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전드 1957-118화 (118/400)

Round 118. 웸블리로 한 걸음 더

‘넣는다! 반드시 넣어야 해!’

의지를 불태우는 알렉스의 눈에 괴물처럼 커지는 상대 골키퍼의 모습이 들어왔다.

더 가까워지면 기회를 놓친다.

그리 판단한 알렉스는 과감하게 슈팅을 날렸다.

퉁-

‘헉!’

슛이 골키퍼의 손에 맞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펀칭에 굴절되어 살짝 튀어 올랐던 공은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골대로 떨어졌다.

수비수가 기를 쓰고 몸을 날렸지만, 공을 걷어 내는 데 실패했다.

“골인!”

“스코틀랜드 꼬마가 또 일을 저질렀어!”

고개를 쭉 빼고 결과를 지켜보던 유나이티드 서포터들은 방방 뛰어올랐다.

상대의 동점 골이 터졌을 때 느꼈던 답답하고 불쾌한 기분은 쑥 내려가 버렸다.

그런 후련한 기분은 맨유 선수들도 느끼고 있었다.

“잘했다, 퍼기!”

“이 녀석, 진짜 마무리는 일품이라니까.”

누구보다 기쁜 건 준영이었다.

훗날 영국 축구를 빛낼 거대 원석.

하지만 처음 만났을 땐 정말 너무 어려서 걱정도 되었다.

거기다 그를 맨유로 일찍 데려가는 게 오히려 축구 인생을 꼬이게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도 있었다.

그러나 알렉스 퍼거슨은 그 우려를 일축해 버릴 정도의 활약을 보여 주었다.

과감하고 적극적으로 자기 역할을 수행하며 경험과 실력, 자신감을 쌓아 나갔다.

그렇게 경기를 거듭할 때마다 스스로를 연마하면서 점점 보석으로 탈바꿈되어 가고 있었다.

“자, 다들 진정하고 다시 경기에 집중하자. 전반전도 얼마 안 남았으니까.”

“Yes, Sir!”

리드한 상태로 전반을 끝내면 그만큼 여유롭게 후반을 시작할 수 있다.

이에 준영은 시계가 멎을 때까지 상대 공격수들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았다.

***

1 대 2.

홈경기에서 한 점 뒤진 채 전반을 마친 알비온은 후반에 대대적인 공세로 나왔다.

라인을 적극적으로 올리고, 공이 움직이는 곳을 중심으로 선수들이 활발히 움직였다.

“공이 있는 쪽에 너무 몰린 거 아닌가?”

“마치 애들 동네 축구 하는 것 같구만.”

공이 가는 쪽으로 우르르 몰려들어 공격을 지원하고, 수비 상황에서는 다 같이 달려들고.

단순히 동네 축구 같다고 얕볼 수 없었다.

같은 동네 축구 전술이라도 애들이 하는 거랑 프로랑 하는 것은 사뭇 다르니까.

거기다…….

‘이건 지난번 노팅엄 녀석들과 비슷하잖아. 거의 토털 사커 수준인걸.’

푸시 앤 런.

뛰면서 패스하고 밀어붙이는 게 공격수만이 아니었다.

하프백, 심지어 후방 수비수들까지 적극적으로 올라와 가세했다.

사실상 포지션 같은 걸 따지지 않고 위치에 따라 패스를 밀어 주고 기회를 만들어 나갔다.

“와, 이놈들, 완전 제멋대로인데?”

“그런데도 기가 막히게 손발이 잘 맞는군.”

준영이 보기에 앞서 상대했던 노팅엄보다 알비온 쪽이 더 토털 사커에 가까웠다.

노팅엄 측과 달리 알비온에는 확실히 잘 조율하는 핵심 선수가 있었기 때문.

‘바비 롭슨, 그가 알비온의 플레이를 만들어 가고 있어.’

여기에 가장 부합하는 이가 로날드 엘런과 데릭 케반.

그 둘은 마치 쐐기라도 된 것처럼 맨유 수비진에 달려들어 빈틈을 만들고 기회를 창출했다.

전반 5분에는 데릭이 밀고 들어와 내준 패스를 엘런이 슈팅으로 연결했다.

2분 후에는 롭슨이 찔러 준 패스를 받은 데릭이 슛을 날렸고, 이것이 골대 왼쪽으로 지나갔다.

전반 12분, 코너킥에서는 데릭이 준영을 슬쩍 잡아 놓는 사이, 롭슨이 파고들어 헤딩슛을 날렸다.

“와, 알비온 녀석들, 작정하고 두들기는데?”

“벌써 후반 15분이 지났는데, 유나이티드는 중앙선을 넘지 못하고 있어.”

“그래도 실점은 하지 않고 잘 버티는군.”

“크악! 저 키 큰 원숭이 놈만 아니었으면 벌써 2골은 들어갔을 텐데!”

알비온의 연이은 공세에도 불구하고 준영을 축으로 하는 맨유 수비진은 무너지지 않았다.

공격수의 슈팅 각을 좁히고, 돌파하는 상대에게서 인터셉트를 해내고.

몸을 날려 중거리 슛을 막거나 공중볼에서도 우세를 보였다.

하지만 준영은 안심할 수 없었다.

‘계속 막는다고 될 일이 아니야. 공격을 해야 하는데!’

점수 차가 좀 되면 모를까, 달랑 1점 차.

아차 하는 순간 동점 골이 터지기라도 하면 분위기는 급변해 버릴 것이다.

‘그러니 공격을 해야 하는 거지. 상대가 전진하면 그만큼 기회가 오기 마련인데…….’

이 상식이 때론 잘 안 통할 때가 있었다.

바로 지금처럼.

“곧장 최전방으로 패스를……!”

“안 돼. 서두르지 마!”

공을 향해 몰려드는 상대를 피할 간단한 방법은 최전방을 노린 롱 패스.

하지만 알비온은 이에 대한 대비를 잘하고 나왔다.

애초에 롱 패스 전술 자체가 단순하니 수가 읽히면 대응하기도 쉬웠던 것.

거기다 알비온의 적극적인 라인업(Line up)은 의도치 않은 효과까지 불러일으켰다.

삐익-!

“윽, 오프사이드라니.”

준영이 하듯이 일부러 오프사이드 함정을 파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수비수들의 적극적인 전진과 맨유 공격진의 성급함이 맞물리면서 절묘한 오프사이드 트랩이 만들어졌다.

여기에 심판들의 판정이 알비온의 우세에 무게를 더했다.

전반에도 핸드볼을 무시했던 심판이 후반전에 벌어지는 오프사이드나 기타 파울에 있어서도 은근히 알비온의 편을 들었던 것.

불리한 상황이지만, 심판 탓을 늘어놓고 있을 틈은 없었다.

“급할수록 돌아가라고 했어! 상대가 몰려든다고 겁먹지 말고, 침착하게 전진 패스를 넣어!”

준영의 이 말에 제대로 부응한 건 바비 찰튼.

그는 주변이 알비온 선수들로 둘러싸인 상황에서도 영리하게 포위망을 벗어났다.

그리고 반대편에 있는 콜린 웹스터에게 기막힌 스루패스를 넣어 주었다!

‘오, 나이스 패스!’

준영이 절로 주먹을 불끈 쥘 정도로 멋진 패스였다.

오프사이드를 무너트리는 콜린의 움직임이나 딱 맞춰 들어가는 패스 모두 예술이었던 것.

그렇게 무인지경이 된 알비온 진영을 콜린이 달려가고 있을 때였다.

삑-!

부심이 기를 드는 것과 동시에 심판이 휘슬을 불었다.

“뭐라고? 오프사이드? 저게 왜 오프사이드입니까!”

어이없다는 준영의 항의에 심판은 당연하다는 투로 대꾸했다.

“공격수가 수비수보다 앞서 있었으니 그렇지.”

“무슨 소립니까! 패스가 가기 전에 콜린은 수비수 뒤쪽에 있었는데!”

“그야 그렇지. 근데 저기 키 큰 친구는 확실히 앞에 있었다고.”

콜린이 아닌 숀이 문제였다는 것.

숀은 확실히 수비수보다 앞서 있었다.

‘맞다. 오프사이드 규정이 21세기랑 다르지.’

21세기에는 수비수보다 앞에 있어도 공격에 관여하지만 않으면 오프사이드에 걸리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관여하든 안 하든 수비수보다 앞선 상황에서 패스가 들어오면 무조건 오프사이드였던 것.

사실 수비 입장에선 일괄 처리되니 개꿀이라고 할 수 있었다.

실제로 이 룰 덕분에 준영이 다른 경기에서 득을 본 적도 있었고.

“쩝, 좋다 말았네.”

“그래도 알비온 녀석들, 꽤 놀랐나 봐.”

하마터면 뒷공간이 제대로 털릴 뻔했기 때문일까.

후반 30분대가 가까워 오자, 알비온 선수들이 슬금슬금 물러났다.

후반 초반에 보여 줬던 적극적인 움직임도 줄어들었고.

‘불안하기도 하지만, 체력도 떨어져서 그렇겠지.’

교체 룰이 없는 현실에서 이렇게 체력이 떨어지는 시간대를 극복할 만한 방법은 많지 않다.

없는 체력을 쥐어 짜내거나, 아니면 체력을 아낀 선수가 본격적으로 활개 치거나.

알비온에서도 아직 쌩쌩하게 움직이는 선수들은 있었다.

바로 롭슨과 엘런, 데릭 공격 3총사.

그들은 여전히 날카로운 움직임을 보이며 맨유의 수비 라인을 파고들어왔다.

‘저놈들, 계속 이안 쪽을 노리네.’

이미 롭슨은 이안 그리브스를 상대로 몇 차례 재미를 봤다.

그쪽 루트로 돌파하려 드는 건 당연했다.

당연히 그쪽으로 어떻게든 땜빵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바비, 측면으로 가서 이안을 도와줘!”

“예!”

머피 코치도 더는 그냥 둘 수 없다고 봤는지 중원에 있던 바비 찰튼을 수비로 끌어내렸다.

체력이 좋고 수비 능력도 좋은 바비 찰튼은 바비 롭슨을 잘 틀어막았다.

“자, 4분 남았다! 좀 더 버텨 보자!”

“이길 수 있어!”

후반엔 이렇다 할 공격을 못해 조마조마했건만, 그래도 어떻게든 잘 버텨 내며 리드를 이어 가고 있었다.

‘그래도 방심해선 안 되지. 시작하고 5분, 끝나기 전 5분이 제일 위험하니까.’

그 위기는 준영만 느끼고 있는 건 아니었다.

전방에 있던 공격수들도 내려와서 수비에 힘을 불어넣어 주고 있었다.

물론 전부 다 내려온 건 아니고, 알렉스만 남아서 역습 상황에 대비했다.

“태클하지 마! 슈팅 각만 좁혀!”

“파울하지 마! 뒤에서 커버해 줄 테니까 절대 하면 안 돼!”

준영은 위험 지역에서 프리킥이나 페널티킥이 나올 만한 상황을 차단하려 애썼다.

판정이 불리하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아예 빌미가 될 만한 행동을 하지 않기로 한 것.

이에 다른 선수들도 알비온 측이 슈팅을 하면 준영이 하듯이 뒷짐을 지고 막을 정도였다.

‘환장하겠군. 밀어붙이는데도 뚫리지가 않다니…….’

쉽지 않은 경기가 될 거라 생각은 했다.

하지만 어떻게든 이기겠다는, 팀을 다시 살리겠다는 절박함을 안고 나온 유나이티드의 골문을 열기는 만만치 않았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아!’

이쪽도 우승이 절박하긴 마찬가지!

정규 시간 45분이 끝난 가운데, 롭슨은 이를 악물고 돌파를 시도했다.

하지만 자신과 동명인 바비 찰튼의 수비는 끈질겼다.

페널티 박스 측면을 파고드는 데는 성공했지만, 슈팅할 각이 전혀 없었다.

‘거기선 딱히 선택할 게 없을걸.’

슈팅 각이 안 나오니 뒤로 볼을 돌리거나 아님 중앙으로 컷백을 시도하거나.

하지만 모든 대비가 되어 있었다.

어떤 수를 쓰든 롭슨의 시도는 막히게 될 것이다.

‘슈팅인가?’

롭슨은 과감하게 슈팅을 날렸다.

까앙-

골대 하단 구석을 노렸던 그 회심의 슈팅은 골대를 맞고 튕겨 나갔다.

역시나 각이 없다 보니 어쩔 수 없었다.

‘거봐, 그럴 줄 알았… 잠깐, 리바운드 볼은……!’

아차 싶은 순간, 알비온의 공격수 데릭 케반의 앞으로 공이 굴러갔다.

‘설마 일부러 노리고 골대 쪽으로?’

우연인지 의도인지 지금 상황에선 중요하지 않았다.

준영은 황급히 몸을 날렸지만, 데릭의 슈팅을 저지할 수 없었다.

그건 골키퍼 해리 그렉도 마찬가지.

‘망했… 아!’

구겨지던 준영의 표정이 활짝 펴졌다.

수비 가담을 위해 페널티 박스까지 내려와 있던 숀이 골대 안으로 날아드는 슛을 머리로 막아 냈던 것!

“재경기는 절대 안 해!”

거의 한 골을 넣은 것이나 마찬가지인 멋진 디펜스.

해리는 펄쩍 뛰어올라 숀의 머리를 맞고 솟구쳤던 공을 잡아챘다.

“잘했어요, 숀! 오늘 술은 내가 사죠.”

“조심해! 공을 확실히 잡고 있으라고!”

숀의 경고에 해리는 냉큼 공을 품에 안고 웅크렸다.

그가 방심한 상황을 노리고 덤벼들었던 알비온 선수들은 분통을 터트리며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자! 조금만 더 버티자!”

해리는 잠시 공을 쥐며 시간을 끌고 상대의 공격 템포도 죽였다.

그러곤 센터 서클 부근에서 기다리고 있던 알렉스에게 공을 차 보냈다.

“막아! 막아!”

“애송이에게 또 골을 먹으면 수치다!”

알비온 선수들은 기를 쓰고 쫓아갔다.

영악한 알렉스는 무모하게 골문으로 달려가지 않았다.

대신 코너 플래그까지 달려가 적당히 버티고 있다가, 알비온 선수의 발에 맞춰 공을 아웃시켰다.

남은 시간을 끌려고 코너킥을 만들어 낸 것이다.

하지만 맨유는 그 코너킥 공격을 할 필요가 없었다.

삐익- 삑-

뭔가 맥 빠진 듯한 심판의 종료 휘슬이 길게 울렸다.

알비온 선수들과 팬들이 낙담하는 가운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신나게 환호성을 질렀다.

FA컵 4강 진출.

맨유는 웸블리로 한 걸음 더 성큼 다가섰다.

***

실제 이 경기는 2 대 2로 비깁니다. 막판에 웨스트 브롬위치가 동점 골을 넣었죠.

나흘 후 올드 트래퍼드에서 열린 재경기에서는 바비 찰튼의 어시스트를 받은 콜린 웹스터가 경기 종료 1분 전에 극적인 결승 골을 터트리며 4강에 진출하죠. 유튜브에 검색하니 해당 경기 영상이 있더군요. ^^

이렇게 이겼지만 사흘 후, 리그 경기에서 또다시 만난 웨스트 브롬위치에게 0 대 4 대패로 제대로 보복당합니다……;;;

아무튼 당시 시즌 경기 기록을 보면 정말 힘겨운 상황에서도 맨유가 어떻게든 웸블리로 가려 했음을 알 수 있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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