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141. 레전드&레전드
“골키퍼까지 제치다니! 페널티킥을 저렇게 얻어 낸 거였군.”
“저 몸집에 어떻게 저런 움직임이…….”
최정민과 함흥철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미 이준영에 대한 소문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지만, 제대로 된 경기 영상을 보는 건 이번이 처음.
축구 종가 영국에서도 명성을 떨치고 있다고 들었지만, 저 정도일 줄은 몰랐다.
“그야말로 충격이란 말밖에 안 나오는군.”
“격이 다르다는 게 딱 이런 거로구만.”
일반인들의 눈에야 그저 서양인들보다 잘하는 한국인 선수 정도로 보일 뿐이지만, 선수인 그들이 보는 눈에는 또 달랐다.
체격은 접어 두더라도 발재간이나 위치 선정, 그리고 판단 능력은 필드에 뛰는 선수들 중에서도 단연 최강.
상대 팀 선수 중에서 이준영을 일대일로 막거나 제칠 수 있는 이가 없었다.
“저걸 봐. 이준영이 공을 잡으면 항상 두세 명씩 견제하고 있어.”
“사전에 그리하기로 훈련한 것처럼 말이지?”
“그렇지 않으면 자기들도 못 막는다는 걸 아는 거야.”
만약 이준영이 공격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면 볼턴은 벌써 끝장났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수비수나 하프백 중에 그의 빈자리를 메울 수 있는 이는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바비 찰튼이라는 선수가 발재간도 있구만. 많이 뛰어 주고 말이야.”
“그래도 이준영에 미치진 못해. 거기다 체격에서 오는 위압감도 부족하고.”
최정민은 한일전에서 만났던 일본 선수들의 반응을 떠올렸다.
일본 선수들은 자신이 공을 잡을 때마다 쩔쩔맸다.
체격이든, 스피드든, 개인기든, 정상적인 대응으론 비비기 힘들었으니까.
이준영은 그런 모습을 유럽 선수들이 보이게 만들었다.
그것도 콧대 높기로 유명하다는 영국인들을 상대로 말이다.
‘마치 딴 세상에서 온 녀석 같아.’
지난 스위스 월드컵에서 만났던 세계 최강 헝가리 선수들의 실력도 굉장했지만, 이준영은 그 이상으로 보였다.
공을 다루는 솜씨나 움직임이 같은 사람이라 여겨지지 않았으니까.
대체 어디서, 누구에게 축구를 배웠기에 저런 기량을 갖추게 된 것일까?
“오, 중거리 슛!”
“들어갔다아-!”
영상 마지막에 준영의 역전 골이 나오자, 극장 안에서는 환희의 함성과 함께 박수가 터져 나왔다.
“저런 녀석이 대표팀에 합류하면 정말 큰 힘이 되겠어.”
함흥철의 말에 최정민은 고개를 내저었다.
“과연 한국 선수로 뛰려고 할까? 저 정도면 당장 영국에서 노릴 것 같은데.”
“뭐 그야 그렇지만, 높으신 분들도 관심을 두고 있다고 하잖아.”
“하긴 김창룡 그 작자도 그 때문에 영국에 갔다지?”
그리고 아직도 행방이 묘연하다.
그의 실종에 대해서 특무대 선수들 누구도 염려하거나 동정하지 않았다.
김창룡은 선수를 자기 밀거래 사업의 중간 상인으로 부렸으니까.
“잘하면 아시안게임 때 차출할 수 있을 거라더니만… 지금 봐서는 영 가능성이 없는 것 같아.”
“나라가 힘이 없으면 인재를 뺏길 수밖에 없는 거지.”
당장 일제 강점기 때 베를린 올림픽 일본 축구대표로 차출된 김용식 선생만 해도 그렇다.
또 마라톤에서는 손기정이 있고.
“새미 리라고 들어 봤나? 재미 교포인데, 미국 다이빙 선수로 올림픽에 나가서 금메달을 땄지. 그것도 두 번이나.”
그와 달리 아직 한국은 금메달 하나 따내지 못했다.
“지금보다 훨씬 부강한 나라가 되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인재는 계속 남의 나라를 돋보이게 하는 장식품이나 될 거야.”
“뭐, 그런 걸 떠나서 나도 저런 큰 무대에서 경기를 해 보고 싶군.”
함흥철은 부러운 눈으로 이준영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마침내 경기가 끝나고, 이준영이 우승컵을 받기 위해 시상대에 있는 여왕의 앞으로 나가는 광경을 보았다.
그런데 이후에 기대했던 장면은 나오지 않았다.
이준영이 우승컵을 들고 보란 듯이 자랑하는 광경은 없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선수들이 서로 우승컵을 번갈아 잡아 보며 입 맞추는 모습만 나왔다.
“뭐야, 왜 주장이 우승컵을 드는 장면이 없지?”
“있었을 텐데 찍지 않거나 가위질을 한 모양이군.”
최정민은 코웃음을 쳤다.
영국인들이 어지간히 자존심이 상했던 모양이다.
아마 자기 나라의 가장 전통 있고 권위적인 축구 대회에서 이방인이 최고의 활약을 보이며 여왕에게 우승컵을 받는 상황을 용납하기 힘들었으리라.
‘세계의 벽……. 그건 단순히 실력뿐만이 아니겠군.’
문득 그런 생각이 든 최정민은 상영이 끝나자, 곧장 원대로 복귀했다.
당장 코앞으로 다가온 아시안게임에서 좋은 성적을 내기 위해서는 좀 더 연습하지 않으면 안 되니까.
***
한국인들이 뒤늦게 FA컵 결승전 영상을 보며 환호하고 있을 즈음.
준영은 이탈리아 밀라노에 와 있었다.
바로 유러피언 컵 2차전 경기를 치르기 위해서였다.
“흠, 내가 알던 밀라노랑은 다르네.”
현지에서 첫 훈련을 마치고, 동료들과 시내 관광을 하고 있었다.
“뭐가 다르다는 거야, 존?”
“그게, 도시가 내가 들었던 이미지랑은 달라요.”
21세기의 밀라노는 패션과 디자인으로 유명한 세련된 도시.
그러나 1958년의 밀라노는 금융과 유통, 자동차와 섬유, 기계 등의 제조업이 발달한 활기찬 산업 도시였다.
그래서인지 현대식 건축물이나 자동차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롬바르디아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인데, 밀라노는 그 중심이라는군.”
영국에서 챙겨 온 가이드북을 본 콜린 웹스터는 준영을 보며 피식 웃음을 지었다.
“존, 넌 밀라노를 문화재가 많은 유서 깊은 도시 정도로 알고 있었던 거지? 그렇지?”
“네, 뭐 대충은…….”
“사실 도시 이미지가 어떻든 크게 상관없어. 나한텐 예쁜 아가씨가 많은 도시가 멋진 도시야.”
그러면서 콜린은 거리에서 힐끔힐끔 자신들을 바라보는 미녀들을 보며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 점에서 밀라노는 좋은 도시 같군. 나도 윌리엄 존 찰스처럼 언제 세리에 A에서 뛰고 싶어.”
“그 사람, 콜린과 같은 웨일즈 출신이죠? 유벤투스에서 뛴다고 했던가요?”
“맞아. 굉장한 공격수야. 존 너도 붙어 보면 아마 쩔쩔맬걸?”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밀라노 대성당 앞에 도착했다.
웅장하고 화려한 고딕 스타일의 성당에 다들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근데 아직도 짓고 있네. 미완성인 건가? 아님 2차 대전 때 박살 나서 수리 중인가?’
주변을 둘러보던 준영은 아무도 안 보는 틈을 타서 스마트폰을 꺼내 잽싸게 1958년 5월의 밀라노 대성당의 풍경을 찍었다.
‘역시 이게 편하단 말이지.’
아날로그 카메라도 나름의 감성과 멋이 있지만, 사용하기 불편한 점이 있었다.
필름을 꼬박꼬박 채워 줘야 함은 물론, 동영상 촬영은 불가능하고, 크기도 컸으니까.
‘리즈도 같이 구경했으면 좋았을 텐데.’
나중에 대학 입시가 끝나고, 비시즌일 때 오붓하게 밀라노에 구경 오는 것도 괜찮을 듯싶었다.
“뭐, 일단 선물이라도 사 가지고 갈까?”
그렇지 않아도 대성당 가까이에 라 리나센테라는 백화점이 있었다.
거기서 기념품이 될 만한 것을 구하기로 마음먹은 준영은 동료들에게 말을 하고 라 리나센테로 향했다.
고대 로마 건축물을 연상시키는 아치와 하얀 외벽으로 장식된 백화점에 들어온 준영은 쇼윈도에 상품을 진열하던 젊은 직원과 부딪쳤다.
“아, 미안해요.”
“Mi dispiace.”
사과의 말을 주고받은 두 사람은 잠시 서로를 바라보았다.
준영은 직원의 명찰에 적힌 이름에 저도 모르게 눈길이 갔다.
‘조르지오 아르마니? 설마!’
이탈리아 유명 패션 브랜드 아르마니.
설마 이 백화점 직원이 그 명품 브랜드의 창업자 조르지오 아르마니란 말인가?
놀란 것은 조르지오도 마찬가지.
“당신… 존 Y. 리?”
“어, 나 알아요?”
어설픈 영어로 말을 건넨 조르지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 얼굴, 신문 나옴. 우리 팀 졌다. 2 대 1. 하지만 다음 경기 이긴다.”
‘AC 밀란 팬인가?’
뭔가 앙심을 품은 듯한 조르지오의 표정에 준영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그때, 뒤쪽에서 좀 더 유창한 영어가 들려왔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존 Y. 리 선수?”
“어, 당신은…….”
180대의 키에 점잖은 인상을 한 흑발의 신사.
하지만 필드에서는 엄청난 기량을 발휘하는 밀란의 레전드급 리베로.
“체사레 말디니 선수군요. 이런 곳에서 만날 줄은 몰랐습니다.”
“오, 내 이름을 기억하다니.”
당연히 기억할 수밖에.
이 사람의 아들이 역사상 최고의 수비수, AC 밀란과 이탈리아 축구의 영웅, 2002년 한국에서 애송이 대학생 공격수에게 뒤통수를 까이고 16강에서 탈락하는 아픔을 맛보는 파울로 말디니이니까.
“반갑습니다. 안 그래도 2차전을 몹시 기대하고 있죠.”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선수로도, 감독으로도 명성을 날린 레전드 오브 레전드.
이미 올드 트래퍼드에서 벌어진 1차전에서 그를 꺾은 준영은 여유롭게 그와 악수를 나누었다.
***
준영과 말디니는 백화점 근처에 있는 카페로 자리를 옮겨 대화를 나누었다.
“말디니 선수는 영어를 잘하는군요.”
“적당히 대화를 할 수 있는 정도죠. 어릴 때 고향에 주둔했던 미군과 뉴질랜드군에게 어깨너머로 배운 정도입니다.”
“그랬군요. 말이 통하는 줄 알았다면 1차전이 끝나고 얘기를 건네 봤을 텐데…….”
“그땐 대화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럴 기분이 아니었으니까.”
체사레 말디니의 표정에는 아쉬움이 가득했다.
5월 8일에 올드 트래퍼드에서 벌어진 1차전은 이길 수도 있었으니까.
“그때, 전반 24분, 우리 팀 공격수 후안 알베르토 스키아피노가 선제골을 터트렸죠.”
“예, 그건 나도 눈앞에서 꼼짝없이 당했어요.”
준영은 자신의 앞에서 방향을 슬쩍 꺾는 감각적인 터치로 골을 넣은 스키아피노를 떠올렸다.
나중에 경기가 끝나고서야 그가 1950년 브라질 월드컵 결승전에서 골을 넣은 우루과이 선수란 걸 알았다.
즉, 알시데스 기지아와 함께 마라카낭의 비극을 만들어 낸 주역인 것이다!
“그 골을 넣고 우리가 쉽게 경기를 할 줄 알았는데……. 전반 막판에 당신의 어시스트를 받은 데니스 바이올렛이 동점 골을 터트렸죠.”
준영의 견인에 힘입어 FA컵 결승에서 2골을 넣은 데니스 바이올렛은 무섭게 예전의 기량을 되찾아 가기 시작했다.
유러피언 컵 준결승 1차전에서도 마찬가지.
동점 골을 터트리고, 후반전에도 계속 위협적인 슈팅을 AC 밀란의 골대에 날려 댔다.
그 바람에 밀란은, 그리고 리베로인 말디니는 또 다른 공격수를 완전히 놓쳐 버렸다.
바로 어니 테일러.
코너킥 상황에서 준영이 헤딩으로 떨어트린 공을 받은 그는 골키퍼와 일대일의 기회를 잡았다.
다급했던 나머지 말디니는 손을 써서 그를 쓰러트렸다.
“그렇게 페널티킥 판정이 내려졌고… 우린 역전패했습니다. 돌아와서 언론의 질타를 당했죠.”
아쉽고 분한 패배.
말디니는 자신들에게 그 쓴맛을 안겨 준 이방인에게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실수가 드문 단단한 수비력에 강력하고 정교한 공격력.
마치 어린 시절 군인들이 끌고 왔던 탱크라도 보는 기분이었다.
***
1. 준영의 경기 영상이 상영된 명동 중앙극장은 모 드라마에서 심영이 고자 샷(…)을 맞은 장소입니다.
하지만 실제 심영은 명동 중앙극장이 아니라 명동 예술회관, 현재 명동 국립극장에서 공연을 했다고 합니다.
2. 조르지오 아르마니는 실제로 AC 밀란 팬입니다. EA7 제품군의 경우 당시 AC 밀란 공격수 안드레이 세브첸코의 백넘버 7번에 영감을 받아 이름 지어진 것이라 하네요.
3. 체사레 말디니는 당대에 이탈리아 최고 수비수로 명성을 드날렸습니다. 다만 아들과 달리 국대에서는 그다지 눈에 띄는 모습을 보여 주지 못했죠.
이때 이탈리아는 수페르가의 비극이라고 해서 당시 국대 주전 대다수가 있던 토리노 FC 선수들이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면서 전력이 급락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