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104. 짜고 치는 각본
주영 일본 대사 니시 하루히코는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웨스트민스터 살인 사건이 터졌을 때도, 현재 조사 중인 상황에서도.
박춘금이란 자가 워낙 큰소리를 탕탕 치기에 나름 기대감을 품었던 건 사실이다.
더구나 리준욘의 비리에 대한 증거까지 확보했다니까.
그런데 리준욘 측의 대응은 그야말로 상식 밖.
협박을 받았다지만 어떻게 사람을 죄다 쏴 죽일 생각을 한단 말인가.
그것도 대사관 직원까지!
“그 범인이 후테이센징(不逞鮮人)인 줄은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이제 와서 그런 소리를 하면 뭘 하나!”
웨스트민스터 코앞에서 벌어진 총격 살인 사건.
워낙에 충격적이다 보니 대중이나 언론은 사건 자체보다 ‘어째서?’라는 데 의문을 품고 있었다.
더구나 범인은 경찰이 오자 순순히 체포에 응하는 떳떳함을 보였다고 하지 않은가.
그리고 그 어째서? 라는 의문이 풀리는 데는 하루도 걸리지 않았다.
죽은 이들이 고쿠류카이 출신인 게, 그리고 고쿠류카이가 뭘 하던 집단인지 언론을 통해 공개되어 버린 것.
“바깥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미군정에 전범으로 낙인찍혀 해산된 조직이 런던 한복판에서 설쳤다는 데 반감이 컸던 듯합니다.”
“거기다 불법 총기까지 소지한 게 들통났으니…….”
아직 영국의 태평양 전쟁 참전자들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살아 있는 상황.
적국의 전쟁 범죄 집단이 수도 한복판에 나타난 걸 알게 되면 당장 일본 대사관에 몰려와서 돌을 집어 던질 것이다.
“하! 어쩌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단 말인가. 어쩌다!”
불안감에 하루히코가 책상 앞에서 연방 좌우로 왔다 갔다 하고 있을 때였다.
“대사 각하,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손님?”
“그게 영국 대외 정보부 쪽 사람이라고…….”
움찔.
찔리는 구석이 있었던 하루히코는 진땀을 흘렸다.
그렇다고 찾아온 손님을 내칠 수는 없었다.
“들이도록.”
잠시 후, 하루히코의 앞으로 MI6 요원 제이미 번즈가 나타났다.
간단한 인사를 주고받은 후 번즈는 바로 본론으로 넘어갔다.
“이번 총격 사건으로 심려가 크실 줄 압니다.”
“그, 그렇소…….”
번즈는 자신이 챙겨 온 두꺼운 서류를 쭉 넘겨 보며 말을 이어 나갔다.
“귀국의 외교 정책은 전쟁의 과오를 씻고, 친선을 도모하는 방향으로 잡았다고 알고 있습니다.”
“맞소.”
그렇게 이미지 혁신 차원에서 유학생들이나 사업가, 외교관 부인들이 영국 사회에서 여러 봉사 활동을 많이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노력이 순식간에 시궁창으로 처박히게 생겼다.
“이번에 친분을 쌓은 사람이 저에게 책 한 권을 추천해 주더군요. 미국 학자가 쓴 ‘국화와 칼’이라는 책이었습니다.”
“…….”
“일본의 관습이나 사고방식이 잘 분석된 책이었습니다. 덕분에 꽃을 들면서 한편으로 칼을 품고 있는 양면성을 잘 알게 되었다고나 할까…….”
꽃은 평화의 상징.
그렇게 꽃을 흔들면서 칼을 휘둘러 아시아를 전화에 몰아넣은 것이 일본이다.
“본국의 훈령은 친선 도모인데, 대사관 직원들은 전범 조직과 연관이 있었군요. 이걸 어찌 봐야 할까요?”
“나, 나는 모르는 일이오. 아무리 부하라도 속내까지 어찌 알겠소?”
“그러니까 대사님과 이번 사건은 무관하단 말입니까?”
“그렇소!”
어차피 고쿠류카이와 중간에 연락책 노릇을 하던 녀석들은 이번에 죽었다.
여기서 꼬리를 자르고 오리발을 내밀면 어찌 알겠는가.
“정말 모르는 일입니까?”
번즈의 무서운 눈길에 하루히코는 애써 눈길을 돌렸다.
“알겠습니다. 저도 양국의 관계에 금이 가는 건 원치 않습니다. 다만 전범 조직이 귀국 대사관 쪽과 연결이 되어 있어서…….”
“그건 몰랐다고 하지 않소! 앞으로 주의하리다.”
“그러면 앞으로 우리 쪽 정보 제공자의 뒤를 캐는 시도는 하지 말아 주십시오.”
“그놈들이 MI6 쪽 사람을 건드렸다고?”
“그렇습니다. 홍콩에서 활동했던 친구인데, 비밀리에 활동하느라 가짜 신분증을 쓰고 있었지요.”
하루히코는 그 홍콩의 MI6 정보 제공자가 누굴 말하는지 금방 눈치챘다.
“그, 그럼 설마 리준욘이……?”
“죽은 그의 부모, 그를 키운 지인도 다 우리와 관계가 돈독했었죠.”
번즈는 입술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을 했다.
이건 사실 준영이 짜 준 각본이다.
실제 식민지나 전쟁 지역에서 현지 정보원을 쓴 사례가 있지 않냐면서.
“하지만 그자는 축구 선수 아니오?”
“그렇기에 철의 장벽조차도 쉽게 넘어갈 수 있죠. 그렇잖아도 지난번에 체코슬로바키아에 방문했다가 곤욕을 겪었고.”
“그건 정체불명의 망명자라 조사한 거라고…….”
“단지 대외적인 핑계일 뿐입니다. 실제로 그쪽 보안국에서 냄새를 맡아서 말썽이 벌어진 거지요.”
번즈는 천연덕스럽게 둘러대면서 준영의 각본 능력에 감탄했다.
그때 일을 또 이렇게 엮어 버릴 수 있다니!
도대체 미래에서 그는 어떤 드라마와 영화들을 봐 왔던 걸까?
“우, 우리는 전혀 몰랐소.”
“네, 모르는 게 당연하죠. 이제 아셨으니 우리 쪽을 자극하는 짓은 자제하셨으면 합니다. 저희가 이번에 생각보다 많은 걸 알게 되어서 말입니다.”
반즈가 이번에 알게 된 건 미래의 정보.
하지만 하루히코는 그것이 자신에게 불리한 정보들이라고 착각했다.
“아, 알겠소. 다신 안 하겠소.”
“그리 믿고 물러납니다. 좋은 하루 되시길.”
흡족한 미소를 지은 번즈는 연방 진땀을 쏟는 하루히코를 뒤로하고 일본 대사관을 떠났다.
***
“그 Park이라는 노인이 죽었소.”
유치장에서 자신을 불러낸 수사관의 말에 이억관은 가늘게 웃음을 지었다.
‘지옥으로 떨어졌구나, 박춘금. 기왕이면 좀 더 비참하게 연명하길 바랐는데…….’
“듣고 있는 거요? 이로써 당신의 혐의는 더욱 가중되었소.”
“앞서 말했다시피 나는 내 할 일을, 민족의 반역자를 처단했을 뿐이오.”
떳떳함을 주장하는 이억관의 태도에 수사관은 한숨을 쉬었다.
확실히 현재까지 입수된 정보를 보면 그가 사건을 저지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실제 경찰 내 참전자들 중에서 그를 이해한다는 이들도 있을 정도.
“다시 말하지만, 당신이 저지른 일은 우리 법률에…….”
쾅!
갑자기 조사실 문이 벌컥 열리며 낯선 사람이 들어왔다.
대체 누구지?
어리둥절해하는 수사관의 앞으로 다가온 사내는 슬쩍 신분증을 보여 주었다.
“대외 정보부의 제이미 번즈라고 하오.”
“그러십니까? 피해자들, 고쿠류카이에 대한 문제 때문에 오신 겁니까?”
“그것도 있소만…….”
번즈는 자신을 멀뚱히 바라보는 이억관을 향해 호통을 쳤다.
“내가 성질 좀 죽이라고 했지? 아무리 쪽바리 갱들에게 원한이 많다고 하지만, 접선하라고 보냈더니 다짜고짜 총질을 해?”
‘응?’
도대체 이 사람, 왜 자신을 아는 척하면서 호통을 치는 걸까?
“자넨 정보원으로 실격이야! 애국자 노릇을 하면 잘했다고 넘어갈 수 있을 줄 알았나? 한동안 벽이나 보면서 반성이나 하라고!”
뭔지 모르지만, 이 분위기에서 함부로 입을 놀려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억관이 가만히 입을 꾹 닫고 있는 사이, 놀란 수사관이 번즈에게 물었다.
“정보원이라뇨? 이자가 그럼 대외 정보부 소속이란 말입니까?”
“그렇소. 개인 사업가로 위장해서 활동 중이었는데……. 참 나, 이렇게 곤란하게 만들고 말이야.”
투덜거리던 번즈는 수사관에게 이런저런 설명과 부탁을 건넨 다음 조사실을 떠났다.
그렇게 한바탕 바람이 휩쓸고 간 후, 수사관의 태도가 매우 공손해졌다.
“음지에서 일하는 분이셨군요. 왜 진작 이야기하지 않았습니까?”
“그건… 함부로 발설할 게 아니라서.”
“하긴 그렇군요. 뭐 필요한 거 없습니까? 홍차라도 내어 드릴까요?”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르지만, 억관은 준영이 뭔가 손을 썼음을 눈치챌 수 있었다.
절대 포기하지 않기로 약속했으니, 지금 이 상황도 한번 즐겨 보기로 했다.
***
“그렇게 처리해 주셨군요. 감사합니다.”
모즐리의 프레드로 저택으로 돌아온 준영은 번즈에게서 억관의 일을 잘 처리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곧바로 석방은 힘들지만, 그래도 확실히 중형은 피할 수 있겠다면서.
“정보부 백이 확실히 좋구만. 사모님과 필립이에게도 연락해 줘야지.”
이제 좀 웃을 수 있었다.
정말이지 요 며칠, 얼마나 발품을 팔면서 마음을 졸였던가.
“잘 해결된 거예요, 준?”
준영이 이억관의 집에 연락을 마쳤을 즈음, 리즈가 다가왔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근데 어쩌다 보니 정보부 요원이 되어 버렸어.”
“뭐 어때요? 축구 선수로 위장한 MI6 요원, 멋있기만 한데요?”
빙긋 미소를 짓던 리즈는 잊은 것이 있다는 듯 박수를 치며 말을 이었다.
“아 참, 어제 던컨 씨한테 국제 전화가 왔어요.”
“던이?”
“네. 베오그라드에서 훈련 잘하고 있다고, 준의 일은 어찌 되었는지 몹시 궁금해하더라고요.”
“하긴 그 녀석들에게도 알려 줘야겠군.”
지금쯤 한창 걱정하고 있을지 모른다.
자칫 살인 사건 공범으로 낙인찍히는 게 아닌가 하고서.
마음에 그런 걱정을 안고 있으면 경기에도 제대로 집중할 수 없을 터.
그러니 알려 주어야 한다. 전화를 하든, 전보를 보내든.
“그나저나 내일이 드디어 유러피언 컵 8강전 2차전이군.”
“준이 빠졌는데도 잘할까요?”
“물론이지. 우리 팀 동료들은 다들 강하다고. 적진 한가운데라고 주눅 들 일은 없을 거야.”
특히 바비 찰튼은 요즘 절정의 기량을 보여 주고 있었다.
그러니 내일 경기에서도 한 골 정도는 득점하지 않을까?
“이제 뮌헨에서 벌어질 일은 걱정하지 않는군요.”
“당연하지. 갈 일이 없으니까.”
역사는 바뀌고 있다.
앞으로도 계속 변할 것이다.
자신이 알던 역사와는 다른 세계가 펼쳐질 터.
준영은 그 새로운 세계가 기대되었다.
***
“어이, 리틀 존에게서 연락이 왔어!”
맨유 선수단이 경기장으로 떠나기 전, 준영이 보낸 전보가 그들에게 도착했다.
“어떻게 되었대? 걱정할 필요 없는 거야?”
“잘 해결되었다니 그런 모양이야.”
“혹시 걱정하지 말라고 일부러 이런 메시지를 보낸 게 아닐까?”
워낙에 존에게 연달아 나쁜 일이 펑펑 터지다 보니 걱정을 완전히 지울 수 없었다.
그래서 우려하는 선수들도 있었지만, 던컨은 그가 무사할 거라고 믿었다.
“울버햄프턴전 출전에 맞춰서 훈련을 하고 있다니까, 괜찮을 거야. 주전 자리 다시 탈환할 거니까 각오들 하래.”
“하하, 그 자식, 잘난 척은!”
어쨌거나 힘을 내야 한다.
일부러 걱정하지 말라고 이렇게 연락을 보내 줬는데, 지고 가서는 면목이 서지 않을 테니까.
“아 참, 호텔 직원에게 들었는데, 유고슬라비아 대통령이 오늘 경기를 관전할 거래.”
“그 티토라는 사람?”
“하, 이거 오늘 경기도 만만치 않겠는걸.”
국가 지도자가 직접 관전을 오다니.
높으신 분의 격려(?)가 얼마나 효과가 뛰어난지는 이미 유고슬라비아에 오기 전에 하이버리에서 확인했다.
어쩌면 그 경기만큼이나 힘들지 모른다.
하지만 선수들은 우려보다 투쟁심을 불태웠다.
겨우 여기서 고전해서는 나중에 진짜 강팀, 작년에 고배를 안겨 준 레알 마드리드와 맞붙을 수 없을 테니까.
“자, 다들 가자, 이기자!”
“Manchester is Wonderful!”
자신들도 모르게 새로운 역사의 흐름으로 나아가고 있는 버스비의 아이들.
전의를 다진 그들은 격전지로 향했다.
***
실제 부업으로 정보원으로 활동한 선수가 있습니다.
루마니아의 게오르게 포페스쿠로, 차우셰스쿠 집권 당시에 동료들이 정치적인 불만이 있는가 살펴보고 비밀경찰에게 밀고를 했다 합니다.
어찌 보면 스파이라기보다 프락치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