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133. 저력 있는 녀석들
유러피언 컵 4강전 팀의 교체.
UEFA가 이런 말도 안 되는 짓을 시도하는 까닭은 대회 흥행을 위해서였다.
유럽 클럽 최강자를 가리는 대회.
맨유, 버스비의 아이들은 지난 시즌 준결승에 올라 전 대회 챔피언 레알 마드리드를 상대로 선전을 하면서 명성을 떨쳤다.
축구 종가를 대표하는 팀에 걸출한 실력을 가진 젊은 선수들.
유럽 축구 팬들도 관심을 보이던 그들이 불행한 사고로 선수 생활을 접고 말았다.
이제 맨유의 주전은 경험이 부족한 애송이와 후보, 급히 땜빵 된 신참들로 구성되었다.
준결승부터는 각국을 대표하는 스타플레이어들의 치열한 명승부가 벌어지길 기대한 UEFA 입장에서는 김새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준결승전이 시시한 시합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맞아요. 흥행도 흥행이지만, 자칫 대회를 주최하는 우리 유럽축구연맹의 권위가 실추될 수 있소!’
이에 UEFA는 맨유의 사정이 딱하지만, 팀을 교체하려고 했던 것이다.
같은 지역 팀인 맨체스터 시티로.
“지금 장난하는 거요?”
UEFA 측 대리인의 제안에 맨시티 감독 레스 맥도웰이 불쾌한 기색을 보였다.
주장 케네스 반즈도 별반 차이가 없었다.
“지금 우리더러 버스비 꼬맹이들의 대타나 하란 겁니까?”
UEFA 대리인은 반즈의 따가운 눈총에 진땀을 흘렸다.
“너무 불쾌하게 여기지 마십쇼. 지금 유나이티드는 리그 경기도 간신히 진행하는 중이라 들었습니다. 여의치 못한 이웃을 돕는 일이라 생각하면 안 되겠습니까?”
“이건 이웃을 돕는 게 아니라 이웃의 뒤통수를 치는 짓이오.”
맥도웰은 현재 맨유의 자리를 가로챌 생각이 전혀 없었다.
지금 상황이야 어떻든, 저들의 땀방울로 이뤄 낸 결실이다.
그것도 축구 협회의 반대를 무릅쓰고, 아무런 지원도 받지 않은 상태에서 따낸 준결승 티켓.
이걸 가로챘다간 두고두고 불명예가 될 것이 뻔하다.
맥도웰에 이어 반즈가 말했다.
“지금의 유나이티드를 얕보지 마시죠.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그 녀석들, 여전히 저력은 갖고 있으니까.”
FA컵만 봐도 알 수 있다.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유나이티드는 웸블리행을 이뤄 냈다.
“지금 그놈들에겐 절박함이 있어요. 해내고자 하는 의지도 강하죠. 그러니 당신네가 걱정하는 시시한 시합은 되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십쇼.”
“그럼 결론은…….”
“우린 나가지 않을 겁니다.”
반즈의 말에 맥도웰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우리뿐만이 아니지. 잉글랜드의 어느 팀도 당신들이 제의하는 불명예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오.”
“알겠습니다. 그쪽의 뜻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요. 실례했습니다.”
대화를 마치고 UEFA 대리인은 물러났다.
그가 떠난 후, 반즈가 맥도웰 감독에게 말했다.
“이 소식, 버스비 꼬맹이들도 들었을 테죠?”
“당연하지.”
분명히 이를 갈고 있을 것이다.
특히 무너진 팀을 지탱하고 있는 존 Y. 리라면 더더욱.
‘5월 유러피언 컵에서 어떤 경기가 벌어질지 기대가 되는군.’
부디 좋은 시합을 해 주기를.
맥도웰은 이웃이자 라이벌의 선전을 기원했다.
***
프래턴 파크에 맨유 서포터들의 응원 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경기장 한 면을 붉게 물들인 그들이 신나게 함성을 지르는 동안, 홈팬인 포츠머스 팬들은 초조한 표정으로 경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젠장, 초반부터 밀리고 있잖아!”
“이빨 빠진 맨유 정도는 할 만할 줄 알았는데.”
최근 포츠머스는 3연패.
거기다 순위도 20위라서 강등권이 코앞이라 조마조마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맨유전을 반전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며 나왔지만, 정작 휘슬이 울린 후 벌어지는 상황은 기대 이하였다.
원정 팀인 맨유는 초반부터 과감한 공세를 펼쳤다.
존 레논과 어니 테일러가 번갈아 가며 양쪽 측면을 쑤시고 다녔다.
중앙에서는 숀 코너리와 콜린 웹스터가 잇달아 헤딩과 슈팅을 날리며 포츠머스 수비를 흔들었다.
물론 포츠머스도 당하고만 있지 않았다.
그들은 백전노장인 제임스와 191센티미터의 장신 공격수 더간을 앞세워 한 방을 노렸다.
제임스가 빠르게 측면으로 돌파해서 크로스를 올리면 더간이 이를 헤딩으로 터트리는 방식으로 굵직하게 플레이했던 것.
하지만 그 공중전은 제대로 통하지 않았다.
맨유에는 준영뿐만 아니라 180대 선수들도 여럿 있어 공중전이 쉽지 않았다.
“젠장, 또 놓치다니!”
빌 포크스의 마크에 헤딩슛 기회를 놓친 더간은 분통을 터트렸다.
유나이티드의 소문난 장신 수비수 존 Y. 리에게 막힌 것도 아니고, 자신보다 작은 녀석에게 공을 빼앗기다니!
‘흥, 이런 녀석 정도는 내 선에서 충분히 정리가 가능해.’
더간은 공중전 능력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상당히 전투적인 기질이 있었다.
헤딩뿐만 아니라 왼발 슛도 수준급.
그래서 다른 팀 수비수들은 상당히 버겁게 여기는 선수였다.
하지만 빌 포크스는 달랐다.
더간보다 더 헤딩을 잘하고, 몸싸움에도 강하며 드리블이나 슈팅도 뛰어난 선수와 매일 훈련에서 상대해 왔으니까.
어디 그뿐이던가.
준영이나 숀과의 몸싸움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 웨이트 트레이닝에도 열중하고 있었다.
‘빌이 상당히 안정적으로 수비를 해 주는군. 이러면 하프백에 있는 리틀 존이 좀 더 공격에 가담할 수 있겠지.’
머피 코치의 예상대로 준영은 바비 찰튼과 함께 포츠머스 중원을 쓸고 다녔다.
이에 포츠머스 선수들은 어떻게든 맨유의 공격을 주도하는 준영을 막으려 애썼다.
“저 자식, 어깨를 다쳤다며?”
“아직 덜 나았다더군. 몇 번 차징을 걸어 주면 겁나서 못 올라올걸?”
“팔을 다쳤으니, 이번엔 다리 치료를 받게 해 줘야지.”
거친 차징과 발이 높은 태클.
견제에도 불구하고 준영은 쉽사리 공을 빼앗기지 않았다.
오히려 그에게 수비가 쏠리는 바람에 정작 중앙의 방비가 소홀해졌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준영이 패스를 찔러 주었고, 콜린이 이를 정확히 골대에 때려 넣었다.
“드디어 터졌다!”
“기다리고 있었다고!”
전반 19분, 콜린의 선제골에 맨유 서포터들은 신이 나서 펄쩍펄쩍 뛰었다.
그런데 기뻐하는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또 골이 터졌다.
실점으로 포츠머스 진영이 어수선한 틈을 타서 어니 테일러가 과감한 돌파로 추가 골을 만들어 낸 것이다.
순식간에 스코어는 0 대 2.
원정 팀 맨유는 2점을 먼저 리드해 가며 경기를 완전히 지배했다.
“전반에 승부를 낸다. 강등권에 있는 폼페이(* 포츠머스 FC의 별명)랑 놀고 있을 틈은 없어!”
준영의 말에 맨유 선수들은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팀 상대로 빌빌거리고 있으면 UEFA 놈들이 비웃을 거야.”
“우리가 여전히 강팀이라는 걸 보여 주자고!”
다들 전의가 불타올랐다.
얼마 전 UEFA가 4강전 팀 교체라는 진짜 말도 안 되는 짓을 하려고 들었기 때문.
맨체스터 시티가 거절하면서 없던 일이 되었지만, 맨유 선수들의 불쾌감과 분노는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그들의 화산 같은 분노에 애꿎은 폼페이, 아니 포츠머스만 휘말려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터엉-!
“우와아아앗!”
방금 준영이 찬 슈팅이 크로스바를 맞고 튕겨 났다.
거의 40미터는 족히 되는 거리에서 작정하고 날린 강슛은 포츠머스 선수들의 심장을 덜컥 내려앉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방금 저게 들어갔다면 정말 오늘 경기, 그대로 접어야 할 뻔했다.
“리바운드 볼은……?”
“괜찮아. 우리 편이 잡았어.”
안심하던 포츠머스 선수들은 존 레논이 벼락같이 공을 가로채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이건 정말 제대로 허를 찔렸다.
이후에는 역습이라 생각해서 다들 유나이티드 진영 쪽으로 달려가거나 돌아서고 있던 상황이었으니까.
“저, 저 애송이를 얼른 막아!”
“크로스를 올리지 못하게 해!”
공을 가로챈 레논은 크로스를 올리지 않았다.
일전에 준영이 가르쳐 준 대로 슬쩍 페인트를 넣으며 달려드는 수비수를 제쳤다.
그리고 반대편 골포스트를 노려보며 공을 강하게 찼다.
“저, 저거……!”
잔디 위를 살짝 떠서 날아가던 슈팅은 골키퍼의 손끝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고는 골포스트를 맞히고 그대로 골대 안으로 굴러들어갔다.
“3 대 0이다!”
“크하하! 간만에 다득점 경기로구만!”
맨유 서포터들은 존 레논의 데뷔 골을 축하하며 아낌없는 박수와 함성을 보냈다.
그러다 누군가의 입에서 노래가 흘러나왔다.
한 명이 부르자 주변에 있던 이들도 같이 부르고, 이윽고 모두가 함께 부르기 시작했다.
“거치른 벌판으로~ 달려가자!”
“으쌰라~ 으쌰~”
“내일의 희망을~ 마시자!”
김수철의 ‘젊은 그대’.
준영은 이 곡 가사를 영어로 바꿔서 윌리엄 터너를 비롯한 맨유 서포터들에게 퍼트렸다.
가사도 괜찮고, 노래도 신명 나서 다들 금방 익혀서 불러 댔다.
그 바람에 21세기 대한민국 축구대표팀의 응원가가 맨유의 응원가로 자리 잡게 되었다.
“아~ 아~”
“태양 같은 젊은 그대~!”
경기장을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노랫소리에 준영은 어깨를 연방 들썩였다.
같이 흥이 올랐던 레논이 말했다.
“이거 정말 좋은 곡이네요.”
“그래. 이기고 있을 때 들으면 더 신나는 곡이지.”
더욱 흥이 오른 맨유 선수들은 계속해서 포츠머스를 몰아붙였다.
이미 3점을 리드하고 있었지만, 그 정도에서 만족하고 싶지 않았다.
***
불타오른 전의만큼이나 적극적으로 경기에 임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그들은 후반전에도 3골을 더 몰아치며 6 대 0이라는 압도적인 점수 차로 경기를 끝냈다.
“이만하면 우릴 깔보지 못하겠지?”
“에이, 이 정도로는 안 되지. 버밍엄, 울버햄프턴도 잡아야…….”
준영은 시원한 대승으로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선수들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그러다 막 샤워를 마친 레논을 보고 어깨를 도닥였다.
“오늘 정말 잘해 줬어. 네가 오늘 대승의 주역이야.”
“그냥 열심히 한 건데……. 고마워요, 주장.”
전반에 터진 레논의 세 번째 골이 아니었으면 경기가 그렇게 쉽게 가지 않았을 것이다.
레논도 자신의 데뷔 골로 팀이 크게 이겨서 몹시 기뻤다.
“근데 너 그 축구화, 내가 준 게 아니구나.”
“네. 그게 좋긴 한데, 아직은 계속 신던 게 익숙해서요.”
조셉 포스터와 함께 나2키를 운영하는 준영은 맨유와 스폰서십 계약을 맺으면서 선수들이 사용하는 물품을 지원했다.
축구공과 축구화, 그리고 좀 더 가볍고 땀을 잘 배출하는 소재로 만든 유니폼과 훈련복 등등.
‘아직 품질은 21세기에 미치지 못하지만, 그래도 원래 쓰던 것보다는 훨씬 낫단 말이지.’
거기다 샘플 자체가 21세기 용품이다 보니 디자인도 상당히 세련된 편.
선수 유니폼뿐만 아니라 서포터들의 레플리카도 마찬가지라서, 맨유 레플리카가 패션 잡지에 실리기도 했다.
당연히 나2키의 브랜드 가치도 상승했다.
‘물 들어올 때 노 젓는다고… 조셉이 사업 규모를 늘리고 해외 생산 시설을 지으려고 드는 것도 이해가 된단 말이지.’
준영은 그 해외 생산 시설을 지을 곳으로 한국을 추천했다.
하지만 한국에서 쓸 만한 인재나 협력 업체를 구하지 못하면 그대로 없던 일이 된다.
‘억관 아저씨에게 부탁했는데 아직 연락이 없으니…….’
금방 될 일이 아니란 것은 안다.
그래도 준영은 결과가 빨리 나오기를 기대했다.
기왕이면 좋은 결과가 나오기를 말이다.
***
20세기 초중반에는 스포츠 대회 주최나 진행에서 지금 시점에서 보면 좀 황당한 일이 많았습니다.
초창기 올림픽에는 비둘기 사격이나 오토바이 경주, 대포 쏘기(!) 등의 종목이 있었습니다.
월드컵도 초기에는 예선 조 편성이나 토너먼트 편성도 좀 이상했고요.
유러피언 컵에서도 본문에 언급된 대로 주최 측에서 진짜 엉뚱한 짓을 하려고 했습니다.
이게 미안했던지, 다음 시즌에는 맨유에게만 특별히 출전권을 줬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여전히 뮌헨 참사 악몽을 떨치지 못한 데다 재정적으로 어려웠던 맨유는 기껏 받은 출전권을 제대로 써 보지도 않고 대회를 포기해 버렸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