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전드 1957-122화 (122/400)

Round 122. 쓰레기 버리는 법

‘그 악명 높은 김창룡을 눈앞에서 볼 줄이야.’

21세기에 있을 때, 해방 전후 시대를 다룬 드라마에 언급된 인물이다.

일본군 헌병 출신으로 독립운동가들을 잡으러 다니던 친일파.

해방 이후에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공산당이라는 누명을 씌워 죽인 학살범이다.

그뿐만 아니라 밀수와 군수품 횡령으로 부정하게 모은 재산만 20억.

현대 물가로 환산하면 무려 800억에 가까운 금액이었다.

‘억관 아저씨가 봤으면 바로 체어 샷을 날렸겠구만.’

”무얼 그리 생각하고 있는 건가?”

김창룡이 눈꼬리를 실룩 치켜올렸다.

준영이 자신의 악수를 받지도 않고 멀뚱히 바라보고 있었으므로.

“실례했습니다. 아주 유명하신 분을 직접 눈앞에서 보게 되어 얼떨떨해서…….”

“훗, 그래?”

마음 같아서는 박춘금 때처럼 이 독사 같은 인간에게도 쌍욕을 날려 주고 싶었다.

하지만 팀이 어려운 상황에서 또 분란을 일으킬 수 없었다.

더구나 상대는 현직 대한민국 대통령의 최측근이었다.

‘아주 독사 같은 작자야. 무슨 짓을 할지 알 수가 없으니 조심하게.’

김용우 대사가 김창룡이 찾아올 것을 미리 알려 줬을 때 이런 말을 했다.

설마 홍콩 시민권을 가진 자신에게 해코지를 할까 싶지만, 괜히 대사님이나 한국 교민들을 상대로 화풀이를 하게 만들어서는 곤란했다.

“이 앞에 좋은 카페가 있으니 거기 가서 이야기를 나누는 건 어떻습니까?”

“카페? 큰일을 이야기할 텐데 커피 따위보다 술을 마셔야지. 미리 봐 둔 카바레가 있으니 그리 가지.”

김창룡은 자신이 묵는 고급 호텔 근처에 있는 클럽으로 준영을 데려갔다.

술은 물론이고, 여러 가지 향응을 제공하는 업체였다.

‘이 양반, 이런 덴 언제 알아봐 뒀지?’

이미 몇 번 와 본 모양인지 능숙하게 술을 주문하고, 작부들도 불러서 잘 놀았다.

“몸도 안 좋으신 것 같은데 술을 드셔도 괜찮은 겁니까?”

“훗, 몸이 어떻든 사내가 술을 안 마시고 살 수 있나. 자네도 찔끔찔끔 마시지 말고 쭉쭉 들이켜라고.”

“말씀은 고맙지만, 그럴 순 없습니다. 제 술버릇이 고약하거든요.”

“고약해? 어떻게?”

“취하면 주변에 있는 사람을 팹니다. 지난번에도 병으로 남의 머리를 내리친 적이 있어서…….”

“하하, 이제 보니 이준영이는 완전 개망나니였구만.”

처맞기는 싫었던지 김창룡도 준영에게 계속 마시라는 권유는 하지 않았다.

얼마 후 불콰하게 취기가 오르자, 그는 분통을 터트렸다.

“젠장 맞을, 자네 응원하려고 일부러 북이며 장구며 구해다 교민들까지 몽땅 데려왔는데 말이야. 경기를 져 버리다니!”

“면목이 없습니다.”

“아냐. 자네는 열심히 하지 않았나. 심판이 문제였어. 야비하게 상대 팀을 슬쩍 편들고…….”

한국이었으면 당장 잡아다 감옥에 넣었다는 둥, 총살시켰다는 둥.

이리저리 떠들던 김창룡이 마침내 본론을 이야기했다.

“이번 5월에 동경에서 아시안게임이 있거든? 그래서 말인데, 자네를 대한민국 대표팀 선수로 뽑고 싶어서 말이야…….”

“태극 마크를 달게 해 준다고요?”

“그래, 아주 영광스러운 자리가 아닌가 말이지.”

국가대표 선발을 마다할 선수가 있을까.

하지만 준영은 쉽게 수락할 수 없었다.

영광스럽다 해도 독사가 권하는 자리를 덜렁 받아들였다가 나중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까.

‘더구나 국가대표팀 감독이 선발하는 것도 아니고, 대통령 측근이 뽑은 거면 진짜 안 좋은 소리가 나올 거야.’

무엇보다 중요한 건 앞으로 자유당 독재가 막을 내릴 시간이 겨우 2년 남짓 남았다는 점.

침몰하는 배에 올라타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힘들 것 같습니다.”

“뭐? 아니, 어째서?”

“5월까지 팀 일정이 남아 있습니다. 유러피언 컵 출전도 해야 하고요.”

김창룡이 와락 눈살을 찌푸렸다.

“조국보다 팀이 중요하다는 건가?”

“조국도, 팀도 중요합니다. 제가 뛰는 무대는 아주 큽니다. 아시안게임하고는 인지도에서 비교도 안 되는 수준이죠.”

“…….”

“유럽에서 대한의 기상을 떨칠 수 있는 기회인데, 이걸 걷어차는 건 국가적인 손해라고 봅니다.”

김창룡의 얼굴이 더 구겨졌다.

분위기로 봐서는 얼굴에 술을 끼얹거나, 술병으로 머릴 후려갈길 기세.

‘어디 행패를 부려 보라고. 그럼 곧장 경찰에 신고해 주마.’

거절할 명분과 함께 김창룡을 감옥에 보내거나 한국으로 쫓아낼 명분이 생긴다.

그런데 이 독사 같은 인간이 성질을 부리기는커녕, 담배 연기를 한숨과 함께 푹 토하는 게 아닌가.

“휴우, 그렇다면 할 수 없지.”

“예? 그럼……?”

“소 잡는 칼을 닭 잡는 데 쓸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돌아가서 내가 각하께 말씀드리지.”

의외로 말은 통하는 인간이었던 걸까.

준영은 김창룡에 대한 평가를 약간 바꾸기로 했다.

“각하는 그렇게 설득할 테니까 자네가 일을 좀 해 줘야겠어.”

“일이요?”

의아해하는 준영에게 김창룡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자네, 영국에서 사업 좀 한다면서? 제법 발도 넓다고 하고 말이야. 그럼 좋은 물건을 떼 와서 나한테 좀 넘길 수 있겠지?”

“예? 대체 무슨 말씀을…….”

“나까마 말이야, 나까마. 왜 이리 못 알아들어?”

나까마.

밀수 판매 조직 수집책이나 중간 상인을 일컫는 속칭이다.

준영도 김창룡의 말을 이해하고 입을 떡 벌렸다.

‘이 쌍놈의 시키가 돌았나.’

진짜 체어 샷을 날릴 뻔했다.

성실하게 사업 잘하는 사람에게 밀수를 하라니!

누구 인생 종치게 만들려고 개수작인가!

“방금 그 이야기는 안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야, 이준영이! 내가 호의를 베풀겠다는데도 거절하는 거야, 지금?”

“호의? 무슨 호의 말입니까?”

“야 이 색꺄! 네 편의대로 대표팀 차출 미룰 수 있게 조치해 주겠다고 했잖아! 그럼 성의를 보여야 할 거 아니야!”

김창룡의 말에 준영은 코웃음을 쳤다.

“남의 의사와 상관없이 당신들 마음대로 결정하고, 그걸 물러 준다고 고맙게 여기라고요? 노예로 갖다 팔지 않을 테니 돈 내놔, 라는 거랑 뭐가 다릅니까? 완전 날강도가 따로 없구만.”

“뭐? 날강도? 아니, 이노무 쉐키가!”

쨍그랑-!

김창룡이 들고 있던 잔을 내팽개쳤다.

유리 조각이 사방으로 튀면서 놀란 작부들이 비명을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준영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야 인마, 내가 누군지 알아? 내가 마음먹으면 너 같은 놈 매장하는 건 일도 아니야.”

“왜? 빨갱이로 몰려고?”

“다시는 한국에 들어오지 못하게 할 수도 있어! 아니, 영국에서 편히 살 수 있을 것 같아?”

“옛말에 이런 말이 있더군요. GR하고 자빠졌네… 라고.”

격분한 김창룡이 벌떡 일어나 지팡이를 치켜들었다.

하지만 그는 준영을 후려치지 못했다.

뒤에서 양복 입은 백인 사내들이 그의 행동을 막았기 때문.

척 봐도 이 업체를 관리하는 조직원들로 보였다.

“그만하시지. 여긴 술이나 마시고 여자랑 노는 데지, 소란 피우는 장소는 아니니까.”

“하, 이 깡패 새끼들이……. 내가 누군지 알아?”

“관심 없소. 험한 꼴 보기 싫으면 썩 꺼져.”

험악해지는 상대의 태도에 김창룡의 부관들은 황급히 상관을 만류하며 자리를 떴다.

“야, 이준영이! 똑똑히 기억해 둬! 넌 인마, 나한테 찍혔어!”

준영은 김창룡에 대한 평가를 약간이 아니라 확 바꾸었다.

상종 못할 쓰레기로.

‘빨리 치워 없애야겠군.’

괜히 김용우 대사나 교민들에게 피해가 가면 큰일이다.

준영이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아까 김창룡을 막은 조직원이 준영에게 말을 건넸다.

“안 다쳤소?”

“멀쩡해요. 고맙습니다.”

“뭘, 우리 팀 주장을 지키는 거야 당연한 일인데.”

씩 웃음을 지은 조직원은 수첩과 펜을 꺼내 준영에게 건넸다.

“사인이나 좀 해 주쇼.”

“얼마든지.”

준영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서포터로 추정되는 조직원에게 시원하게 사인을 해 줬다.

그때 웨이터가 다가와 조직원에게 나지막하게 말을 건넸다.

뭔가 심상찮은 분위기에 준영의 표정이 달라졌다.

“왜? 무슨 일 있어요?”

“아까 그치들이 계산도 안 하고 가 버렸다고 하오. 리 선수가 할 거라며…….”

‘먹튀까지 했다고?’

준영은 김창룡에 대한 평가를 확 바꾸다 못해 못을 박았다.

소각이 시급한 쓰레기로.

***

다음 날.

팀 훈련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준영은 반가운 사람을 만났다.

“우와! 억관 아저씨?”

“오랜만이야, 준영이.”

살이 살짝 빠지긴 했지만, 이억관은 건강해 보였다.

준영은 기뻤지만, 한편으로 의문도 있었다.

“어떻게 된 거죠? 무죄 방면되었다는 이야기는 못 들었는데요?”

“그건 내가 설명하도록 하죠.”

MI6의 요원 제이미 번즈.

이억관을 데려온 그는 준영에게 서류 하나를 건네주며 말했다.

“얼마 전 Eok-kuan Lee에 대한 형량이 정해졌습니다. 징역 20년이 언도될 거라고 하더군요.”

“예? 그렇게나 오래요?”

사형이 아니란 점은 다행이지만, 그래도 꽤 길지 않은가.

더구나 그 정도 중형이면 가석방은 기대할 수 없다.

그런데 어떻게 이억관이 이렇게 나올 수 있었던 걸까?

“혹시 이송 중에 탈옥시킨 겁니까?”

“유치장에서 슬쩍 빼내 온 건 맞지만, 탈옥으로 처리하진 않을 겁니다. 그랬다간 시끄러워질 테니까.”

그냥 조용히 바꿔치기를 할 계획이라고 했다.

이미 억관과 닮은 동양인을 구해 놓고 서류 조작도 진행되고 있다고.

“그 대타가 아저씨 대신 20년을 복역하는 겁니까?”

“아뇨. 그 친구는 얼마 안 있을 겁니다. 감옥에서 병에 걸려 죽은 걸로 처리해서 빼낼 테니까.”

그 대타도 결국 MI6 쪽 사람인 모양.

아무튼 그런 식으로 억관은 자유를 되찾게 되었다.

하지만 여기엔 반드시 지켜야 할 조건이 있다고.

“앞으로 영국에는 있을 수 없습니다. 자칫 알 만한 사람의 눈에 띄기라도 하면 곤란해지니까.”

“…그렇겠군요.”

이해는 하지만, 뭔가 섭섭한 감정을 느끼는 준영에게 억관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걱정 마, 준영이. 이참에 고국으로 돌아가지, 뭐. 가서 지난번에 계획한 대로 라면 공장을 세우면 되지 않겠나?”

“하하, 그러네요. 아저씨는 그걸 꼭 하고 싶어 하셨으니까.”

“그래, 우리가 만든 라면으로 동포들도 배불리 먹이고, 아시아 시장에 수출해서 외화를 벌면 얼마나 나라에 큰 보탬이 되겠어?”

“맞습니다. 맞는 말씀이에요.”

확실히 억관을 한국으로 보내는 게 좋을 듯했다.

영 못 만날 건 아니니까.

자주 연락하고, 이따금 한국에 찾아가서 만나면 된다.

그런데 거기까지 생각하니 어제 김창룡의 엄포가 떠올랐다.

‘다시는 한국에 들어오지 못하게 할 수도 있어!’

그리 신경 쓸 필요도 없는 말이다.

2년 후 자유당 독재 정권이 무너지면 김창룡의 앞날도 뻔하니까.

다만…….

‘소각이 시급한 쓰레기잖아. 이참에 빨리 처리해 버릴까?’

미스터리 푸드 컴퍼니가 자신의 회사인 걸 알면, 억관이 세울 한국 지사에 온갖 횡포를 부릴지 모른다.

그러니까 처리해 버리자.

마침 처리해 줄 솜씨 좋은 환경미화원도 눈앞에 있지 않은가.

준영은 곧장 번즈에게 말을 건넸다.

“번즈 씨, 쓸 만한 정보 하나 드릴 테니 일 하나만 해 주지 않겠어요?”

***

50∼60년대 실제로 몇몇 선수와 지도자들이 밀수 수집책이나 중간 상인으로 활동하다 적발된 일들이 있었습니다.

당시엔 해외여행이 쉽지 않았지만, 국가대표 선수들은 국제 대회 참가나 원정 경기 등으로 해외에 곧잘 나갈 수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김창룡도 당시 특무대에 대표급 선수들을 끌어모았던 게 단지 본인이 축구를 좋아하기 때문만은 아닐 거라는 추정도 있습니다.

실제로 밀수로 치부한 게 밝혀진 인물이기도 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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