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전드 1957-137화 (137/400)

Round 137. 아브라카다브라

“달려! 달려라!”

“마법사 나가신다. 길을 비켜라!”

준영의 질주가 시작되자, 맨유 서포터들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덩달아 한국 교포들도 징과 꽹과리 등을 치며 흥을 돋우었다.

‘와, 잽싸게 몰려드는군.’

준영은 중앙선을 넘기 무섭게 달려드는 볼턴 선수들의 모습에 혀를 내둘렀다.

마치 먹잇감을 포착하고 몰려드는 상어 떼 같은 움직임이었다.

“죽어라, 노란 원숭이!”

“응. 잘 가라, 하얀 쓰레기.”

날아드는 태클을 가볍게 뛰어넘어 피하기 무섭게, 이번엔 3명의 볼턴 선수가 덤벼들었다.

재빨리 스피드를 올린 준영은 양발 사이로 공을 툭툭 치며 세 선수 사이를 빠져나갔다.

그 절묘한 돌파에 관중석에서 크게 환호성이 일어났다.

“우와, 역시 마법사!”

“슛해라! 슛!”

준영의 앞에 있던 수비수도 슛을 할 걸 생각하고 등을 내밀며 몸을 날렸다.

하지만 무안하게도 준영은 페널티 아크 쪽에 있던 데니스 바이올렛 쪽으로 패스를 보냈다.

‘리턴!’

준영의 눈빛을 읽은 바이올렛은 곧장 페널티 박스로 쇄도해 들어가는 준영에게 논스톱 패스를 건넸다.

골키퍼가 황급히 뛰어나왔지만, 준영은 공을 툭 쳐올리는 사포로 이마저도 제쳐 버렸다.

“자, 마무리… 억!”

마지막 순간, 골키퍼가 손을 뻗어 발목을 잡아챘다.

공을 놓친 준영이 쓰러지기 무섭게 휘슬이 울렸다.

“페널티킥이다!”

“역시 마법사 리틀 존! 한 건 해 줄 줄 알았어!”

맨유 팬들의 기쁜 함성이 웸블리 경기장을 크게 울렸다.

자리에서 일어난 준영에게 동료들이 달려와 부둥켜안거나, 어깨를 도닥였다.

“잘했어요, 주장!”

“진짜 예술적인 돌파였어!”

기뻐하는 동료들을 진정시킨 준영은 슬쩍 셜록 심판을 바라보았다.

사실 방금 전에 휘슬이 울렸을 때 시뮬레이션 파울로 처리해 버리는 건 아닐까 생각했다.

번든 파크에서의 일이나, 그동안 겪어 왔던 불리한 판정을 생각하면 충분히 그럴 거라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는 곳에서는 저지를 엄두가 안 나는 모양이군.’

아무튼 지금 중요한 건 이 기회를 반드시 성공시켜야 한다는 것.

준영은 데니스 바이올렛 쪽을 바라보았다.

“데니스가 처리해 줘요.”

“뭐? 이걸 내가?”

“할 수 있죠, 그렇죠?”

준영의 물음에 그는 오래 망설이지 않았다.

“알았어. 내가 할게.”

그는 준영이 자신의 자신감을 북돋아 주려고 일부러 이 기회를 주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반드시 성공시켜야 한다!

그리 다짐한 데니스 바이올렛은 페널티 스폿에 공을 놓았다.

눈앞에 서 있는 볼턴의 골키퍼 에디 홉킨스는 정신 사납게 좌우로 몸을 흔들흔들했다.

어느 쪽을 찰지 결정을 지은 바이올렛은 곧장 슛을 날렸다.

파앙-

날카롭고 강력한 슈팅은 곧장 골대 왼쪽 상단 구석에 박혔다.

반대로 몸을 날린 골키퍼를 완전히 속인 깔끔한 골.

웸블리에 다시 한 번 맨유 팬들의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들어갔다아!”

“내가 아는 데니스 바이올렛이 돌아왔어!”

이른 시간에 실점을 했던 맨유는 전반 32분, 경기를 원점으로 되돌렸다.

비록 페널티킥이긴 하지만, 오랜만에 골 맛을 본 데니스 바이올렛은 준영과 즐겁게 하이파이브를 나누었다.

“자, 이제 다음 골도 쉽게 넣을 수 있겠죠?”

“그래, 역전 골은 내게 맡겨 둬!”

지금부터 다시 시작.

승리에 대한 의욕을 불태운 버스비의 아이들은 기운차게 달려 나갔다.

***

어떤 스포츠든 마찬가지이지만, 축구도 흐름을 많이 타는 종목이다.

동점 골로 사기가 오른 맨유는 연달아 위협적인 슈팅을 날리며 볼턴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자, 이번에도 가랑이 사이로 통과시켜 드립니다∼”

“이 망할 애송이 자식!”

마크맨이 다리를 오므리며 움찔한 틈을 타서 알렉스는 냉큼 라인을 따라 공을 몰고 깊숙이 들어갔다.

크로스를 올리는 척 페인트를 넣은 그는 수비수를 따돌리고 곧바로 페널티 박스 안으로 들어가 슈팅을 때렸다.

“우와아-!”

강력한 슈팅이 골키퍼의 선방에 맞고 튕겨 나왔다.

박스 외곽에서 그 리바운드 볼을 잡은 데니스는 한 차례 접기로 수비수의 태클을 따돌린 다음 슛을 날렸다.

마치 자를 대고 그은 것처럼 직선으로 쭉 날아간 강슛.

골대 그물이 세차게 흔들리자 관중들은 불끈 주먹을 쥐었다.

“골?”

“아냐. 옆 그물이었어.”

단체로 허리를 젖힌 맨유 팬들은 아쉬움의 탄식을 토했다.

하지만 탄식은 오래가지 않았고, 금방 격려의 박수가 경기장에 쏟아졌다.

“젠장, 언제까지 설치게 내버려 둘 셈이야? 공격 좀 제대로 해 보라고!”

투덜대던 볼턴의 골키퍼 에디 홉킨스가 전방으로 길게 공을 건넸다.

나다니엘 로프트하우스의 머리를 노리고 날아간 롱 패스는 힘껏 뛰어오른 이안 그리브스의 헤딩에 맥없이 잘려 버렸다.

“잘했어, 이안!”

준영의 엄지 척에 고개를 끄덕인 그는 곧장 로프트하우스의 움직임을 쫓았다.

‘언제까지 구멍 취급을 받을 순 없어!’

이안은 뮌헨 사고 이후 주전으로 출전하고 있지만, 활약이 썩 좋은 편은 못 되었다.

상대 공격수에게 뚫리거나 농락당하면서 아찔한 위기를 초래하거나, 급기야 골을 내주는 일이 많았기 때문.

물론 그만큼 상대 공격수가 만만찮은 실력자들이기 때문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수긍할 수는 없었다.

‘내가 잘하지 않으면 이번 시즌 이후로 내 자리는 없을 거야.’

그러므로 증명해야 한다.

앞으로 유나이티드의 수비를 책임질 수 있는 선수라는 것을!

이를 악문 이안은 로프트하우스에게 전달되는 패스를 태클로 걷어 냈다.

“좋았어. 다시 역습이다!”

이안이 걷어 낸 공을 잡은 준영은 오른쪽 측면으로 내달리는 어니 테일러에게 정확히 롱 패스를 보냈다.

아쉽게도 어니가 터치 미스를 저지르면서 공은 그대로 라인 아웃이 되었다.

그리고 심판은 전반 종료를 알리는 휘슬을 길게 불었다.

“휴, 득점 찬스가 많았는데 겨우 한 골이라니…….”

“아직 후반전이 있잖아요. 차차 나아질 테니 염려 마요.”

준영은 아쉬워하는 데니스 바이올렛을 다독이며 라커룸으로 돌아갔다.

‘예상보다 볼턴의 공격이 날카로웠어. 이에 대비하지 않으면 안 돼.’

이쪽이 약해졌는지, 저쪽이 강해졌는지 알 수 없지만 방책은 세워야 한다.

여기까지 와서 준우승으로 끝내는 건 너무 아쉬웠으니까.

***

선수들이 쉬러 간 사이, 관중들도 잠시 여유를 갖고 휴식을 취했다.

“예상과 달리 팽팽하군. 순위표만 보면 볼턴은 리그 하위권인데 말이야.”

시가를 입에 문 처칠의 말에 알버트가 대꾸하고 나섰다.

“토너먼트 승부 아닙니까. 다음번을 기약할 수 없는 외나무다리 위에서의 싸움이니, 누구나 필사적이 되기 마련이지요.”

“그렇군. 이런 시합이라면 오히려 강팀이 더 부담스럽겠어.”

약팀을 이겨도 당연한 결과일 뿐이지만, 지면 온갖 비난과 조롱을 당하게 된다.

이와 달리 약팀은 져도 손해 볼 건 없고, 이기면 영광을 누릴 수 있으니 심리적으로 더 여유로울 수밖에.

“아무래도 볼턴 쪽이 유리할 것 같은데…….”

“그래도 유나이티드가 이길 거예요! 언니가 오빠야한테 부적을 만들어 줬거든요!”

카린의 말에 처칠과 알버트는 리즈를 바라보았다.

얼굴을 살포시 붉힌 리즈는 별거 아니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그냥 손수건에 몇 글자 수놓아 줬을 뿐이에요.”

“주문을 말인가? 어떤 주문이지?”

처칠의 물음에 리즈가 잠시 망설이다 대답했다.

“그게… Abracadabra요.”

“거참 괴상한 주문이군. 어느 나라 말이지?”

“히브리어예요. ‘뜻대로 될지어다.’라는 뜻이래요.”

사실 ‘Abracadabra’만 수놓지 않았다. 준영에게 따로 배워 둔 한글로 ‘승리’라는 글자도 박아 넣었다.

“허허, 확실히 아가씨들은 그런 미신 같은 걸 좋아하는군.”

과거에 교회의 눈을 피해 암암리에 이어지던 부적이나 타로카드 점 등은 세계 대전을 거치며 크게 유행했다.

전장에 나간 연인과 남편, 아버지가 무사하기를 바라는 이들이 많았기 때문.

그런 점에 있어서는 리즈도 마찬가지였다.

유나이티드의 우승보다 준영이 별 탈 없이 무사히 경기를 마치기를 바랐다.

***

하프타임이 끝나고 다시 양 팀 선수들이 필드로 나왔다.

진영을 바꾼 그들은 남은 45분 동안 승부를 결정짓기 위해 초반부터 맹렬히 볼 다툼을 벌였다.

‘볼턴도 꽤 적극적으로 나오는군.’

전반에 수비와 미드필더 지역 인원이 적어 고전한 맨유는 후반전에는 바비 찰튼을 미드필드 지역으로 내리면서 중심을 잡았다.

하지만 볼턴은 이와 반대로 공격 쪽의 비중을 높였다.

그리고 초반의 어수선한 상황을 틈타 좋은 찬스를 만들어 냈다.

브라이언 버치와 패스를 주고받은 데니스 스티븐슨이 측면의 빈 공간으로 공을 몰고 들어간 것.

‘저거 분명 크로스다!’

마침 가까이 있던 빌 포크스가 마크를 붙었다.

그는 스티븐슨이 공을 차기 무섭게 뒷짐을 지며 몸을 날렸다.

터엉-!

“컥!”

스티븐슨이 올린 크로스가 빌의 뒤통수를 맞고 높이 떠올랐다.

“굴절 한번 묘하게 되는군.”

“그래도 문전으로 날카롭게 가는 건 막았으니까.”

박격포탄처럼 높이 솟구쳤던 공은 골대 앞쪽으로 떨어져 내렸다.

떨어지는 공을 응시하던 골키퍼 해리 그렉은 낙하지점으로 천천히 이동했다.

그렇게 떨어지는 공이 번쩍 든 그의 두 손에 잡히려 할 때였다.

갑자기 쇄도해 온 나다니엘 로프트하우스가 껑충 뛰어 떨어지는 공에 머리를 가져다 댔다.

“크어억!”

공에 집중하고 있던 해리는 누가 달려들 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힘껏 몸을 날린 로프트하우스에게 밀린 그는 필드 위에 나동그라지며 공을 놓치고 말았다.

충돌 때문에 비틀거리던 로프트하우스는 무주공산으로 떠돌던 공을 잡아 그대로 골대 안에 밀어 넣었다.

“뭐야, 저게!”

“반칙이잖아!”

“우- 우우-!”

맨유 서포터들이 거센 야유를 보냈다.

준영을 비롯한 맨유 선수들도 바로 심판에게 몰려가 항의했다.

“이건 골키퍼 차징입니다! 로프트하우스의 파울이라고요!”

“골키퍼가 공을 완전히 잡은 건 아니잖아. 오히려 공에 먼저 머리를 댄 건 로프트하우스였지.”

“골키퍼를 아예 담가 버렸는데 무슨 소릴 하는 겁니까!”

버럭 언성을 높인 준영은 보란 듯이 해리 그렉 쪽을 가리켰다.

로프트하우스와 공중에서 부딪친 충격이 만만찮은지, 몸을 가누지 못하는 상태로 팀 닥터의 치료를 받고 있었다.

맨유 측은 해리의 상태가 몹시 걱정되었다.

만약 해리가 경기를 못 뛸 정도로 상태가 나쁘면 필드 플레이어 중 누군가가 대신 문전을 지켜야 한다.

교체 규정이 아직 없기 때문이다.

아무튼 해리의 상태와 별개로 로프트하우스의 골은 취소되지 않았다.

“규정상 문제 될 건 없어. 공중볼 다툼을 하면서 골키퍼와 부딪치는 게 허다하잖아.”

‘하긴, 지금은 어느 정도의 경합은 눈감아 주고 있지.’

21세기에는 골키퍼 차징 파울이 될 만한 반칙도 이 시대에는 허용되고 있었다.

셜록 심판이 탐탁지 않긴 해도 제멋대로 판정을 내린 건 아니었다.

“어휴, 젠장!”

“해리, 괜찮아요?”

겨우 몸을 일으킨 해리 그렉은 오만상을 지은 상태로 엄지를 들어 올렸다.

아프긴 해도 뛰지 못할 정도로 나쁘진 않았다.

“빌어먹을, 로프트하우스 저 자식, 다음에 또 얼씬거리면 머리통을 후려쳐 버리겠어!”

“진정해요. 릴렉스…….”

간신히 해리를 진정시킨 준영은 손목에 묶은 리즈의 손수건을 매만졌다.

부적까지 얻었지만, 우승컵을 들기는 쉽지 않았다.

“그렇다고 콩라인에 머물 수는 없지!”

받은 만큼 갚아 주리라.

준영과 맨유 선수들이 잔뜩 벼르면서, 후반전은 제대로 불이 붙기 시작했다.

***

실제로 1957-58 FA컵 결승전에서 로프트하우스의 골은 골키퍼 차징이다, 아니다 논란이 많았습니다.

당시에는 어느 정도의 경합은 허용하는 입장이었는데, 사실 유튜브에 있는 영상을 보면 상당히 심하게 부딪쳤습니다……;;;

1950년대 이전에는 정말 골키퍼 보호 규정이 전무해서 사고가 많았습니다.

위의 흑백 사진은 1931년 스코틀랜드 리그 셀틱과 글래스고의 시합에서 벌어진 일인데, 셀틱 골키퍼 존 톰슨이 공격수와의 충돌로 현장에서 의식을 상실, 이후 사망했습니다.

1936년에 선더랜드 골키퍼 지미 소프가 첼시와의 경기에서 충돌 부상을 입고 갈비뼈가 부러졌습니다.

문제는 소프는 당뇨병을 앓고 있었고, 부상 때문에 상태가 악화되면서 결국 요절하고 말았죠.

이런 일련의 사건이 계속 일어나자, 결국 축구 협회는 골키퍼가 공을 잡은 상황에서 부딪치는 건 파울로 간주했습니다.

이후로 계속 골키퍼 보호 규정이 강화되었지만, 현재에 와서도 사고는 종종 일어나곤 합니다.

체코 국가대표이자 첼시와 아스날의 수문장이었던 페트르 체흐의 경우도 경기 중 충돌로 심각한 머리 부상을 입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죠.

이후, 체흐는 항상 헤드기어를 끼고 출전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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