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전드 1957-124화 (124/400)

Round 124. 꿀 같지 않은 상대

희미하게 깔린 안개.

이슬비로 축축하게 젖은 필드는 찐득하게 발을 붙잡았다.

‘오늘은 반드시 이겨야 하는데…….’

준영은 동료들과 함께 필드에 나온 상대 팀을 바라보았다.

하얀 저지를 걸친 저들은 런던에 연고를 둔 풀럼 FC.

현재 2부 리그에서 리버풀, 블랙번, 웨스트햄 등과 치열한 승격 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FA컵 준결승 상대로 2부 리그 팀이면 다들 꿀이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현재 유나이티드의 분위기는 썩 좋지 못했다.

지난주에 치른 리그 32라운드 번리 원정 경기도 패했으니까.

2연패에 무득점까지 하면서 승승장구하던 팀 분위기에 제동이 걸렸다.

‘거기다 현재 2부 리그에 있지만 풀럼은 선수층도 만만찮단 말이지.’

펠레가 최고의 패싱 플레이어라고 격찬한 조니 헤인스.

첼시에서 8시즌을 뛰며 324경기 130골을 넣은 로이 벤틀리.

스탠리 매튜스만큼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은 윙어 아서 스티븐스.

잉글랜드 월드컵 우승으로 명예의 전당에 올라간 수비수 조지 코헨 등등.

아직 애송이 티를 못 벗은 유나이티드는 잔뼈가 굵은 저들에게 자칫하면 잡아먹힐 수 있었다.

‘더구나 오늘은 중립 경기지.’

오늘 준결승 경기가 열리는 곳은 아스톤 빌라의 홈구장인 빌라 파크.

홈팬들의 열렬한 성원을 업고 경기를 할 수 없었다.

…라고 생각했건만, 분위기는 영 딴판이었다.

“이겨라, 유나이티드!”

“난 너희들 승리에 다 걸었어!”

“지지 마! 웸블리까지 가라고!”

경기장을 가득 메운 69,745명의 축구 팬들은 유나이티드를 열렬히 응원했다.

비록 최근 두 경기 부진이 있었다고 하지만, 기존의 팀 전력이 무너진 상황에서 FA컵 준결승까지 올라온 것에 영국 축구 팬들은 깊은 감명을 받았기 때문.

“United! United! United!”

관중들의 열광적인 성원에 준영과 맨유 선수들의 표정도 한결 가벼워졌다.

여기에 그들을 힘내게 해 주는 사람들은 또 있었다.

“쫄지 마! Cottagers 시골뜨기, 풀럼 FC의 별명

녀석들, 별거 아니라고!”

“데니스?”

낯익은 목소리가 들린 곳을 바라보니, 데니스 바이올렛과 케니 모건스가 반갑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상체에 붉은 유니폼을 입은 그들은 레플리카를 걸친 서포터들과 함께 뜨거운 응원을 보냈다.

“거참, 언제 온 거지?”

“오늘은 절대 지지 말자!”

비록 드러내진 않았지만, 준영도 날씨만큼이나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하지만 관중들, 그리고 예전 동료들의 응원을 듣자니 힘이 절로 났다.

“좋아, 한번 날뛰어 보자고.”

무거운 기분을 훌훌 털어 낸 준영은 경기가 시작되자 기운차게 공을 향해 달려갔다.

***

지미 머피 코치는 오늘 준영을 미드필드로 전진 배치시켰다.

앞선 두 경기에서 무득점이었던 게 공격 지원이 시원치 않았기 때문이라고 판단했던 것.

여기에 공격진에도 변화를 줬다.

최전방에 숀 코너리와 알렉산더 도슨을 투톱을 두고, 그 아래 어니 테일러와 알렉스 퍼거슨을 배치한 것.

장신 공격수 숀 코너리의 투입은 오늘같이 잔디 상태가 좋지 않은 날 매우 유용한 한 수가 되었다.

후방에서 준영이 롱 패스로 올려 준 공을 받아서 바로 중앙과 좌우로 파고드는 동료 공격수들에게 밀어 줄 수 있었으니까.

거기다 숀이 상대 수비들과 경합하며 싸워 줄수록 공간이 많이 나왔다.

“선배님, 나이스 패스요!”

알렉스 퍼거슨은 숀이 헤딩으로 떨어트려 준 공을 몰고 풀럼 페널티 박스로 냉큼 달려 들어갔다.

그리고 찬스를 잡자 망설이지 않고 슛!

그러나 그의 슈팅은 골대 위 한참 높은 곳으로 날아가 버렸다.

“어휴, 너무 급했잖아, 알!”

유나이티드 서포터들 곁에서 경기를 보던 캐시는 한숨을 쉬었다.

척 봐도 마지막에 힘이 너무 들어갔다.

그래도 알렉스의 첫 슈팅은 경기 분위기를 유나이티드 쪽으로 가져오는 데 쓸 만했다.

풀럼 수비수들은 장신 공격수를 활용한 맨유의 굵직한 포스트 플레이와 발 빠른 공격수들의 침투에 연거푸 빈틈을 내줬다.

그러다 전반 9분에 다시 한 번 위기 상황을 맞았다.

어니 테일러가 날린 슛을 골키퍼 토니 마세도가 펀칭을 했고, 이 리바운드 볼이 알렉스 쪽으로 떨어진 것.

“으하핫! 잘 먹겠습니다!”

바로 리바운드 볼에 달려든 알렉스.

그러나 막 슈팅을 하려는 순간, 미끄러지고 말았다.

한 차례 중심이 흐트러진 상태에서도 알렉스는 바로 다시 슈팅을 날렸다.

그러나 토니 골키퍼가 이번에도 펀칭으로 공을 밖으로 쳐 냈다.

“아, 젠장. 손, 아니 발이 미끄러지지만 않았더라도……!”

“그래도 잘했어.”

코너킥 찬스가 나오자, 준영은 서둘러 상대 문전으로 다가갔다.

“동양인을 막아!”

“절대 공을 머리에 닿게 만들지 마!”

풀럼의 수비수 조지 코헨이 준영에게 바싹 달라붙었다.

그와 다른 수비수들이 끈덕지게 가로막으면서 준영은 헛물만 켰다.

하지만 공격 자체는 허탕을 치지 않았다.

준영에게 수비가 쏠린 만큼 빈틈이 생겼던 것.

그 빈틈은 로이 벤틀리나 아서 스티븐스 등의 공격수들이 메웠지만, 그들의 수비 능력으론 후방에서 총알같이 쇄도해 온 바비 찰튼을 막지 못했다.

제대로 공을 이마에 맞힌 바비의 헤딩슛은 그대로 풀럼 골대에 꽂혀 들어갔다.

“Go-al!”

“역시 해낼 줄 알았어!”

선제골이 터지자 맨유 선수들은 신나게 방방 뛰었다.

2주 만에 터진 골에 기뻐하는 건 유나이티드 서포터들도 마찬가지.

“크하하! 봐라, 이것들아! 맨체스터가 최고란 말이다!”

서포터들 중에 제일 선두에 서 있던 윌리엄 터너는 긴 장대에 맨유 엠블럼이 그려진 거대한 깃발을 힘차게 흔들어 댔다.

그러자 다른 서포터들도 색종이를 뿌리고 북을 두들겨 댔다.

“우와, 뭐냐, 저거?”

“엄청 거창하고 화려한데?”

“우리도 다음에 저런 거 해 봐야겠어.”

준영이 전수한 21세기 응원 방식에 관중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화려한 퍼포먼스에 떼창으로 외쳐 대는 응원 구호.

기존의 응원단이 오합지졸이라면, 레플리카까지 갖춰 입은 유나이티드 서포터는 마치 멋진 의장대를 보는 느낌이었다.

그렇다 보니 안 그래도 유나이티드를 성원하던 축구 팬들은 저도 모르게 그 응원 구호를 따라 불렀다.

“빌라 파크가 완전히 올드 트래퍼드가 되어 버렸군.”

“과연 풀럼 쪽에서는 어떻게 나오려나?”

기자들의 시선이 풀럼 선수들에게 향했다.

방금 전 선제골로 분위기가 가라앉았다면 이후 유나이티드의 일방적인 공세가 될 것이다.

하나 풀럼 선수들은 딱히 풀이 죽거나 하지 않았다.

어차피 자신들은 2부 리그 팀이니, 이 경기를 진다 해도 손해는 아니라고 보았던 것이다.

오히려 이 와중에 조니 헤인스는 과감하게 반격을 시도했다.

동료와 패스를 주고받으며 맨유 진영 깊숙한 곳으로 치고 들어오더니, 준영이 마크하러 접근하자 측면 쪽으로 비스듬히 침투 패스를 찔러 넣었다.

그리고 그것을 잽싸게 파고든 아서 스티븐스가 잡았다.

‘오프사이드 아닌가?’

선심은 기를 들지 않았다.

다행히 빌 포크스가 놓치지 않고 잘 쫓아갔다.

준영도 재빨리 중앙으로 내려오며 크로스나 컷백이 들어오는 것에 대비했다.

그런데 아서가 툭 한 번 치고 들어가면서 빌을 제치더니 그대로 슛을 날렸다!

‘슛이라고? 각도 없는데?’

과감하게 때린 아서의 슛은 해리 그렉의 손끝을 지나 골대 상단 구석에 박혔다.

그 순간, 경기장에 울려 퍼지던 유나이티드의 함성이 뚝 하고 그쳤다.

“우와, 2분 만에 동점 골을 만드네.”

“풀럼 녀석들도 보통내기는 아니구만.”

경기장 분위기가 돌변했다.

져도 손해 볼 거 없는 풀럼과 달리 유나이티드 선수들은 조바심을 느끼고 있었으니까.

연패를 끊어야 한다는, 그리고 팀이 건재하다는 걸 증명해야 한다는 중압감이 그들의 어깨를 무겁게 짓눌렀다.

그 무게는 신참과 애송이들이 감당하기 만만치 않았다.

그건 초보 주장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좀 쉽게 가나 했더니만…….”

한숨 쉴 틈은 없었다.

준결승 상대는 만만하지 않다.

이를 인정하고 분위기 전환에 나서지 않으면 안 되었다.

***

동점 골이 터지자, 준영은 곧장 반격에 나섰다.

킥오프하면서 공격수들이 뒤로 흘려 준 공을 직접 과감하게 치고 올라간 것.

“리틀 존이다! 드리블의 마법사가 발동이 걸렸어!”

“풀럼 녀석들, 제대로 막을 수 있을까?”

풀럼 공격수인 지미 힐이 1차 저지에 나섰지만, 준영은 이를 뿌리쳤다.

이에 발이 빠른 지미 랭글리가 준영을 바싹 따라붙고, 조지 코헨이 황급히 수비 라인을 점검했다.

때마침 준영의 움직임에 맞춰 맨유 공격수들이 여러 방향에서 침투와 유인을 시도하고 있었다.

‘슛 아니면 패스? 슛이다! 틀림없이 슛을 때릴 거야!’

확신을 한 코헨은 준영이 접근해 오자 황급히 몸을 날렸다.

뻐엉-

예상대로 과감한 중거리 슛!

코헨의 어깨를 살짝 스치고 지나간 무회전 슈팅은 크로스바 왼쪽을 맞고 튕겨 나갔다.

아쉬움의 탄성이 장내에 크게 울려 퍼졌다.

‘망할, 하필이면 골대를 처맞아!’

준영은 분통한 마음에 발을 굴렀다.

들어갔으면 더없이 좋고, 골대 위로 떴어도 상대를 위협하거나 분위기를 전환하는 용도로 좋았을 것이다.

그런데 하필 골대를 맞다니!

“오늘은 풀럼 쪽에 운이 따르는 모양이군.”

“거기다 요즘 유나이티드가 주춤하고 있으니 말이야.”

“역시 팀 재건이 쉽게 될 리 없지.”

기자들이 쑥덕이는 가운데, 위기를 넘긴 풀럼이 공격에 나섰다.

로이 벤틀리가 공을 몰고 맨유 진영으로 넘어와서는 조니 헤인스에게 패스.

바로 마크를 붙는 프레디 굿윈을 뿌리친 그는 이번에도 재빠르게 측면으로 파고든 아서 스티븐스에게 침투 패스를 찔러 넣었다.

‘이런, 괜히 펠레가 칭찬한 게 아니었군!’

준영이 혀를 내두를 정도로 정확한 순간에 제대로 들어간 패스.

다행히 수비하러 내려와 있던 바비 찰튼이 달라붙어서 공을 잘 걷어 냈다.

드로인으로 이어지는 상황.

풀럼의 풀백인 지미 랭글리가 맨유 페널티 박스로 공을 길게 던졌다.

엄청난 롱 드로인에 준영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 자식, 델랍(* Rory Delap. 인간 투석기라 불릴 정도로 롱 드로인이 특기였던 선수)이냐!’

랭글리가 던진 롱 드로인은 맨유 수비수들보다 앞서 있던 벤틀리 쪽으로 떨어졌다.

드로인으로 들어간 것이기 때문에 오프사이드가 아니었다.

가슴으로 공을 받아 떨어트린 벤틀리는 곧장 돌아서 슈팅을 시도했다.

하지만 공이 그의 발에 걸리기 직전, 준영이 부리나케 걷어 냈다.

“우와, 방금 전에 진짜 위험했어.”

“그러게. 리틀 존이 걷어 내지 않았다면…….”

위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랭글리가 다시 롱 드로인을 날릴 준비를 하고 있었으니까.

마치 투석기를 쏜 것처럼 페널티 박스 중앙으로 길고 정확하게 날아오는 공을 향해 지미 힐이 머리를 가져다 댔다.

“비켜, 주걱턱!”

준영이 지미 힐을 밀치고 공을 끊어 냈다.

헤딩으로 걷어 낸 공을 박스 밖에서 재차 잡아 낸 그는 곧장 최전방으로 길게 찼다.

“뛰어, 퍼기!”

중앙선 부근에서 대기하고 있던 알렉스 퍼거슨은 딱 맞춰서 풀럼 진영으로 달려갔다.

그의 앞으로 텅 빈 공간이 펼쳐져 있었다.

***

현대엔 풀럼이 런던에서 제일 땅값이 비싼 동네이지만, 원래는 런던 서남쪽 외곽 템즈 강변에 있던 시골 마을이었다고 하네요.

풀럼 FC에 Cottagers, 오두막집에 사는 놈들이니 시골뜨기니 하는 별명이 생긴 것도 그 때문인 모양입니다.

풀럼은 산업혁명 시대부터 사람이 몰렸고, 도자기와 양조 산업이 발전했으며 20세기 들어 자동차와 항공기 산업도 융성했습니다.

그러다 재개발이 되고 20세기 후반에 들어서는 런던에서 가장 인기 있는 지역이 되었는데… 어째 우리나라 서울 강남이랑 비슷하다 싶더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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