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전드 1957-138화 (138/400)

Round 138. 부상 투혼

다시 한 점 앞서 나가기 시작한 볼턴은 수비에 치중하면서 역습을 노렸다.

하지만 너무 이르게 라인을 내려 버리면서 오히려 잦은 위기를 자초했다.

「로니 코프, 볼턴의 패스를 끊어 내 중앙의 존 Y. 리에게 건넵니다. 존 Y. 리, 전방을 응시하다 슈웃-! 아, 골키퍼 에디 홉킨스가 가까스로 밖으로 쳐 냅니다.」

라디오 캐스터는 중계하다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거의 40미터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터진 준영의 강력하고 과감한 슈팅.

감탄과 아쉬움의 함성이 웸블리에 크게 울렸다가 가라앉았다.

「유나이티드가 코너킥으로 공격을 이어 갑니다. 장신 선수가 많은 유나이티드, 이 기회를 잘 살릴 수 있을지?」

준영이 중앙으로 들어온 상황에서 어니 테일러가 코너킥을 올렸다.

적절한 높이와 빠르기.

토미 뱅크스를 비롯한 볼턴 수비수들은 기를 쓰고 장신인 준영과 숀의 접근을 막았다.

볼은 데이스 바이올렛을 스치고, 뒤에서 돌아 들어오던 바비 찰튼의 머리로 떨어졌다.

하지만 수비에 가세한 데니스 스티븐슨의 마크에 바비의 헤딩슛은 다소 힘없이 골문으로 향했다.

“놔둬. 내가 잡는다!”

주변 동료를 만류한 에디 홉킨스는 냉큼 뛰어올라 공중볼을 잡았다.

그런데 그때, 알렉스 퍼거슨이 달려들며 머리를 들이밀었다.

화들짝 놀란 에디 골키퍼는 버럭 고함을 질렀다.

“야 인마, 무슨 짓이야!”

“쳇, 조금 늦었군.”

골키퍼가 잡기 전에 밀어내고 공을 빼앗으려 했건만.

아쉬워하는 알렉스에게 심판이 구두 경고를 보냈다.

“위험한 짓 하지 마, 꼬마야. 한 번만 더 그랬다간 퇴장이야.”

“왜 나한테 그래요? 저쪽 공격수도 그랬는데!”

“너 같은 애송이가 비엔나의 사자와 같은 줄 알아? 저쪽은 공을 잡기 전에 경합한 거였어.”

“나도 골키퍼가 공 잡기 전에 경합하려 했다고요!”

준영은 황급히 알렉스를 뜯어말렸다.

그냥 뒀다간 진짜 심판에게 손대는 최악의 상황도 벌어질 수 있기에.

“그만해, 퍼기. 너 그러다 퇴장당한다고.”

“주장! 당하고 있으면 안 돼요!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똑같이 갚아 줘야 한다고요.”

“인마, 여긴 웸블리이지 바빌로니아가 아니야!”

지금 21세기의 골키퍼 보호 규정을 고스란히 따를 필요는 없다.

하지만 준영은 골키퍼를 상대로 몸싸움을 할 생각은 없었다.

좀 전의 로프트하우스처럼 공을 가로채 득점하는 건 쉽지 않으니까.

정당한 플레이로 인정될지, 파울이 될지,

그건 종이 한 장 차이다.

그런데 달려드는 건 위험한 도박이나 마찬가지.

알렉스처럼 적당히 구두 경고를 듣고 말면 다행이지만, 잘못하면 퇴장당할 수 있었다.

“축구는 숫자 싸움이야. 머릿수가 많은 쪽이 이길 확률이 높다고. 추격해야 할 중요한 상황에서 퇴장을 당하는 것만큼 최악은 없어!”

“알겠어요. 명심할게요.”

흥분한 알렉스를 겨우 진정시킨 준영.

그는 다시 원래 위치로 돌아가 볼턴의 역습을 차단하는 데 열중했다.

***

준영은 상대 역습을 막는 과정에서 데니스 스티븐슨과 굉장히 많이 부딪쳤다.

공중볼을 따낸다고 점프해서 부딪치기도 하고, 드리블을 해 오자 태클로 쓰러트리기도 했다.

그리고 이런 경합의 끝에는 준영이 승리했다.

이렇게 매번 막히다 보니 스티븐슨도 지긋지긋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겨우니 그만 좀 쫓아오면 안 될까?”

“그럼 공격을 하지 말든가.”

말이 되지 않는 소리를 지껄이다니.

준영은 곧장 그에게 달라붙어 공을 빼앗으려 했다.

이에 스티븐슨은 등을 지며 돌아서 준영의 마크를 피하려 애썼다.

하지만 쉽사리 떨쳐 낼 수 없었다.

가까이 동료라도 있으면 패스를 할 텐데, 오히려 로니 코프와 바비 찰튼 등 맨유 선수들만 있었다.

‘젠장, 이대로면 또 빼앗기고 말 거야.’

저편에서 침투하는 로프트하우스의 움직임을 본 스티븐슨은 슬쩍 팔을 휘둘러 준영을 뿌리치려 했다.

“악!”

순간 손끝에서 뭔가 물컹한 느낌과 함께, 단말마의 비명이 고막을 두들겼다.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린 스티븐슨.

그는 준영이 왼쪽 눈을 움켜쥔 채로 쓰러지는 모습을 보았다.

상당히 고통스러운지, 남은 손으로 잔디를 긁어내듯이 쥐어뜯고 있었다.

“주장!”

“눈을 찌르면 어떡해요!”

맨유 선수들의 항의에 스티븐슨은 진땀을 뻘뻘 흘리며 손을 내저었다.

“아냐. 일부러 그런 건 절대 아니라고!”

그가 쩔쩔매는 사이 심판이 달려와 경기를 일시 중지시켰다.

맨유 쪽 진영에서는 팀 닥터가 황급히 필드로 뛰어 들어갔다.

“왜 저러지?”

“리틀 존이 다쳤나 봐.”

“심하게 맞은 것 같진 않은데?”

“바보야, 심하지 않은데 팀 닥터는 왜 달려갔겠냐?”

맨유 팬들은 우려 섞인 표정으로 필드를 바라보았다.

가장 마음을 졸이는 이는 리즈였다.

도대체 무슨 부상인지?

여기서는 너무 멀어서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필드로 달려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는 형편이고.

‘제발, 부디 큰 부상은 아니길!’

리즈가 손을 모아 기도를 올리는 사이.

준영의 주변에 모인 선수들은 낯빛이 하얗게 변했다.

스티븐슨에게 찔린 준영의 왼쪽 눈에서 핏물이 흘러내리고 있었으니까.

“설마 실명……?”

“야 인마,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

부축을 받아 라인 밖으로 나간 준영은 잔뜩 긴장해서 자신의 눈을 살피는 팀 닥터의 모습을 보며 입술을 물어뜯었다.

‘설마 안구를 다쳤나? 그럼 이 시대 의학 기술로 치료가 될까?’

예전에 심심풀이로 봤던 책에서 라식 수술이 1950년대부터 시작되었다는 이야기를 본 적이 있었다.

그 외에 이 시대 안과 치료가 어느 정도 수준인지는 전혀 알지 못했다.

‘만약에 이대로 왼쪽 눈을 실명하면…….’

한쪽 눈을 실명하고도 선수 생활을 잘한 이들이 없진 않다.

문제는 한쪽 눈이 나빠지면 남은 눈도 덩달아 나빠진다는 것.

왼쪽뿐만 아니라, 나중에는 완전히 시력을 잃을지 모른다는 무서운 생각에 준영의 낯빛이 딱딱하게 굳었다.

‘기왕 시력을 잃을 거면, 최소한 선수 생활 은퇴하고 난 다음으로 해 줘!’

오만가지 생각이 다 나고 있을 때, 팀 닥터가 물병을 열더니 준영의 왼쪽 눈을 씻어 주었다.

“윽……!”

“운이 좋았어. 안구는 다치지 않았으니까.”

“정말입니까? 하나도 안 보이는… 아!”

물로 씻어 내자, 앞이 어느 정도 보였다. 그러나 이내 짙은 붉은색이 시야를 가로막았다.

“손톱이 눈꺼풀 위쪽을 찔렀어. 한동안 계속 피가 나올 것 같아.”

“아무튼 어떻게든 뛸 순 있는 거군요.”

“제대로 뛰긴 힘들지.”

일단 부상은 부상.

눈꺼풀 열상으로 쉽게 눈을 뜰 수 없는 준영은 한쪽 눈으로 남은 경기 시간을 버텨야 했다.

“이 상태론 원근감 같은 걸 잡기 힘들 거야.”

“그래도 아예 못 뛰는 것보단 낫겠죠. 일단 나가면 육탄 방어라도 할 수 있으니까.”

왼쪽 눈을 붕대로 감은 준영은 잠시 후 다시 필드로 들어갔다.

그 부상 투혼에 관중들은 다 같이 박수를 보냈다.

“힘내, 리틀 존!”

“볼턴 따위 곧장 박살 내 버려!”

맨유 서포터들이 일제히 함성을 토하는 가운데, 리즈는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안쓰럽게 준영을 바라보았다.

자세한 부상 정도를 모르다 보니, 그녀는 준영이 한쪽 눈을 잃은 상태에서도 뛰러 나온 줄 알았다.

‘힘내요. 그리고 반드시 이겨요!’

아브라카다브라(Abracadabra).

부디 그가 원하는 대로, 유나이티드의 승리로 끝맺기를.

쉬지 않고 뛰어다니는 준영처럼 리즈도 쉴 새 없이 거듭 기원을 올렸다.

***

후반 30분이 넘었다.

체력도, 집중력도 다 같이 떨어지는 마의 시간대.

아직 동점 골을 얻지 못한 맨유는 마음이 점점 급해질 수밖에 없었다.

“빌어먹을, 그렇게 많이 슛을 때렸는데 들어가지 않다니!”

“볼턴 녀석들도 필사적이에요.”

버스를 두 대 세워 놓은 듯한 볼턴의 수비는 슛은커녕 패스도 비집고 들어갈 만한 곳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맨유 선수들은 장신 숀 코너리의 머리를 노려 크로스를 보냈다.

하지만 급한 마음에 올린 크로스가 정확할 리 만무했다.

볼턴 수비수들의 집중 마크까지 더해지자, 숀은 제대로 헤딩을 할 수 없었다.

“침착해! 아직 시간은 10분 이상 남아 있어!”

분위기만 타면 충분히 동점 골, 아니 역전까지 가능한 시간대였다.

문제는 귀에는 들려도 몸이 알아들을 만한 상태가 아니라는 것.

뭔가 방법이 필요했다.

맨유 선수들의 전의를 피워 올리고, 승리를 낙관할 수 있는 방법이.

“존, 조심해! 그쪽으로…….”

빌의 다급한 외침에 준영은 냉큼 전방의 상대를 주시했다.

비엔나의 사자, 나다니엘 로프트하우스.

역습 찬스를 잡은 그가 공을 몰고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로니 코프의 마크를 간단히 뿌리친 로프트하우스는 준영마저 제칠 기세로 덤벼들었다.

‘오냐, 어디 와 봐!’

어디서 훔쳐 배웠는지, 그는 상체를 흔들며 공을 두고 두 다리를 잽싸게 오가는 헛다리 짚기를 시도했다.

그러고는 준영이 날린 태클을 가볍게 뛰어넘었다.

“빠져나갔나?”

“아냐. 공은 걸렸어!”

고개를 쭉 빼면서 지켜보던 관중들은 준영의 깔끔한 태클에 감탄을 터트렸다.

“헛다리 짚기로 날 제치고 싶으면 더 연습하고 오셔.”

“이 녀석!”

로프트하우스가 공을 되찾으려고 덤벼들었다.

준영은 냉큼 로니 코프에게 공을 건넸다가 곧장 리턴 패스를 받으며 달려 나갔다.

원근감 문제로 터치가 살짝 부정확했지만, 그래도 곧바로 마크하는 볼턴 선수는 없었다.

‘자, 이 상황에서 어떻게 나오려나?’

내려가서 텐백을 구축할까, 아니면 달려 나와 요격을 시도할까.

볼턴에서 한 선택은 전자였다.

그들은 섣불리 뛰쳐나오는 대신, 진지에 틀어박히기로 마음먹었다.

‘그렇다면 진지로 쳐들어가 주지!’

계속 공을 몰고 볼턴 페널티 박스로 들어가던 준영.

양발 사이로 재빨리 공을 굴리면서 두꺼운 상대 수비진을 뚫고 들어갔다.

‘발끝의 감각을 믿고 돌파한다!’

준영의 과감한 돌파에 볼턴 수비수들은 당황했다.

태클을 할지 차징을 할지.

박스 안에서 섣부른 대응을 할 수 없었던 그들은 순간적으로 허수아비가 된 것처럼 그를 놓치고 말았다.

“젠장! 뭣들 하고 있는 거야!”

골키퍼 에디 홉킨스가 황급히 달려 나왔다.

슈팅할 각도도, 공간도 없다.

분명 중앙 쪽을 노리고 크로스를 올리거나 낮게 패스를 찔러 줄 것이다.

‘그런 시도는 충분히 막을 수 있어!’

에디가 자신한 그 순간.

갑자기 준영의 발에서 공이 사라졌다.

스텝이 슬쩍 꼬였다 싶은 그 순간, 앞발이 아닌 뒤쪽 발이 공을 터치했던 것.

‘이, 이게 뭐야!’

골키퍼가 예상치 못한 준영의 라보나 킥.

완전히 허를 찌르며 들어간 그 패스는 골키퍼의 가랑이 사이를 통과해 버렸다.

“어, 어……!”

허를 찔린 건 골키퍼뿐만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선수들이 갑자기 준영이 툭 찔러 넣은 패스에 대응하지 못했다.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

골 냄새를 맡고 맹수처럼 달려든 데니스 바이올렛은 몸을 날려 준영의 패스를 골대 안으로 밀어 넣었다.

“우와아아아!”

“들어갔다아아아!”

골 그물이 흔들리기 무섭게 관중석도 함성으로 요동쳤다.

후반 39분, 2 대 2.

준영의 과감하고 투지 어린 플레이로 경기는 또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

1966년 잉글랜드의 월드컵 우승을 견인한 골키퍼 고든 뱅크스는 1972년 교통사고로 한쪽 눈을 실명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이후에도 선수 생활을 이어 나갔습니다.

우리나라에도 과거 80년대 ‘외눈의 골잡이’라 불린 이태호 선수가 있고, 대전의 김은중 선수나 수원의 곽희주 선수 등이 한쪽 눈을 실명한 상태에서도 뛰어난 활약을 보여 준 바 있습니다.

시련이 있어도 포기하지 않고 투혼을 불살랐기에 그들의 이름이 축구 팬들의 기억에 남아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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