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142. 산 시로에서 격돌
“정말이지… 1차전을 끝낸 그날 밤엔 잠이 들지도 못했죠.”
레전드가 잠을 설치게 만들었을 줄이야.
준영은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패배한 게 분했던 거군요.”
“그도 그렇지만, 궁금했습니다. 도대체 어디서 이 낯선 선수가 갑자기 나타났을까 하고 말이죠.”
말디니의 고향 트리에스테는 외국인의 왕래가 잦은 항구 도시였다.
하지만 동양인을 직접 본 건 지난 5월 8일이 처음이었다.
거기다 지금까지 이야기로 듣던 동양인에 대한 이미지와도 영 딴판.
실력도 현재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지탱하고 이끌어 가는 수준이었다.
“제 출신이나 등장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하고 있는 것이긴 하죠. 그래서 말디니 선수의 반응이 새삼스럽진 않네요.”
준영의 말에 말디니의 표정이 굳었다.
마치 ‘너도 다른 선수들과 별반 차이가 없더라.’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렸기에.
이탈리아 최강의 팀, 리그 최고의 리베로라 자처하는 말디니 입장에선 자존심 상하는 발언이었다.
이미 1차전에서 패했기에 굴욕감은 더욱 컸다.
그렇기에 그냥 물러서고 싶지 않았다.
“내 반응이 새삼스럽지 않다면, 새삼스럽게 느끼게끔 만들어 줘야겠군요.”
“어떻게 말입니까? 나나 우리 팀을 박살 내 보시겠다?”
준영의 물음에 말디니는 가늘게 웃음 지었다.
그 미소에서는 점잖은 신사의 면모가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먹잇감을 노려보는 사자처럼 사나워 보였다.
그 모습을 태연히 바라보던 준영이 말했다.
“그런 말을 들으니 그냥 있을 수 없군요. 우리 한 가지 내기를 해 보는 게 어떻습니까?”
“내기요?”
“그래요. 혹시 차를 갖고 있습니까?”
준영의 물음에 말디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줄리에타 스파이더를 한 대 갖고 있습니다. 작년에 우승하고 알파 로메오 사에서 선물로 받았죠.”
“제법 좋은 차를 갖고 있군요. 나도 라곤다 3리터를 갖고 있어요. 그러니까…….”
준영은 품에 있던 차 키를 꺼내 놓으며 말했다.
“2차전에 각자 애마를 겁시다. 이긴 사람이 상대의 애마를 가지는 거죠. 그럼 새삼스럽게 느껴질 거라고 봅니다.”
쫄리면 뒤지시든지.
그러나 괜히 레전드가 아닌지, 말디니 역시 보란 듯이 차 키를 꺼내 놓았다.
“좋습니다. 반드시 새삼스럽게, 그리고 후회하게 만들어 주겠습니다.”
“자신만만하군요.”
“그야 우리 안마당, 산 시로에서 싸우는 거니까.”
말디니의 자신감에 준영은 가늘게 웃음 지었다.
분명히 어려운 시합이 될 것이다.
하지만 뚜껑을 열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모르는 법이다.
‘한 가지는 알고 있지. 산 시로가 무패의 성지는 아니란 걸 말이야.’
2017년, 이탈리아가 홈에서 월드컵 예선 탈락의 아픔을 맛본 곳이 산 시로다.
60년 정도 이르긴 하지만, 준영은 그 쓴맛을 AC 밀란도 꼭 맛보게 해 주고 싶었다.
왜냐하면 AC 밀란과 악연이 있었으니까.
‘미래에서 벌어진 일이지만, 날 영입하기로 해 놓고 팽개친 일은 잊을 수가 없어.’
덕분에 동경하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그것도 70여 년 전의 과거로 오게 되었다.
그 은혜(?)는 톡톡히 갚아 주리라 마음먹었다.
***
1958년 5월 14일.
밀라노 서쪽에 자리한 이 경기장을 본 맨유 선수들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저렇게 생긴 경기장은 난생처음 봐.”
“마치 외벽이 나사 홈을 파 놓은 것같이 생겼잖아.”
“어쨌거나 굉장히 커! 웸블리랑 견줄 수 있을 정도로!”
실제로 가이드에게 들으니, 원래 15만 명까지 들어갈 수 있게 설계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실제론 10만 언저리로 수용 가능하게 바뀌었다고.
“아무튼 명심할 것은 저 안에 들어찰 관중들은 대부분 AC 밀란 팬이라는 거지.”
그렇게 말한 지미 머피 코치는 선수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다고 주눅 드는 바보는 없지. 안 그래?”
“물론이죠!”
“스파게티 녀석들 콧대를 또 한 번 납작하게 해 주자고요!”
사기는 충천.
적당히 흥분하는 선수는 있어도, 지나치게 긴장하거나 겁먹은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미 홈에서 이겨 봤기 때문인지, 여유가 있었던 것.
머피 코치에 이어 준영이 선수들에게 말했다.
“결승전에 저승사자 군단이 기다리고 있을 거야.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가 보자!”
“좋지! 승리를 위하여!”
“유나이티드가 최고다!”
준영의 독려에 저마다 함성을 내지른 선수들은 버스에서 내려 산 시로로 들어갔다.
그리고 경기가 시작되기 직전까지 충분히 몸을 예열시켜 두었다.
“와, 이제 본격적으로 들어오는구나.”
“관중이 몇 명이나 되는 것 같아?”
“한 7∼8만 정도 되지 않을까 싶은데?”
준영과 맨유 선수들이 관중석에 차곡차곡 쌓이는 인파를 보고 있을 때, 갑자기 큰 함성이 일어났다.
몸을 풀던 AC 밀란의 공격수가 아주 절묘한 리프팅 기술을 보여 주고 있었던 것.
그 광경을 본 밀란의 홈 관중들은 박수를 치며 찬사를 보냈다.
“저놈, 1차전에도 나온 녀석이지?”
“이름이 에르네스 뭐시기라던 아르헨티나 녀석이었지.”
“발재간이 제법이군.”
준영이 보기에도 탄성이 나올 정도로 에르네스토 쿠치아로니의 공 다루는 기술은 빼어났다.
보란 듯이 자신의 발재간을 보여 준 쿠치아로니는 맨유 선수들 쪽으로 공을 보냈다.
마치 너희도 할 수 있으면 해 보라는 듯이.
“건방진 자식!”
“1차전에서 잘하지도 못한 주제에 까불고 있구만.”
“똥개도 자기 집에서는 유세한다더니, 딱 그 짝이구만.”
맨유 선수들이 쿠치아로니를 째려보고 있을 때, 준영이 공 앞으로 다가갔다.
발끝으로 가볍게 공을 튕겨 올린 그는 좀 전에 쿠치아로니가 했던 것처럼 리프팅을 선보였다.
“와, 저것 좀 봐!”
“저 중국 놈 발재간도 장난이 아닌데?”
좀 전에 쿠치아로니의 리프팅을 보며 환호하던 관중들은 준영의 테크닉에 시선이 사로잡혔다.
보란 듯이 아까 쿠치아로니가 했던 리프팅을 고스란히 따라 하는 것은 물론, 훨씬 더 템포가 빨랐다.
그뿐만 아니라, 이후에는 한 번도 보지 못한 재주까지 보여 주었다.
“공이 몸에서 전혀 떨어지지 않는데?”
“공이랑 춤을 추는 것 같아.”
“세상에, 서커스단 광대도 울고 가겠군.”
발뒤축에 공을 붙인 상태로 돌거나, 주저앉았다가 한쪽 팔로 물구나무서기를 하다 잽싸게 회전하면서 공중에서 공을 튕기거나.
몇 가지 비보이 기술이 가미된 21세기 프리스타일 사커에 다들 입을 다물지 못했다.
“잘한다, 리틀 존!”
“거기서 돌고, 그렇지!”
주변에 있던 맨유 선수들은 박수를 치며 준영이 선보이는 쇼에 호응했다.
그들은 종종 준영의 프리스타일 사커를 봤기 때문에 결코 낯설지 않았다.
뻐엉-!
한동안 준영과 춤을 추던 공은 수직으로 높게 솟구쳐 올랐다.
공중에 높게 떠올랐던 공은 준영의 발등에 조금도 튕기지 않고 살포시 얹혔다가 지면에 내려앉았다.
“이 정도 답례면 충분하나?”
준영은 다시 공을 쿠치아로니에게 차 보냈다.
하지만 쿠치아로니도, 멍하니 넋이 빠져 버린 다른 AC 밀란 선수들도 그 공을 잡아채지 못했다.
본 시합 전에 벌어진 서전은 누가 봐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승리로 끝났다.
***
몸풀기를 끝내고 라커룸으로 돌아갔던 선수들은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다시 필드로 나왔다.
검고 붉은 줄무늬는 홈팀 AC 밀란.
그들에게 맞서는 맨유는 하얀색 원정 저지를 걸쳤다.
동전 던지기로 진영을 정한 양 팀은 독일인 주심의 킥오프 휘슬에 맞춰 경기를 시작했다.
“자, 앞으로 90분 동안 이 꽉 물고 뛰어!”
“Yes, Sir!”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골키퍼에는 해리 그렉, 그리고 수비수로는 빌 포크스와 이안 그리브스, 그리고 중앙에 주장인 이준영이 자리를 잡았다.
하프백으론 로니 코프와 바비 찰튼이, 좌우 측면에는 발 빠른 케니 모건스와 프레디 굿윈이 배치되었다.
최전방에는 데니스 바이올렛, 숀 코너리, 콜린 웹스터로 구성된 3톱이 공격을 맡았다.
이에 맞서는 홈팀 AC 밀란은 쿠치아로니, 지안카를로 다노바, 그리고 페르 브레데센과 스키아피노 등, 남미와 유럽의 혼성 공격진을 내세웠다.
미드필드는 닐스 리드홀름을 필두로 루이지 자니에르, 알피오 폰타나가 맡았다.
수비에는 체사레 말디니, 루이지 라디체, 마리오 베르가마스치가 나왔다.
그리고 로렌초 부폰이 수문장으로 골대를 지켰다.
‘저 로렌초 부폰이란 녀석, 잔루이지 부폰이랑 무슨 사이려나?’
1차전에서도 출전한 이 시대의 부폰을 슬쩍 바라보았던 준영.
그는 이내 공을 가진 닐스 리드홀름에게로 시선을 두었다.
‘눈을 떼선 곤란하지. 저 아저씨도 체사레 말디니만큼 전설적인 선수니까.’
닐스 리드홀름.
50년대 그레놀리 삼총사로 명성을 떨치며 고국 스웨덴의 월드컵 준우승을 견인한 실력자다.
삼총사 중 군나르 그렌, 군나르 노르달이 떠난 후에도 AC 밀란에 남은 닐스는 36살의 노장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발끝은 날카로웠다.
독수리처럼 전방을 살피던 그는 빌 포크스의 배후로 파고들던 노르웨이 공격수 페르 브레데센의 움직임에 맞춰 패스를 밀어 주었다.
‘날카롭긴 하지만 조금 길어.’
준영의 예상대로 그 패스는 전진해 온 해리 그렉이 먼저 잡아챘다.
그 과정에서 살짝 충돌이 있었지만 해리도, 페르 브레데센도 별다른 타격이 없었던지 금방 일어나 경기를 이어 갔다.
해리가 길게 찬 공은 곧장 최전방의 숀 코너리에게 떨어졌다.
가슴으로 공을 받아 낸 숀은 좌로 도는 척하다 반대편으로 돌아서 알피오 폰타나의 마크를 뿌리쳤다.
그러고는 마리오 베르가마스치의 차징마저 흘려 내 버리고는 AC 밀란 박스 안으로 들어갔다.
“헉, 위험하잖아!”
“얼른 막아야……!”
우려하던 홈팬들은 숀의 슈팅이 말디니의 태클을 맞고 라인 밖으로 나가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비행기 사고로 쫄딱 망한 팀인 줄 알았는데…….”
“젠장, 정신 차려! 홈에서도 질 거냐?”
질책 어린 관중들의 응원이 사납게 터져 나왔다.
그들은 코너킥 공격에 가담하러 준영이 박스 안으로 들어오자 거센 야유를 보냈다.
“우ㅋ 우ㅋ 우키키~”
“꺼져라, 원숭이!”
“밀림으로 돌아가!”
아랑곳하지 않고 날아드는 코너킥을 주시하던 준영.
펄쩍 뛰어오른 그는 공에 이마를 살짝 갖다 대면서 방향을 틀어 놓았다.
오른쪽 상단으로 날아가는 헤딩슛.
들어간다 싶던 그 순간, 로렌초 부폰이 번개 같은 몸놀림으로 공을 쳐 냈다.
‘젠장, 역시 이름값은 하는구만.’
부폰은 역시 부폰.
1차전에서도 느꼈지만, 이 시대 부폰도 21세기의 부폰에 손색없는 실력을 자랑했다.
아무튼 중요한 건 리바운드 볼.
다행히 같은 편인 케니 모건스가 페널티 박스 밖에서 잡았다.
하지만 다소 성급했던 그의 슈팅은 장외 홈런급으로 치솟고 말았다.
“미안해요. 마지막에 몸의 중심이 뒤로 가서 그만…….”
“괜찮아. 역습만 안 내주면 되니까.”
케니의 어깨를 툭 쳐 준 준영은 재빨리 수비로 돌아갔다.
냉큼 공을 내려놓은 로렌초 부폰은 스키아피노의 앞쪽으로 정확히 롱 패스를 보냈다.
따라붙는 프레디 굿윈을 간단한 동작으로 제쳐 낸 스키아피노는 바비 찰튼과 빌 포크스의 마크마저 벗겨 냈다.
거기다 슈팅하는 척 접더니만 해리 그렉까지 따돌렸다!
‘헐!’
가슴이 철렁하는 상황에서 터진 스키아피노의 슛.
황급히 골문으로 몸을 날린 준영은 무릎으로 스키아피노의 슈팅을 막아 냈다.
그리고 뛰어드는 지안카를로에 앞서 공을 터치라인 쪽으로 멀리 걷어 냈다.
‘큰일 날 뻔했다!’
가슴을 쓸어내린 준영.
하지만 안심할 상황은 아니었다.
여전히 공은 맨유 진영에 있고, 소유권은 AC 밀란이 가졌으니까.
***
1. 스웨덴의 그레놀리 삼총사는 우리나라와도 인연이 있습니다. 1948년 런던 올림픽 축구 경기에서 만났거든요.
당시 우리나라는 12 대 0으로 대패했고, 스웨덴은 이후 결승까지 가서 금메달을 땄지요.
사진에서 제일 오른쪽에 있는 선수가 닐스 리드홀름입니다.
2. 로렌초 부폰은 실제 잔루이지 부폰의 할아버지의 사촌으로, 당시 세계에서 손꼽히는 골키퍼였습니다.
1960년대에는 레프 야신과 더불어 FIFA 올스타 스쿼드에 선정되기도 했죠.
그는 AC 밀란과 라이벌 팀인 인터밀란(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으로 이적하며 총 다섯 번의 리그 우승에 공헌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