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전드 1957-120화 (120/400)

Round 120. 세기의 연인

“대륙붕에 석유가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건 알 만한 사람은 다 알지. 그러니 각국은 사전에 해양 영토를 확정해 두고 싶어 하는 거야.”

있을지 없을지 모르지만, 사전에 점유해 놓으면 나중에 개발하기 쉽다.

더구나 북해 지역은 19세기부터 유전의 존재가 곳.

그렇다 보니 북해 연안 국가들은 이번 제네바 국제 해양법 회의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존재보다 채산성이지. 분명히 득이 되니까 자네가 추천한 게 아닌가?”

“물론입니다. 채산성은 충분합니다.”

국제 유가를 말할 때 그 척도로 삼는 세 곳의 석유가 있다.

미국 서부 텍사스 중질유.

중동의 두바이유.

그리고 북해산 브렌트유였다.

“석유는 생산량도 많아야 하지만, 품질도 높아야 하잖아요. 그 때문에 베네수엘라 같은 경우에도 기름 위에 떠 있다고 했지만, 품질은 매우 나빴죠.”

유가가 높을 때는 베네수엘라의 저급 석유도 잘 팔렸지만, 셰일 오일 등이 등장한 후에는 바로 외면당했고, 베네수엘라 경제도 망했다.

“하지만 북해 석유는 유가의 3대 척도로 꼽힐 정도로 품질이 좋죠. 거기다 21세기에 석유 생산이 줄어든 시점에서도 천연가스는 많이 나왔고요.”

“그래, 바로 그 정보가 중요하지. 투자자들 입장에서는 확실한 정보가 이득이 되니까.”

북해는 바다가 거칠지만, 깊이는 얕다.

즉, 그렇게 고도의 채굴 기술도 필요하지 않으며 비용도 적게 든다.

그럼에도 본격적인 시추가 70년대에 이루어진 것은 득이 될지 안 될지 확신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네가 알려 준 미래의 정보가 있으니 확신을 갖고 나설 수 있는 거지.”

“결론은 예상보다 진척이 빨라질 수 있다는 거군요.”

“그렇지. 미국 쪽 기술을 도입할 수 있다면 2∼3년 안에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싶네.”

“그럼 준비를 좀 더 서둘러야 하겠군요.”

주로 축구에 신경을 쓰고 있지만, 준영은 이쪽에도 공을 들이고 있었다.

알버트를 따라 맨체스터의 사교계에 참석한 이후로도 계속 유력 인사들이나 사업가들과 인맥을 쌓고 있는 것도 이 때문.

지난번에는 알버트가 추천한 고속도로 공사에 투자하기도 했다.

‘라면 사업이나 조셉의 의류 사업이 앞으로도 잘되어야 할 텐데…….’

미래를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 모든 일이 잘 풀리지는 않는다.

그것을 뮌헨 비행기 사고를 계기로 확실히 깨달았다.

그러니 마냥 낙관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대비하리라 마음먹었다.

“그건 그렇고, 아까 리즈가 몹시 당황하던데 무슨 일이 있었나?”

“하하, 그게…….”

“설마 망측한 행동이라도 한 겐가?”

때론 대비할 틈도 없이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준영은 앞으로 그에 대한 방편도 익혀 두리라 결심했다.

***

고즈넉한 벽돌집과 잘 어울리는 작은 마당.

슥 한번 집을 둘러본 준영은 문 앞으로 다가가 초인종을 울렸다.

잠시 후, 벌컥 문이 열리며 알렉스가 얼굴을 내밀었다.

“누구세… 와, 주장! 오셨군요!”

“바로 코앞이니까 오지. 여기가 이번에 임대한 집이야?”

“네. 조용한 데다 겉보기보다 깔끔한 게 좋더라고요.”

맨체스터에 와서 그동안 직원 숙소에서 지냈던 알렉스는 이번에 새집을 구했다.

그것도 준영이 사는 모즐리 마을에.

“자, 이건 집들이 선물.”

“우와! 찻잔 세트네요. 고마워요. 잘 쓸게요!”

준영은 집 안으로 들어와 한번 둘러보았다.

집 내부 공간은 넉넉했다. 크고 작은 방이 4개에 주방, 거실, 창고에 다락방까지.

“혼자 살기엔 좀 커 보인다?”

“헤헤, 혼자 살 거 아니에요. 글래스고에 있는 가족들도 곧 올 거고…….”

알렉스는 제대로 대답하지 않고 실실 웃기만 했다.

그 이유가 곧 밝혀졌다.

“어머, 손님이 오셨네요.”

뒤뜰 쪽에서 빗자루를 든 소녀가 나타났다.

꽤 지적인 미모에 성격이 강해 보였다.

“이쪽 아가씨는……?”

“아, 제 여자 친구인 캐시예요. 인사해, 캐시. 우리 팀 주장이셔.”

알렉스의 말에 캐시가 준영에게 인사를 건넸다.

“캐시 홀딩입니다. 알을 잘 돌봐 주셔서 감사해요.”

“반가워요, 캐시 양. 존 Y. 리입니다.”

영국 축구 최고 명장 위에 있다는 여걸.

그녀는 벌써 미래의 남편을 휘어잡고 있었다.

“알, 벽난로 청소는 아직 안 한 거야?”

“그게… 다른 물건 좀 정리하는 게 바빠서.”

“내가 벽난로 청소부터 해 놓으라고 했을 텐데!”

쩔쩔매는 알렉스를 준영은 내심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아담한 집에 연인과 둘이서 오붓하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였으니까.

준영은 벽난로 청소를 하는 알렉스를 거들며 물었다.

“퍼기야, 왜 하필 이 동네를 택했냐? 여기보다 교통이나 공공 서비스 조건이 좋은 곳들도 많은데.”

“제가 볼 땐 축구만 생각하기 딱 좋은 곳 같아서요.”

클럽 같은 유흥가도 없고, 눈 돌릴 만한 극장이나 번화가도 없다.

검소하게 살면서 축구에 몰두하기 딱 좋은 환경이라는 것.

‘SNS는 인생의 낭비라고 한 양반답구만.’

준영이 내심 수긍할 때, 알렉스가 가까이 다가와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리고 캐시는 맨체스터로 오고 싶어 하지 않았어요. 제가 유나이티드에 입단하는 것도 우려했고요.”

“그럴 테지. 어린 네가 낯선 곳에서 제대로 자리를 잡을 수 없을 거라 생각했을 테니까.”

거기다 같은 연합 왕국에 속해 있다곤 하지만,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사이는 좋지 못했다.

지역감정 정도가 아니라 민족 자체가 다르니까.

남친의 잉글랜드행을 캐시로서는 충분히 꺼릴 만했다.

그래서 다소 한적한 모즐리로 온 것이라고.

“그리고 주장이 있잖아요. 가까이 있으면 배울 게 많을 것 같았어요.”

“짜식, 사회생활 할 줄 아는구나.”

준영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알렉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다 뭔가 생각이 난 듯, 품속에서 티켓을 꺼내 알렉스에게 건넸다.

“뭐죠? 연극 티켓?”

“그래. 오늘 저녁 팰리스 극장에서 숀 형이 나오는 연극 공연이 있잖냐.”

“아, 맞다. 그랬죠.”

이날 공연에 빠질 수 없었던 숀 코너리는 재경기는 없을 거라며 웨스트 브롬위치 알비온과의 경기에서 사력을 다했다.

비록 골은 넣지 못했지만, 마지막에 중요한 헤딩 선방으로 팀의 승리를 지켜 냈다.

“여친이랑 데이트 장소로 나쁘지 않을 거야.”

“고마워요. 근데 주장은요? 데이트 안 해요? 듣자니 연인이 있다고 하던데……?”

“그래, 있어. 우리도 연극 보러 갈 거야.”

알버트가 일개 축구 선수에게는 손녀를 못 보낸다고 완고하게 굴고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데이트 기회를 놓칠 순 없었다.

더구나 최근엔 팀 재건에 신경 쓴다고 데이트할 틈이 없었으니까.

‘게다가 연극이 로맨스 러브 스토리라니 더 볼만하겠지.’

빨리 저녁이 왔으면.

그러한 바람에 준영은 괜히 시계와 창밖의 해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

팰리스 극장에서 공연하는 언딘(Ondine).

19세기 독일 소설이 원작인 이 연극은 물의 요정과 기사의 사랑 이야기를 다루고 있었다.

여기서 숀 코너리가 맡은 역은 물의 요정과 사랑에 빠지는 기사 한스.

충동적인 사랑에 번민하다 끝내 옛 신과 물의 요정의 계약에 따라 죽고 마는 비극적인 역할이었다.

“베르타 공주! 나에게 어떻게 그런 거짓말을 할 수 있소?”

“들으세요, 한스. 그 여자는, 아니 그것은 이 세상의 존재가 아니에요. 잊어버리도록 하세요!”

연기를 하면서 숀은 쓴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신화와 전설을 가미한 중세 배경의 러브 스토리라고 하지만, 본질적으로 따지면 현실에서 충분히 있을 만한 일이니까.

사회적 지위가 다름에도 눈이 맞은 남녀, 이를 갈라놓으려는 주변 사람들.

그 과정에서 따져지는 도덕과 부덕.

어쩌면 원작자는 당시 계급 사회에서도 있을 만한 일을 신화와 전설에 빗댄 것일지 모른다.

“우리의 이별은 영원한 이별이 되겠지. 여느 연인들처럼 내세에서 다시 만나기를 기약하고 싶지만… 서로 다른 세계로 떠난 것처럼 헤어져 버릴 테지.”

공연은 클라이맥스를 지나 결말에 다다랐다.

숨죽이고 지켜보는 관객들 중에는 감정이 이입되었는지 눈시울을 붉히는 이들도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막을 내리자, 객석에서는 요란한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성공! 그것도 대성공!

반색을 한 숀은 출연한 배우들과 함께 관객들에게 정중히 인사를 건네고 퇴장했다.

“잘했네. 정말 열연을 보여 주었어!”

“매일 축구공만 끼고 있어서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우려를 했었는데 말이야.”

연출가와 스태프들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숀과 함께 연기했던 여배우는 다 끝나고 긴장이 풀렸는지 의자에 털썩 앉았다.

“와, 다 끝나니 배가 고프네요.”

“신경을 많이 써서 그렇겠지.”

“어디 보자… 올 때 사 놓은 과자가 있을 텐데.”

가방을 뒤지던 그녀는 과자 한 통을 꺼냈다.

그러곤 거기서 길쭉한 초콜릿 과자를 꺼내 맛있게 씹어 먹었다.

‘저건 분명 리틀 존의 식품 회사에서 새로 만들었다는…….’

며칠 전 준영이 신상품이라고 건네준 적이 있었다.

초콜릿을 코팅한 스틱 크래커.

다들 좋아했지만, 과자 같은 군것질거리는 별로 즐기지 않았던 숀은 맛만 보고 말았다.

“아, 이제 좀 살 것 같네요.”

연거푸 과자, 빼빼Ro를 집어서 먹었던 그녀는 갑자기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놀라 일어난 건 숀도 마찬가지.

그도 그럴 것이 지금 분장실로 너무나 유명한 사람이 들어오고 있었으니까.

‘맙소사! 유명한 사람들이 온다더니 앤 공주도 왔었나?’

로마의 휴일.

그 영화 한 편으로 세기의 연인이 된 여배우 오드리 헵번.

작년에 화니 페이스라는 뮤지컬 영화를 찍고 잠시 활동을 중단한 그녀가 숀과 극단 사람들 앞에서 활짝 미소를 짓고 있었다.

“많이들 놀랐나 보네요. 갑자기 이야기도 없이 찾아와서 폐가 된 건 아닌지…….”

“폐라니요. 전혀 그렇지 않아요.”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은 톱스타가 자신들의 공연을 봐 준 것만 해도 영광.

그래도 좀 궁금하긴 했다.

어째서 오드리 헵번이 지금 여기에 와 있는지.

“그거요? 파리 여행을 마치고 돌아가던 중에 잠시 샌 거예요. 귀찮게 쫓아오는 기자분들이 한둘이 아니라서…….”

그렇게 몰래 맨체스터 관광을 하다가 팰리스 극장에 오게 되었다.

언딘은 브로드웨이에서 그녀가 공연했던 작품이기도 해서 관심이 갔고.

“으으, 못난 모습을 보여 드린 건 아닌지…….”

“그런 생각 하지 마세요. 충분히 잘하셨어요. 저랑 다른 개성 있는 연기가 인상적이었고요.”

언딘을 맡았던 여배우를 칭찬해 주던 오드리는 분장대에 놓여 있는 빼빼Ro를 보았다.

“어머, 이 길쭉한 과자는 뭐죠?”

“요즘 새로 나온 과자예요.”

“그래요? 한번 먹어 봐도 돼요?”

평소 초콜릿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오드리는 냉큼 빼빼Ro 하나를 집어 들고 씹어 먹었다.

그러다 하나 더 집어 들더니 3개, 4개, 5개를 연달아 먹었다.

“어머나, 이건 정말이지… 평생 먹어도 질리지 않을 것 같아.”

정말 맘에 들었던지 활짝 미소를 지은 그녀는 빼빼Ro 상자를 집어 들며 물었다.

“저기, 이거 가져가도 될까요?”

“네네, 그러세요.”

숀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지었다.

지금 빼빼Ro를 입에 문 앤 공주님의 모습은 스페인 광장에서 아이스크림을 잡수실 때의 모습과 다를 바 없었으므로.

***

캐시 홀딩은 퍼거슨 감독보다 2살 연상인데, 실제론 1964년에 처음 만났습니다. 하지만 소설에서는 일부러 일찍 출연시켜 봤습니다. 어차피 역사도 바꾸어 전개하고 있는 참이라……. ^^

오드리 헵번은 초콜릿을 정말 좋아했는데, 어린 시절 2차 대전 때 몹시 굶주렸던 비참한 경험 때문이라고 하네요. 영양실조로 거의 죽을 뻔할 때 먹은 게 초콜릿이라고 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