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전드 1957-116화 (116/400)

Round 116. 물러설 수 없는 경기

“이게 시제품인가? 진짜 잘 만들었네요.”

준영은 케일이 가져온 과자 시제품을 살펴보았다.

가늘고 길쭉한 막대형의 단단한 크래커에 끝부분만 남겨 두고 초콜릿을 바른 과자.

바로 빼빼Ro였다.

지난번에 카린이 미래의 과자를 먹어 보고 싶다고 해서 형태와 재료를 알려 주고 개발해 보라고 일렀다.

“어디 맛은… 와, 맛있네.”

“사장님이 곧잘 말하는 식으로 초콜릿은 진리니까요. 시식한 사람들 중에서 싫다는 사람은 거의 못 봤습니다.”

특히 여성층이 좋아해서 빨리 시판해 달라고 요청했단다.

케일도 상당히 긍정적으로 보고 있었기 때문에 생산 위탁을 해서라도 서둘러 판매하고 싶어 했다.

“제가 아는 제과 업체 중에 요즘 매출이 좋지 않은 곳이 있습니다. 원래 군납 크래커와 초콜릿을 만들던 곳이니 문제없이 생산해 낼 겁니다.”

“알았어요. 그렇게 진행하도록 하세요. 아 참, 이거 이름은 빼빼Ro로 하고요.”

“Pepero? 뭔가 이탈리아나 스페인 느낌이 드는군요. 무슨 뜻입니까?”

“특별한 뜻은 없어요.”

빼빼 마른 과자라고 빼빼Ro라고 지은 게 아닐까 싶지만, 굳이 어원까지 설명할 필요는 없을 터.

중요한 건 수중에 돈 되는 상품이 하나 더 생겼다는 점이다.

‘이게 일본 과자를 베낀 거라 들었는데……. 까짓거 알게 뭐람.’

먼저 팔면 장땡.

최근에 동쪽 섬나라와 안 좋은 일이 있었던 준영은 그 사실을 살며시 무시해 버렸다.

아니, 과거 남의 나라 도공들을 잡아가서 돈을 번 놈들에게서 뜯어 올 것이 있다면 다 뜯어 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

맨체스터 남쪽에서 130킬로미터에 자리한 작은 도시.

버밍엄과 울버햄프턴 사이에 자리한 이 도시에 알비온 혹은 배기스라는 별명을 가진 팀이 있다.

바로 웨스트 브롬위치 알비온.

그들의 구장인 호손스 경기장 한쪽 면이 빨갛게 물들었다.

최근에 언론에서도 화제가 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12번째 선수들, 유나이티드 서포터들은 경기 시작 전부터 열띤 응원을 펼쳤다.

“저런 건 우리도 배웠으면 좋겠는데.”

경기 전, 필드에서 몸을 풀고 있던 알비온의 공격수가 유나이티드 서포터를 부러운 듯이 바라보았다.

“곧 배울 겁니다. 사람은 유행에 민감하고, 또 남에게 지고 싶지 않아 하니까.”

그는 자신에게 말을 건넨 선수를 바라보았다.

건장한 체격에 선이 굵은 용모를 가진 자신을 왜소하게 느끼게 만드는 장신의 동양인.

현재 유나이티드의 주장을 맡고 있는 존 Y. 리였다.

바로 오늘 그가 상대해야 할 적이다.

“유행은 몰라도, 남에게 지고 싶지 않다는 건 동감할 수 있어.”

“패배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으니까. 당신도 마찬가지죠. 안 그래요, 바비 롭슨?”

알비온의 공격수 바비 롭슨.

훗날 전설이 되는 이 사나이는 준영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웃음을 지었다.

“맞아. 물러설 수 없는 경기에서는 특히 그렇지.”

롭슨의 입은 웃고 있지만, 눈은 그렇지 않았다.

마치 먹잇감을 노려보는 사나운 맹수와 같은 눈길이었다.

준영은 그 맹수를 상대로 조금도 밀리지 않았다.

마치 창끝으로 맹수의 심장을 노리기라도 하듯, 싸늘하고 날카롭게 상대의 시선을 받아쳤다.

그런 침묵의 대치는 한참 동안 이어졌다.

“좀 이따 시합에서 보자고.”

“그럽시다.”

바비 롭슨은 돌아서는 준영의 모습을 한동안 지켜보고 있었다.

비행기 사고로 파탄이 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하지만 모두의 예상과 달리 그들은 쉬이 무너지지 않았다.

버스비의 이단아라 불리는 저 동양인이 날벼락을 맞은 팀을 지탱하고 있었으니까.

‘즉, 저 녀석을 쓰러트리면 유나이티드를 주저앉힐 수 있단 얘기지.’

하지만 생각만큼 쉽지 않을 것이다.

놈은 이미 리그에서 사기 수준으로 취급받는 플레이어니까.

물러설 수 없는 경기.

우승으로 가는 길목에서 만난 상대는 까다롭기 짝이 없었다.

***

경기 전 예열을 끝내고 라커룸으로 돌아온 유나이티드 선수들은 담담히 출전 준비를 했다.

축구화 끈을 고쳐 매고 스터드에 이상이 있지 않은지 살펴보고.

제일 꼼꼼하게 준비하는 건 바비 찰튼.

베오그라드 원정 이후 거의 한 달 만의 출전이었지만, 몸 상태는 나쁘지 않았다.

그래서 지미 머피 코치도 선뜻 그를 출전 명단에 올릴 수 있었다.

“바비, 네가 많이 뛰어 줘야 해. 그래야 우리 공격이 날카롭고, 수비는 든든하게 버틸 수 있어.”

“걱정 마세요. 심장이 터질 때까지 뛰어 볼 테니까.”

“그렇다고 진짜 터지면 곤란해. 앞으로 계속 출전해야지.”

바비를 비롯해 출전 선수들에게 전술과 역할을 이야기한 머피 코치는 마지막으로 준영에게 시선을 던졌다.

“힘들겠지만 버텨 다오.”

“걱정 마십쇼.”

머피는 준영에게 길게 말하지 않았다.

필드에서 뭘 해야 할지 잘 알고 있는 녀석이니까.

“좋아, 다들 가자!”

경기 시간이 다가오자 다들 라커룸을 나갔다.

그리고 알비온 선수들과 복도에서 잠시 대기하고 있다가 심판과 함께 필드로 나섰다.

동전을 던져 진영을 결정한 후, 준영은 동료들이 각자 위치로 가기 직전 어깨동무를 하며 둥글게 모여 전의를 다졌다.

“웸블리까지 2경기 남았다. 끝까지 가 보자. 모두를 위해서.”

“그래, 모두를 위해!”

필드에 있는 자신들, 병상에서 승리를 기원하고 있을 선배와 친구들, 그리고 관중석에서 함성을 보내는 팬들 등등.

유나이티드를 성원하는 모든 이들을 위해서라도 정상을 향한 질주는 멈출 수 없었다.

“오늘 반드시 결판을 본다! 반드시 이겨야 해!”

숀의 결연한 외침에 알렉스는 고개를 갸웃했다.

“무승부면 나흘 뒤에 올드 트래퍼드에서 재경기를 할 수 있잖아요.”

“바보 녀석! 다음을 생각하는 물러 터진 정신 상태로 이길 수 있을 것 같냐!”

임전무퇴! 배수의 진!

준영은 숀이 이렇게 결사적으로 나오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숀 형은 5일 저녁에 연극 공연이 있어. 재경기를 하게 되면 곤란해지지.”

“나 참, 꼭 이겨야 한다는 게 그것 때문이었어요?”

어이없어하는 선수들의 반응에 숀은 역정을 냈다.

“그것 때문이라니! 나에겐 중요한 공연이야! 연극계에서 유명한 사람들이 내 연기를 보러 온다고!”

물론 공연이 중요하다고 경기를 대충 할 생각은 없었다.

오늘 각본 없는 드라마에 이어 5일 공연하는 연극까지 2연승을 이어 가리라 다짐하고 있었다.

“자, 반드시 이기자. 이겨서 숀의 연극을 보러 가자고.”

“크크크, 꼭 가서 깽판을 쳐야겠네요.”

짓궂은 미소를 지은 선수들은 다 같이 손을 모았다.

“Manchester is Wonderful!”

파이팅 구호를 크게 외친 선수들은 각자의 위치로 흩어졌다.

전투를 앞두고 있는 그들의 전의는 유니폼 색깔만큼이나 붉게 타올랐다.

***

웨스트 브롬위치 알비온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A컵 8강 경기가 시작되었다.

알비온은 현재 리그 4위.

1953-1954년 시즌 FA컵 우승, 리그 2위로 더블을 할 뻔했던 전적이 있었다.

그들은 공격수 데릭 케반을 필두로 로날드 엘런, 바비 롭슨이 삼각 편대를 이뤄 유나이티드 진영으로 진격해 들어왔다.

‘샌디에게 들은 대로 토트넘과 전술이 비슷하군.’

유나이티드의 전력 분석관을 담당하고 있는 버스비 감독의 아들 샌디는 알비온의 전력과 전술에 대해서 알려 주었다.

그 정보에 따르면 알비온의 감독 빅 버킹엄은 토트넘의 푸시 앤 런과 흡사하게 스피드와 패스를 중시한 전술을 쓴다고 했다.

하지만 알비온의 푸시 앤 런은 토트넘과 다른 점이 있었다.

바로 선수 전원의 활동력이 상당히 적극적이라는 점.

하프백이나 수비수들도 적극적으로 라인을 올리고 오버래핑을 시도하며 패스할 공간을 만들어 공격을 거들고 있었다.

‘꽤 현대 축구 냄새가 나잖아. 조심해야겠군.’

물론 상대가 제법 세련되고 선진적인 전술을 쓴다고 마냥 움츠릴 필요는 없다.

라인을 올렸다는 건 그만큼 뒷공간이 비었다는 뜻이니까.

즉, 제대로 허를 찔러 역습을 펼치면 카운터펀치를 묵직하게 꽂아 넣을 수 있다.

‘일단은 공격부터 차단해야지.’

준영은 바비 롭슨의 패스를 받은 데릭 케반을 막아섰다.

178센티미터 정도의 신장을 지닌 데릭은 꽤 단단한 체구를 갖고 있었다.

샌디가 알려 준 바에 따르면 그의 별명은 탱크.

과연 탱크처럼 저돌적인 드리블을 펼쳤다.

‘몸싸움 능력이 상당하군. 빌이나 이안은 감당하기 힘들겠어.’

준영도 데릭을 쉽게 막아 세울 수 없었다.

키나 체격은 분명 월등하지만, 무게 중심은 데릭 쪽이 더 낮았다. 거기다 스피드도 뛰어났다.

데릭도 자신의 이런 장점을 살려 준영을 제치려 애썼다.

‘하지만 쉽게 제치진 못할 거다.’

‘쳇, 너무 깊게 들어왔어.’

준영을 제치려다 유나이티드 페널티 박스 깊숙한 곳까지 들어와 버린 데릭.

그는 중앙으로 쇄도하는 동료 로날드 엘런에 맞춰 크로스를 올렸다.

하지만 각도도 나빴고, 높이도 낮았던 덕분에 골키퍼 해리 그렉의 손에 간단히 잡혀 버렸다.

전방을 응시하던 해리는 곧장 길게 공을 내찼다.

숀의 머리를 겨냥한 것이지만, 공의 낙하지점을 알비온의 수비수 스튜어트 윌리엄스가 먼저 차지했다.

윌리엄스가 끊어 낸 공은 하프백 레이 발로우의 발을 거쳐 다시 유나이티드 진영으로 넘어왔다.

하지만 맨유의 프레디 굿윈이 이를 차단, 가까이 있던 바비 찰튼에게 패스했다.

재빠르게 사방을 살핀 바비는 자신에게 마크를 붙은 알비온 선수를 제쳐 내고, 측면 공간으로 달려가는 알렉스에게 침투 패스를 보냈다.

“나이스 패스!”

알렉스는 자신의 발 앞에 떨어진 패스를 앞으로 툭 치고 달려 나갔다.

“애송이 자식!”

“스코틀랜드 촌구석에서 통하던 실력으로 우리한테 될 것 같냐!”

스피드를 올린 알비온 선수들이 순식간에 알렉스를 둘러쌌다.

그 바람에 전진하지 못한 알렉스는 뒤에 있던 스탠 크루더에게 패스.

크루더는 바로 전방으로 쇄도하던 콜린 웹스터에게 패스를 찔러 주었다.

하지만 다소 성급하게 들어왔던 패스는 콜린의 발에 걸리지 않았고, 수비수가 멀리 걷어 내 버렸다.

측면에 있던 바비 롭슨은 라인 밖으로 나가려던 공을 절묘한 터치로 잡아 냈다.

그러고는 곧장 유나이티드 측면 공간으로 달려 나갔다.

“붙어! 놓치면 안 돼!”

맨유 수비수 이안 그리브스가 앞을 막았지만, 롭슨은 페인팅 동작 하나로 그를 따돌려 버렸다.

그러고는 쇄도하는 동료 데릭을 향해 날카로운 크로스를 올렸다.

투웅-!

공은 데릭의 머리를 맞고 공중으로 튀어 올랐다.

준영이 같이 뛰어올라 경합하는 바람에 정확하게 헤딩을 하지 못했던 것.

재빨리 낙하지점을 확보한 준영은 재차 뛰어올라 머리로 공을 걷어 내려 했다.

그런데 그때, 데릭이 그의 어깨를 잡아챘다.

‘이건 반칙인데?’

하지만 휘슬은 울리지 않았다.

준영이 걷어 내지 못한 공은 알비온 공격수 엘런의 발 앞에 떨어졌다.

그리고 바로 다이렉트 슛!

“와아아아아!”

그물이 세차게 철썩이자 함성이 크게 일어났다가 이내 사그라들었다.

알비온 쪽에는 아쉽게도 옆 그물.

큰 위기를 모면한 준영과 유나이티드 선수들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참 나, 방금 저 녀석이 반칙을 했는데…….”

“어쩔 수 없어. 여긴 알비온 홈이잖아.”

홈 어드밴티지.

하지만 그런 것치고 너무 노골적인 파울이었는데 휘슬을 불지 않다니.

‘시야가 가려서 심판이 못 봤을지도 모르겠군.’

준영은 단순히 심판의 실수로 여기고 넘어가기로 했다.

심판 판정에 너무 신경을 쓰다가는 경기 집중력이 흐트러질 테니까.

***

웨스트 브롬위치 알비온의 감독 빅 버킹엄은 나중에 아약스와 바르셀로나 감독으로 취임합니다.

거기서 그는 자신이 곧잘 사용한 푸시 앤 런 전술에 패스 앤 무브 플레이 방식을 접목하지요.

이 전술은 훗날 아약스와 바르셀로나에 그의 후임으로 부임한 네덜란드 출신의 리누스 미헬스 감독에게 계승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리누스 미헬스는 자신의 제자 요한 크루이프와 함께 토털 사커를 탄생시킨 현대 축구의 아버지로 칭송을 받게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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