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전드 1957-103화 (103/400)

Round 103. 거래

늦은 밤 귀가한 손웅민은 탁자에 앉아 노트북을 켰다.

OS가 가동된 후 곧장 브라우저를 연 그는 검색창에 한 사람의 이름을 올렸다.

이준영 혹은 John Young Lee.

대한민국 퍼스트 레전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최초의 한국인 선수.

그의 일대기에 관련한 기록과 다큐멘터리 영상이 줄줄이 떠올랐다.

“이준영, 1934년 출생, 2003년 사망…….”

손웅민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는 얼마 전까지 이준영이 뮌헨 비행기 참사 때 죽은 줄 알았다.

얼마 전 대표팀 소집 때 이준영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서 그 말을 했더니 다들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는 게 아닌가.

‘형, 어디 아파요? 이준영 옹, 2002년 월드컵 때 한국에도 왔는데?’

대표팀 후배 이강익의 말에 어리둥절했던 웅민.

그는 이준영 옹이 뮌헨 참사 때 돌아가셔서 지난 2월 초에 다 같이 성묘를 다녀온 게 아니냐고 말했다.

‘그거야 설날이니 그랬죠! 초대 해외파 선수이셨는데 성묘 가는 건 당연하잖아요.’

그랬던가?

참으로 이상하다.

그런데 어째서 자신은 그렇게 착각하고 있었을까?

뮌헨 참사 자체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그만큼 큰 비극이었기 때문일까?

“거참, 귀신에 홀린 것도 아니고…….”

몇 번을 검색해 봐도 강익이가 말해 준 대로였다.

이준영은 멀쩡히 살아서 이후 십수 년간 선수 생활 잘하다 은퇴, 그 뒤엔 식품 산업과 의류업으로 큰 부를 축적하여 훗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회장까지 지냈다.

『그 형님이 원체 포부가 크셨어. 그냥 라면이나 신발 장사하는 걸로 만족 안 하셨다고. 언젠가 석유 시장을 꽉 잡을 거라고 했는데…….』

다큐멘터리에서 이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이철호.

몇 해 전에 타계한 그는 대한민국 라면의 원조 가문인 미스터리 푸드 컴퍼니의 사장을 맡아 라면을 세계인의 음식으로 자리 잡게 한 라면왕이다.

“거참, 이 할아버지, 대체 정체가 뭐야?”

현역 때는 축구 선수로, 은퇴 후에는 사업가로 성공한 입지전적인 인물.

그런데 이상한 점은 허더스필드 타운에 입단하기 전까지는 과거 행적이 불분명하다는 점이다.

“홍콩 시민권자였다곤 하지만, 23살 이전에 어디에서도 축구를 한 적이 없고…….”

당시는 동양인이 천대받는 시대.

하지만 나중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대성하는 선수가 철저히 무명으로 보냈다는 게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그가 영국에 오기 전에는 가짜 이름으로 활동했을 가능성도 주장하고 있었다.

“뭐지, 이건……?”

스크롤을 내리던 손웅민은 업로드된 지 이틀밖에 안 된 게시물을 클릭했다.

영어로 작성된 그 게시물에는 이준영의 과거에 대해 완전 깜짝 놀랄 만한 이야기가 실려 있었다.

“MI6? 영국 정보기관에서 기밀 해제된 문서라고?”

모니터 화면에 얼굴을 가까이 댄 손웅민은 게시물에 올라온 사진과 기록들을 읽어 나갔다.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대한민국 퍼스트 레전드의 비밀.

손웅민의 입이 저도 모르게 벌어졌다.

***

“어서 오게, 존. 안 그래도 기다리고 있었지.”

준영의 방문을 예상했다는 듯 처칠은 빙긋 웃음을 지었다.

그가 권하는 대로 자리에 앉은 준영은 곧장 본론을 이야기했다.

“지난번에 말씀하셨죠? 혹시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이야기하라고. 힘닿는 데까지 도와주신다고요.”

“그래, 자네는 그 호의를 미뤘지.”

준영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이번엔 각하의 호의가 절실합니다.”

“신문에 난 그 사건 때문이로구만.”

웨스트민스터 근방에서 벌어진 총격 살인 사건.

일본인과 한국인들이 관련된 이 사건으로 5명이 죽었고, 한 명은 중태였다.

그 충격적인 사건에 버스비의 이단아 존 Y. 리가 휘말려 있었다.

“미리 묻네만, 자네가 사람을 죽인 건 절대 아니지?”

“지금 범인으로 잡힌 분은 제가 못한 걸 대신 하신 겁니다.”

준영은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 처칠에게 자세하게 설명했다.

홍콩 행정부 금고에 몰래 시민권 증서를 넣은 일을 일본인들이 눈치챈 것까지.

“끝까지 속이지 못하고 꼬리를 밟힌 게로군. 그래서 자네 동업자란 사람이 살인 멸구를 하려고 죄다 쏴 버렸다는 건가?”

“아뇨. 시민권 증서 반입 건으로 협박은 받았지만, 그 때문에 총격이 벌어진 건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원한 문제죠.”

준영은 박춘금의 행적이나 이억관에게 들은 그의 과거까지 모두 이야기했다.

그제야 처칠은 납득이 가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유대인들이 나치 부역자를 처단하고 다니는 거랑 비슷한 사건이란 거군.”

“그렇습니다. 어떻게, 정상 참작이 안 되겠습니까?”

아직 사형제가 시퍼렇게 살아 있는 시대.

우발적인 살인도 아니고, 무려 5명을 죽였다. 한 명은 거의 죽기 직전까지 팼고.

영국 법정이 과연 이억관의 사정을 얼마나 알아줄지 모른다.

자칫하면 꼼짝없이 중형을 받게 되는 것이다.

“약속은 했으니 힘닿는 데까지 도와주지. 친분이 있는 법관이나 변호사들과 한번 이야기를 해 보겠어.”

“감사합니다.”

“고마우면 다음엔 시가라도 사 오라고. 금연하라는 잔소리는 말고.”

처칠에게 부탁을 하고 물러난 준영.

그는 이번엔 변호사 마거릿 대처의 사무실로 발걸음을 돌렸다.

하지만 얼마 가지 못한 채 정장 차림의 사내들에게 둘러싸였다.

“존 Y. 리 선수 되시죠?”

“그렇습니다만, 뉘신지?”

뭔가 눈빛이 심상치 않다.

혹시 극우파 쪽바리들이 고용한 탐정 혹은 용역들일까.

슬쩍 주먹을 말아 쥔 준영은 언제든 치고 빠져나갈 태세를 갖췄다.

“리 선수를 만나고 싶어 하는 분이 있습니다. 부디 동행해 주시길.”

“쪽바리는 사양인데.”

“쪽바리(Jap)가 아니니 걱정 마십쇼. 절대 리 선수에게 손해되지 않을 것을 약속합니다.”

잠시 망설이던 준영은 흔쾌히 그들을 따라갔다.

누군지 모르지만, 분명히 현재 자신의 상황을 알고 온 듯했으니까.

‘거기다 손해가 되지 않는다고 했지.’

이억관을 구명하는 데 도움이 될지 모른다.

준영은 그 기대감이 어긋나지 않기를 바랐다.

***

정장 사내들이 안내한 곳은 한적한 공원이었다.

벤치에 앉아 책을 보고 있던 사나이는 준영이 오자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미스터 리. 나는 제이미 번즈라고 합니다.”

“이준영입니다.”

번즈와 악수를 나눈 준영은 그와 나란히 벤치에 앉았다.

“지인의 문제로 처칠 경을 만나고 오셨죠?”

“그렇습니다. 잘 알고 계시네요.”

“그야 우리는 그동안 미스터 리를 지켜보고 행적을 조사했으니까요.”

번즈의 말에 준영의 표정이 변했다.

그가 무엇을 오해하는지 눈치챈 번즈는 바로 진정하란 제스처를 보였다.

“흥분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우리는 그 일본인들, 고쿠류카이와 아무런 상관이 없으니까요.”

“고쿠류카이?”

“영어로 하면 Black Dragon Society가 되겠군요. 어제 지인분께 총격을 당한 무리가 그쪽 조직원들이죠.”

“아, 흑룡회…….”

일제 강점기 배경 매체에서 곧잘 언급되는 극우 단체 흑룡회.

준영은 박춘금이 흑룡회 운운했던 게 단순한 협박이나 과장 수준이 아니었음을 알았다.

“오히려 우리는 국가의 안보를 위해 고쿠류카이같이 호전적이고 위험한 사상을 가진 자들을 단속하는 입장입니다.”

“그럼… 정보부 쪽에서 일하시는 겁니까?”

“MI6. 대외 정보 수집 및 방첩 활동을 하고 있지요.”

MI6면 007이 몸담고 있는 조직이 아닌가!

예전에 미래인인 게 들통나면 MI6가 찾아올까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진짜 찾아오다니!

“놀랐습니까?”

“조금요. 혹시 살인 면허도 있습니까?”

“후후후, 그건 기밀이라 말하기 곤란하군요.”

가늘게 웃음을 지은 번즈가 진지한 눈길로 준영을 바라보았다.

“우리가 왜 미스터 리를 지켜보았는지 아십니까?”

“신분 증명이 불분명한 제가 동구권의 스파이로 보여서?”

“그런 추정을 하기도 했지요. 하지만 이걸 보고 생각을 달리하게 되었습니다.”

준영은 번즈가 보여 준 사진을 보고 눈을 둥그렇게 떴다.

바로 애S턴 마틴의 허더스필드 공장에 있을 자신의 DB12였으니까.

“이걸 대체 어떻게…….”

“그야 세상에 완벽한 비밀 같은 건 없으니까. 브라운 회장이 은밀히 연구를 진행해 나갔다고 하지만, 애초에 말과 정보를 죄다 틀어막는 건 불가능하죠.”

역시 일개 기업 수준으론 완벽한 보안이 불가능했던 걸까.

아무튼 정보기관에 들통이 났어도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코로 오트밀을 들이켜야 하는 건 아닐까 우려했으니까.

“그래도 당신을 미래인이라 확신한 건 얼마 되지 않았죠. 당신에 대해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훨씬 많고, 어느 시점의 미래에서 왔는지도 아직 모릅니다.”

“약 70년 후예요.”

“70년 후… 이미 나이가 든 나로서는 도달하기 힘든 시대군요.”

아쉬운 기색을 보인 번즈는 다시 말을 이어 갔다.

“아무튼 우리도 잘 모르는 당신을 이상한 놈들이 뒷조사를 하는 게 마땅찮았습니다.”

사실 적당히 곤란하게 만드는 수준이면 지켜볼 참이었다. 놈들이 알아낸 준영의 약점을 자신들이 이용할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고쿠류카이는 준영의 진짜 정체도 밝히지 못한 주제에 어설프게 자극했다. 결국 어제 사건 같은 불상사가 발생했고.

“우리는 국가의 안보를 위해 미스터 리가 알고 있는 정보가 굉장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크게 기대하진 마십쇼. 난 그냥 축구 선수니까.”

“그래도 앞으로 70년 동안에 벌어질 인류사의 중요한 사건 정도는 알겠죠. 예를 들자면 핵전쟁의 발발 시기라든가.”

“그런 거 없으니까 안심해요.”

“오, 그것참 소중한 정보로군요.”

준영에겐 별거 아닐지 몰라도, 번즈 같은 사람들에겐 달랐다.

상대가 핵을 쓰느냐, 쓰지 않느냐.

이는 외교적인 협상이나 정치적인 예측을 하는 데 중요한 변수가 되니까.

“뭐, 이런 겁니다. 우린 미스터 리의 미래 정보가 필요하고 가급적이면 독점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영국의 미래를 위해서 말이죠?”

“물론. 그래서 얼마든지 거래를 할 수 있습니다. 정보를 받는 조건으로 이번처럼 미스터 리의 곤란한 일을 해결해 준다든가 말이죠.”

“억관 아저씨를 구할 수 있다고요?”

“최대한 형을 줄일 수 있게 도와 드리죠. 아마 처칠 경께도 부탁했겠지만, 같은 편은 많은 게 좋지 않겠습니까? 특히 물밑에서 활동하는 사람이 말입니다.”

경찰 쪽에서는 어떻게 보는지 몰라도, 번즈는 정당방위로 인정받는 게 아주 불가능하진 않을 거라 보았다.

일단 흑룡회에서 먼저 협박과 위협을 가했으며, 숫자도 저들이 더 많았고, 비무장이었던 두 사람과 달리 불법적으로 총기를 소지하고 있었던 게 사실로 밝혀졌으니까.

상대를 모두 제거하지 않고는 위험을 벗어나는 게 불가능했다고 변명해 볼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도망치는 자를, 그것도 늙은이를 쏘아 쓰러트리고 두들겨 팬 건 문제가 되겠습니다만… 뭐, 이것도 일단 죽진 않았으니까요.”

“결론은 해 볼 만하다는 거네요.”

“네. 정 안 되면 여론전을 벌이거나 설득할 만한 수준으로 그럴듯하게 얘기를 만들어도 됩니다. 미스터 리가 그랬던 것처럼요.”

번즈는 상당히 적극적이면서도 호의적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강압적으로 취조하는 것보다 준영의 호감을 사는 편이 많은 정보를 수월하게 얻는 데 유리하니까.

“알겠습니다. 도와주신다면 기꺼이 거래에 응하겠습니다.”

“잘 생각했습니다, 미스터 리.”

준영은 번즈가 내민 손을 잡았다.

앞으로 얼마나 MI6와 거래하게 될지 모른다.

하지만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다면 과거 처칠이 말한 대로 악마와도 손을 잡을 자신이 있었다.

***

MI6라는 명칭은 2차 대전 때 영국 전쟁성에 모든 정보기관들이 통합되어 있을 때 사용되었습니다. 저게 군 정보부 6호라는 뜻이라네요.

당연히 전후에는 SIS로 바뀌었습니다만, 개인적으로 SIS보다 MI6 쪽이 더 멋지게 느껴져서 소설에선 MI6로 쓰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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