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전드 1957-107화 (107/400)

Round 107. 네버 기브업

“오, 세상에! 이런 끔찍한…….”

신문 1면의 기사를 보던 빌 섕클리는 충격을 금치 못했다.

멀리 있는 것도 아니고, 남남도 아닌 녀석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뮌헨에서 끔찍한 사고를 당했다니!

“원정 멤버 17명 중에 14명이 중상… 이 중 10명은 선수 생명이 끝난 수준이라니!”

“존 형님은요? 형님은 무사하대요?”

데니스 로가 화들짝 놀라서 묻자 섕클리는 콧방귀를 꼈다.

“존을 걱정할 필요가 뭐가 있어. 그놈은 베오그라드 원정에 가지도 못했는데.”

“아뇨. 어제 프레드로 저택에 갔었는데, 형님이 급히 뮌헨으로 갔다고 그랬어요.”

“뭬야!”

설마 이 바보가 동료들 마중 갔다가 사고에 휘말린 건 아니겠지?

섕클리는 다시 한 번 사망자와 부상자 명단을 살펴보았다.

다행히 준영의 이름은 없었다.

“음, 없는 걸로 보아 무사한 모양이군.”

“다행이네요.”

“다행이긴 한데… 앞으로가 큰일이겠어.”

이번 유나이티드의 베오그라드 원정 멤버는 사실상 팀의 최정예라 할 수 있다.

그런데 10명 이상이 시즌 아웃이니 팀이 사실상 붕괴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거참, 신도 무심하시지. 그 아이들이 무슨 죄를 지었다고…….”

섕클리가 딱한 마음을 금치 못하고 있을 때, 뭔가 생각에 잠겨 있던 데니스 로는 결연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감독님, 절 이적시켜 주세요! 아니면 임대라도요!”

“뭐?”

“아직 3월이 아니니까 임대나 이적이 가능하잖아요. 유나이티드로 가서 존 형님을 돕고 싶어요.”

데니스의 머릿속에는 무너진 팀을 홀로 지탱하려 애쓰는 준영의 모습이 비춰지고 있었다.

그를 그렇게 외롭게 내버려 두기는 싫었다.

“그러니 이적을…….”

“안 돼!”

“왜 안 돼요? 모르는 사이도 아닌데!”

“이놈아! 가뜩이나 쓸 만한 놈들도 없는데 너까지 나가면 난 어쩌라고!”

맨유가 딱하긴 하지만 허더스필드도 급한 실정이다.

이제 겨우 2연승을 하며 상승세를 탔는데, 팀의 주전 공격수가 빠져나가면 어찌 되겠는가.

“쳇, 어차피 우리 팀, 올 시즌도 망했잖아요.”

“어허, 이놈이 그래도!”

“그러지 말고 감독님도 이참에 저랑 같이 가시죠? 버스비 감독님도 크게 다쳐서 한동안 쉬어야 한다는데요.”

마지막 말은 좀 솔깃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감독이 된다고?

무너진 팀을 재건하여 명성을 날릴 수 있다면…….

“안 돼. 그럴 수 없어. 남의 불행을 틈타 팀을 훔칠 순 없지.”

“감∼ 독∼ 님∼”

“안 된다니까, 이놈아!”

참다못한 섕클리는 철부지 스트라이커를 쥐어박았다.

왕이 될 운명의 소년은 그렇게 탈주에 실패했다.

***

북아일랜드 벨파스트.

유나이티드의 비극은 이 지역에도 알려졌다.

대중들의 관심도 적지 않았는데, 맨유에서 뛰는 선수들 중에 북아일랜드 출신도 있었기 때문이다.

“허, 재키 블란치플라워가 심하게 다쳤대.”

“형인 대니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겠구만.”

안타까움에 혀를 차던 사람들은 신문을 넘긴 순간 일제히 웃음을 지었다.

정말 절묘한 장면이 실려 있었기 때문이다.

축구협회의 루스 총무가 맨유의 동양인 선수에게 얻어맞는 사진.

기자가 맞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셔터를 눌렀는지 진짜 기가 막힌 걸작이 나왔다.

“이 작자는 왜 맞은 거지?”

“유나이티드가 유러피언 컵에 나가고 있잖아? 일정 조정 좀 부탁했는데 칼같이 거절했대.”

“쯧쯧, 맞아도 싸지. 이놈 때문에 멀쩡한 젊은이들이 폐인이 됐잖아.”

어른들이 모여서 신문을 보고 있던 그 순간, 갑자기 날아온 축구공이 신문을 좍 찢고 지나갔다.

“에구, 깜짝이야!”

“야 이 녀석들아! 공을 차려면 딴 데 가서 해!”

어른들의 호통에도 아이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낄낄대며 공을 차면서 골목으로 달려갔다.

그중 선두에 있던 10대 초반의 소년은 또래들보다 아주 능숙하게 볼을 다뤘다.

“야, 어른들이 왜 저런대냐?”

“본토에 있는 축구팀이 망했대.”

“어디가?”

“맨… 유나이티드라던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소년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거긴 것 같았어.”

“선수들이 몽땅 다 다쳐서 병원에 있대.”

친구의 말에 소년은 혀를 찼다.

“쯧쯧, 불쌍하네. 내가 조금만 나이가 많았으면 확 입단해서 도와줄 텐데.”

“하기야 너 정도 실력이라면…….”

“이 벨파스트에서 최고니까.”

“이름부터 이미 최고지!”

친구들의 말에 으스대던 소년은 맞은편에서 식식대며 오는 남자를 보고 화들짝 놀라 도망쳤다.

“조지! 조지 베스트! 너 이 녀석, 또 수업을 빼먹고 농땡이를 치다니!”

“수업이 재미없는데 어떡해요!”

“뭐라고? 이런 몹쓸 놈이……!”

아버지가 쫓아오자 소년, 아니 조지 베스트는 공을 챙겨 들고 도망갔다.

마치 자석을 달아 놓은 것처럼, 도망치면서도 머리와 발끝에서 공을 놓치지 않는 그의 솜씨는 사람들의 입을 딱 벌리게 만들었다.

***

“네 녀석은 진짜 거침이 없구만.”

버트 트라우트만은 방금 손수 탄 커피를 준영에게 건넸다.

“아무리 화가 나도 그렇지, 사람들 보는 데서 총무를 패 버릴 줄은…….”

“버트 씨도 제 입장이 되어 보세요. 안 팰 수 있는지.”

버트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생각해 보니 자신도 준영과 비슷한 나이 때 혈기 넘치는 짓을 한 적이 있었다.

포로수용소에서 자신에게 욕을 한 장교를 두들겨 팼던 것.

그리고 보름 동안 영창에 갇혔다.

“뭐, 크게 문제는 안 될 것 같군. 기자들도 협회의 잘못을 지적하고 있으니까.”

“저보다 팀이 더 걱정입니다. 근데 버트 씨는 여긴 웬일이죠?”

준영의 물음에 버트는 당연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난 독일 사람이잖아. 아무래도 통역할 사람이 필요할 것 같아서 자원했지.”

“그랬군요.”

“그나저나 어떻게 될 것 같아? 울버햄프턴전이 코앞인데 이런 사고가 벌어졌으니…….”

“글쎄요. 양심이 있다면 협회에서 일정 조정을 해 주겠죠.”

실제 역사에서도 협회는 일정을 조정해 주었다.

울버햄프턴전을 4월 말로 미루고, 팀을 재편할 10여 일의 시간을 준 것.

‘말도 안 되는 일이지. 10일 만에 팀을 어떻게 재건하라고?’

재건해 봤자 과거의 몇 퍼센트 전력이나 될까?

현재 뛸 수 있는 주전 선수는 골키퍼 해리 그렉, 수비수 빌 포크스, 그리고 이준영 자신뿐.

바비 찰튼은 부상은 없지만, 정신적으로 심한 충격을 받아 실전 투입이 힘들어 보였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사고가 나기 직전, 바비는 그야말로 최고의 활약을 보여 주고 있었으니까.

‘원래 역사와 다른 건 죽은 사람이 없다는 것, 그리고 내가 있다는 것 정도인가? 아냐. 본드 형도 있으니까…….’

준영은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애썼다.

계속 비관하고 후회하고 남을 원망해 봤자 이 상황에서 득 될 건 없으니까.

‘맨유는 이보다 더 심각한 상황에서도 일어섰어. 그러니까 이번에도 재기할 수 있을 거야.’

어디 해 보자.

여기까지 와 버린 이상 포기할 수 없다.

준영이 결심을 굳혔을 때, 지미 머피 코치가 그와 버트가 있는 병원 휴게실로 들어왔다.

“방금 전에 협회에서 통보가 왔어. 경기 일정 조정을 해 주겠다더군.”

“역시…….”

“역시라니? 알고 있었던 건가?”

머피 코치의 말에 준영은 냉큼 고개를 저었다.

“아뇨. 이 지경이 되었으니 안 해 주진 않을 거라 생각해서요.”

“그랬군. 아무튼 한동안은 내가 팀을 총괄해야 할 판이야.”

선수들은 물론 버스비 감독도 큰 부상을 입었고, 원정에 동행한 코치나 트레이너도 한동안은 복귀 불능.

덕분에 머피 코치는 정말 큰 책임을 떠안게 되었다.

“휴, 내가 해낼 수 있을지 모르겠군.”

“할 수 있을 겁니다. 틀림없이 하실 수 있어요!”

이보다 더 열악한 상황에서도 팀을 버티게 만든 명장.

그가 바로 지미 머피 코치였다.

“그래, 해 봐야지. 자네가 많이 도와줘. 이제 진짜 쓸 만한 녀석들은 몇 없으니까.”

“알겠습니다.”

지금부터 다시 시작.

시간이 부족하기에 준영과 머피 코치는 병실에서 선수들과 인사를 나누고 곧장 맨체스터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랬구나. 얼른 가 봐. 팀을 다시 일으켜야지.”

“그래, 걱정 말고 회복에만 전념해.”

쾌유를 기원하며 준영이 떠나려는 순간, 던컨이 그의 손을 잡았다.

“왜? 또 할 말 있어?”

“이건 하고 가야지.”

“하이파이브?”

“아스날전 생각 안 나? 경기 전에 네가 Ki를 나눠 줬잖아.”

그랬었다.

그때 던컨은 통째로 넘기라고 해서 대신 하이파이브를 두 번 해 줬다.

그리고 그 경기를 격전 끝에 승리했다.

“그 Ki라는 게 뭔지 알 것 같아. 그러니까 갈 때 가더라도 내 건 챙겨 가라. 몽땅 챙겨 가.”

“알았어. 고맙게 받지.”

준영은 던컨과 하이파이브를 나눴다. 이번엔 세 번이었다.

그러자 다른 선수들도 힘겹게 몸을 일으키거나 팔을 들어 올렸다.

“어이, 리틀 존! 내 것도 가지고 가!”

“난 이제 별로 쓸 일 없을 것 같으니까 다 가져가도 돼.”

절망에 빠져 울부짖던 선수들도 말없이 동참했다.

선수로서 꿈과 미래를 잃어버린 상황에서 그동안 애써 쌓아 올린 탑까지 허망하게 무너지는 건 보고 싶지 않았으니까.

모두가 건네는 버프에 준영은 간만에 웃음을 지을 수 있었다.

그는 동료들과 차례로 하이파이브를 나누었다.

마지막으로 남은 이는 로저 바인.

그는 준영의 손을 꽉 움켜쥐고는 말했다.

“덤으로 뭘 줄까 생각했는데, 역시 주장 완장밖에 없더군.”

“절더러 주장을 하라고요?”

“할 수 있지, 그렇지?”

믿음이 깃든 그의 눈빛에 준영은 의지를 실어 고개를 끄덕였다.

“하겠습니다. 해내겠습니다!”

힘을 실어 주는 동료들 앞에서 맹세를 한 준영은 맨체스터를 향해 떠났다.

***

맨체스터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

구석에 둘러앉은 네 남자의 분위기는 진지하다 못해 무거웠다.

“바비, 정말 축구를 관둘 거야?”

준영의 물음에 바비 찰튼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나 같은 비겁자는 아무런 도움이 안 되니까…….”

“야 인마! 지금 등지는 게 더 비겁하다는 거 몰라?”

해리 그렉이 보다 못해 한 대 후려갈기려 들었다.

그를 간신히 만류한 준영이 바비에게 말했다.

“알았어. 한동안 머리 좀 식히고 있어.”

지금 상황에선 오히려 붙들고 끌고 가는 게 독.

준영은 바비 스스로 일어날 것을 기다리기로 했다.

분명 다시 일어날 것이다.

이보다 힘든 역경에서도 다시 일어선 사나이니까.

“도착했군.”

창밖으로 맨체스터 공항의 풍경이 보였다.

잠시 후, 비행기가 착륙하자 준영 일행은 짐을 챙겨 비행기에서 내렸다.

그러자 어디서 기다리고 있었던지 기자들이 벌 떼같이 몰려들었다.

“미스터 리, 남은 선수들과 팀을 재건할 자신이 있습니까?”

“유러피언 컵은 포기할 거란 이야기도 있던데요?”

“협회와 계속 악연만 쌓이고 있는데 괜찮은 겁니까?”

준영은 쏟아지는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손을 저었다.

그러자 시끄럽게 쏟아지던 질문들이 사그라들었다.

그리고 준영은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다들 제일 궁금하신 게 이거겠죠. 유나이티드가 살아날 수 있느냐, 여기서 죽느냐.”

잠시 침묵을 지키던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모두들 잘 아는 분이 예전에 이런 말씀을 하셨죠. 영국은 약해지거나 실패하지 않을 거라고. 네, 저도 지금 그 말을 하고 싶습니다.”

과거 처칠이 의회에서 한 연설의 대목을 빌려 온 준영이 거침없이 말을 이어 나갔다.

“유나이티드는 약해지거나 실패하지 않을 겁니다. 끝까지 싸울 겁니다. 리그든 FA든, 유러피언 컵이든! 끝까지 싸우고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Never give up.

준영의 이 선언이 다음 날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박혔다.

***

조지 베스트는 실제로 농땡이가 심했다고 하네요. 이 양반의 똘끼가 심했던 건 떡잎부터 달랐던 겁니다.

이 편에서 언급된 데니스 로-조지 베스트-바비 찰튼 세 선수는 이후 역대급 트리오로 명성을 날리게 됩니다.

같은 팀에 있을 때 셋 다 발롱도르를 수상했는데, 이만한 커리어의 공격 라인이 앞으로도 있을까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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