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전드 1957-119화 (119/400)

Round 119. 누군가의 희망

“다들 이것 봐. 우리 팀이 또 이겼어!”

병상에 있던 선수들은 데니스 바이올렛이 가져온 신문을 보고 환호성을 질렀다.

셰필드 웬즈데이나 노팅엄을 이겼을 때도 잘하고 있구나 싶었는데, 만만찮은 웨스트 브롬위치까지 잡다니!

“바비 녀석, 다신 축구 안 한다더니…….”

“난 그 말 안 믿었어요.”

옆자리의 마크 존스와 체스를 두던 던컨은 바비가 복귀할 줄 알고 있었다는 듯 웃음을 지었다.

“그보다 알렉스라는 그 스코틀랜드 꼬마가 굉장한 모양이던데요? 세 경기 연속 골을 넣을 정도이니…….”

“존이 직접 글래스고에 가서 데려왔다고 하더군.”

며칠 전에 짬을 내서 문병 왔던 준영에게서 이야기를 들은 로저 바인은 데니스를 보며 말했다.

“너 복귀해도 자리 없을 것 같은데?”

“하하핫! 내가 애송이들에게 밀릴까 봐요? 저보다 케니 녀석을 걱정해야죠.”

상대적으로 부상이 경미했던 케니 모건스는 사흘 후 퇴원이 결정되었다.

데니스도 늦어도 3월 중순에 퇴원할 예정이었다.

물론 부상이 나았다고 바로 경기에 나갈 수 있는 건 아니다.

근육도 다시 단련해야 하고, 경기 감각도 되찾아야 하니까.

“4월 안에는 복귀할 겁니다. 중요한 경기들도 많으니…….”

“그래, 얼른 복귀해서 힘을 보태 줘. 나는 이제 응원하는 것밖에 못하니까.”

사고로 한쪽 다리를 잃은 로저는 다시는 필드에서 뛸 수 없었다.

하지만 여전히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일원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항상 팀이 경기할 시간이 되면 준영이 가져다준 유니폼으로 갈아입곤 했다.

그건 다른 선수들도 마찬가지.

이제는 ‘열두 번째 선수’로 자신들이 몸담았던 팀에 성원을 보낼 생각이었다.

‘무너지지 마라, 유나이티드!’

‘내 땀과 열정으로 쌓아 올린 꿈을 지켜 줘!’

인생이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지는 좌절을 맛본 이들.

그들에게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암울한 삶을 밝히는 빛이자, 의욕을 안겨 주는 희망이었다.

***

대한민국 서울 명동.

낡은 건물과 전차선이 어지럽게 들어서 있는 거리로 신문을 한 아름 안은 소년들이 큰 소리로 외치며 뛰어다녔다.

“호외요, 호외!”

“축구왕 이준영의 맨체스터 연합이 또 승리했습니다!”

사람들은 여기저기 모여들어 호외를 보았다.

어린 학생도, 갓을 쓰고 도포를 걸친 노인도, 리어카를 끌던 행상과 그에게 자릿세를 뜯던 양복쟁이 건달도.

다들 사이좋게 신문 기사에 눈을 모았다.

신문에 실린 사진에는 웨스트 브롬위치에게 승리를 거둔 후 포효하는 준영의 모습이 실려 있었다.

“이야, 또 이겼구만!”

“슛을 굴절시켜 선제 득점에 기여… 뭐야, 그럼 득점을 했단 말 아닌가?”

“팀이 사고로 망했다던데, 참 대단하구만! 대단해!”

“연합 축구단 주장이래! 한국 사람이 코쟁이들의 오야붕이란 얘기잖아.”

“어허, 오야붕이라니! 한국 사람이 한국말을 써야지!”

몇 달 전부터 슬금슬금 소문이 퍼졌던 축구왕 이준영은 이제 모르면 간첩이라고 할 정도로 유명 인사가 되었다.

다들 그의 선전을 자기 일인 양 기뻐하고 뿌듯하게 여겼다.

그것은 경무대의 높으신 분도 마찬가지였다.

“이겼어. 허허허! 또 이겼다는 게야!”

“감축드립니다, 각하!”

“허허허! 이 사람아, 내가 축하받을 일이 뭐가 있다고.”

“각하께서 언제나 이준영이 이기기를 기원하셨지 않습니까. 각하의 마음이 하늘을 움직인 것입니다!”

“허허허, 그런가? 허허허!”

경무관의 아부에 늙은 대통령의 웃음은 그칠 줄 몰랐다.

그렇게 실컷 웃고 난 후, 대통령은 감회 어린 표정으로 다시 말문을 열었다.

“참으로 쾌거가 아닐 수 없어! 왜정 때 손기정 이후로 세계에 이름을 드날린 대한의 건아가 있었던가 말이지.”

이 대통령은 4년 전의 일을 떠올렸다.

숙적 일본을 통쾌하게 무찌르고 월드컵에 나갔던 대한민국 축구대표팀은 두 경기 모두 참패하고 돌아왔다.

단 한 골이라도 넣어 보자는 바람도 이루지 못한 채.

세계의 벽은 너무 높았다.

그걸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현실이 서글펐다.

어떤 이는 단순한 스포츠 경기일 뿐이라고 하지만, 그 스포츠가 사실상 국력의 척도가 되고, 국민의 역량을 보여 주고 있었다.

그 점을 생각하면 대한민국은 국제 사회에서 하류.

그렇게 실망하고 있을 때, 갑자기 혜성같이 나타난 이가 바로 이준영이었다.

한국계 홍콩인이라는 이 축구 선수는 축구의 본고장에서 화려한 실력을 뽐냈다.

그저 높아 보이기만 하던 세계의 벽.

한국인도 그걸 올라갈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 준 것이다!

물론 높으신 분들은 그것 때문에 이준영의 선전을 반기는 건 아니었다.

‘빵과 서커스라고 했던가? 어디서 나타난 놈인지 몰라도 꽤 쓸 만해.’

현재 자유당 독재 정권은 국민들이 정치에 관심을 두지 않기를 바랐다.

그러니 스포츠, 축구 쪽으로 시선을 돌리게 만들어 주는 이준영이 기특해 보일 수밖에.

정말 눈앞에 있다면 훈장이라도 주고 싶을 정도였다.

“이준영이를 한번 불러 보고 싶은데…….”

“각하, 이번 5월 동경에서 아시안게임이 열리니 그때 대표팀에 차출함이 어떨는지요?”

곽영주 경무관의 제안에 다들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전 교통부 차관이자 현 대한축구협회 회장인 김윤기는 곤란한 기색을 보였다.

“그게, 힘들 겁니다. 이준영은 일단 홍콩 시민권자인 데다, 영국에서도 많은 관심을 보이는 선수라…….”

“이보십쇼, 김 회장!”

곽 경무관이 버럭 언성을 높였다.

“하지도 않고 꼬리부터 빼서야 되겠습니까? 재일 교포도 대표 선수가 되는데 홍콩 출신이라고 안 될 게 뭐요? 어차피 같은 한민족인데!”

“물론, 그렇습니다만…….”

“안 된다고 여기지 말고 하면 된다고 덤벼들어야지요! 회장이 그렇게 소극적으로 구니 왜놈들도 자기네 선수라 우기는 게 아닙니까!”

아들뻘인 곽영주에게 호통을 듣는 김윤기는 진땀을 뻘뻘 흘렸다.

“똑바로 하세요, 똑바로! 이러니까 월드컵 출전 등록도 못하고 망신을 당하는 게 아닙니까!”

대한민국 축구대표팀은 올해 스웨덴 월드컵 아시아 예선에도 나가지 못했다.

영어를 전혀 모르는 협회 직원이 출전 등록 서류를 분실해 버렸기 때문.

그와 관련한 비난은 수장인 김윤기가 다 떠안아야 했다.

“됐네. 그만하게, 곽 경무관. 지난 일을 다시 들춰 봤자 속만 상할 뿐이잖나.”

곽영주를 만류한 이 대통령은 김윤기를 보며 말했다.

“아무튼 이준영이를 한번 부르는 건 재밌을 것 같네. 진행시켜 보라고.”

“알겠습니다, 각하.”

“기왕이면 영국에 그 친구를 설득할 사람을 보내는 것도 괜찮을 듯싶은데…….”

이 대통령의 말에 육군 정복을 입은 장군이 지팡이를 짚으며 일어섰다.

“각하,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오, 김 소장이? 하지만 몸이 불편한데 괜찮겠나?”

“각하가 원하신다면 지구 반대편이 아니라 불지옥에라도 다녀올 수 있습니다!”

“허허허, 그럼 창룡이 자네에게 맡겨 봄세.”

김창룡.

독사 같은 인상을 한 이 30대 후반의 장군은 전 육군 특무대 대장을 맡고 있었다.

그러다 2년 전에 허태영, 신초식 등에게 총격을 받고 죽다 살아났다.

최근까지 치료와 요양을 했던 그가 이번 일을 자청한 것은 단지 대통령에게 잘 보이기 위함은 아니었다.

‘영국 하면 축구니까!’

김창룡은 엄청난 축빠였다.

특무대 축구팀을 직접 관리 감독하며 전국에서 유명한 선수들을 죄다 끌어모을 정도.

하지만 정작 축구계에서는 평판이 영 좋지 않았다.

그렇다 보니 김윤기 회장은 우려가 될 수밖에.

‘저 인간 성질이면 도리어 사고를 칠 것 같은데…….’

하지만 늙은 대통령의 총애를 받는 김창룡을 안 된다고 외칠 만큼 배짱이 두둑하지 않았던 그는 묵묵히 입을 다물고만 있었다.

***

프레드로 저택의 서재.

저녁 식사를 마친 준영은 이곳에서 세 자매와 함께 공부를 하고 있었다.

‘좌표평면 위의 두 점 A(-2, 1), B(3, 4) 사이의 거리는 얼마일까……. 어디 보자, 이걸 어떻게 계산하더라?’

리즈가 뽑아 준 수학 문제들을 풀이하던 준영.

그의 귀에 간질거리는 소음이 들렸다.

와작와작, 바삭바삭.

살짝 고개를 돌려 보니 이 집 막내 아가씨가 책을 보며 과자를 씹어 먹고 있었다.

그냥 과자도 아니고, 얼마 전 생산 판매를 시작한 빼빼Ro.

카린은 물론이고 앤지와 리즈도 이 미래의 과자를 좋아했다.

초콜릿 과자는 진리인 데다, 바삭거리는 식감도 좋고 부스러기를 흘리지 않고 깔끔하게 먹을 수 있었기 때문.

“카린, 과자 많이 먹으면 살찐다?”

“괜찮아. 놀다 보면 살 빠져.”

“이가 썩으면 즐겁게 놀지도 못할걸.”

“양치질 열심히 하면 돼.”

언니들의 충고를 가볍게 받아친 카린은 다시 빼빼Ro 하나를 입에 물었다.

그러자 앤지가 카린이 물고 있던 빼빼Ro를 잡고 중간을 뚝 부러트려서 가로챘다.

“좋은 과자야. 빼앗아 먹기도 좋고.”

“우씨! 작은언니, 못됐어!”

아웅다웅하는 동생들을 보며 생긋 웃음을 짓던 리즈도 빼빼Ro 하나를 입에 물었다.

계속 작문에 열중하다 보니 입이 심심해졌기 때문.

그건 준영도 마찬가지였다.

어려운 수학 문제들을 연거푸 풀자니 머리가 아팠고 단것이 당겼다.

“잘 안 풀려요?”

“학교 다닐 때도 수학이 제일 싫었어.”

그나마 21세기 한국에서는 최저 학력 기준에 미달하지 않으면 괜찮았다.

하지만 준영이 치러야 할 영국 학력 인증 시험은 운동선수라고 커트라인을 낮춰 주지 않았다.

“힘내요. 나중에 채점해서 점수 잘 나오면 상을 줄 테니까.”

“감사합니다, 쓰앵님. 근데 그 전에 칼로리 보충 좀 할게요.”

준영은 슬쩍 리즈 쪽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러고는 마침 그녀가 물고 있던 빼빼Ro를 싹둑 잘라 먹었다.

갑작스러운 대시.

그 와중에 입술까지 스치자 리즈는 화들짝 놀랐다.

“에, 에… 이건?”

“원래 이런 식으로도 먹는 과자야.”

과연!

저런 식으로 로맨틱하게 강탈을 할 수 있구나.

이 과자가 지닌 엄청난 잠재성(?)에 지켜보던 앤지와 카린은 저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었다.

“얼른 문제나 풀어요.”

“알겠습니다, 쓰앵님.”

빨갛게 얼굴이 달아오른 리즈를 보며 준영은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확실히 보충을 해서 그런지, 머리가 아프지도 않았고 문제도 술술 풀렸다.

그렇게 즐겁게 공부를 하고 있을 때였다.

“존, 나랑 잠시 이야기 좀 하세.”

“예? 아… 예.”

갑자기 서재를 찾아온 알버트의 말에 준영은 뜨끔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혹시 좀 전의 과자 강탈 건을 알고 혼을 내려는 건 아닌지?

하지만 그건 제 발 저린 나머지 짐작한 것일 뿐이었다.

정작 알버트가 부른 이유는 따로 있었다.

“4월에 스위스 제네바에서 국제 해양법 회의가 열릴 거라고 하네.”

“그래요? 혹시 어업 협정 같은 겁니까?”

“아니. 그것보다는 대륙붕의 법적인 정의와 깊이, 면적 등을 논의할 것 같더군.”

“그럼 혹시…….”

뭔가를 짐작한 준영에게 알버트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맞네. 해양 영토 확정 문제를 논의하려는 거야. 우리가 장차 노리고 있는 사업에 영향을 줄 테지.”

바다, 대륙붕, 석유…….

아직 세상은 험한 북해 바다 아래 감춰진 검은 황금을 모른다.

하지만 미래 해양 자원의 가능성과 희망을 품고 준비하는 이들이 있었다.

***

김창룡은 그라운드의 독재자로 불릴 정도로 축구계에 악명을 떨쳤습니다.

자기가 맡은 특무대에 최정민이나 함흥철 같은 당대 유명 선수들을 끌어모아 독식하는 한편, 승부에 개입하는 행위도 서슴지 않았죠.

당시 조선 방직이라고 50년대 잘나가는 실업팀이 있었는데, 이 팀이 특무대한테 이겼다고 그 자리에서 전원 체포되는 일도 있었습니다(…).

당시 조선 방직팀 감독이 마라토너로 유명한 손기정 옹이었는데, 이분도 그때 잡혀가서 곤욕을 치렀습니다.

이런 작자이다 보니, 실제로도 곱게 죽지 못했습니다. 인과응보라고 하겠네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