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전드 1957-130화 (130/400)

Round 130. 붉은 제국의 기상

카린의 생일날.

프레드로 저택의 홀에서 성대한 생일 파티가 열렸다.

홀 중앙에 놓인 3단 케이크에는 카린의 나이에 맞는 초가 꽂혀 있었다.

그 초에 불이 켜지자, 앤지가 치는 피아노 반주에 맞춰 다들 생일 축하곡을 불렀다.

“Happy birthday to you∼ Happy birthday to my∼”

노래가 끝나자 한껏 볼을 부풀린 카린이 훅 불어 초를 껐다.

환호와 갈채를 보낸 손님들은 카린에게 다가와 선물을 건넸다.

“생일 축하해, 카린.”

“항상 축복만이 가득하길…….”

카린의 친구들과 알버트의 지인들, 그리고 이웃 사람들 등등.

준영도 이런 증정 행렬에 끼어 있다가 자신이 마련한 선물을 건넸다.

“와, 상자가 커다래!”

뭐가 들었는지 몹시 궁금했던 카린은 곧장 포장을 뜯어 내용물을 확인했다.

“망원경?”

“그래, 천체 망원경이야.”

아이들이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조작이 쉬우면서도, 목성을 관찰할 수 있을 정도로 배율이 높다고.

“카린이 좋아하는 외계인이나 UFO를 찾는 데 도움이 될 거야.”

“와, 고마워, 오빠야!”

기뻐하니 다행.

역시 선택하기를 잘했다 싶었다.

그런데 카린의 마음을 사로잡는 선물을 준 사람은 준영만이 아니었다.

“생일 축하한다, 꼬마 아가씨. 이 아저씨는 아가씨를 위한 기사를 데려왔단다.”

“기사?”

허더스필드의 감독 빌 섕클리.

카린은 그의 옆에 서 있던 데니스 로를 바라보았다.

처음 보는 얼굴은 아니다.

데니는 준영에게 축구 테크닉을 배우러 종종 프레드로 저택을 찾아오니까.

“데니 오빠가 카린의 기사가 되는 거야?”

“아니, 나는 아니고…….”

멋쩍은 미소를 지은 데니는 손에 든 케이지에서 노란 얼룩 고양이를 꺼냈다.

이제 갓 젖을 뗀 어린 고양이는 마치 동화에 나오는 요정 캐시 같았다.

“와, 귀여워!”

“앞으로 이 녀석이 찍찍이들을 잡아 카린을 지켜 줄 거란다. 그러니 잘 보살펴 주렴.”

“네, 고마워요!”

고양이가 무척 맘에 드는지 카린은 곧장 부둥켜안고 볼을 비볐다.

그렇게 선물 증정이 끝나자, 다들 만찬을 즐기며 대화를 나누었다.

“존, 다친 팔은 좀 어때?”

섕클리의 물음에 준영은 오른팔을 움직여 보이며 말했다.

“이제 그럭저럭 훈련을 할 만한 수준입니다. 그래도 아직은 조심하고 있습니다.”

“그래, 너무 심하게 다치지 않아 천만다행이군.”

준영과 섕클리가 대화를 주고받고 있을 때, 데니는 준영의 곁에 붙어 있는 소년을 슬며시 째려보았다.

“형님, 쟤는 누구죠?”

“아, 인사해라. 알렉스 퍼거슨이라고, 너랑 같은 스코틀랜드 출신이야. 알, 이쪽은 허더스필드의 데니스 로야.”

준영의 소개에 알렉스는 데니에게 손을 내밀었다.

“만나서 반가워. 안 그래도 한번 보고 싶었어. 주장한텐 이야기를 많이 들었거든.”

준영에게만 듣지 않았다.

구단 관계자들이나 언론사 기자들이 자신과 데니스 로를 비교하는 걸 들은 적이 있었다.

같은 스코틀랜드 출신에 비슷한 또래, 포지션도 같은 공격수였으니까.

하지만 친밀감보다 경쟁심과 더불어 강한 질투를 느꼈다.

무명이었다가 준영에게 발탁되어 뜬 자신과 달리 데니스 로는 많은 이들이 호평하는 유망주였으니까.

‘쳇, 주장은 이런 놈이 뭐 대단하다고 칭찬을 한담.’

‘망할 자식! 듣보잡 주제에 감히 형님이랑 같이 뛰어?’

그 자리는 내 것이어야 했어!

뮌헨 비행기 사고 이후, 맨유로 이적 혹은 임대를 꿈꿨던 데니는 질투 어린 시선으로 알렉스를 째려보았다.

당연히 악수를 하는 둘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힘내라, 2부 리그 선수. 다음 시즌에도 2부에서 뛸 거라지?”

“너나 잘해. 무명 선수가 유나이티드 공격진에서 자리 잡기 굉장히 힘들 테니까.”

“하하하, 그런 건 2부 리그 선수가 걱정 안 해 줘도 돼.”

“과연 그럴까? 다음 시즌에 2부 리그 선수에게 자릴 뺏길지도 모르는데?”

미래의 명감독 vs 미래 맨체스터의 왕.

둘의 눈에서 스파크가 튀었다.

금방이라도 크로스 펀치가 오갈 듯한 분위기에서 둘 다 준영에게 덜미를 잡혔다.

“남의 잔칫날에 와서 싸우지 마, 인석들아.”

“아, 안 싸워요.”

“맞아요. 사나이답게 친분을 쌓는 거라고나 할까.”

둘을 화해(?)시키고 돌아온 준영에게 빌 섕클리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저놈들, 나중에 크게 될 거야.”

섕클리도 준영이 글레스고에서 데려왔다는 알렉스 퍼거슨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구경한 바 있었다.

데니만큼 발재간이 뛰어나진 않지만, 상당히 저돌적이고 영리하게 플레이할 줄 알았다.

그래서 좋은 기회도 곧잘 잡곤 했다.

“장차 영국, 아니 어쩌면 유럽을 흔들어 놓을지도 모르겠군.”

“분명히 그럴 겁니다. 둘 다 장래성이 크니까요.”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한 준영.

그는 이어지는 섕클리의 말에 깜짝 놀랐다.

“얼마 전에 날 찾아온 손님이 이렇게 이야기하더군. 영국 최고의 클럽을 지휘하고 싶지 않느냐고 말이지.”

“예? 영입 제안이 왔다고요?”

준영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섕클리는 웃음을 지었다.

“그래. 버스비가 몸 상태가 안 좋아서 짐을 쌌냐고 하니까 그 양반이 고개를 젓더군. 유나이티드에서 온 게 아니라고 말이야.”

‘리버풀에서 왔구나.’

방금 섕클리가 말한 건 그가 리버풀 감독을 맡게 되었을 때의 일화였다.

그런데 준영이 알기로 섕클리가 리버풀에 부임하는 건 1년이나 더 지난 후였다.

대체 어째서 벌써 제안이 온 건가?

혹시 자신이 과거로 온 것 때문에 역사가 바뀌고 있는 걸까?

“그 양반은 리버풀의 윌리엄스 회장이었어. 내가 오면 전폭적인 지원을 해 주겠다고 약속하더군.”

“그래서 가실 겁니까?”

“내 지도자 경력의 마지막 기회가 될 수 있겠단 생각이 들더군.”

섕클리는 리버풀 측의 제안에 마음이 기울어진 상태였다.

야심이 없이 쓸 만한 선수는 팔아 치우고 보는 허더스필드 구단에 불만이 많았으니까.

올 초만 해도 그랬다.

팀에 연전연승을 안겨 준 신성(新星)을 곧장 팔아 치웠으니까.

만약 구단이 준영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보내지 않고 지켰더라면 이번에 리버풀의 제안을 반려했을 것이다.

“감독님이라면 잘 해내실 겁니다.”

“고마워. 언젠가 필드에서 만나는 날이 왔으면 좋겠군.”

앞으로 몇 년 후, 섕클리가 기대하는 상황이 벌어질 것이다.

60년대 리버풀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호적수로 부상하게 되니까.

앞으로 치열하게 벌어질 노스웨스트 더비.

준영은 그 라이벌 매치가 매우 기대되었다.

***

리버풀 FC.

1892년 머지사이드 주 리버풀 항을 연고지로 창설된 이 축구팀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챔피언에 올랐지만, 1953-1954 시즌 부진으로 디비전 2로 강등되었다.

그 뒤로는 암흑기.

안필드라는 거대 구장과 6만의 열성 팬을 두고 있지만, 1부 리그로의 복귀는 쉽지 않았다.

아직 경기가 남아 있지만, 이번 1957-1958 시즌도 승격은 희박해 보였다.

“필, 선수 시절부터 자네가 얼마나 우리 팀에 헌신해 왔는지 잘 봐 왔어.”

토마스 발렌타인 윌리엄스.

30년 가까이 리버풀 이사로 활동하다 재작년부터 회장을 맡고 있는 그는 감독인 필립 테일러와 독대 중이었다.

“자네가 얼마나 우리 팀을 사랑하는지 알고 있네. 그래서 더 기회를 주려 했네만… 이번 시즌까지가 한계일 듯싶네.”

“그렇겠지요. 팬들의 불만이 대단할 테니까요.”

필립 테일러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리버풀을 맡기엔 제 능력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말이지요.”

테일러는 성적 부진으로 파면된 도날드 월쉬 감독의 뒤를 이어 지휘봉을 잡았다.

하지만 팀 성적을 올리기란 마음처럼 쉽지 않았다.

자신이 원하는 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전술을 쓰고 싶었지만 냉혹한 현실 앞에 가로막혔다.

무엇보다 다시 팀이 비상하기를 원하는 팬들의 열광적인 소망은 그에게 항상 커다란 부담이 되었다.

“차라리 잘됐습니다. 저보다 뛰어난 지도자가 팀을 맡아 일으켜 세울 수 있다면, 기꺼이 물러날 수 있습니다.”

“그리 생각해 주니 고맙군.”

자리에서 일어난 윌리엄스 회장은 벽에 붙은 지도를 보았다.

브리튼 섬이 크게 나타난 그 지도에는 1부에서 3부까지 풋볼 리그 팀들이 표시되어 있었다.

“우리는 변화가 필요해. 모두가 달라져 가는데, 변하지 않으면 승격은커녕 더 뒤처지고 말겠지.”

“회장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그 변화의 바람을 가져온 녀석이 바로 존 Y. 리다.

홍콩에서 왔다는 이 동양인 선수는 영국 축구인들에게 정말 적잖은 쇼크를 주었다.

유럽 선수보다 월등한 신체에 강인한 체력, 거기다 엄청난 테크닉까지.

‘아직도 잊히지 않아. 시즌 초 허더스필드와의 경기는!’

그때 리버풀은 외계인 같은 존 Y. 리에게 두 번이나 농락당했다.

현재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주장을 맡고 있는 놈은 1부 리그 역시 흔들어 놓았다.

다들 놈을 막을 선수를 찾고, 놈을 무력화할 전술을 생각해 내느라 여념이 없었던 것.

변화의 바람은 이렇게 나타나게 된 것이다.

“아 참, 다음 시즌부터 새로 맡을 감독이 누굽니까? 혹시 벌써 합의를 마친 겁니까?”

“그래, 빌 섕클리야.”

“허더스필드의 감독 말입니까? 확실히 그 사람이라면 저보다 나을 것 같군요.”

그리 대단치 않은 선수들을 데리고 괜찮은 성적을 내는 사람이다.

거기다 축구에 대한 열정도 강하고, 뛰어난 선수를 발굴하는 능력까지 갖고 있었다.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회장님.”

“무엇인가? 가능한 한 들어주지.”

윌리엄스 회장이 흔쾌히 수락하자, 테일러 감독은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무능한 제가 물러나더라도 기존 코칭스태프들은 남겨 주십시오.”

루벤 베넷, 조 페이건, 밥 페이즐리.

이 3명의 코치와 트레이너들은 테일러 본인이 과분하게 느낄 정도로 뛰어난 역량을 가지고 있었다.

“그 친구들은 분명히 새 감독, 빌 섕클리 밑에서도 잘 해낼 수 있을 겁니다.”

“그 점은 걱정 말게.”

윌리엄스 회장이 흔쾌히 수락했다.

다른 코치들은 몰라도 밥 페이즐리는 자신이 임명했다.

테일러의 부탁이 아니더라도 남길 생각이었다.

“그리 들어주시니 안심하고 물러날 수 있겠군요. 아무튼 결정이 났으니 저는 남은 일정을 마저 소화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고맙네, 필. 그리고 미안하네.”

테일러의 협조로 감독 교체는 원만하게 진행될 것 같았다.

하지만 다음 시즌 선수단 구성 등 아직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많았다.

그것은 빌 섕클리가 정식으로 부임하면 진행될 것이다.

“변화해야 해. 그게 성공하면 도약하는 일도, 정상에 오르는 일도 가능하겠지.”

풋볼 리그 우승, 그다음은 유럽 제패.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맷 버스비가 노리던 유러피언 컵 우승이 목표가 될 것이다.

‘안타깝게도 유나이티드는 불의의 사고로 목표가 멀어져 버렸지. 어쩌면 우리가 최초로 유럽을 제패할 수 있을지 모른다!’

섕클리와 뜻이 맞는 야심가 토마스 윌리엄스.

그의 결단에 의해 붉은 제국은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

필립 테일러는 18년간 리버풀에서 300경기 넘게 뛰었습니다. 2차 대전이 끝나고 1946-1947 시즌에 리버풀에 우승을 안겨 주기도 했죠.

주장으로서 팀에 상당한 헌신을 했기에 1954년 은퇴 직후, 곧장 리버풀의 감독으로 부임할 수 있었죠.

하지만 감독으로서 두각을 보이기에 당시 그는 너무 젊었습니다.

지도 경험이 일천한 젊은 감독의 성적치고는 나쁘지 않았지만, 리버풀 팬들은 만족하지 못했죠.

결국 물러났지만 그가 남겨 놓은 3명의 코치들, 그중 밥 페이즐리는 이후 빌 섕클리의 뒤를 이어 리버풀의 전성기를 이어 나갔습니다.

그 점에서 미래의 리버풀에 큰 기여를 한 사람이 아닌가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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