 아들이 뒤통수를 차이는 수모를 겪었지.’
아무튼 준영은 절대 상대의 도발에 넘어가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살인 태클 같은 악질적인 보복에도 조심해야 하는 건 물론이었다.
***
전반전은 0 대 1로, 예상 밖으로 원정 팀 맨유가 앞선 상태로 끝났다.
현재 합산 스코어는 맨유가 3, AC 밀란이 1.
남은 후반전에 밀란이 전환을 일궈 내지 않으면 결승행은 맨유의 것이 될 것이다.
물론 이 점은 AC 밀란 선수들이 제일 잘 알고 있었다.
삐익-!
후반전 시작을 알리는 휘슬이 울리기 무섭게, 밀란은 골 사냥에 나섰다.
로니 코프가 발밑에 두고 있던 공을 가로채서는 곧장 최전방의 스키아피노 쪽으로 찔러 주었다.
총알같이 맨유 골문 앞으로 쇄도했던 스키아피노는 패스의 궤적만 살짝 비트는 절묘한 슛을 날렸다.
“또 속을 것 같냐!”
1차전 때 허용한 스키아피노의 선제골과 같은 패턴의 슛.
해리 그렉은 바로 몸을 날려 공을 쳐 냈다.
그리고 이어지는 코너킥.
준영 때문에 공중전은 승산이 없다고 봤던지, 밀란은 낮고 빠른 코너킥을 보냈다.
그것도 박스 외곽 쪽으로.
‘밖에서 때려 넣으시겠다? 그치만 쉽지 않을걸?’
준영의 장담대로 공이 밖으로 흐르자, 바비 찰튼이 곧장 튀어나와 공을 걷어 내려 했다.
그런데 살짝 늦게 쇄도했던 알피오 폰타나가 그에게 태클을 날렸다.
“위험해, 피해!”
화들짝 놀란 바비 찰튼은 점프를 해서 태클을 피하려 했다.
공중에서 중심을 잡지 못한 그는 그대로 빙글 돌면서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바비!”
“이 자식, 사람 잡으려고 작정했어!”
맨유 선수들의 거센 항의에 경기는 다시 한 번 중단되었다.
바비는 충격으로 인상을 찡그리긴 했지만, 다행히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
심판은 누가 봐도 화난 표정으로 폰타나에게 경고를 보냈다.
다음에 또 그러면 그땐 퇴장시키겠다고.
21세기로 치자면 옐로카드를 받은 셈이지만, 폰타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대로 지면 그대로 끝이니까.
‘이놈들, 본격적으로 전투를 시작할 모양이군.’
준영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초반 스키아피노의 기습 공격마저 실패하자, 노매너 파이터들은 점점 거칠게 나오기 시작했다.
공을 몰고 온다 싶으면 태클을 날려 대고, 점프나 몸싸움에서도 팔꿈치를 위협적으로 들이댔다.
‘역시, 개가 똥을 끊지.’
유구한 전통을 이어 온 필드 파이터들의 본성은 어디 가지 않았다.
가장 거칠게 날뛰는 건 공격수 지안카를로.
그는 돌파 중에 준영에게 인터셉트를 당하자, 곧장 유니폼을 잡아당겼다.
준영이 이를 뿌리치자, 이번엔 스터드를 내밀며 정강이를 걷어차려 했다.
‘어쭈, 해보자 이거야?’
돌려차기 한 방이면 골로 갈 녀석이 까불다니.
그렇다고 폭력으로 대응할 순 없는 법.
축구 경기 중에는 축구로 대응을 해 줘야 한다.
“덤벼. 어디 한번 빼앗아 보시지?”
준영은 경기 전에 선보였던 리프팅 기술로 지안카를로의 약을 살살 올렸다.
그때 뒤쪽에서 쿠치아로니가 슬쩍 달려들었지만, 드래그 백으로 가볍게 피해 냈다.
“나서지 마! 저 마늘내 나는 원숭이는 내가 처리할 테니까!”
지안카를로는 마치 약을 올리듯이 공을 갖고 빠져나가는 준영을 쫓아갔다.
무릎이든 발목이든 걸리면 작살내 주겠다고 다짐하면서.
“잡았…….”
갑자기 방향을 바꾼 준영을 쫓아가려고 몸을 돌리던 지안카를로.
우득-!
무릎에서 들리는 불길한 소음과 함께 그의 몸이 무너져 내렸다.
***
‘칼치오 스트리코’라고 하는 이탈리아 전통 축구(?)입니다.
현대 축구보다 럭비에 더 가까운 경기인데, 치고받는 건 예사라 했다 하면 유혈이 낭자하곤 합니다.
이런 거 보면 이탈리아 축구가 괜히 거친 게 아니구나 싶지요.
저게 무슨 축구냐 싶지만, 원래 축구와 럭비도 같은 뿌리에서 나왔습니다.
손 쓰지 말고 하자며 나온 게 현대의 축구죠.
인원도 60명(!)씩 동원하다가 양 팀 합쳐 22명으로 고정되는 등, 차근차근 룰이 만들어져 현대의 축구가 나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