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135. 역사를 바꾸다
닥터 리.
여섯 번째 007 시리즈의 주역으로 등장한 악당.
소설에 따르면 그는 러시아와 한국의 혼혈아로, 한국 황제의 황금을 훔쳐 범죄 조직을 세웠고, 악의 조직 스펙터의 간부가 되었다고 나왔다.
“이름은 John Lee, 6피트 4인치(194센티미터)의 건장한 체구에 만능 스포츠맨… 허, 진짜 어이가 없군.”
저택에 돌아와 소설을 살펴본 준영은 기가 막힌 나머지 몇 번이나 고개를 저었다.
캐릭터 설정이 찌라시 언론에 알려진 자신의 루머로 꾸며져 있었으니까.
“근데 이거 내용은 완전 살인 번호잖아.”
미치광이 과학자인 혼혈 악당이라든가, 섬에서 비밀 연구를 하는 점이라든가, 미국의 로켓 발사를 방해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는 점이라든가.
예전에 영화에서 본 설정 그대로였다.
“살인 번호요?”
리즈의 물음에 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007 시리즈 첫 번째 영화야. 내가 지난번에 말했었지? 숀 형이 제임스 본드를 맡는다고.”
“아, 그럼 이게 그 영화의 원작 소설인 건가요?”
“그래. 근데 내가 아는 거랑 설정이 많이 달라.”
원래 악당의 이름은 닥터 리가 아니라 닥터 노였다.
거기다 한국이 아니라 중국인 혼혈이었고.
어째서 이렇게 바뀐 걸까?
거기에 대해서 앤지가 이렇게 추리했다.
“존이 유명해져서 그런 거라고 봐. 실존 인물을 모델로 한 캐릭터들이 있으니까.”
“하긴 그런 경우가 꽤 있지. 근데 왜 하필 악당으로 쓰는 거냐고!”
“내로라하는 영국 축구 선수들을 상대로 이겼으니까 악당같이 보였던 거겠지.”
“루스 총무와 비슷한 부류라는 건가?”
가치관이 고리타분한 이들이 적지 않으니, 작가가 그렇다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이 작가 아저씨 말인데, 내가 실제로 MI6와 연줄이 있다는 걸 알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럼 MI6 내부의 적이나 배신자로 설정할지도?”
“그러면 그건 골든 아이에 나오는 006인데.”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이지만, 준영은 한 가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자신이 축구뿐만 아니라 다른 분야에도 영향력을 미쳐서 역사를 바꾸어 가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웬만하면 좋은 쪽으로 많이 바뀌었으면 좋겠군.’
바라는 대로 될지 안 될지.
지켜보기 전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해 가리라 마음먹었다.
***
2027년 4월.
개인적인 볼일로 잠시 한국에 다녀왔던 손웅민은 영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장시간 비행의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그는 노트북을 꺼내 즐겨 보는 프로그램을 검색해 보았다.
“오, 전당포 머머리 최신화가 올라왔네.”
시청자들 사이에서 ‘반값 대마왕’이라 불리는 미국 머머리 아저씨가 전당포에서 감정과 거래를 하는 버라이어티 쇼.
오늘은 한 청년이 할아버지 댁 다락에서 찾은 거라면서 책 한 권을 가지고 왔다.
「1958년에 출간된 007 시리즈 여섯 번째 이야기 ‘닥터 리’예요. 그것도 초판본이죠.」
「어디 한번 봅시다. 양장 표지 상태가 괜찮군요. 책이 아니라 베개로 썼던 것 같은데…….」
잠시 고객과 농담 따먹기를 하던 머머리 아저씨는 서적 감정 전문가인 레비라는 아가씨를 불러왔다.
책을 살펴본 레비는 책과 관련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늘어놓았다.
「‘닥터 리’는 1962년 개봉한 첫 번째 007 영화의 원작 소설이에요. 원래는 3월에 출간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출판사의 편집 요청 때문에 한 달 미뤄졌어요.」
「무엇 때문에 연기되었죠?」
「원래는 제목도, 악당의 이름도 닥터 리가 아니었어요. 플레밍은 중국계 캐릭터로 설정해서 닥터 노라고 이름 지었죠.」
그런데 출판사에서는 이 설정을 마땅찮아 했다고 한다.
좀 더 대중의 관심을 끌어오기를 원했던 출판사에서는 당시 영국에서는 꽤 악명을 떨치던 한국인 축구 선수를 모델로 캐릭터 설정을 바꿀 것을 요청했다고.
「소설은 잘 팔렸지만, 이런 자극적인 시도는 비판을 받았죠. 모델이 된 존 Y. 리도 거북하게 여겼다고 하고요.」
「모델이 된 선수가 작가를 때리러 갔다는 얘기는 없나요?」
「그런 이야기는 없어요. 다만 007 배역을 맡은 숀 코너리가 존 Y. 리와 함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뛴 적이 있다고 하죠.」
레비의 설명과 함께 유니폼 차림의 존 Y. 리와 숀 코너리가 나란히 찍힌 흑백 사진이 화면에 떠올랐다.
「최근에 밝혀진 정보에 따르면 존 Y. 리는 MI6의 정보원이었다고 해요.」
「실제 007에 가까운 사람이었다는 건가요?」
「007의 상관이 M이잖아요? 근데 당시 맨유의 감독도 M, 맷 버스비였다는 거죠.」
「거참 재밌는 우연이네요.」
손웅민은 흥미로운 표정으로 영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존 Y. 리, 이준영이 MI6의 정보원이었다는 건 그 역시 얼마 전에 알았지만, 007 시리즈에 영향을 끼쳤을 줄은 몰랐다.
“진짜 대단한 영감님이라니까. 일개 축구 선수가 이 정도로 많은 족적을 남기다니…….”
일개 축구 선수에게 대한민국은 큰 신세를 졌다.
이준영은 식품 가공, 의류 산업을 한국에 유치하여 1차 산업의 토대를 쌓았다.
또 그가 세운 ‘미래 재단’ 장학생들은 맨체스터에 유학해서 석유화학, 제철과 기계 공학, 자동차, 조선 등 여러 가지 학문과 기술을 쌓았다.
이 덕분에 한국은 70년대에 중공업 산업 육성에 필요한 인재를 얻을 수 있었다.
영국 재계나 산업계와 교류와 친분을 쌓으면서 자본과 기술 도입을 원만하게 진행한 것도 덤.
그래서 학자들은 이준영이 한국 경제를 최소 10년은 가속시켰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거기다 오일 쇼크 때도 굉장한 도움을 줬다던가.”
이 당시 그의 별명이 ‘북해의 석유왕’.
그래서 당시 정부 관료들도 이준영을 무시하지 못했다.
아니, 그가 한국을 방문하면 대통령이 직접 마중 나올 정도였다고.
“축구계 쪽이야 말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큰 영향을 끼쳤지.”
현대적인 축구 리그 출범, 유소년 축구 아카데미 건립, 선수와 지도자의 해외 연수 지원 등등.
현재 한국 축구가 뿌리를 깊이 내리고 쑥쑥 성장할 수 있었던 건 이준영의 지원 덕이다.
‘대체 어떻게 한 사람이 이 정도로 많은 일을 해낼 수 있었을까?’
분명 혼자 이룩한 일은 아니다. 그에게 협력하고 도움을 주는 이들도 많았으니까.
하지만 굵직굵직한 마스터플랜은 그가 잡고 진행해 나간 것이 분명한 사실이다.
‘정말 누가 말하는 대로 외계인인가?’
동영상 플랫폼에 새로 올라온 영상들을 살펴보던 손웅민은 흑백 영상 하나에서 시선을 멈췄다.
“1957-58 시즌 FA컵 결승전 하이라이트라고?”
재생 버튼을 누른 그는 곧바로 70여 년 전의 과거 경기에 빠져들었다.
***
1958년 5월 첫째 주 토요일.
수많은 사람들이 영국 축구의 성지, 웸블리 경기장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그중 유난히 돋보이는 무리가 둘 있었다.
“와, 저 붉은 셔츠 놈들은 뭐지?”
“유나이티드 응원단이야. 자칭 12번째 선수라고 떠벌리는 놈들이지.”
붉은 레플리카를 걸친 맨유 서포터들은 벌써부터 깃발을 휘두르고 북을 치면서 응원에 열을 올렸다.
“Oh, Manchester∼”
“Is wonderful!”
“Manchester is Wonderful!”
북소리에 맞춰 응원 구호를 연호하고 있을 때, 한쪽에서 요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이게 무슨 소리지?”
“아, 나 저 사람들 알아. 분명 리틀 존을 응원하는 한국인들일걸.”
한복을 걸친 한국인들은 상모를 돌리며 꽹과리와 징, 장구와 북을 신명 나게 두들기고, 태평소를 불러 댔다.
“시끄럽긴 한데 뭔가 활력이 느껴지는 것 같아.”
“와, 저 모자에 달린 리본을 돌리는 것 좀 봐!”
소음 신고를 듣고 달려온 런던 경찰들은 한국인들과 뒤섞여서 춤추며 환호하는 맨유 서포터들을 보고 입을 떡 벌렸다.
“어쩌죠? 체포합니까?”
“유치장 터져 나가게 만들 셈이야? 놔둬. 저러다 말겠지.”
결승에 올라온 팀들 입장에선 오늘이 축제나 마찬가지.
지나친 수준이 아니라면 눈감아 줄 수 있었다.
“근데 오늘 누가 이길까요?”
“자넨 볼턴 원더러스에게 걸어. 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걸 테니.”
“그렇게 멋대로 정하시는 게 어딨습니까?”
이렇게 경기 시작 전부터 분위기가 달아오르는 가운데, 경기장 안으로 10만에 육박하는 관중들이 차곡차곡 자리를 잡아 가기 시작했다.
“와, 이거 장난 아니네.”
경기 전, 필드에서 동료들과 몸을 풀던 준영은 경기장에 들어차는 관중들을 보곤 혀를 내둘렀다.
성대한 결승전이 될 거라 생각은 했지만, 엄청난 규모가 보여 주는 위압감은 저도 모르게 심장을 쿵쿵 뛰게 만들었다.
이 정도 규모는 21세기 월드컵에 나갔을 때도 본 적이 없었으니까.
“어이, 리틀 존, 설마 벌써부터 쫀 건 아니겠지?”
“쫄긴 누가 쫄아요?”
긴장하지 않은 척 큰소리를 치던 준영은 방금 전 살짝 무안을 줬던 데니스 바이올렛을 바라보았다.
비행기 사고 때 당한 부상을 회복해서 돌아온 데니스.
계속 훈련에 동참하다 지난 21일 울버햄프턴전에서 마침내 복귀전을 치렀다.
“컨디션은 좀 어때요?”
“글쎄, 작년 결승전만큼은 아닌 건 분명해.”
그리 말하던 데니스는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근데 생각해 보니 작년 결승전에는 출전하지 않았네. 하하핫.”
“뭡니까, 실없게시리.”
울버햄프턴전에서 맨유는 아쉽게 패배했다.
데니스도 골 맛을 보지 못했는데, 그건 26일 첼시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부상 후유증 같은 건 없어 보이는데……. 아무래도 경기 감각이 많이 떨어져서 그런가?’
새로운 선수들과 손발이 맞지 않는 문제도 있었다.
결국 시간이 약일 수밖에 없지만, 느긋하게 기다릴 수 없는 게 현재 맨유의 상황이었다.
“아무튼 결승 상대가 볼턴이라 다행이야. 오랜만에 골 맛 좀 보겠어.”
데니스는 1월에 볼턴에게 크게 대승을 거둔 일을 떠올리며 경기를 낙관했다.
준영은 웃음을 지으며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어째 볼턴이랑은 좋은 기억이 없단 말이지.’
번든 파크에서는 썩어 빠진 심판 때문에 퇴장을 당하고 팀은 4 대 0으로 대패했다.
1월 홈경기 때 이 패배를 시원하게 갚아 주었지만, 이후 신분 증명 문제가 터지며 곤경에 처했다.
‘이번에는 제발 별일이 없어야 할 텐데.’
무사히 경기를 끝내기를, 그리고 우리 팀이 반드시 승리하기를.
마음속으로 기원을 올린 준영은 예열을 끝내고 동료들과 함께 라커룸으로 돌아왔다.
바로 유니폼으로 환복을 하는 등 경기 출전 준비를 하고 있을 때, 머피 코치가 라커룸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가, 감독님!”
“그동안 다들 잘 지냈나?”
휠체어에 불편한 몸을 실은 이는 바로 맨유의 감독인 맷 버스비.
선수들을 한 차례 슥 둘러본 그는 주장 완장을 차고 있는 준영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존,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이 많았지?”
“아뇨. 고생이라고 할 것까지는 없었습니다.”
“없기는. 어깨가 탈골되어 고생하지 않았나.”
준영의 손을 잡아 도닥여 주는 버스비의 눈이 절로 붉어졌다.
“고맙네. 포기하지 않고 여기까지 와 줘서, 정말… 고마워.”
목이 멘 버스비는 결국 눈가에 맺힌 눈물을 훔쳤다.
그 모습에 준영과 선수들은 눈시울이 붉어짐을 느꼈다.
“감독님, 그 말은 나중에 해 주십쇼.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니까요.”
“이런, 그렇지. 내가 너무 경솔했구만.”
옅은 미소를 지은 버스비는 오늘 출전하는 선수들 모두와 악수를 나누며 선전을 기원했다.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주게.”
“네, 우승컵을 가지고 돌아오겠습니다.”
버스비와 약속을 한 준영은 선수들을 데리고 필드로 나갔다.
자신과 모든 이들의 꿈과 희망을 승리로 일궈 낼 것을 다짐하면서.
***
시대의 거대한 흐름 속에 일개 개인은 무력하게 보이곤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사람의 노력이 사회를 바꾸고, 민족을 구하고, 국가를 변화시키는 일은 엄연히 존재하죠.
그렇게 역사를 만드는 사람들을 우리는 영웅이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