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전드 1957-140화 (140/400)

Round 140. 알현

결승전 다음 날.

준영과 프레드로 남작 일가는 초청장에 적힌 시간에 맞춰 버킹엄 궁을 방문했다.

“왕궁이야! 오빠야, 저기 근위병들 좀 봐! 진짜 인형 같아!”

차창 밖을 보며 잔뜩 흥분한 카린을 리즈가 진정시켰다.

“카린, 왕궁에선 예의 바르게 행동해야 해. 안 그러면 ‘이놈!’ 하고 혼날 거야.”

“응, 언니. 예의 바르게 할게.”

내심 동생만큼이나 흥분해 있었던 리즈는 왕궁의 풍경을 보고도 태연한 준영의 반응에 의아하게 여겼다.

“예전에 왕궁에 와 본 적 있어요?”

“응, 관광 차 둘러봤었지.”

21세기에서 맨유와 입단 계약을 하러 영국에 왔을 때, 런던 구경을 했다.

버킹엄 궁은 70년 후의 미래랑 큰 차이는 없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근위병들이 들고 있는 소총 정도.

“저를 따라오십시오.”

준영 일행이 차에서 내리자 시종이 그들을 인도했다.

외부인의 출입이 금지된 구역으로 안내된 준영 일행은 응접실에서 잠시 대기하고 있다가 여왕 엘리자베스 2세를 알현했다.

“어서 오시오. 버킹엄 궁에 온 것을 환영하오.”

“초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폐하.”

정중히 인사를 올리는 준영에게 여왕은 미소를 지었다.

“시종을 통해 보내 준 샴페인은 어땠소? 친구를 세례해 주었는가?”

“네, 폐하.”

어제 찾아온 시종은 초청장뿐만 아니라 샴페인도 가지고 왔다.

준영은 그것을 들고 곧장 던컨이 머무는 숙소로 찾아갔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주(酒)님의 은총을 맛보게 해 주었습니다.”

“호호호, 그대는 말을 참 재밌게 하는군.”

준영과 잠시 대화를 나누었던 여왕은 프레드로 남작 일가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오랜만이오, 남작. 여전히 정정하군요.”

“폐하를 다시 뵙게 되어 기쁘기 한량없습니다.”

“이쪽의 아이들이 그대의 손녀들인가요? 참으로 영특해 보입니다.”

알버트와 함께 자매들은 여왕에게 공손히 예를 취했다.

염려하던 카린도 제법 의젓하게 인사하며 여왕에게 흡족한 미소를 짓게 했다.

“꼬마 숙녀는 우리 왕세자 또래로 보이는데 꽤 의젓하군요.”

“사실은 말썽꾸러기이지요.”

“호호호, 그 나이 또래에 그렇지 않은 아이들이 어디에 있겠소.”

아이들은 밝고 명랑하게 자라는 것이 좋다.

이런 여왕의 말에 준영과 알버트는 동의한다는 듯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응접실에서 잠시 담소를 나누었던 일행은 이후 여왕과 함께 점심을 먹었다.

식사 후 후식을 나누던 와중에 여왕이 준영에게 말을 건넸다.

“원래 짐은 어제 웸블리에 방문할 일정이 없었지. 그런데 그대가 와 있다고 하니 찾아가지 않을 수 없었소.”

“일부러 미천한 이방인을 보러 와 주셨다니, 감읍할 따름입니다.”

준영의 말에 여왕은 신기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거참, 그런 말들은 어디서 배웠는가? 정말 일개 축구 선수 같지는 않군.”

‘예전에 OTT에서 본 영국 역사 드라마에서요.’

그 드라마 중에는 눈앞의 여왕님이 주인공인 것도 있다.

사실 준영은 여왕이 좀 낯설게 느껴졌다.

21세기 뉴스 매체에서 곧잘 보던 나이 든 풍채가 아닌, 큰누나 또래의 젊은 용안이었으니까.

그런 여왕이 근사하게 세팅된 빼빼Ro를 홍차와 함께 우아하게 드시는 모습을 보자니 참으로 기분이 묘했다.

“그리고 미천하다는 말은 삼가라. 겸손한 건 좋다만, 그대에겐 어울리지 않는군. 그대는 정말 특이한 인물이 아닌가.”

찻잔을 내려놓은 여왕이 보다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 나갔다.

“흔치 않은 동양인 축구 선수. 사람들의 입맛을 매료시키는 음식과 과자를 판매하고 있고, 혁신적인 광고 사업과 발명 특허권을 갖고 있지.”

그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고속도로 토목 공사나 북해 대륙붕 석유 개발에도 관심을 보인다고.

이러한 여왕의 말에 준영의 표정도 달라졌다.

뭔가 중요한 이야기를 할 것 같았기에.

“저에 대해서 많이 알고 계시는군요.”

“어제 경기 전에 그대에게 말했지 않은가.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고 말이야.”

홍차로 살짝 입을 축인 여왕이 곧장 직구를 던졌다.

“흥미로울 수밖에 없지. 그대는 70년 후의 미래에서 온 사람이니까.”

***

‘준이 미래에서 온 걸 알고 계시다니!’

깜짝 놀란 리즈는 하마터면 손에서 찻잔을 놓칠 뻔했다.

동요한 건 앤지나 카린, 심지어 알버트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정작 준영은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담담한 기색이었다.

“번즈 요원에게 들으셨습니까?”

“짐은 이 연합 왕국의 수장이니까. 직접 통치하지 않아도 내 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중대한 일들은 보고받고 있소.”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 입헌 군주.

하지만 그저 상징적인 존재만은 아닌 듯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런 중요 정보를 보고받거나, 이렇게 미래인을 왕궁에 초청하는 일을 할 수 없을 테니까.

“폐하, 오빠야를 체포하지 마세요!”

걱정스러운 마음에 카린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쳤다.

그 무례한 언행에 앤지가 황급히 만류했지만, 여왕은 오히려 웃음을 지을 따름이었다.

“왜 내가 그를 체포할 거라 생각하느냐?”

“그야 오빠야는 미래에서 와서 많은 걸 알고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후후후, 자유를 억압하고 고문으로 실토하게 만드는 건 성급한 자들이나 하는 짓이지. 짐은 그런 방식에 관심이 없으니 안심하거라.”

보고서를 올린 제이미 번즈는 강압적인 방식보다, 유화적이고 친밀한 접근이 준영에게서 미래 정보를 캐내는 데 유리하다고 이야기했다.

여왕 역시 거기에 동의했다.

나치와 싸울 때처럼 나라의 명운이 걸린 위급한 상황이면 모를까, 지금은 그렇게 다급하지도 않으니까.

“존 영 리, 그대는 어제 경기의 결과를 알고 있었소. 그렇지 않은가?”

“네, 원래는 볼턴 원더러스가 우승을 합니다.”

“그걸 그대가 바꾸어 놓았군. 그로 인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생각해 보았소?”

“아뇨. 거기까지 생각하진 않았습니다. 그저 저는 제가 아끼는 팀이 우승하는 걸 원했을 뿐입니다.”

“그대 개인의 명예도 챙기고 싶었을 것이고?”

“네, 기왕에 이 시대에 왔으니 레전드로 남고 싶었습니다.”

솔직하게 대답한 준영은 조심스럽게 여왕에게 질문을 건넸다.

“외람된 질문입니다만, 폐하께선 혹시 제가 역사를 바꾸는 것을 우려하고 계십니까?”

“그대가 이 나라를 망치고 있다면 우려했겠지. 하지만 그런 모습은 보이지 않았소.”

유러피언 컵에서 빼어난 활약으로 영국을 대표하는 팀을 4강에 올려놓았다.

식품 사업을 하며 가난한 신민들을 구휼하고 있고, 발명 특허료로 기술학교 학생들의 장학금을 지원하고 있다.

거기다 비록 본인의 야망을 위해서라고 하지만, 북해 바다 아래에 연합 왕국의 미래를 책임질 자원이 있음을 알려 주었다.

이런 자를 뭐 하러 가로막겠는가.

“그대가 지금처럼 이 나라에 득이 되는 일을 한다면 짐도 나서는 일은 없을 것이오. 아니, 적극 지원할 용의도 있지.”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폐하.”

여왕의 말에 준영은 내심 쾌재를 불렀다.

상징적인 존재만은 아닌 국가의 수장이 자신의 뒷배가 되어 주겠다니!

정말이지 눈앞으로 탄탄대로가 열린 느낌이었다.

“아 참, 짐이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소.”

잊은 것이 있다는 듯이 다시 입을 연 여왕이 준영을 보며 물었다.

“70년 후에 이 나라를 다스리는 게 누구인가? 찰스? 아니면 그 아이의 아들?”

“어, 그게 말입니다…….”

“혹시 또 여왕이 즉위하는 것이오? 아니면 로마노프 왕가처럼 공산주의자들에게 숙청당하기라도 하는 것인가?”

소련의 위협이 심상찮다 보니 여왕도 그 점이 우려되는 모양.

그래서 미래가 궁금한 듯했지만, 진실을 말해도 되나 싶었다.

워낙에 역대급 재위 기간이니, 여왕 본인이 크게 놀랄 거라 생각되었으니까.

***

주말에 이억관은 아들 필립과 함께 명동 중앙극장을 찾았다.

최근 이 극장에서 영국에서 공수해 온 축구 경기 영상을 상영하고 있었기 때문.

그냥 축구 경기도 아니고 FA컵 결승전, 바로 볼턴 원더러스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시합이었다.

“자자, 영국 협회배 축구 대회 결승전이 절찬 방영 중입니다!”

“축구왕 이준영의 진기명기 발재간을 보러 오십쇼!”

극장 간판에는 거창하게 경기 장면을 그려 놓았고, 기도와 피에로들이 극장 앞에서 열심히 홍보했다.

“허! 이렇게 많은 줄이라니!”

“많이 기다려야겠는데요?”

극장 앞에 길게 늘어선 줄을 본 억관과 필립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사실 경기 결과 자체는 이미 알고 있었다.

스코어나 준영의 대략적인 활약이 이미 신문을 통해 알려졌기 때문.

그러나 정작 경기가 어땠는지 자세히 아는 사람은 없었다.

실제 경기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많았기에, 중앙극장에서 두 팔을 걷어붙였다.

그들은 비행기를 동원해 영국에서 직접 경기 영상이 담긴 영화 필름을 가져왔다.

그리고 입소문을 타고 사람들이 중앙극장으로 구름같이 몰려들었다.

‘이거 한참 기다려야겠구만,’

곤란한 표정을 짓던 이억관 부자에게 뱁새눈의 사내가 다가와 말을 건넸다.

“이보슈, 이렇게 줄 서서는 하루 종일 기다려도 못 볼 거요.”

“방법이 없잖습니까.”

“없긴 왜 없어? 돈 좀 더 들이면 되는 것을.”

뱁새눈은 은근한 웃음을 지으며 억관에게 극장표를 내밀었다.

‘암표상이었나.’

마냥 기다리기도 뭐했기에 억관은 암표 2장을 사서 다음번 상영 시간에 극장 안으로 들어갔다.

극장 안은 그야말로 콩나물시루만큼이나 빽빽하게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렇다 보니 후덥지근한 건 물론, 숨까지 답답할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 하나 불만을 품지 않았다.

“아직 필름을 돌리지 않는 건가?”

“앗! 저쪽에 있는 저 사람, 최정민 아니야?”

“정말이네! 진짜 최정민이야!”

큰 키에 준수한 외모를 가진 군인을 본 사람들은 깜짝 놀란 반응을 보였다.

금방 극장 안이 시끌벅적해졌지만, 한국에 돌아온 지 얼마 안 된 이억관은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웃할 따름.

그는 옆 사람에게 말을 건넸다.

“이보십쇼, 최정민이 대체 누굽니까?”

“뭐? 당신, 간첩 아냐? 어떻게 최정민을 몰라? 아시아의 황금발이라 불리는 선수인데!”

“그래요? 하하, 제가 외국에 살다 와서…….”

현재 육군 특무대 축구단 소속인 최정민은 대한민국 축구대표팀의 간판 공격수.

그는 자신을 알아보고 악수나 사인을 청하는 사람들의 요구에 응하느라 진땀을 흘렸다.

곁에 있던 동료 함흥철은 그런 친구를 보며 웃음을 지었다.

“와, 역시 아시아의 황금발은 다르구만.”

“그 낯간지러운 별명은 그만둬.”

“왜? 사실 아닌가?”

최정민이 애써 고개를 젓는 사이, 극장 안이 캄캄해지며 결승전 영상이 재생되기 시작했다.

흑백 영화로 찍힌 경기 영상에선 영어 해설이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를 알아듣지 못했지만 흰 놈들은 볼턴이요, 검은, 실제론 붉은 녀석들은 맨체스터라는 건 금방 알아보았다.

그러다 주장 완장을 찬 장신의 동양인 선수가 비추어지자, 극장 안은 이내 시끌벅적해졌다.

“와, 이준영이다! 이준영!”

“세상에, 저 발재간을 봐!”

태클을 가볍게 뛰어넘어 피하고, 기를 쓰고 달려드는 상대 선수들을 절묘하게 제쳐 내는 모습에 사람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것은 국가대표 선수인 최정민과 함흥철도 마찬가지였다.

***

최정민 선수는 대한민국 스트라이커 계보의 첫 장에 오른 전설적인 선수입니다.

당시 기준으로 큰 키(178센티미터)에 빠른 발과 뛰어난 테크닉, 여기에 시원스러운 용모를 갖춘 스타플레이어였죠.

아시안컵 2연패를 달성하고, 1954년 스위스 월드컵에 출전하여 명성을 날리면서 아시아의 황금발이란 별명이 붙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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