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123. 살아가리라
“후레자식! 내가 누군 줄 알고 감히!”
연방 분통을 터트리는 김창룡의 모습에 부관과 수행원들은 안절부절못했다.
아무래도 어제 이준영에게 당한 분이 쉬이 풀리지 않았던 모양.
여기가 한국이면 당장 헌병들을 보내 잡아 올 테지만, 그럴 수도 없는 상황이다.
괜히 엉뚱한 사람에게 분풀이를 하려 들 수 있기에 다들 김창룡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 애썼다.
“이대로는 못 돌아가. 그 건방진 멀대 새끼 콧대를 납작하게 만들지 않으면……!”
김창룡이 절뚝이며 호텔방을 서성이고 있을 때였다.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서 수행원이 문을 열어 봤더니, 처음 보는 서양인이 서 있었다.
“여기가 General Kim의 숙소가 맞습니까?”
“그렇소만. 댁은 뉘시오?”
“예, 저는 존 Y. 리를 돌봐 주고 있는 제임스 본드라고 합니다.”
이준영의 매니저?
김창룡의 눈꼬리가 곧바로 치켜 올라갔다.
“무슨 일로 찾아왔나?”
김창룡이 다가와 으르렁대며 묻자, 제임스는 바로 허리를 굽혔다.
“어제 그 덩치 큰 철부지 녀석이 결례를 범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사죄를…….”
“웃기고 있네! 이제 와서 사과한다고 받아 줄 것 같아? 당사자가 직접 오지도 않았는데!”
“그게, 직접 올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서 말입니다. 어르신께 아주 혼쭐이 났거든요.”
“어르신?”
“홍콩에서부터 이준영의 후견인을 맡았던 분입니다.”
제임스의 말에 따르면, 후견인은 홍콩 출신의 부호라고 했다.
현재 이준영의 명의로 되어 있는 사업도 사실 그 후견인이 하고 있는 거라고.
“어르신은 장군이 하고 계신 사업 쪽에도 관심이 많으십니다. 그런데 공만 차서 세상 물정 모르는 녀석이 망발을 한 거지요.”
“흥, 교육을 제대로 시켰어야지!”
“예, 맞습니다. 어제 일은 입이 천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내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 없다는 건 잘 압니다. 하지만…….”
제임스는 비굴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 나갔다.
“언제까지 감정을 세워서 좋을 게 없지 않습니까? 저희 어르신은 장군 같은 분과 건설적이고 풍족한 관계를 맺기를 바라십니다.”
이야기를 들어 보니 그 어르신이라는 자도 깨끗한 놈은 못 되는 듯했다.
하지만 아무려면 어떤가.
암흑가에 발을 담그고 있든 어떻든 돈만 되면 그만 아닌가.
“어르신께서 말씀하시길, 장군께서 마음만 풀 수 있다면 그 철부지를 굽든 삶든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하셨습니다.”
“흐음…….”
“거기다 기분 좀 푸시라고 어르신께서 좋은 자리를 마련해 두셨습니다.”
“좋은 자리? 얼마나 좋은데?”
“어제 장군이 가셨던 클럽보다 2배, 아니 10배는 물이 좋은 곳입니다.”
김창룡의 입꼬리가 절로 말려 올라갔다.
그러다 헛기침을 하며 점잔을 빼는 모습을 보였다.
“어흠, 뭐 그럴 것까지는 없는데……. 그래도 정성을 생각하니 거절하기도 힘들구만.”
“예, 그럼 바로 가시죠. 호텔 밖에 차를 준비해 두었습니다.”
못 이기는 척 발걸음을 뗀 김창룡은 부관들과 함께 숙소를 나왔다.
‘흥, 별거 없는 놈이었잖아. 하긴 일개 축구 선수 나부랭이가 잘나 봤자 얼마나 잘났겠어.’
굽든 삶든 마음대로 하라고 했겠다?
그럼 인생의 쓴맛을 실컷 보여 주고 나까마로 제대로 부려 주리라.
그리 마음먹은 김창룡은 제임스가 준비한 차를 타고 물 좋은 곳을 향해 떠났다.
***
“와, 진짜 물 좋은데요? 풍경이 끝내줘요.”
“하하하, 괜히 블랙풀이 휴양지로 유명한 게 아니죠.”
파도 소리와 함께 들려오는 말소리에 김창룡은 눈을 떴다.
도대체 여긴 어딜까?
부관들은 어디 가고, 자신은 언제부터 정신을 잃었던 걸까.
마지막 기억으로 차에 타고 있던 빨강 머리 미녀가 따라 주는 와인을 마시며 다 같이 하하호호 떠들었던 게 생각났다.
그 뒤로 갑자기 필름이 끊겼다.
술에 약이라도 탔던 걸까?
“여, 깨셨습니까, 장군.”
“너 이 자식!”
눈앞으로 다가온 준영을 보고 김창룡은 벌떡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꿈쩍도 할 수 없었다.
머리만 내놓고 포대 자루에 넣어진 상태로 굴비처럼 묶여 있었으니까.
“무, 무슨 짓을 하려는 거냐? 여긴 어디야?”
“배 위고 바다 한가운데라는 것만 알려 드리죠. 그리고 무슨 짓을 할지는 충분히 상상이 되실 텐데요. 이 GR 맞은 쓰레기 새뀌야.”
준영의 싸늘한 눈길에 김창룡은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뒤쪽에서 히죽거리며 지켜보는 제임스를 보자니, 어떻게 된 상황인지 금방 파악할 수 있었다.
“이, 이봐, 내가 좀 무리한 요구를 했다는 건 알아. 하지만 이건 아니지 않나. 너랑 나랑 원수진 것도 없는데.”
“그래, 없어. 근데 어쩌나. 너 같은 쓰레기는 빨리 폐기하길 바라는 사람들이 많은걸.”
준영이 손을 들었다.
그러자 배에 있는 크레인 고리가 김창룡을 걸어서 바다 쪽에 대롱대롱 매달았다.
떨어트리면 그대로 용궁행.
자루 밑에 묵직하게 돌도 들어 있으니 절대 떠오르지 못할 것이다.
“으아아아아! 사, 살려 주게, 준영이! 살려 주면 시키는 일은 다 하겠네!”
“응, 그러다 나중에 통수칠 거 다 알어.”
준영이 크레인 레버를 내리자 김창룡은 수면에 풍덩 빠졌다.
머리만 잠기지 않은 상황에서 다급해진 그는 필사적으로 애원했다.
“살려 주게! 아니, 살려 주십쇼, 준영 도련님! 살려만 주시면 제 전 재산을 다 내놓겠습니다!”
“리얼(Real)?”
“예, 예! 진짭니다! 저 돈 많습니다! 진짜 많습니다!”
김창룡은 엄청난 축재를 했다.
21세기 물가로 환산하면 수백억에 달하는 규모.
그 재산을 김창룡은 아무도 모르게 빼돌려 두었다.
믿을 만한 사람 명의로 토지를 사거나, 차명 계좌 여러 개에 분산해 놓거나.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 분산시켜 둔 자산도 있었다.
“정말 저 작자가 돈이 많습니까?”
제임스 본드, 아니 제이미 번즈의 물음에 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꽤 될 겁니다. 밀수와 군수품 횡령으로 배를 채웠으니까.”
“그렇다면 어둠 속에 묻어 놓긴 아깝군요. 토해 내게 만들어 유용하게 쓰는 게 어떻습니까?”
“부정한 돈인데요?”
“Pecunia non olet. 돈에서는 냄새가 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로마의 명군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말이지요.”
깨끗하게 벌었든, 더럽게 모았든 돈은 돈.
제대로 써서 많은 사람들에게 혜택이 돌아가게 하면 된다는 게 번즈의 생각이었다.
“하긴, 제대로 쓴다면 괜찮겠네요.”
고개를 끄덕인 준영은 다시 크레인 레버를 올렸다.
이미 김창룡은 물속에 풍덩 잠겼지만, 숨이 끊어지진 않았다.
“쿨럭! 쿨럭! 고맙습니다. 고맙슴다, 도련님.”
“GR 말고, 빼돌린 재산 내역과 위치나 다 털어놔. 구라 치면 바로 Under the Sea야.”
풀려나서 배 안으로 끌려간 김창룡은 곧장 신문에 들어갔다.
‘제길, 이준영 이 개 같은 후레자식! 오늘 이 수모는 절대 잊지 않으마!’
어떻게든 살아남는다!
살아서 훗날 수단, 방법 안 가리고 응징해 주리라!
내심 이를 빠득빠득 가는 독사의 두 눈에 벌겋게 핏발이 섰다.
***
끼이익- 철컥!
떠밀려서 좁은 감방에 들어오기 무섭게 철문이 굳게 잠겼다.
며칠 전 이준영에 대한 원한을 불태우던 김창룡은 얼빠진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몇 번이고 반복해서 상세한 재산 내역과 위치 정보를 쥐어 짜내진 그는 마침내 육지로 돌아왔다.
그런데 이게 웬일.
배에서 밥을 먹고 깜빡 잠들었다 깨고 보니 호송차 안이었다.
더구나 더 기가 막힌 건 따로 있었다!
‘죄인 Eok-kuan Lee은 6명의 일본인을 살해한 혐의로 징역 20년을…….’
도대체 어찌 된 영문인가?
하지도 않은 살인을 했다고 누명을 쓴 건 물론, 엉뚱한 인물로 오해를 받다니!
그렇게 누명을 쓰고 끌려온 곳이 스코틀랜드 북쪽 외진 섬에 있는 형무소였다.
“이보시오! 나는 억관인지 만관인지 하는 놈이 아니오! 난 대한민국 육군 전직 특무대 대장 김창룡이란 말이오!”
“시끄러, 원숭이! 닥치고 있어!”
죄인의 얼굴이 알려진 것과 차이가 있었지만, 간수들은 그리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동양인 얼굴은 거기서 거기니까.
거기다 유치장에 있다 보면 얼굴이 삭기 마련.
이렇다 보니 김창룡은 진짜 미치고 환장할 지경이었다.
“크아악! 이준영 이 개자식! 도대체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무슨 수작을 부린 거냐고!”
“어이, 닥치란 말 못 들었냐, 원숭이!”
소란을 피우기 무섭게 간수가 들어와 몽둥이를 한바탕 휘둘렀다.
“끄으윽…….”
“한 번만 더 소란을 피웠다간 그땐 뼈도 못 추릴 줄 알아!”
찜질 한번 화끈하게 맛본 김창룡은 피와 멍투성이가 된 상태로 차가운 감방 바닥에서 울부짖었다.
“어흐흐흑! 아니야. 난 여기 있을 사람이 아니라고. 흐흐흑!”
자신의 영달을 위해 수많은 사람들에게 누명을 씌우며 고통을 주었던 독사 김창룡.
그는 차디찬 감옥 속에서 점차 생기를 잃어 갔다.
***
서울 시내에 호외가 뿌려졌다.
대통령의 최측근 김창룡의 실종 사건 때문이었다.
“영국엔 왜 간 거래?”
“이준영을 만나러 갔다던데. 아시안게임 때 차출하려고 말이야.”
현지에선 납치 가능성을 높게 두고 수사를 하고 있다고.
그 와중에 발표된 몇몇 수사 정보는 국민들을 어이없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현지에서 밀매 조직과 접선을 했다고?”
“밀매 조직과 문제가 일어나서 납치를 당했을 가능성이 높대.”
“김창룡 이놈, 그럴 줄 알았어!”
“흥,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샌다더니만.”
납치 도중 버려졌던 부관들의 증언에 따르면 납치범은 이준영의 매니저를 자처했다고 한다.
하나, 이는 곧 거짓으로 밝혀졌다. 이준영은 매니저가 없었으니까.
거기다 제임스 본드라는 이름도 영국의 첩보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 이름이었다.
“아무튼 이번 일로 높으신 분들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되었군.”
“대통령 최측근이 해외에서 밀수 조직과 접선을 해? 거, 나라 꼴 잘∼ 돌아가는군.”
“쉿! 누가 듣겠어. 말소리 낮추라고!”
거리의 민심이 흉흉한 가운데.
가방을 든 번듯한 양복의 신사가 상공회의소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영국에서 오셨다고요?”
“그렇습니다. 고국을 떠난 지 10년이 넘었지요.”
“완전히 귀국하신 겁니까?”
“예, 가족도 함께 왔지요.”
제출한 서류의 등록을 기다리는 동안, 신사는 자신과 이곳에 온 사업가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슬쩍 창밖을 바라보았다.
오면서도 봤지만 서울의 풍경은 심상치 않았다.
전쟁의 상처는 빠르게 복구되어 가고 있었지만, 무언가 어수선하고 민심은 다소 흉흉해 보였다.
“영국에서 식품 사업을 하셨다고요? 뭘 거래했었습니까? 밀가루? 통조림?”
“라면이라고, 인스턴트식품이지요.”
“라면?”
“기름에 튀긴 국수 같은 겁니다.”
“국수라……. 쯧쯧, 좀 더 일찍 귀국하지 그랬습니까. 작년에 미국의 무상 원조가 끝나서 밀가루 가격이 계속 오르고 있어요.”
안타까워하던 팔자수염의 사업가는 실례했다는 듯 물음을 건넸다.
“아 참, 그런데 성함이 어찌 되시오?”
“제 이름은…….”
저도 모르게 이억관이라고 말하려 했던 신사는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소개했다.
“이활(李活)이라고 합니다.”
“거, 좋은 이름이구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과거 항일 투쟁을 할 때 썼던 가명.
고국에 돌아와 새로운 삶을 시작한 이억관은 그 이름을 다시 꺼냈다.
빛나는 미래를 볼 때까지, 꿋꿋이 살아가리라 다짐했기에.
‘난 여기서 다시 시작할 거야. 준영이 자네도 힘내게!’
미소를 지은 이억관은 멀리 서쪽에 있는 준영의 건투를 빌었다.
***
1958년 한국은 삼백산업의 퇴조와 자유당 독재 정권의 횡포로 상당히 상황이 안 좋았습니다.
조봉암 선생이 이때 잡혀갔고, 보안법 파동도 있었죠.
다음 해 경향신문이 폐간되고, 태풍 사라 때문에 나라가 완전히 결딴납니다.
1960년 4.19 혁명은 3.15 부정 선거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정치든 경제든 그동안 쌓인 게 터진 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