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전드 1957-115화 (115/400)

Round 115. 살림꾼의 귀환

“난 그 비행기를 타지 않았어요. 존의 우려대로 사고가 날까 무서웠으니까.”

하지만 진짜 사고가 났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쳤다.

동료들도 다시는 필드에 설 수 없는 신세가 되었고.

“나는 내 자신이 비겁하다고 생각했어요. 겁이 났으면 모두를 말렸어야 했는데 그러지 않았으니까. 그런 건 용서받을 수 없을 거라 생각했어요.”

“바비, 네 생각은 틀렸어.”

단호하게 고개를 저은 빌 포크스가 말했다.

“용서받을 수 없을 거라고? 누가 그래? 다친 녀석들이? 아니면 감독님이?”

“…….”

“다들 그 일로 힘들어하고 있지. 하지만 아무도 널 탓하지 않아! 오히려 너라도 무사한 걸 다행이라 여기면 모를까!”

빌의 말에 준영이 동의하며 말을 이어 갔다.

“바비, 네가 무서웠던 건 팀원들이 아니라 유나이티드 팬들이었어. 그렇지 않아?”

“…맞아요.”

혼자 무사히 사고를 모면한 걸, 알면서도 동료들을 만류하지 않은 걸 대중에게 비난받을 것이 두려웠다.

그래서 도망치려고 했다.

축구도 관두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대한 것에 귀를 막고 지내고 싶었다.

“빌의 말이 맞았어요. 나는 비난받는 게 무서워서 진짜 비겁한 짓을 했어. 가장 힘든 상황에 모두를 등졌지.”

죄책감을 핑계로 웅크리고 있던 자신을 일깨운 건 동료들이 보여 준 투지와 희망.

축구공과 축구화를 처분했다고 해서 선수로서의 자긍심과 의욕까지 지워 버리진 못했다.

오히려 그 자긍심과 의욕은 동료들의 투지와 희망으로 깨어나 어리석은 자신을 질책했다.

웅크리고 있지 말라고.

지금이라도 동료들에게 힘을 보태 주라고.

“더는 비겁하게 숨고 싶지 않아. 지금이라도 잘못은 고치고 모두에게 힘이 되고 싶어요.”

바비 찰튼의 진지한 표정을 본 준영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눈 감아. 일단 한 대 맞자.”

“예? 아, 예…….”

바비는 눈을 감았다.

본인의 심정이야 어떻든, 이랬다저랬다 하며 동료들 애를 태운 건 사실이니까.

얻어맞아도 할 말은 없었다.

짝-!

“으악!”

등짝을 화끈하게 후려갈기는 일격에 바비는 저도 모르게 펄쩍 뛰어올랐다.

“숀, 바비 저 녀석, 점프력이 좀 떨어진 것 같지 않아요?”

“그러게. 그동안 빈둥거리다 살이 좀 찐 모양이군.”

바비의 등짝을 시원하게 후려친 준영은 그에게 말했다.

“3월 1일 FA컵 경기가 있어. 그때까지 무조건 몸을 만들어 놔.”

“알았어요.”

“장비 다 정리했다고 했지? 필요한 거 있으면 이야기해. 챙겨 줄 테니까.”

바비는 연방 고개를 끄덕였다.

“저기, 다른 거 할 거 없어요? 라커룸 청소라든지, 축구화 닦는 거라든지, 할 수 있는 건 다 할 테니까.”

“됐고, 신참들한테 한턱 쏴. 그거면 충분해.”

“아! 그렇게 할게요.”

등짝이 아직 따끔따끔하다.

하지만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기 때문인지, 바비의 표정은 좀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홀가분하게 변해 있었다.

***

올드 트래퍼드 근방의 단골 클럽.

정말 오랜만에 이곳을 찾은 맨유 선수단은 잔을 높이 들었다.

“자, 우리 팀의 살림꾼 바비 찰튼의 귀환을 축하하며!”

“바비를 위해!”

“유나이티드를 위하여!”

건배를 한 선수들은 이내 왁자지껄하게 떠들면서 잔을 주고받았다.

준영은 바비가 스탠 크루더를 비롯한 새로운 선수들과 잘 어울리는 모습을 보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때, 불콰해진 알렉스 퍼거슨이 준영에게 다가와 매달렸다.

“으헤헤, 주~ 장! 빨리 안 마시고 뭐 해~?”

“하… 누가 미성년자한테 술 먹였어?”

미래의 007이 딴청을 피우는 걸 봐선 그가 이 지경으로 만든 듯했다.

“헤헤, 주장, 얼른 한잔해요∼ 주장한테 한 잔∼ 딸꾹! 주고 싶다고요. 주장이 날 맨체스터에 데려와서… 헤헤.”

맥주와 위스키를 양손에 들고 덤비는 알렉스.

다행히 빌과 콜린이 그를 만류하고 나섰다.

“퍼기야, 주장은 술 먹이면 안 돼. 우리 팀 전속 가수라고.”

“맞아. 이 클럽 객원 가수이기도 하고 말이지.”

그 말에 관심을 보인 건 알렉스가 아니라, 리버풀에서 온 존 레논이었다.

“노래를 잘 부르는 모양이죠?”

“어느 정도는. 물론 전문 가수한테는 못 비비는 수준이지만.”

존 레논 앞에서 가창력을 자랑한다니.

어째 펠레 앞에서 드리블하는 격이라 준영은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말이 나온 김에 불러 봐, 주장!”

“그래, 한 곡 뽑아 보라고!”

지금 준영의 심정을 알 리 없는 동료들은 연방 부추겼다.

존 레논도 흥미가 생기는지 부탁하고 나섰다.

“저도 주장의 노래를 한번 들어 보고 싶네요.”

“알았어. 못한다고 까진 마라.”

1월 볼턴전 승리 이후 오랜만에 클럽 무대에 오른 준영은 기타를 들고 연주를 시작했다.

“Cos ah ah I’m in the stars tonight∼ So watch me bring the fire and set the night alight∼”

밝고 경쾌한 노래에 다들 발을 구르거나 박수를 치면서 흥을 보탰다.

가만히 귀 기울여 듣고 있던 레논도 저도 모르게 어깨를 들썩일 정도로 리듬을 탔다.

그리고 잠시 후, 노래가 끝나자 누구보다 크게 박수를 쳤다.

“어때, 괜찮았어?”

준영의 물음에 레논은 잔뜩 흥분한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대단했어요. 기존의 로큰롤하고 느낌이 사뭇 다른 노래 같은데… 대체 무슨 곡이죠?”

“제목은 몰라. 예전에 여행하다 주워들은 거야.”

BTS의 Dynamite.

한국 가요 최초로 빌보드 1위를 찍은 곡이니, 미래의 위대한 뮤지션도 감탄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더구나 현재 존 레논은 아직 풋내기 소년이니까.

“아 참, 지난번에 기타에 사인해 준 거 있잖냐. 우리 하숙집 둘째 아가씨가 고맙다고 전해 달라더군.”

“고맙긴요.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었는데.”

준영은 기왕 대화의 물꼬를 튼 김에 몇 가지 질문을 더 해 보기로 했다.

“궁금한 게 있는데, 축구는 어떻게 하게 된 거야?”

“그거요? 별로 대단한 이유는 아닌데…….”

레논은 잠시 주저했다.

그리 자랑스럽게 털어놓을 이야기는 아니었기 때문에.

하지만 음악적인 소양도 뛰어나고, 사람도 좋아 보이는 주장에게 솔직히 털어놓기로 했다.

“제가 사실 가정환경이 별로라……. 그 때문에 어릴 때부터 애들하고 많이 다투고 싸웠어요. 엄마랑 이모 속도 많이 썩였고요.”

“불량아였다 이거군.”

“맞아요. 말썽꾼이었죠. 음악도 배우고, 그림도 배웠는데 그다지 변하진 않았죠.”

한번은 사고를 크게 쳤다고 한다.

그래서 화가 난 외삼촌은 레논을 학교 축구팀에 들여보냈다고.

규율과 신사도를 중시하는 스포츠를 하다 보면 반항기가 줄어들 것이라 보았던 것.

“뭐, 열심히 했어요. 안 그러면 학교에서 일찍 벗어나지 못할 거라 생각했으니까.”

“훗, 불순(?)한 의도였다 이거군.”

“그래도 성공했죠. 어릴 때 동경하던 팀에 입단하기도 했으니까.”

레논이 동경했던 리버풀 FC.

비록 1군에 속하진 못했지만, 레논은 불만을 품지 않았다.

학교에서 싸움질이나 하고 선생들에게 꾸지람을 듣는 것보다, 공을 차면서 밴드 활동을 하는 게 훨씬 즐거웠으니까.

‘본드 형 같은 고민은 없나 보군.’

처음 만났을 때 숀 코너리는 배우로도, 선수로도 성공하지 못한 것에 답답함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레논에겐 그런 고민이 없었다.

아직 어려서 그런 듯했다.

아니, 어쩌면 본인이 만족할 만큼 선수 생활이나 밴드 활동이 잘되고 있기 때문일지도.

“갑자기 유나이티드에 와서 좀 곤란하긴 해요. 리버풀에 있는 밴드 멤버들과 자주 만나기 힘들게 되었으니까.”

“이참에 그냥 아예 선수로 자리 잡는 건 어때?”

준영의 제의에 레논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제 발재간으론 유명 선수가 되긴 힘들 것 같고……. 프로 선수는 30대면 은퇴해야 하잖아요. 하지만 음악은 나이 들어서도 할 수 있죠.”

“하긴, 맞는 말이야.”

당장 준영도 부업으로 식품 사업을 하고 있지 않은가.

은퇴 후 석유 재벌 구단주가 되기 위한 자본금을 모으기 위해서 말이다.

‘아무튼 기왕에 아는 사이가 되었으니, 이상한 놈이 되지 않도록 잘 이끌어 줘야겠군.’

위대한 뮤지션인 걸 떠나서 존 레논의 인성이나 사생활은 썩 좋지 않았다.

가족에게 폭력적인 성향을 보이는가 하면, 반전과 평화를 부르짖으면서도 전범들이 합사된 야스쿠니 신사를 찾아가는 무식한 짓을 저지르기도 했다.

그러니 풋내기인 지금부터 바르게 자랄 수 있게 옆에서 도와주면 일본 마녀에게 현혹당하는 일도, 총 맞고 비명횡사하는 일도 없으리라.

“난 축구만큼이나 음악을 좋아해. 그러니까 뭔가 어려움이 있거든 이야기하라고. 힘닿는 데까지 도와줄 테니까.”

“고맙습니다, 주장. 아! 지금 당장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요.”

무슨 도움이 필요한 걸까.

흔쾌히 고개를 끄덕인 준영은 난감한 요청을 받고 말았다.

“주장이 아까 부른 노래, 그거 가사 좀 적어 주시면 안 될까요? 너무 맘에 들어서…….”

설마 Dynamite에 눈독을 들이는 걸까?

레논의 흥분한 반응을 봐선 확실히 그래 보였다.

‘미안해, BTS.’

앞으로는 선곡도 조심해야겠다고 느끼는 준영이었다.

***

다음 날.

훈련을 마친 후, 준영은 트래퍼드 파크에 있는 미스터리 푸드 컴퍼니 공장을 찾았다.

“현재 노스웨스트뿐만 아니라 노스이스트, 요크셔험비까지 판매처가 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런던의 유통 업체들도 우리 라면에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헨리 케일 상무의 보고에 준영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시장은 꾸준히 늘고 있고……. 신설 공장과 설비 확장은 어때요?”

“순조롭습니다. 3월 안으로 완료될 겁니다. 그리고 4월부터 신제품 토마토 스파게티 맛을 출시할 계획입니다.”

부사장인 이억관이 부재중인 상황이지만, 라면 사업은 여전히 순풍에 돛을 단 듯 잘되고 있었다.

신제품 개발도 거의 다 끝난 터라 이제 시장 상황을 보면서 천천히 출시해 가고 있었다.

“치킨이나 패스트푸드 분야도 걱정할 거 없고……. 소스나 식자재 생산도 문제없겠죠?”

“예, 기술이나 설비 쪽은 다 갖춰졌으니 재료 수급만 차질 없으면 됩니다.”

케일 상무는 소스 쪽의 시제품들을 보여 주었다.

모두 일전에 준영이 알려 준 레시피대로 만든 드레싱 소스들.

샐러드에 소스들을 찍어 차례로 시식해 봤는데, 모두 다 훌륭했다.

“우려가 있다면 사람들이 야채와 과일을 그렇게 많이 즐기지 않는다는 겁니다.”

“드레싱 소스로 좀 더 맛있게 먹을 수 있다면 달라지겠죠.”

영국 사람들은 빵과 고기를 중시했고, 채소와 과일은 냉랭한 기후 때문에 생산량이 많지도 않았다.

그래도 잼을 만드는 베리류의 과일들은 곧잘 먹는 편이었다.

“뭐, 이건 됐고……. 저번에 부탁했던 건 어떻게 됐어요?”

“그거 말입니까? 순식간에 개발을 끝냈지요.”

케일 상무는 자신만만하게 웃음을 지었다.

처음엔 사장이 굉장히 이상한 걸 만들라고 시키지 않을까 걱정했다.

하지만 정작 별로 어려운 것도 아니었다. 현재의 제과 기술로 충분히 만들 수 있었던 것.

‘이건 라면만큼이나 잘 팔릴 거야.’

케일은 확신할 수 있었다.

부담 없이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맛인 데다, 상당히 우아하고 세련된 형태를 하고 있었으니까.

***

음악가나 예술가들 중에 인성이 개차반인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베토벤만 해도 고용인들을 썩 좋지 않게 대했다고 하지요. 빈센트 반 고흐는 술주정이 너무 심했다고 하고요.

스포츠 선수, 축구 선수들 중에서도 실력은 별개로 인성이 나쁜 이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날강두(…)라든가, 치아레스(…)라든가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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