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전드 1957-132화 (132/400)

Round 132. 미친 얘기 같지만 사실

최근에 맨유가 겪고 있는 석연찮은 판정.

이 배후에는 분명히 루스가 있다.

이렇게 추정한 준영은 절친한 번즈 요원은 물론, 따로 탐정을 고용해서 최근 스탠리 루스의 행적을 조사했다.

그 결과 상당히 의심할 만한 행적들을 밝혀냈다.

심판 위원회 소집, 맨유 경기에 배정된 심판들의 교체 등등.

‘결정적인 증거는 없지만, 이것만 해도 언론에 크게 불을 지피기에는 충분하군.’

억지로 증거를 찾을 필요는 없다.

자극적인 이슈를 좋아하는 기자들에게 적당한 건수를 던져 주면 알아서 조사하니까.

더구나 맨체스터 가디언과 같은 진보계 언론사들은 고리타분하고 보수적인 세력의 비리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다.

‘불을 지르는 것보다 불을 끄는 게 더 힘든 법이지.’

구린 짓을 했으면 그만큼 쓴맛을 봐야 마땅하다.

그와 동시에 준영은 루스 개인의 치부에 대해서도 조사했다.

그의 부정을 파헤쳐서 이 기회에 축구계에서 완전히 퇴출시킬 생각이었던 것.

그런데 뜻밖의 사실이 밝혀졌다.

“사실입니까?”

“뭐 하러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고용한 탐정의 정보와 대조해 보면 금방 밝혀질 일인데요.”

번즈 요원의 말대로 탐정 역시 똑같은 사실을 전달했다.

인종 차별주의자에, 뒤에서 수작을 부린 일을 빼면 루스에겐 다른 부정부패는 없다는 것.

그는 결코 뇌물을 받지 않았고, 사생활도 깨끗했다.

몇 해 전에 부인과 사별한 후에는 독신 생활을 이어 가면서 추문이 될 만한 일도 없었다.

오히려 현대적인 판정 시스템을 구축하고, 영국 축구계에 여러모로 공헌한 공로로 대영제국 최고 훈장과 기사 작위를 받았다.

“거참, 인종 차별이나 하는 작자라서 본성까지 썩어 있을 줄 알았는데…….”

“그건 존이 잘못 생각하는 겁니다. 루스 총무는 악하다기보다 가치관이 다른 겁니다.”

루스는 빅토리아 시대, 19세기 말기에 태어났다.

어린 시절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의 위상을 보며 자랐고, 그만큼 대영제국에 대한 자부심과 백인 우월주의에 젖어 있었다.

“존, 당신이 살던 21세기에서는 인종 차별이 결코 용인되어서는 안 될 불의로 취급받겠지요.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아요.”

“지금도 공식적으로는 인종 차별을 금지하고 있잖아요.”

“물론 그렇죠. 그러니 본국도 현재 남아공에서 진행되는 인종 차별 정책에 비판적인 것이고요.”

문제는 아직 옛날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다는 점.

루스는 바로 그런 부류였다.

그가 보기에 준영은 자신이 오래 믿어 오던 가치관을 부수는 마귀 같은 존재였다.

“그래서 부정인 걸 알면서 날 퇴출시키려고 그 난리를 치고, 판정에까지 개입해서 나와 내가 몸담은 팀을 부정하려 했던 거군요.”

“맞아요. 신념에 불타는 인간은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 모르죠. 아니, 정당화시킵니다.”

“히틀러나 스탈린처럼 말이군요.”

준영은 이번 일을 계기로 배운 것이 있었다.

단순한 선악 구도, 흑백 논리로 사람을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

그리고 올곧은 사람도 괴물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

“뭐야, 왜 갑자기 아무런 말이 없는 거냐?”

초조해하던 루스의 물음.

잠시 회상에 빠져 있던 준영은 유감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잠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처칠 각하를 만났을 때처럼, 총무님을 만났으면 어땠을까 하고 말이죠.”

처칠도 사고방식이 루스와 크게 다르지 않은 구시대 사람.

하지만 계속 대화를 나누고 만남을 가지면서 인정을 받고 친분을 쌓았다.

“하지만 처칠 각하 때와 달리, 총무님과 저는 서로를 알기보다 적대해 버리고 말았죠. 그 앙심은 양자 모두 쉽게 지우지 못할 겁니다.”

“쓸데없는 소리는 집어치워. 날 협박할 속셈으로 찾아온 거 아니냐? 그러니 방금 전에 적반하장이니 하는 말을 주절댄 거잖나!”

“네, 맞습니다. 친하게 지내긴 힘들어졌죠. 대신 피곤하게 지내지는 말았으면 합니다.”

준영은 품에서 꺼낸 종이 하나를 루스에게 건넸다.

거기엔 루스와 자주 만난 심판 위원회 임원들, 그리고 갑작스러운 심판 교체와 관련한 정황들이 간략하게 적혀 있었다.

‘이, 이놈이 정말 알아챘구나!’

이 상황에서 어떻게 알아냈는지, 얼마나 더 깊게 알고 있는지는 생각할 필요가 없다.

이것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머리를 굴려야 하는 상황이니까.

“보다 상세한 조사 내역이 있습니다. 아마 언론에 공개하면 얼씨구 좋다면서 시끄럽게 떠들어 대겠죠.”

“크윽!”

“듣자니 총무님은 올해 FIFA 집행위원회에 합류하실 거라죠? 분명히 차기 회장직을 노리실 것 같은데, 이런 시끄러운 일이 벌어지면 힘들지 않겠습니까?”

“이 원숭이 놈이……!”

으르렁대면서 튀어나오는 루스의 혐오 발언에 준영은 싸늘하게 받아쳤다.

“그런 자학적인 언행은 삼가십쇼. 본인이 원숭이 따위에게 당하는 얼간이라고 말하는 것밖에 안 되니.”

루스의 얼굴은 삶은 문어처럼 벌겋게 달아올랐다.

주먹을 꼭 말아 쥔 것이 금방이라도 휘두를 것만 같았다.

하지만 지금 자신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건 준영이었다.

만약 이번 일로 FIFA 집행위원회에 합류하지 못하면 현 FIFA 회장인 아서 드루리의 뒤를 잇지 못하게 된다.

그럼 FIFA에서 영국 축구의 입지가 좁아지게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할 터.

“…원하는 게 뭐냐?”

“뭘 원하는지는 총무님이 더 잘 아실 텐데요? 더 이상 판정에 부정하게 개입하지 마십시오.”

“그것뿐인가?”

“네. 저도, 총무님도 할 일이 많지 않습니까. 서로 귀찮게 치고받지 말고, 소 닭 보듯이 지내는 걸로 족합니다.”

준영은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았다.

어차피 루스가 제대로 들어주지 않을 게 뻔한 데다, 지나친 요구를 했다가 역공을 당할 빌미를 줄 수 있기 때문.

“알겠다. 뜻대로 해 주지. 더는 개입하지 않으마.”

“네, 지켜보겠습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자리에서 일어난 준영은 칵테일 바에서 나오기 무섭게 스마트폰을 꺼내 녹음 어플을 껐다.

루스가 판정 개입을 인정하는 말까지 녹음해 놨으니, 혹시나 또 뻘짓을 시도하면 그땐 진짜 대형 화재급으로 불을 활활 지펴 줄 생각이었다.

“빌어먹을! 내가, 대영제국의 서훈자이자 기사인 내가! 원숭이 따위에게……!”

루스는 부들부들 떨었다.

하지만 분노할수록 느껴지는 건 자괴감뿐.

느긋하게 칵테일 한 잔을 즐길 시간에 그는 10년은 더 늙어 버렸다.

***

런던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온 준영은 선수들과 함께 회복 훈련을 진행했다.

4월 16일 포츠머스 원정, 그리고 19일 홈에서 버밍엄 시티와의 경기가 있었다.

거기서 끝이 아니다. 21일에는 현재 1위 울버햄프턴과 격돌해야 하고, 다시 이틀 후에 뉴캐슬과 시합, 그리고 26일에 첼시 원정이 있었다.

이 일정 역시 만만치 않게 빡빡했다.

‘루스 영감탱이에게 다음 시즌 일정을 똑바로 짜라고 할 걸 그랬군.’

정말이지 교체 규정도 없으면서 너무나 빡빡한 일정의 연속.

투덜거릴 틈은 없었다.

그럴 시간에 조금이라도 더 회복에 힘쓰고, 든든하게 먹여 체력을 붙여 놓아야 한다.

“주장, 궁금한 게 있어요.”

훈련이 끝날 무렵, 존 레논이 다가와서는 말을 붙였다.

혹시 음악과 관련한 이야기일까, 새로운 노래를 가르쳐 달라고 조르는 건 아닐까.

안 그래도 BTS 다이너마이트 사건이 마음에 찔렸던 준영은 사전에 실드를 쳤다.

“지금은 축구와 관련된 질문만 받을게.”

“네, 바로 그겁니다.”

고개를 끄덕인 레논이 곧장 말을 이어 나갔다.

“토트넘전에서 주장의 플레이를 봤어요. 상대의 거친 차징을 마치 물 흐르듯이 피해 내더군요.”

“아, 그거…….”

“그 정도로 상체를 기울이는데도 중심을 잃지 않고 볼 컨트롤도 잘하더군요. 저는 따라 해 봤는데 안 되더라고요.”

안 되는 건 레논뿐만이 아니었다.

알렉스 퍼거슨이나 케니 모건스 등도 준영의 플레이를 따라 해 봤지만,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기 일쑤였다.

그렇다 보니 다들 준영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건 말이지. 코어 훈련을 잘하면 돼.”

“코어 훈련?”

“그러고 보니 너희 신참들에겐 제대로 설명을 안 했구나. 코어란 말이지. 척추와 복부, 허리, 골반 쪽의 뼈와 근육을 뜻하는 거야. 그걸 강화하는 훈련이지.”

신체의 코어 근육을 단련하면 밸런스 유지에 굉장한 도움이 된다.

90분을 뛰는 동안 다양한 움직임을 취하고 급격한 방향 전환을 반복해야 하는 축구 선수 입장에선 코어 근육 강화로 밸런스를 높이는 게 무척 중요했다.

“드리블에만 유리한 건 아니야. 효율적인 힘의 전달도 가능하기 때문에 더 강력한 슛도 때릴 수 있지.”

“아, 그래서 주장의 슛이 강한 거군요.”

“난 그냥 덩치발로 차는 줄 알았더니만.”

어느새 모여든 선수들은 준영의 설명에 귀를 기울였다.

“그런데 그 코어 훈련은 어떻게 하는 거죠?”

“간단해. 너희도 내가 하는 걸 한 번 본 적이 있을 거야.”

준영은 직접 자세를 취하며 플랭크를 비롯해 몇 가지 코어 훈련법들을 가르쳐 주었다.

“아, 저거였나?”

“나도 본 적이 있어. 무슨 요가 비슷한 건 줄 알았는데…….”

“그거 동양의 무술 수련법인가요?”

코어 훈련은 21세기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기에 이 시대 사람들은 잘 몰랐다.

준영은 맨유에서는 물론 허더스필드 타운에 있을 때도 이 훈련을 가르쳐 줬지만, 제대로 하는 이들은 드물었다.

너무 지루한 데다, 효과가 있는지 의문스럽기도 해서였다.

거기다…….

“조심해. 그거 장난 아니다?”

“그래, 보기보다 굉장히 힘들어.”

“난 슈퍼맨인지 뭔지 하다 죽는 줄 알았다니까.”

이미 코어 훈련의 쓴맛을 봤던 고참들은 어린 선수들에게 경고했다.

코어 훈련을 꼬박꼬박 챙겨 하는 이는 숀 코너리와 부상당한 던컨 에드워즈를 빼면 거의 없었다.

아무튼 겪어 보지 못한 신참들은 어리둥절해하다가 곧 따라 해 보고는 금방 이유를 알게 되었다.

간단한 동작이라 생각했던 게 몇 초 만에 사람을 한계까지 몰아넣었기 때문이다.

“허억, 이거 정말 장난 아닌데?”

“으윽… 뱃살이 당겨.”

쉽게 할 만한 게 아니다.

대부분의 선수들이 ‘포기하면 편해.’라고 생각하고 슬그머니 관두는 가운데, 알렉스와 레논만이 계속해 나갔다.

“그만. 첫날부터 무리한다고 금방 단련되는 게 아니야.”

“그럼 얼마나 해야 되죠?”

“최소 한 달은 꾸준히 해야 효과가 보일 거야.”

준영이 좀 더 상세한 훈련 진행에 대해서 설명해 주고 있을 때였다.

구단 직원에게 뭔가를 전달받았던 지미 머피 코치가 버럭 언성을 높였다.

“뭐라고? 그게 무슨 개소리야! 만우절도 한참 지났다고!”

“제가 없는 얘기를 지어내겠습니까? 분명히 그쪽에서 그렇게 제의했답니다.”

뭔가 심상치 않다.

준영과 선수들은 곧장 코치 곁으로 다가와 물음을 건넸다.

“무슨 일입니까?”

“그게 UEFA 놈들이 말이야. 우리 팀 전력이 정상이 아닐 것 같으니 유러피언 컵 4강전 출전을 맨체스터 시티에게 넘길 생각을 하고 있대.”

“예?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이죠?”

“이미 맨체스터 시티에 제안을 했다고 하는군.”

준영은 머피가 방금 전 왜 그리 분개했는지 알 것 같았다.

‘이놈들, 미친 거 아냐?’

이 시대 축구판에서 어처구니없는 일들을 봐 왔지만, 이런 경우는 정말 생각지도 못했다.

***

스탠리 루스는 사생활에 문제도 없고, 뇌물도 단호히 거절할 정도로 청렴한 면모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일전에 언급한 대로 아파르트헤이트를 지지하고 유럽 이외 지역을 푸대접하는 등, 영 좋지 않은 행보를 보였죠.

결국 이게 문제가 되어 이후 브라질의 주앙 아벨란제에 밀려 FIFA 회장 자리에서 내려오고 말았죠.

아벨란제는 월드컵 출전 티켓을 계속해서 늘리며 남미와 아프리카, 아시아 지역 국가들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문제는 이 사람이 순수한 의도에서 그런 건 아니라는 거죠.

당시 월드컵 TV 중계권료가 폭등하면서 FIFA의 수입이 많아졌거든요.

그래서 경기 수를 늘릴 목적으로 출전 국가들도 계속 늘려 나갔던 것이죠.

당연히 아벨란제 집권기 동안 FIFA는 완전히 배금주의에 물들었고, 회장 투표도 금권 선거로 전락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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