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125. 최고의 무대를 향해
준영의 롱 패스를 달려가는 방향으로 떨어트린 알렉스는 폭주하는 기관차처럼 달려 나갔다.
마침 풀럼 측면에는 아무도 없었다.
중앙에 있던 풀럼 수비수 조지 코헨만으로 저지하기에는 무리.
순식간에 만들어진 일대일의 상황.
알렉스는 상대 골키퍼 토니 마세도까지 제쳐 내고 빈 골대로 공을 밀어 넣었다.
“골인… 아니!”
골라인을 넘기 직전, 기를 쓰고 달려온 조지 코헨이 공을 극적으로 걷어 냈다.
“휴, 큰일 날 뻔했군.”
방금 전 코헨은 도박을 했다.
중앙에 있는 자신이 알렉스를 저지할 수 없으니, 일단 골키퍼에게 맡기고 자신은 골대로 가서 슛을 걷어 내기로 한 것.
골키퍼까지 제쳤다고 애송이가 가볍게 슈팅을 날렸으니 망정이지, 강슛을 때리거나 구석을 노렸으면 속절없이 실점을 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아, 저 기회를 놓치다니…….”
“유나이티드 입장에선 진짜 뼈아프겠는걸.”
기자들의 평대로 방금 역습 실패는 맨유 쪽에 아쉬움을 크게 남겼다.
그 여운은 선수들의 집중력을 흐트러뜨리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괜찮아. 실망할 거 없어! 아직 전반 30분도 안 지났다고!”
준영의 격려에도 불구, 알렉스나 다른 젊은 선수들의 머릿속엔 방금 전 찬스가 아른거렸다.
그게 들어갔다면 경기가 잘 풀렸을 텐데.
아쉬움에 발이 무뎌진 맨유 진영으로 풀럼 선수들이 날카롭게 치고 들어왔다.
전반 28분, 로이 벤틀리의 기습적인 중거리 슛이 터졌다.
구석을 노리고 날아든 그 날카로운 슈팅을 해리 그렉이 가까스로 쳐 냈다.
“이안, 뭐 해! 리바운드 볼 잡아!”
공이 오면 걷어 내려던 이안 그리브스의 뒤쪽으로 조니 헤인스가 귀신같이 달려들었다.
냉큼 공을 가로챈 헤인스는 주저 없이 슛!
그러나 갑자기 떡하니 가로막는 커다란 등짝에 막혀 공은 밖으로 흘러 나갔다.
“미안, 주장.”
“알면 정신줄 좀 놓지 마.”
이어지는 코너킥 상황.
잠시 바람을 가늠하던 조니 헤인스가 코너킥을 골대 쪽으로 바싹 붙여 찼다.
그것도 상당히 빠르고 강하게.
‘슛터링?’
준영이 깜짝 놀란 가운데, 해리 그렉이 떨어지는 공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는 쇄도하던 로이 벤틀리, 지미 힐과 부딪쳤지만, 다행히 공을 밖으로 쳐 내는 데는 성공했다.
“괜찮아, 해리?”
“큭, 망할 놈들. 작정하고 부딪치는군.”
1950년대는 골키퍼 보호 규정이 약했다.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21세기만큼 보호해 주는 건 아닌지라 공격수들의 어지간한 차징은 눈감고 넘어가기 일쑤.
골키퍼는 투지로 이를 극복하는 수밖에 없었다.
“난 괜찮으니까 코너킥 좀 빨리 걷어 내 줘.”
“알았어.”
조니 헤인스가 다시 한 번 슛터링을 시도했다.
하지만 이번엔 준영의 머리에 걸렸고, 박스 밖으로 나간 것을 바비 찰튼이 받아 냈다.
역습 찬스.
하지만 풀럼 쪽에서 태클로 거칠게 바비를 쓰러트렸다.
“저건 파울인데?”
심판은 그대로 경기를 진행시켰고, 공을 빼앗은 풀럼은 곧바로 슛을 날렸다.
하지만 부정확했던 슈팅은 골대 위로 훌쩍 넘어갔다.
준영은 곧장 심판에게 항의했다.
“뭐 하는 겁니까? 방금 전 그건 파울이었다고요!”
“정당한 태클이었어.”
“발바닥이 훤히 다 보이는 높은 태클인데 그게 정당하다고요?”
심판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소귀에 경 읽기라는 속담이 이 경우를 말하는 것 같았다.
‘진짜… 요즘 심판들 왜 이래?’
오늘 경기뿐만이 아니다.
지난 번리 원정이나 웨스트 브롬위치 알비온과의 경기에서도 심판들은 슬그머니 상대 팀을 편드는 판정을 하곤 했다.
‘협회에서 지령이라도 떨어진 건가?’
아무래도 지난번에 수정 펀치를 맞은 루스 총무가 뭔가 수작을 부린 것 같았다.
노골적인 편파 판정을 했다간 시끄러울 테니, 이렇게 결정적인 순간에 눈감아 버리는 방식으로 나오는 건 아닌지?
아무튼 그건 경기 끝나고 생각해 볼 일이고, 지금은 바비의 상태를 알아보는 게 중요했다.
다행히 크게 심각하지 않은지 바비는 잔뜩 인상을 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걱정할 필요 없어요, 주장. 뛰는 덴 문제없으니까.”
“알았어. 조심하라고.”
던컨이 없는 지금, 바비는 공수에서 준영의 부담을 줄여 주는 전력의 핵심.
그가 빠지기라도 하면 경기는 힘들어질 수밖에 없었다.
“자자! 정신 똑바로 차리고 작품 하나 만들어 보자!”
해리 그렉은 최전방의 숀에게로 길게 롱 패스를 보냈다.
가슴으로 공을 받아 낸 숀은 곧장 돌아서려다 조지 코헨의 거센 마크에 공을 스탠 크루더에게 보냈다.
크루더는 곧장 측면으로 들어가는 어니 테일러에게 패스.
풀럼 측면을 흔들며 돌파해 들어가던 어니는 중앙으로 치고 들어오는 도슨을 보았다.
‘딱 맞춰 들어오는군. 여기서 패스를 밀어 주면……?’
하지만 어니의 컷백은 간파되었고, 바로 골키퍼에게 차단당했다.
다시 공격 기회는 풀럼에게로 넘어갔다.
골키퍼 토니에게 패스를 받은 지미 랭글리는 빠른 발을 이용, 측면을 따라 맨유 진영 깊숙하게 파고들었다.
그런 그의 앞을 맨유의 로니 코프가 가로막았다.
하지만 공을 한 번 툭 치고 로니를 따돌린 랭글리는 맨유 문전으로 날카로운 크로스를 올렸다.
‘롱 드로인뿐만 아니라 크로스도… 앗!’
크로스 낙하지점으로 움직이던 준영은 쇄도하던 로이 벤틀리와 부딪쳤다.
그 바람에 공은 놓쳤고, 풀럼의 지미 힐이 기회를 잡았다.
잡지 않고 그대로 다이렉트로 날린 지미 힐의 슈팅은 맨유 골대 그물을 세차게 흔들었다.
“역전이다!”
“허, 풀럼이 경기를 뒤집어 버릴 줄이야…….”
전반 38분.
경기가 절반이 지나기도 전에 전세는 뒤집혀 버렸다.
***
맨유 선수들의 동요는 컸다.
오늘 경기도 결국 지고 마는 걸까?
아무래도 FA컵은 여기까지, 준결승에서 끝내게 되는 건 아닌지?
‘어쩌면 이게 당연할지도…….’
‘애초에 우리 실력으론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어.’
무리다.
자신들의 역량으론 여기까지가 한계다.
그렇게 생각하던 그들에게 준영의 말이 날아들었다.
“설마 포기하는 거냐? 웸블리가 코앞인데?”
웸블리 스타디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축구 대회의 종착역.
영국의 축구 선수라면 누구나 꿈꾸는 최고의 무대다.
준영의 말대로 그 영광의 무대가 코앞까지 왔다!
오늘 경기만 이긴다면 꿈은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지금이 후반 막판도 아니고, 이제 전반이 끝날 무렵이야. 그런데 여기서 체념할 건가?”
다들 고개를 저였다.
사실 여기까지 온 건 기존 주전 멤버들의 활약 덕분.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들이 만들어 준 기회를 허망하게 날려 버려서는 안 되니까.
“절대 포기하지 마! 우리가 누구지?”
“Manchester United!”
“그래, 우리가 어떤 팀인지 런던 촌놈들에게 똑똑히 알려 주자!”
꺼져 가던 전의가 다시 불타올랐다.
다시 불을 지피는 데 성공한 준영은 킥오프가 되자, 보다 활발하게 풀럼 진영을 누비고 다녔다.
원래 지미 머피 코치는 준영을 공격에 적극 활용하려 했다.
하지만 상대의 공세가 강하다 보니 앞으로 치고 갈 기회는 많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역전 골이 터지면서 풀럼 선수들은 다 이긴 것처럼 흥분했다.
경계심이 풀렸고, 집중력도 느슨해졌다.
‘이래서 옛날부터 골을 넣은 직후에는 조심하라고 했던 거지.’
서두를 필요는 없다.
준영은 동료들과 패스를 주고받으며 풀럼 진영의 허점을 노렸다.
‘상대 진영에 균열은 있어!’
그리고 그 틈으로 어니 테일러가 뛰어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살짝 공에 스핀을 먹인 준영은 어니의 움직임에 따라 침투 패스를 찔러 주었다.
‘진짜 기가 막힌 패스로군!’
어니는 내심 감탄을 금하지 못했다.
블랙풀에 있을 때, 스탠리 매튜스가 왜 그리도 이 키 큰 동양인에 대해서 수없이 격찬했는지 이제 좀 알 것 같았다.
“이런, 뚫렸다!”
“막아! 놓쳐선 안 돼!”
풀럼 수비진이 어니 테일러를 죄어 왔다.
부지런히 좌우 사방을 살피던 어니는 페널티 아크 쪽으로 패스를 보냈다.
때마침 그쪽으로 들어가던 바비 찰튼이 곧장 슈팅을 날렸다.
잘 만든 활처럼 근사한 호를 그린 슈팅은 풀럼 골대로 빨려 들어갔다.
“우와아아아!”
거대한 함성이 빌라 파크를 뒤흔들었다.
전반 종료 2분을 남겨 두고 첫 번째 골의 주인공인 바비 찰튼이 다시 경기를 원점으로 되돌려 놓았다.
풀럼의 역전 골이 터졌을 때 돌처럼 굳어 버렸던 유나이티드 서포터들은 다시 신나게 깃발을 흔들고 북을 두들겨 댔다.
“거봐, 할 수 있잖아.”
바로 점수가 갱신되는 스코어보드를 보며 준영은 미소를 지었다.
방금 바비의 골은 컸다.
1 대 2로 전반을 끝내는 것과 2 대 2로 끝내는 것은 분위기가 완전히 다르니까.
‘잘하면 2차전 없이 곧장 웸블리로 갈 수 있겠어.’
하지만 방심은 금물.
절대 마음을 놔서는 안 되는 상대임을 알고 있는 준영은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
전반전 2 대 2.
바비 찰튼의 활약으로 경기는 원점으로 돌아왔고, 선수들의 전의 또한 상당히 높아졌다.
분위기가 바뀐 것은 후반전이 시작되자 바로 나타났다.
준영과 로니, 바비를 경유해서 패스를 받은 알렉산더 도슨이 강슛을 날린 것.
비록 골대를 훌쩍 넘어가긴 했지만, 자신감 넘치는 슈팅만큼이나 도슨은 활발히 필드를 누비고 다녔다.
그건 알렉스나 다른 신참 선수들도 마찬가지.
오늘 경기를 무승부로 끝낼 생각도 없고, 하이버리에서 예정된 2차전을 뛸 생각도 없었던 그들은 왕성하게 쏘다니며 풀럼 진영을 흔들어 댔다.
마치 구석에 몰아넣고 두들겨 대는 난투와 같은 상황.
풀럼에는 이 상황을 타개할 만한 선수가 없었다.
분명 공격수들의 기량은 1부 리그 어지간한 팀보다 나았다.
그 때문에 전반전에 전세를 역전시키는 등 위협적인 모습을 보일 수 있었다.
‘문제는 조니 헤인스 같은 중량감 있는 공격수들을 제대로 지원할 전력이 부족하다는 거지.’
전반전에 풀럼에게 호되게 당하긴 했지만, 준영은 그들의 약점을 찾아냈다.
‘바로 미드필더, 하프백의 수준 차이지.’
분명히 현재는 21세기 축구만큼 미드필더가 중시되진 않았다.
그러나 실력 있는 지도자들은 중원을 장악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체감하고 있었다.
“풀럼에는 뛰어난 공격수들과 수비수들을 중간에서 이어 줄 선수가 없다. 이 부분을 집중적으로 파고들어!”
전반전 경기를 본 머피 코치도 준영처럼 풀럼의 약점을 파악하고, 상대의 허리를 봉쇄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 작전은 제대로 통했다.
왕성한 활동력으로 미드필드를 장악하자, 풀럼은 수비에서 공격으로 쉽게 전환하지 못했다.
공이 제대로 오지 않으니 조니 헤인스나 지미 힐 등 공격수들도 내려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되자 맨유는 수비 부담을 한결 덜 수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경기 주도권을 쥔 것에서 만족해선 곤란하지.’
축구 경기에서 가장 중요한 건 골.
90분 내내 경기를 지배하던 팀도 역습 한 방에 무너지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그것을 알기에, 준영은 이 좋은 상황을 낭비해선 안 된다고 보았다.
‘때마침 적절한 기회가 오고 있지.’
동료 공격수들의 움직임, 그리고 상대 수비들의 대응.
이를 꼼꼼히 살피던 준영은 공을 몰고 앞으로 나갔다.
이제 상대의 숨통을 멎게 할 골을 만들 때가 되었다.
***
풀럼은 1957-1958 시즌에 디비전 2에서 5위로 마감하면서 승격에 실패합니다.
그러다 다음 시즌 그레이엄 레가트라는 걸출한 선수를 영입하면서 마침내 1부 리그로 올라옵니다.
하지만 하위권을 맴돌다 10년 만에 다시 강등, 90년대에 와서는 3부 리그까지 떨어지게 됩니다.
그러다 케빈 키건 감독이 부임하며 부흥이 시작되었고, 마침내 21세기 들어 프리미어리그에 입성했죠.
그리고 이때 K리그 팬들에게는 통수로 유명한(…) 설기현을 영입하기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