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139. 정상에 올라서
“와, 이거 어떻게 되는 거지?”
“마지막에 또 동점이라니……!”
경기장의 기자들은 자리에 앉아 있지 못했다.
맨유의 공격이 번번이 볼턴의 수비벽 앞에 막혀서 이대로 경기가 끝날 줄 알았건만.
5번 존 Y. 리가 기가 막힌 돌파와 허를 찌르는 패스로 데니스 바이올렛의 동점 골을 만들어 냈다.
“방금 그거 사진 찍었어?”
“바이올렛의 동점 골 말이야?”
“아니, 그 직전에 존 Y. 리가 했던 패스!”
어떻게 스텝을 꼰 상황에서 뒤쪽 발로 패스를 밀어 줄 수 있는 건지!
대다수 기자들은 그런 킥은 처음 보았다.
단 한 명을 제외하고.
“10년 전인가 부에노스아이레스에 갔을 때 본 적이 있어. 분명히 에스투디안테스라는 팀에서 뛰던 선수가 했던 거였는데…….”
존 Y. 리가 그 아르헨티나 선수의 플레이를 보았던 걸까.
아무튼 중요한 점은 종료 5분여를 남겨 두고 동점이 되었다는 것이다.
“쳇, 정말 사람 피곤하게 만드는 녀석이군.”
나다니엘 로프트하우스는 맨유 선수들과 골 셀레브레이션을 즐기는 준영을 노려보았다.
뮌헨 이후 무너진 유나이티드 최후의 보루.
만만찮은 녀석, 아니 풋볼 리그 최고 수준의 선수였기에 그만큼 준비를 하고 오늘 경기에 출전했다.
녀석이 곧잘 사용한다는 개인기를 연구하고 습득한 것은 덤.
후반 이른 시간에 골을 얻었을 때만 해도 이 경기를 이길 수 있겠다 생각했다.
그런데 결국 이렇게 마지막에 덜미를 잡히게 될 줄이야!
“패스해! 녀석들이 동점 골로 흥분해 있을 때 한 방 먹여 줄 테니까!”
로프트하우스의 요청대로, 볼턴 선수들은 재빨리 반격을 시도했다.
하지만 패스는 그에게 전달되기 전 도중에 바비 찰튼의 발에 끊기고 말았다.
“잘했어, 바비!”
“이참에 역전 골까지 때려 넣자고!”
기세가 오른 맨유는 볼턴의 반격보다 훨씬 빠르게 상대 문전으로 공을 보냈다.
바비 찰튼의 발에서 로니 코프를 거쳐 측면의 어니 테일러에게 전달되었다가 중앙으로 날카로운 크로스가 올려졌다.
하지만 쇄도하던 숀 코너리의 머리에 맞기 전에 컷.
에디 홉킨스가 펀칭으로 쳐 낸 공은 박스 외곽에 있던 알렉스가 잡아챘다.
“퍼기, 침착하게 해! 절대 역습을 주면 안 돼!”
“알아요. 걱정 말아요!”
복싱으로 치면 볼턴은 구석에 몰린 상황.
여기서 상대를 K.O시켜야 한다.
그렇지 않고 놓아주면 분명히 연장전에서 놈들은 전열을 추스르고 나올 터.
‘여기서 끝내야 해! 끝낼 수도 있는 상황이니까!’
상대 진영의 빈틈을 살펴보던 알렉스는 한 차례 툭 치며 수비수를 제쳐 내고 페널티 박스로 들어갔다.
그리고 골대 구석을 노리고 슛을 때리려는 순간, 토미 뱅크스가 냉큼 공을 밖으로 길게 차 냈다.
최전방에 있는 로프트하우스에게 전달하려는 의도였지만, 과감하게 전진해 온 이안 그리브스의 헤딩에 끊기고 말았다.
“나이스 컷!”
이안이 잘라 낸 공을 받아 챈 준영은 한 차례 공을 앞으로 툭 친 후, 그대로 슈팅을 때렸다.
‘그 거리에서 슛을?’
지면 위로 낮고 빠르게 날아오는 슈팅.
공이 골대 왼쪽 하단 구석으로 날아오는 것을 본 에디 홉킨스는 냉큼 몸을 날렸다.
‘이 정도는 충분히 막을 수 있어!’
자신만만하게 손을 뻗었던 그는 공이 골대 바로 앞에서 바운드가 되자 사색이 되었다.
지면을 튕긴 공을 잡기 위해 황급히 손을 뻗어 봤지만, 손끝을 스친 공은 그대로 골라인을 넘어가 버렸다.
그와 동시에 거센 함성이 웸블리를 뒤흔들었다.
“Unbelievable!”
“세상에! 정말 역전한 거야?”
“해냈어! 리틀 존이 진짜 해냈다고!”
기대는 하고 있었다.
그리고 승리를 원하고 있었지만, 그게 금방 이뤄질 거라곤 생각지 않았다.
동점 골도 경기 막판에 겨우 넣지 않았던가.
그래서 연장전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경기 종료 직전에 역전 골이 터지다니!
“John Young Lee-! John Young Lee-!”
“네가 우리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수호신이다!”
골을 터트리고 보란 듯이 트랙을 내달리는 준영.
오늘 경기의 주인공을 향해 맨유 팬들은 아낌없는 환호와 갈채를 보냈다.
***
준영의 역전 골이 터지고도 한동안 경기는 계속되었다.
볼턴은 완전히 뒤집혀 버린 전세를 어떻게든 되돌리려 했지만, 사기가 절정에 오른 유나이티드의 수비벽을 뚫지 못했다.
정규 시간에서 약 3분 정도 시간이 더 흘렀을 즈음.
준영은 문전으로 날아오는 데니스 스티븐슨의 크로스를 헤딩으로 멀리 걷어 냈다.
그리고 그것을 마지막으로 J. 셜록 심판이 경기 종료를 알리는 휘슬을 길게 불었다.
“이겼어! 우리가 우승이야!”
“흑흑, 진짜 우리 팀이 우승한 거야?”
“보시오, 저 사람이 우리 대한의 자랑인 이준영 선수요!”
맨유 팬들, 그리고 그들과 함께한 한국 교민들은 벅차오르는 감정을 참지 못했다.
신나게 날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누군가는 머플러를 움켜쥐고 엉엉 울음을 터트렸다.
시끄럽게 징과 꽹과리를 두들겨 대는 한국 교민들과 얼싸안고 만세를 불러 대는 이들도 있었다.
관중들이 이렇게 우승의 감격을 나누는 사이, 혈투를 벌인 양 팀 선수들은 서로 악수를 나누었다.
“축하한다, 유나이티드.”
“고맙습니다. 그쪽도 대단했어요. 다음에 또 만나죠.”
준영의 말에 로프트하우스는 반쯤 정색하며 손을 내저었다.
“싫어. 다신 FA컵에서 네놈들이랑 안 만날 거야.”
“하하핫, 그래도 리그에선 보게 될 거잖아요.”
상대와 인사를 마친 뒤, 준영과 맨유 선수들은 관중석으로 이동했다.
목이 터져라 응원해 준 팬들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를 건넨 그들은 버스비 감독과 옛 동료들이 자리한 곳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감독님, 우리가 이겼어요! 최정상에 올랐다고요!”
“그래, 존. 고맙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뛰어 줘서 정말 고마워.”
버스비 감독은 손수건으로 연방 눈물을 훔쳤다.
2월의 그 참혹한 사고로 앞날이 창창한 선수들의 날개가 꺾인 후, 그 역시 큰 절망과 함께 무거운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준영이 만류한 대로 그 비행기를 타지 않았다면 사고를 겪지 않았을 테니까.
그 때문에 준영이나 남은 선수들에게 선전이나 투혼을 요청하지 못했다.
바랄 수 있는 상황도 아니고, 자신은 바랄 자격도 없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단아라 불리는 이 선수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남은 선수들을 이끌고, 새내기들과 함께 만만찮은 상대를 외나무다리에서 쓰러트려 가며 마침내 영광스러운 정상에 올랐다.
오늘만 해도 두 번이나 굴러떨어지는 상황에서도 꿋꿋이 기어올랐다.
덕분에 아직 마음속에서 좌절감을 떨치지 못했던 몇몇 부상 선수들의 표정도 밝아졌다.
회의적으로 보이던 희망.
그 희망이 힘든 역경 속에서도 꺾이지 않고 꽃피우는 것을 오늘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수고했어, 존!”
“넌 정말 대단한 놈이야!”
옛 동료들이 한마디씩 노고를 치하하는 가운데, 짓궂은 미소를 짓던 던컨 에드워즈가 숨겨 둔 샴페인을 꺼내 터트렸다.
“크악! 뭐 하는 거야, 인마!”
“하하핫! 우승했으니 한잔해야지!”
“바보야, 그건 우승컵을 갖고 왔을 때… 어푸푸!”
샴페인에 홀딱 젖어 버린 준영.
그가 던컨에게 가볍게(?) 헤드록을 걸고 있을 때, 경기 진행요원이 다가와서 말했다.
“리 선수, 그만하고 시상대에 오르시죠.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앗, 죄송합니다.”
샴페인에 젖은 머리를 쓸어 넘긴 준영은 팀원들과 함께 귀빈석 앞에 마련된 시상대에 올랐다.
다들 박수를 보내는 가운데, 유독 루스 총무만이 잔뜩 불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남들처럼 박수는 치고 있는 모양새가 참으로 어색해 보였다.
‘어떤 흑백 영화에서 잘라 낸 짤방을 보는 것 같군.’
그에게 득의의 미소를 건넨 준영은 에든버러 공작이 건네는 우승 메달을 목에 걸었다.
그러곤 우승 트로피 옆에 서 있는 여왕에게 정중히 예를 취했다.
“그대, 다친 눈은 괜찮은가?”
“예, 다행히 안구는 다치지 않았습니다.”
준영의 말에 약간 떨어져서 지켜보고 있던 리즈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정말 큰 부상을 당한 건 아닌지 걱정했으니까.
“그런데 의외로군. 땀에 젖어 있을 거라 생각은 했네만 술에 젖어 있다니.”
“바보같이 성급한 친구가 있었습니다. 무례를 용서해 주시길.”
“호호호, 따로 샴페인을 보내 줄 테니 그 친구에게 세례해 주도록 하시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FA컵 우승 트로피를 든 여왕은 준영에게 건넸다.
정중히 우승컵을 받은 준영.
그는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우승컵을 번쩍 들어 올렸다.
“Manchester is Wonderful!”
명가는 죽지 않았다.
그것을 증명하듯이 따낸 우승컵을 번쩍 치켜든 준영을 향해 카메라 플래시가 쉴 새 없이 터졌다.
우승을 만끽하는 영광의 순간.
하늘로 날아오를 듯한 신나는 기분에, 준영과 맨유 선수들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걸렸다.
***
신나게 우승의 기쁨을 만끽한 준영은 런던의 한국 대사관을 찾아갔다.
김용우 대사에게 우승한 사실을 전하기 위해서였으나…….
“대사님은 귀국하셨습니다.”
대사관 직원의 말에 준영은 깜짝 놀랐다.
“예? 언제요?”
“아직 못 들으셨군요. 제네바 국제 해양법 회의에서 본국의 훈령을 거부하고 사표를 쓰셨어요.”
“그런…….”
제네바 국제 해양법 회의는 준영도 알고 있었다.
거기서 북해 석유 개발에 필요한 대륙붕과 해양 영토 확정 문제를 다룬다고 알버트에게 들었으니까.
그런데 거기에 김용우 대사도 갔을 줄은 몰랐다.
“그야 갈 이유가 있었으니까요. 1952년에 대통령 각하께서 평화선을 공표하셨거든요. 근데 이게 국제적으로 시끄러워서…….”
‘아, 이승만 라인!’
학교 다닐 때 배운 적이 있다.
이승만의 업적 중 하나로, 독도 영유권을 공고히 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고 말이다.
“이번에 제네바에서 미국 대표단이 영해는 6해리, 독점 어업 구역을 영해선에서 6해리로 제안했는데, 평화선을 고수하는 우리 입장에선 받아들일 수 없었어요.”
한국 대표로 참석한 김용우 대사는 미국의 제안에 반대했다.
동해의 어업권과 독도를 두고 일본과 대치 중이던 한국 입장에선 미국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
하지만 냉전 체제에서 자유 진영의 대표이자, 한국의 물주나 다름없는 미국을 거스를 수 없었다.
결국 본국에서 미국의 제안에 찬동하라는 긴급 훈령이 내려왔다.
하지만 김용우는 이를 거부, 해양 회의 표결에서 반대표를 던졌다.
이후 정부에도 사표를 내고 대사직에서 물러났다고.
“완전히 상남자시군.”
“본국에선 사임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해임으로 처리했습니다. 미국과 외교 문제를 일으킨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이유에서죠.”
그래도 대통령 본인이 그은 평화선을 지키려고, 독도를 지키려 애쓴 분에게 그리 대우하다니.
아쉬움을 뒤로하고 준영은 호텔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런데 호텔로 돌아오자 버킹엄 궁에서 왔다는 사람이 그를 찾았다.
“왕궁에서 오셨다고요?”
“그렇습니다. 폐하께서 리 선수와 프레드로 남작가 분들을 궁으로 초대하셨습니다.”
초청장에 적힌 시간을 보니 점심때.
우승 팀 주장을 불러서 밥이라도 한 끼 먹여 줄 모양이다.
준영은 비슷한 경험을 21세기에서 한 적이 있었다.
2026년 북미 월드컵 8강에 올랐을 때 동료 선수들과 함께 청와대의 초청을 받았던 것.
‘근데 나만 간다고? 프레드로 저택 사람들은 왜?’
의아해하는 준영에게 왕궁의 시종이 잊은 것이 있다는 투로 말을 이었다.
“아 참, 폐하께서 리 선수에게 한 가지 명을 내리셨습니다.”
“명이라고요? 그게 뭡니까?”
잠시 머뭇거리던 시종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빼빼Ro, 꼭 챙겨 오시랍니다.”
***
김용우 대사는 외교관을 지낸 이후로 체육계에서 굵직하게 활동했습니다.
대한체육회 회장, 대한올림픽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활발하게 활동하셨죠.
위원장으로 활동할 때는 대한적십자사 부총리를 역임하면서 남북 적십자 회담을 이끌어 내기도 했습니다.
슬하에 6남매를 두셨는데, 주영 대사로 나가면서 아들은 ‘병역의 의무가 있기에 외국에 데려갈 수 없다.’라며 한국에 두고 가셨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