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전드 1957-136화 (136/400)

Round 136. 결승전 개막

햇볕이 따스하게 내리쬐는 오후.

10만에 육박하는 관중이 들어찬 웸블리 필드로 양 팀 선수들이 입장했다.

하얀 상의에 파란 하의를 입은 볼턴 원더러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이와 대조되는 붉은색 상의에 하얀 하의를 입고 나왔다.

“이겨라, 유나이티드!”

“염통이 터질 때까지 뛰어. 알겠냐?”

관중석에서 들려오는 낯익은 목소리에 준영과 바비, 데니스 등은 고개를 돌렸다.

“아니, 저 녀석들……!”

“용케도 나왔구만!”

로저 바인, 토미 테일러, 재키 블란치플라워 등등.

붉은 유니폼을 입은 옛 동료들이 떡하니 자리를 잡고 손을 흔들어 주고 있었다.

“존! 볼턴 녀석들 따위 간단히 해치워 버려!”

던컨 에드워즈가 벌떡 일어나 성화를 부렸다.

아직 양다리의 깁스도 풀지 않은 상태로 설치다 보니, 곁에 있는 그의 부모님과 약혼자 몰리는 기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반드시 이겨! 알겠지?”

“알았어. 끝나고 트로피 가져갈게!”

반가운 녀석들의 등장에 준영과 맨유 선수들은 더욱 전의가 끓어올랐다.

그렇게 씩씩하게 필드로 나간 그들은 잠시 후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여, 여왕 폐하시다!”

“오신다는 말은 못 들었는데?”

에든버러 공작 필립과 함께 나타난 귀부인은 분명 연합 왕국의 여왕 엘리자베스 2세.

필드에 있는 선수들뿐만 아니라 관중과 기자들도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리 긴장할 필요 없소. 짐은 인사만 하러 왔을 뿐이니.”

“예, 옙!”

여왕은 부군과 함께 양 팀 선수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며 선전을 요청했다.

그러다 마침내 준영의 앞에 당도하였다.

“존 Y. 리, 그대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를 들었소. 정말 흥미롭더군.”

“…황공하옵니다.”

여왕과 악수를 나누었던 준영은 그녀의 의미심장한 미소에 심상찮은 느낌을 받았다.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흥미롭더라고?’

마치 자신이 미래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투로 말하는 것 같았다.

정말 알고 있다면 번즈 요원이 알려 준 걸까?

‘그럴 리가. 실권도 없는 사람이잖아. 입헌제 왕국의 군주, 군림하되 통치하지는 않는 사람인걸.’

준영은 너무 과민한 반응을 보이지 않기로 했다.

여왕이 자신의 비밀을 알고 있더라도 이를 함부로 떠벌리지는 않을 테니까.

‘사실 여왕님보다 신경 쓰이는 인간은 따로 있으니까.’

그것은 바로 주심.

J. 셜록이라는 이름의 이 주심은 안면이 있었다.

바로 번든 파크에서 판정에 항의한다고 자신을 퇴장시킨 그 작자였으니까.

‘루스 총무 이 인간, 또 날 엿 먹일 셈인가?’

다시는 개입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놓고 이런 짓을 하다니!

‘개 같은 판정 나오기만 해 봐라. 죄다 까발려서 뒤집어엎을 테니까!’

여기까지 와서 억울하게 트로피를 내줄 생각이 없었던 준영은 루스가 있을 귀빈석 쪽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

“아니, 어떤 놈이 이따위 심판 배정을!”

준영의 생각과 달리 루스 총무는 당혹감을 금치 못했다.

하필 배정된 심판이 번든 파크에서 자신의 부추김을 받아서 존 Y. 리를 퇴장시킨 놈이라니!

심판 위원회는 생각이 있는 것인가!

‘설마 이놈들, 나한테 잘 보일 맘에 이런 배정을 한 걸까? 이러면 내가 좋아할 줄 알고?’

준영과 칵테일 바에서 마주친 이후로 루스는 심판 위원회에 발길을 끊었다.

딱히 연락도 하지 않았다.

괜히 그 악마 같은 동양 놈을 건드렸다간 FIFA 회장 직책이 저 하늘로 날아가 버릴 테니까.

그래서 놈이 말한 대로 소가 닭 보듯이 지내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이런 사고가 터질 줄이야!

‘빌어먹을, 심판 위원회 놈들을 죄다 그냥…….’

“루스 경, 낯빛이 좋지 않군요. 식은땀까지 흘리는데, 어디 불편한 데가 있소?”

에든버러 공작의 물음에 루스는 움찔 놀랐다가 이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아, 아닙니다. 그저 폐하께서 직접 관전하시는 만큼 멋진 시합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하하하.”

대충 둘러댄 말.

하지만 공작의 곁에 있던 여왕이 원치도 않았음에도 맞장구를 쳤다.

“멋진 시합이라. 그래, 확실히 기대하고 있소.”

기대하고 있소, 기대하고 있소, 기대하고 있소…….

여왕의 이 말이 루스의 귀에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겉으론 웃음을 짓고 있었지만, 정말 웃는 게 웃는 것이 아니었다.

‘아, 제발! 엉뚱한 일은 터지지 말아 줘!’

***

루스가 속으로 간청하고 있을 때.

셜록 심판의 휘슬이 울리며 FA컵 결승전 경기가 시작되었다.

볼턴은 천천히 패스를 주고받으며 탐색을 펼치다, 측면으로 내달리는 윙어 더그 홀든에게 공을 건넸다.

하지만 더그의 돌파는 준영에게 끊기고 말았다.

어깨싸움에서 밀린 더그는 밀려나서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파울인가?”

“아냐. 정당한 몸싸움이야. 존 Y. 리가 먼저 어깨를 넣었다고.”

기자들이 본 대로 심판은 파울을 불지 않았다.

오히려 항의하는 더그에게 빨리 일어나라고 손짓을 했다.

‘편파 판정을 할 생각은 없나 보군.’

방금 전에 준영은 일부러 거칠게 더그 홀든을 밀어붙였다.

그 몸싸움을 두고 심판이 어떻게 판정을 하는지 알고 싶었기 때문.

‘방심해선 안 돼. 대놓고 안 해도 중요한 순간에 편파 판정을 할 수 있으니까.’

준영의 생각과 달리, 셜록 심판은 오늘 정말 엉뚱한 판정을 할 생각은 없었다.

사실 키다리 원숭이가 여전히 맘에 들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대놓고 퇴장시킬 순 없었다.

번든 파크에서 이미 한바탕했는데, 또 저지른다면 분명히 고의성이 있다고 비난받을 테니까.

‘더구나 여왕 폐하께서 보고 계시잖아.’

나라에서 가장 귀하신 분이 지켜보는 가운데 엉뚱한 짓을 했다간 그냥 넘어가지 못할 것이다.

사회적인 분위기야 어떻든, 영국은 인종 차별이 법적으로 금지였으니까.

‘난 오늘 도와주지 않을 거다. 볼턴 네놈들이 알아서 해 봐.’

이렇게 심판이 중립을 지키는 가운데, 어니 테일러 쪽을 노린 맨유의 날카로운 패스가 볼턴 수비수 토미 뱅크스에게 잘렸다.

미드필드 지역을 재빠르게 거친 공은 맨유의 빈 공간 쪽을 파고드는 데니스 스티븐슨에게 전달되었다.

‘우와! 온다, 와!’

마치 이쪽으로 패스할 줄 알았다는 듯 준영이 무섭게 달려왔다.

사촌 동생 던컨 에드워즈의 단짝이던 동양인 선수.

그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이미 겪어 본 바 있었기에, 데니스 스티븐슨은 서둘러 달아났다.

하지만 공을 컨트롤하며 달리는 사람은 그냥 달려오는 사람보다 느릴 수밖에 없었다.

결국 따라잡힐 지경이 되자, 데니스는 맨유 골대 쪽을 향해 슈팅를 시도했다.

‘어림없는 슛이야.’

급하게 차다 보니 위력도 약하고 방향도 좋지 않았다.

더구나 맨유 골키퍼 해리 그렉까지 각을 좁혔다.

그런데…….

“이안! 비엔나의 사자를 놓치면 안 돼!”

나다니엘 로프트하우스.

비엔나의 사자라는 별명을 가진 이 볼턴의 공격수는 냉큼 데니스가 공을 찬 쪽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해리 그렉이 잡기 전에 공을 잡아채는 데 성공했다.

“문전 쪽으로 돌아서지 못하게 막아!”

해리의 외침에 이안은 황급히 로프트하우스에게 마크를 걸었다.

그때, 등을 지고 있던 로프트하우스가 발바닥으로 공을 굴리며 잽싸게 방향을 전환했다.

“그, 그건!”

“너희 팀 주장의 기술이었지? 스트레인지 룰렛인지 뭔지.”

순식간에 이안을 벗겨 낸 로프트하우스는 곧바로 벼락같이 슈팅을 날렸다.

골키퍼 해리 그렉의 손을 살짝 스치며 지나간 슈팅은 곧장 아래로 뚝 떨어지며 골대 안으로 들어갔다.

“우와!”

“멋진 슛이었어!”

로프트하우스의 아름다운 선제골에 관중석에서 우레 같은 환호성이 일어났다.

누구보다 환호한 사람은 귀빈석에 있는 스탠리 루스였다.

“그래, 바로 그거야!”

심판 때문에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경기를 보던 차에 이런 멋진 선제골이 나오다니!

그것도 현직 잉글랜드 대표팀 공격수의 발끝에서!

‘크하핫! 꼴좋구나, 원숭이! 네놈의 코앞에서 실점이 벌어졌으니!’

준영이 트로피를 드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았던 루스 입장에서는 무척이나 반가울 수밖에 없는 골이었다.

아무튼 선제골의 효과는 엄청났다.

대체로 중립적인 태도를 보이던 대다수 관중들이 약속이나 한 것처럼 로프트하우스의 이름을 연호했으니까.

“쳇, 어쩌다 운 좋게 들어간 것 가지고!”

“지지 마라, 유나이티드!”

붉은 레플리카를 걸친 맨유 서포터들은 기죽지 않고 북을 두드리며 깃발을 휘둘러 댔다.

그 성원에 힘을 입었던지, 맨유 선수들은 실점의 충격을 쉽게 떨쳐 냈다.

연이어 들어온 볼턴의 공세를 잘 뿌리치면서 곧바로 역습에 나섰던 것.

슬쩍 중앙선을 넘어왔던 준영은 측면 쪽에 있는 알렉스 퍼거슨에게 패스를 찔러 주었다.

저돌적인 알렉스는 마크하는 상대 수비수의 다리 사이로 공을 통과시킨 다음, 볼턴 문전을 향해 돌진해 들어갔다.

“우와, 저 애송이 녀석, 제법 하는데?”

“덩치도 있으면서 굉장히 발이 빨라!”

관중석에서 환호성이 일어나는 가운데, 알렉스는 중앙에 있던 공격수 숀 코너리를 향해 크로스를 올렸다.

“끊어 내!”

“공격수의 머리에 닿게 해선 안 돼!”

점프하는 숀의 주위로 볼턴 선수들 여럿이 뛰어올랐다.

하지만 공은 그들의 머리 위를 지나, 배후에서 돌아 들어가던 데니스 바이올렛의 앞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곧장 터지는 바이올렛의 강력한 발리슛!

“우와아- 아아아-”

관중석에서 터져 나온 기대의 탄성은 아쉬움으로 마무리되었다.

바이올렛의 슈팅이 한 끗 차이로 골대에서 빗나가 버렸기 때문.

이 과정에서 누구보다 아쉬워하는 사람은 역시 데니스 바이올렛이었다.

“쳇! 이런 건 들어가야 하는데!”

“괜찮은 슈팅이었어. 너무 조바심 내지 마.”

숀이 위로했지만, 바이올렛은 쉬이 표정을 펴지 못했다.

예전 같으면 쉽게 넣었을 슛.

이걸 놓쳐 버린 까닭은 경기 감각이 회복되지 않아서일까, 아니면 사고로 인한 부상 후유증 때문일까.

답답하면서도 두려운 마음은 쉽게 풀어지지 않았다.

***

볼턴의 선제골이 터진 후, 양 팀은 그야말로 난타전을 벌였다.

서둘러 동점 골을 만들려는 맨유.

한 골 추가해서 멀찌감치 달아나려는 볼턴.

빠르게 공방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날카로운 슈팅과 멋진 선방, 그리고 절묘한 수비가 연달아 일어났다.

“결승전답게 치열하군.”

“근데 실점한 유나이티드 쪽이 좀 더 수비가 견고한 느낌이야.”

“저 5번 녀석 덕분이겠지.”

관중들은 감탄했지만, 정작 볼턴의 공격을 막는 준영은 환장할 지경이었다.

데니스 스티븐슨과 나다니엘 로프트하우스가 여기저기 빈 공간을 들쑤시고 들어오고 있었기 때문.

이들이 설치고 가면, 측면에서 더그 홀든이나 브라이언 버치가 들어와 돌파를 시도하거나 크로스를 올리곤 했다.

그리고 그걸 막아 내는 건 준영의 몫.

‘망할, 수비와 미들이 부족해.’

사실 그럴 만했던 게 오늘 출전 선수나 전술이 공격에 치우쳐 있었기 때문이다.

최전방에 숀 코너리와 데니스 바이올렛, 그 양쪽 윙 포워드로 알렉스 퍼거슨과 어니 테일러.

여기에 바비 찰튼까지, 수비보다 공격에 치중된 상태였다.

“잡아, 슛!”

“하게 내버려 둘 것 같냐!”

브라이언 버치가 건네준 컷백을 로프트하우스가 슈팅으로 이어 가려는 순간, 준영이 냉큼 잘라서 앞으로 치고 나갔다.

그는 앞쪽에 있는 바비 찰튼에게 패스를 건네주었다가, 곧장 리턴 패스를 받아 볼턴 진영으로 달려 들어갔다.

***

최근에 본 독자분 리플 중에 충전은 어떻게 하기에 주인공이 스마트폰 같은 21세기 물건을 쓰냐고 하시는 분이 있더군요.

당연히 1950년대라도 전기가 있으니까! …라는 정도로는 부족했을지 모르겠습니다.

딱히 설명할 필요 없고, 넣어 봤자 쓸데없는 분량만 늘지 싶어 언급하지 않았습니다만…….

요런 소켓이 BS1363-3핀이라는 건데, 1947년부터 현재까지 영국에서 사용되고 있는 형식입니다.

준영이가 해외여행용 멀티 어댑터를 챙겨 가면 50년대에도 충전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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