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121. 천사와 악마
옷을 갈아입고 분장실에서 나온 숀은 밖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준영과 리즈를 보았다.
“열연이었어요, 숀.”
“정말 감동 깊었어요.”
숀은 두 사람의 감탄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방금 전에 있었던 놀라운 만남에 대해서 자랑하듯 이야기했다.
“진짜예요? 진짜 오드리 헵번이?”
휘둥그렇게 눈을 뜬 준영의 물음에 숀은 씩 웃음을 지었다.
“정말이라니까. 너희 회사에서 만든 과자도 참 맛있게 먹더라.”
“빼빼Ro를? 우와! 지금 어디 있어요? 벌써 극장을 떠난 건?”
“아직 안 갔어. 극장 사장이랑 임원들하고 만나고 있을 거야. 왜? 앤 공주의 사인이라도 받게?”
“그건 당연한 거고… 방금 해야 할 일도 떠올랐어요!”
이 좋은 기회를 놓칠 수 있겠는가.
물이 들어왔을 땐 노를 저어야, 아니 엔진을 돌려야 한다!
그리 생각한 준영은 부랴부랴 꽃다발을 마련하고, 공장 당직자에게 연락해서 빼빼Ro 한 상자를 가져오라고 일렀다.
그렇게 준비가 끝났을 무렵, 극장 관계자들을 만나고 나오는 오드리 헵번을 찾아갔다.
“어머, 누구시죠? 키가 굉장히 크신 분이네.”
세기의 연인.
그야말로 전설적인 여배우를 실물로 보게 된 준영은 감격에 잠시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그러다 옆에 있던 리즈가 부루퉁한 표정으로 발을 꾹 밟자 번쩍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바로 모자를 벗어 인사를 올렸다.
“처음 뵙겠습니다, 헵번 씨. 저는 존 Y. 리라고 합니다. 이곳 맨체스터에서 프로 축구 선수로 활동하며 식품 회사를 운영하고 있죠.”
“그래요? 그런데 왜……?”
“방금 여기 숀 형에게, 헵번 씨가 저희 회사 과자를 아주 맘에 들어 하셨다고 들어서요.”
“아아! 그 빼빼Ro라던!”
예상 이상으로 인상적이었던지, 오드리는 반색을 하며 박수를 쳤다.
그러다 준영이 꽃다발과 함께 빼빼Ro 한 상자를 건네자 함박 미소를 지었다.
“어머나! 고마워요! 리 씨. 정말 잘 먹을게요.”
“아뇨. 감사하고 싶은 건 전데요. 그리고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부탁이요?”
혹시 사인이 필요한 걸까.
바로 펜을 꺼내는 오드리에게 준영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희 회사 광고 모델을 해 주실 수 있습니까?”
갑작스러운 제안에 오드리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의 옆에 있던 매니저는 코웃음을 쳤다.
“세상에, 어이가 없군! 이분이 누구신 줄 알아? 어디서 듣도 보도 못한 삼류 업체가 감히……!”
“잠깐, 잠깐만요.”
매니저를 만류한 오드리가 준영을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어디 조건을 한번 들어 보고 싶네요.”
맑게 빛나는 그녀의 눈빛.
준영은 결코 시시한 조건을 내밀어서는 안 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광고 모델료는 헵번 씨의 격에 맞춰 지불하겠습니다. 그리고 판매 수익의 일부를 전쟁 난민과 기아 결식아동의 구호를 위해 사용하겠습니다.”
“어째서 그런 조건을 제시하시는 거죠?”
“헵번 씨가 정말 바라는 일이라고 생각해서요.”
준영의 말에 뭔가 진지하게 생각에 잠겼던 오드리.
그녀는 만족스럽지 못한 듯 고개를 내저었다.
“그 조건은 받아들일 수 없네요.”
“그렇습니까…….”
실망스러워하는 준영에게 이내 놀랄 만한 말이 들려왔다.
“모델료는 필요 없어요. 저한테 낼 돈이 있다면 그것도 구호 기금으로 써 주세요.”
“아, 감사합니다!”
반색을 한 준영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오드리는 계약서 작성이나 광고 촬영 일자는 다음 날 만나서 상세히 결정하기로 약속하고 호텔로 떠났다.
그렇게 큰 건 하나를 처리한 준영은 리즈와 함께 모즐리로 돌아갔다.
“착한 사람이네요. 그냥 예쁘고 연기만 잘하는 영화배우인 줄 알았는데.”
“자신의 아픔을 잊지 않는 훌륭한 사람이니까.”
오드리 헵번은 소녀 시절 전쟁으로 굶주림을 겪었다.
그 고통을 잊지 않은 그녀는 은퇴 후, 자선 활동에 매진하며 남은 생을 보냈다.
“미래에 이런 말이 있어. 우리가 가장 아름다운 오드리 헵번을 본 건 로마의 휴일이 아니라, 아프리카 난민촌에서라고.”
“외모만 아니라 마음도 아름다운 사람인 거군요.”
“맞아. 정말 천사 같은 사람이지.”
리즈는 처음에 준영이 오드리 헵번을 보고 얼빠진 기색을 보였을 때 내심 화가 났다.
하지만 이렇게 사정을 들어 보니, 준영이 그녀에게 보인 감정이 단순한 호감이 아니라 존경심임을 알 수 있었다.
“본받아야겠네요. 마음을 아름답게 가꾸는 거 말이에요.”
“리즈는 이미 마음도 아름다운걸.”
“피, 아부하는 거예요?”
살짝 샐쭉한 표정을 짓던 리즈는 갑자기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앗! 잊은 게 있어요!”
“뭔데? 극장에서 놔두고 온 게 있어?”
“아뇨. 사인 받는 걸 까먹었어요.”
리즈의 말에 준영은 너털웃음을 지었다.
“괜찮아. 또 만날 기회가 있을 테니까.”
“정말이에요?”
“물론. 천사님과의 인연을 한 번으로 끝내면 섭섭하잖아.”
오드리와의 광고 계약은 앞으로도 계속 이어 나갈 것이다.
그녀는 시대를 초월해서 만인의 사랑과 존경을 받는 위대한 사람이므로.
***
1958년 3월 8일 올드 트래퍼드.
맨유는 FA컵 8강에서 승리를 거뒀던 웨스트 브롬위치 알비온을 리그 31라운드 경기에서 다시 만났다.
FA컵에서 당한 패배가 충격이었을까, 아니면 적진에 들어와서 경계하는 걸까.
알비온은 수비에 치중하며 역습을 노리는 작전으로 나왔다.
이와 달리 유나이티드는 초반부터 적극적인 공세를 펼쳤다.
「존 Y. 리, 중원의 로니 코프에게 패스합니다. 로니가 측면의 존 레논에게 연결, 슈유윳-! 하지만 뜨고 맙니다.」
라디오 중계 캐스터는 아쉬운 탄성을 내뱉었다.
오늘 유나이티드는 공격진에 변화를 주었다.
최근 훈련에서 좋은 모습을 보인 18세의 유망주 알렉산더 D. 도슨과 콜린 웹스터를 투톱으로, 그리고 좌우 측면에는 존 레논과 2월에 임대 영입한 블랙풀의 공격수 어니 테일러를 포진시켰다.
중앙과 측면 모두 유망주와 숙련자의 조합.
유망주의 활기찬 에너지와 숙련자의 노련한 조율을 기대했던 것이었지만, 효과는 그리 좋지 않았다.
‘안 돼. 알비온의 수비가 너무 견고해.’
준영이 볼 때 뭔가 기회는 잘 만드는데 확실한 파괴력이 부족했다.
‘마음 같아선 바로 공격에 가세하고 싶지만… 저 위험한 삼총사를 그냥 둘 순 없으니!’
데릭 케반, 로날드 엘런, 바비 롭슨.
알비온의 이 간판 공격수들은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특히 바비 롭슨의 경우, 바비 찰튼이 거머리처럼 쫓아다니는 중이었다.
‘한 골! 한 골만 어떻게든 만들면 분위기가 우리 쪽으로 확 기울 텐데!’
뭔가 될 듯하면서도 안 되었다.
전반 12분에 레논의 슈팅은 골대 위로 뜨고 말았고, 4분 후에 어니 테일러가 알비온의 문전 앞에서 태클에 쓰러졌지만 심판은 파울을 불지 않았다.
전반 25분에는 순간적으로 측면을 무너트린 존 레논의 패스를 받은 콜린의 논스톱 슛이 골키퍼의 선방에 막혔다.
“이런 흐름이 계속되면 좋지 않은데…….”
아예 안 되는 것보다 이렇게 감질나게 안 되는 때가 더 나빴다.
호구들이 도박에 빠지는 까닭이 될 것 같은데 계속 실패하기 때문이다.
다음에는 되겠지, 분명히 터질 기회가 오겠지.
다들 그리 기대하고 판돈을 높이고 달려들지만, 대부분 고배를 마시기 다반사.
지금 맨유의 공격 상황도 딱 그랬다.
공격수들이 안달이 나서 점점 무리수를 쓰고 있었다.
불필요하게 돌파를 하거나, 너무 완벽한 기회를 만들려다가 뺏기거나.
그렇게 마무리를 짓지 못한 공격이 차단당하면 곧장 알비온의 반격이 펄쳐지곤 했다.
「유나이티드 9번 존 레논, 공을 빼앗깁니다. 알비온의 조 케네디가 전방으로 길게 패스! 데릭 케반이 잡아서 공을 몰고 갑니다. 한 명 제치고, 두 명… 아, 존 Y. 리의 차징에 쓰러지네요.」
알비온의 역습 상황에서 맨유가 위기를 모면했다.
든든하게 후방을 지키는 준영을 향해 관중들의 박수와 함성이 쏟아졌다.
“잘한다, 이준영!”
“힘내라, 대한 건아!”
한국 교포들도 붉은 레플리카를 걸친 유나이티드 응원단 옆에서 열심히 응원을 보냈다.
언제 공수해 왔는지, 준영이 공을 잡거나 맨유가 공격하는 찬스에서 징을 울리고 꽹과리와 북, 장구를 두들겨 댔다.
‘저분들, 맨체스터 안 사실 텐데…….’
한 줌도 안 되는 한국 교포들은 대부분 런던 지역에 살고 있다.
맨체스터 주민은 그야말로 극소수.
그런데 오늘 동원된 한국 교포들의 수는 작년 루턴 타운 원정 때 본 숫자와 비슷했다.
즉, 런던에서 일부러 원정 응원을 왔다고밖에 볼 수 없다.
더구나 새로운 응원 도구까지 갖춘 모양새를 보면…….
‘김용우 대사님이 말한 그 작자 때문일지도.’
아무튼 준영은 경기에 집중했다.
전반전이 끝날 무렵에는 알비온의 공세가 점점 더 거세지고 있었으니까.
“탱크 녀석이 온다!”
“부탁해, 주장!”
데릭 케반이 저돌적으로 공을 몰고 들어왔다.
엘런과 패스를 주고받으며 맨유 페널티 박스로 접근하던 데릭은 공을 잡기 직전, 준영의 태클에 걸려 쓰러졌다.
삐익-!
“맨유 5번 존 Y. 리, 파울!”
‘이게 파울이라고?’
준영은 방금 주심의 판정이 좀 불만스러웠다.
자신이 먼저 공을 걷어 냈는데, 데릭이 걸려 쓰러졌다는 것만으로 파울을 불었으니까.
‘뭐, 그렇게 위험한 위치는 아니니까.’
직접 슈팅을 노리기엔 제법 먼 거리.
준영은 일단 선수들을 불러 모아 벽을 세우고, 측면으로 돌아가는 상대 공격수에 대한 대비도 시켜 두었다.
알비온에서 프리킥 키커로 나선 이는 로날드 엘런.
흔치 않은 양발잡이에 패스 능력도 좋고 슈팅도 꽤 강력한 공격수다.
어떤 선택을 하든 얕볼 수 없는 선수.
살짝 호흡을 가다듬던 그가 슈팅을 날렸다.
뻐엉-!
슈팅하는 순간, 수비벽을 섰던 공격수 도슨이 앞으로 튀어 나갔다.
공을 끊어 내 역습으로 만들려는 의도였던 것.
하지만 의도와 달리 공은 그의 등을 맞고 굴절, 골키퍼의 손이 닿기 힘든 골대 오른쪽 구석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으악! 뭐야, 이게……!”
“아, 재수도 더럽게 없지.”
유나이티드 팬들은 다들 약속이나 한 것처럼 머리를 움켜쥐었다.
그런 포즈를 취한 건 준영도 마찬가지였다.
‘이거 꼬일 각인데…….’
불길한 예감을 애써 털어 낸 그는 공을 갖고 센터 서클로 이동했다.
***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나.
옛 노래의 가사대로 오늘 경기는 그대로 꼬여 버렸다.
전반에 선제골을 내준 맨유는 후반에 파상 공세를 펼쳤지만, 오히려 상대에게 역습 찬스만 줬다.
후반 36분에는 맨유의 코너킥 공격을 냉큼 잘라 내고 만든 알비온의 총알 같은 역습이 로날드 엘런의 두 번째 골로 만들어졌다.
결국 0 대 2 패배로 경기 종료.
뮌헨 비행기 사고 이후 처음 당한 완패에 다들 씁쓸한 기분을 떨쳐 내지 못했다.
“역습에 좀 더 대비를 했어야 했는데…….”
“이미 끝난 경기를 후회하면 뭐 해. 다음 번리전에서 잘하자고.”
씁쓸한 기분을 샤워로 씻어 내고 라커룸을 나온 준영.
그에게 구단 직원이 찾아와 말을 건넸다.
“리 선수를 찾는 사람이 있습니다.”
“기자던가요?”
“아뇨. 한국에서 왔다고…….”
South Korea라는 말에 준영은 곧장 옷을 걸치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구단 직원이 안내한 장소로 가니 지팡이를 짚은 중년의 남자와 그의 호위로 보이는 험상궂은 이들이 있었다.
“김창룡 장군이십니까?”
“그렇소. 반갑네, 이준영 선수.”
웃음을 지으며 악수를 건네는 김창룡.
독사 같은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준영은 ‘악마를 보았다’라는 영화 제목이 떠올랐다.
***
1957-1958 시즌 31라운드 웨스트 브롬위치 알비온전은 실제로 무려 0 대 4의 대패로 끝났습니다. 경기 기록을 보니 두 번째 골은 자책골이더군요……;;;
아무래도 과거 배경으로 글을 쓰는 입장이다 보니 과거 자료를 많이 찾아보게 됩니다.
소설 초반부를 쓸 때는 글 쓰는 시간보다 자료 찾는 시간이 더 많을 때도 있었습니다.
누가 골을 넣었는지, 누가 출전했는지, 어떤 선수가 어떤 팀에서 어느 정도 경력이 있었는지 등등.
가상으로 꾸며 낸다 해도 반영해야 할 부분은 분명히 있습니다.
아무리 판타지로 한다고 해도 맨유 유니폼을 퍼런색으로 만들거나, 응원단 구호를 ‘짜요(加油)~’로 할 순 없는 노릇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