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102. 그날을 보기 전까지
“뭐라고요? 존이 경찰에 잡혀가다니!”
맨체스터에 돌아온 던컨은 런던에서 리즈가 전해 온 소식에 충격을 금치 못했다.
(저도 아직 자세한 건 모르지만, 살인 사건에 휘말린 모양이에요.)
“예? 사람을 죽였단 말입니까?”
(아뇨. 준이 한 건 아니고, 던도 리 셰프 알죠? 그분이 일본인 5명을 죽였대요. 한 명은 심각한 중태고요.)
“이런, 맙소사…….”
던컨도 리 셰프, 이억관을 알고 있었다.
준영과 친한 한국 사람으로, 그가 만든 요리를 곧잘 얻어먹기도 했으니까.
최근엔 준영이 세운 식품 회사 부사장이 되어 상당히 바쁘게 지낸다고 들었다.
부지런하고 온화한 성품을 가진 사람인데 갑자기 살인이라니!
그것도 무려 다섯 사람이나 죽였다고?
“그럼 존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일단 사건 참고인으로 경찰에 출두했다는데, 살인을 거들었다는 증언도 있다고 하고……. 어떻게 될지 잘 모르겠어요.)
“거참… 알았어요. 알려 줘서 고마워요.”
통화를 마친 던컨은 부리나케 동료들과 버스비 감독에게도 이 사실을 알렸다.
당연히 팀은 발칵 뒤집혔다.
“아니, 신분 증명 문제가 해결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또…….”
오밤중에 소식을 전해 들은 하드먼 회장은 머리를 움켜잡았다.
안 그래도 준영이 잘못되면 팀에도 징계 불똥이 튀지 않을까 염려하고 있던 찰나, 일이 무사히 수습되었다는 기사를 보고 안심하고 있었건만!
그런데 하루가 가기 전에 또 사고에 휘말리다니!
“존이 저지른 일은 아닙니다.”
“알고 있네, 맷. 그렇지만 연류된 것만으로도 충분히 골치 아픈 일 아닌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베오그라드에서 2월 5일 유러피언 컵 8강 2차전을 치러야 한다.
더구나 비행기는 내일 출발이다.
하지만 심각한 살인 사건에 휘말려 있는 선수가 원정에 동참할 수 있겠는가?
“어차피 전용기로 가는 거니 출발을 늦추면…….”
“살인 사건이야. 그것도 웨스트민스터 코앞에서 벌어진 사건이라고. 경찰 조사가 고작 2∼3일 안에 끝날 것 같은가?”
더구나 준영이 전용기를 빌린 이유가 무엇인가.
현지 적응 시간을 벌고 피로를 줄이려는 이유 때문이 아닌가.
“존 그 친구의 실력은 인정하네. 하지만 이번은 힘들어. 억지로 데려가 봤자 좋은 소리 하나도 나오지 않을 걸세.”
“휴… 그렇겠지요.”
중요한 유러피언 컵 경기를 앞두고 출전 정지가 해제되어 다행이라 여겼건만.
어쩔 수 없었다.
지금은 그를 제외하는 수밖에.
아깝긴 해도, 그의 공백을 어느 정도 메울 선수들은 있으니까.
“출전은 그렇다 치고, 아무튼 별 탈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부디 그래야 할 텐데…….”
밤은 깊어지고 있었지만 버스비도, 하드먼도 쉬 눈을 붙이지 못했다.
떨치기 힘든 걱정에 그들의 어깨와 마음은 무거워졌다.
***
‘하, 어쩌다 이렇게…….’
런던 경찰청에 와 있는 준영은 답답한 마음에 머리를 움켜쥐었다.
이억관이 벌인 돌발 행동.
그것을 탓할 생각은 없었다.
그가 아니었으면 더러운 친일파에게 무슨 수모를 당했을지 모르니까.
다만 왜 친일파가, 망할 극우 쪽바리들이 자신을 못 잡아먹어 안달인 건지!
‘그렇게나 부러웠나? 그렇게나 눈꼴시었던가? 어떻게든 자기들과 엮지 않으면 못 견딜 정도로.’
생각해 보면 21세기에도 그런 놈들이 있었다.
단지 J리그에서 뛰었다는 이유로 일본이 키웠다고 떠벌리거나, 성이 손씨라고 손오공의 후예, 중국인이라고 주장하거나.
남의 밥에 더러운 숟가락을 얹어 보려는 이 알량한 개수작은 그래도 지라시 수준에서 끝났다.
그래서 준영도 이 정도로 일이 커질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존 Y. 리 씨?”
준영은 자신을 찾는 수사관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예. 조사는 다 끝난 겁니까?”
“그게, 추가로 밝혀진 사항이 있습니다. 사망자 중 2명은 일본 대사관 직원이더군요.”
“그럼…….”
“아마 단순한 살인 사건으로 끝나지 않겠죠.”
외교적으로도 시끄러워질 것이다.
과거야 어떻든, 영국 시민이 일본 공무원을 살해한 거니까.
준영은 수사관에게 간곡히 말했다.
“다시 말하지만 정당방위였습니다. 놈들이 먼저 우리에게 총을 겨누고 납치하려 했다고요.”
“네, 범인도 그리 말하더군요. 실제 사망한 피해자가 권총을 쥐고 있던 것도 확인되었고.”
“그럼 정상참작이 되겠군요.”
준영의 기대에 수사관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걸 판단하는 건 저희가 아니라 법원입니다. 더구나… 정당방위치고 너무 지나쳤어요.”
준영처럼 달걀 정도를 던진 거라면 모를까, 사람을 다섯이나 쏴 죽였다.
더구나 한 명은 이미 팔꿈치로 맞고 제압된 상황이었음에도 확인 사살을 했고.
“그 Park이라는 중상자만 해도 그렇습니다. 부상을 입히는 데 그치지 않고 계속 폭력을 행사했죠.”
박춘금의 부상은 모르는 이들이 보면 실로 치를 떨 정도로 잔혹했다.
뼈가 부러지고 살이 으깨지고.
마치 사람을 고기 다지는 것처럼 두들겨 패 놓았다.
거기다 총격으로 특정 부위 손상까지.
아직 의식불명 상태로 살아 있는 게 용할 정도였다.
“그 새끼는 그렇게 처맞아도 할 말이 없습니다! 동포들을 핍박한 깡패인 데다, 일본의 전쟁을 적극 찬성한 전범이라고요!”
“원한 관계로 인한 범죄라는 겁니까? 유감스럽게도 저희는 그런 사정을 잘 모릅니다. 그래도 피해자들이 선량하지 않은 자들이란 건 알겠더군요.”
권총 같은 불법 무기를 소지한 걸 봐선 갱단의 일원으로 보였다.
문제는 왜 일본 대사관 직원들이 그런 자들과 동행하고 있었느냐는 것.
“그건… 그들이 나치 같은 사상에 빠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를 자기들 사상적인 목적에 이용하려 했죠.”
“한낱 축구 선수를 말입니까?”
“저도 좀 어이가 없지만… 그런 인물들조차도 절실한 경우가 있으니까요.”
준영은 이 문제를 명확히 밝혀야 하나 망설였다.
박춘금이 말한 바에 따르면, 이 극우 쪽바리들은 자신이 신분 증명을 조작했다는 사실을 눈치챘으니까.
심지어 홍콩 행정부 금고에 몰래 시민권 증서를 밀어 넣은 것도 알아냈다.
‘경찰이 이번 사건을 조사하다 그 사실까지 알려지면……. 젠장, 루스 총무 그 인간은 아주 춤을 추겠군.’
심란한 표정을 짓던 준영은 수사관에게 다시 말을 건넸다.
“아저씨는 어떻게 됐습니까?”
“범인 말입니까? 일단 신문이 끝나 유치장에 있습니다.”
“만날 수 있습니까?”
“면회 신청을 해야지요. 하지만 오늘은 안 됩니다. 너무 늦은 시간이라…….”
“알겠습니다.”
준영은 이억관을 만나는 건 내일로 미루기로 했다.
‘내일, 내일은 분명…….’
세워 둔 계획대로라면 베오그라드 원정을 떠나는 날이다.
하지만 지금 상황으로 봐선 따라가기 힘들 것 같았다.
경찰에서도 계속 준영에게 추가 진술을 바라고 있었고, 이억관을 저대로 내버려 두고 갈 순 없으니까.
“뮌헨은… 아냐. 이제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
전용기를 빌린 데다, 그쪽으론 가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니 이제 그 사고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준영은 일단 이억관을 먼저 보살피기로 했다.
***
“미안하네, 준영이.”
다음 날 아침, 면회를 온 준영에게 억관이 면목 없다는 듯 쓴웃음을 지었다.
“어떻게든 자네를 구하려고 한 건데……. 경기도 못 나가게 해 버렸군.”
“아닙니다, 아저씨. 당연한 일을 하신 겁니다.”
21세기 사람인 자신도 악질 친일파들의 일화를 보면 열 받게 되는데, 직접 그들에게 시달린 세대들은 오죽할까.
준영은 충분히 억관의 심정이나 행동을 이해했다.
“당연한 일이라……. 그래, 어쩌면 이렇게 되려고 이역만리까지 와서 구차한 목숨을 부지한 건지도 모르겠군.”
이억관은 16년 전의 일을 떠올렸다.
아직 태평양 전쟁이 한창이던 1942년, 그는 일본군에 징용되어 군속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당시 민족 차별이 심했고, 일본군은 조선인 군속들의 임금을 체불하고 학대를 일삼았다.
전황도 나날이 나빠져 갔기에, 이억관을 비롯한 26명의 청년들은 뜻을 모아 항일 투쟁 조직을 만들었다.
그것이 바로 고려 독립 청년당.
이억관은 바로 그 조직의 총령, 즉 우두머리였다.
“우리는 은밀히 조직을 확대했지만, 일본군은 눈치를 채고 군속들을 흩어 놓으려 했지. 그때 손양섭, 민영학, 노병한 세 동지가 무기를 탈취, 일본군을 기습했어.”
일본군 형무소장과 어용상인 등 10여 명을 사살하는 의거를 일으킨 세 의사는 장렬한 최후를 맞았다.
당시 이억관은 연합군 포로 수송선을 탈취하려는 계획을 세우다 발각, 헌병들에게 체포되었다.
심한 옥고에 몇 번이고 죽음을 생각했지만, 이를 악물고 버텼다.
그날을 보기 전까지 죽을 수 없으니까.
그리고 마침내 기다리던 그날이 왔다.
“난 아무것도 하지 못했어. 아무것도 해내지 못한 게 먼저 간 세 동지들에게 항상 미안했지.”
이런 서글픈 감정은 해방이 된 후에도 풀리지 않았다.
강대국에 의해 쪼개진 조국.
이제는 건국을 향해 달리는 애국지사들은 권력과 이데올로기에 빠져 버렸다.
한때 뜻을 같이한 이들에게 총을 겨누고, 죽창을 휘둘렀다.
그사이 친일파들은 다시 고개를 내밀고 빈자리를 차지해 갔다.
어째서 이렇게 된 걸까.
왜 민족의 운명이 이렇게 돼 버린 걸까.
낙담하여 정처 없이 길을 떠났고, 정신을 차리고 나니 머나먼 이국에 와 있었다.
“준영이, 난 자네에게 고맙게 생각하네. 자네를 만나지 않았다면 다시 태극기를 보는 일도, 조국을 생각하는 일도, 먼저 간 동지들 앞에 떳떳하지도 못했을 테니까.”
“죽으러 가는 사람처럼 말하지 마십쇼.”
“나는 이미 각오를 했네. 어찌 되었든 남의 땅에서 위법을 저질렀으니 그에 대한 처벌은 받아야지.”
그 판결이 사형이라 하더라도 달게 받을 수 있으리라.
이런 억관의 태도에 준영은 화가 났다.
분명히 그는 당연한 일을 했다.
그렇다고 여기서 체념하는 게 과연 옳을까?
“아저씨, 사모님이나 필립이가 걱정하고 있어요! 가족들 생각은 안 할 겁니까?”
“물론 미안하지. 하지만…….”
“먼저 간 세 분에게 면목이 선다고 생각하세요? 인간쓰레기를 청소했죠. 당연한 일이었어요. 근데 그분들이 만족할까요? 아직 할 일이 남았잖습니까!”
준영의 말에 억관은 번쩍 정신이 들었다.
그래, 준영을 만나고 무슨 일을 하고 있었던가.
굶주리는 동포들을 배불리 먹일 거라고 사업을 하지 않았던가.
이제 그 사업이 궤도에 올라서 조국으로 눈길을 돌릴 수 있는 때가 왔다.
그런데 여기서 포기한다면?
“저 혼자는 다 못합니다. 그러니 도와주세요, 아저씨. 포기하지 마십쇼.”
“나는… 나는…….”
뭔가 속에서 울컥 치밀어 올랐다.
방금 전까지 느끼고 있던 만족과 후련한 감정이 턱없이 부족하게 느껴졌다.
살아야 한다,
여기서 끝내서는, 만족해서는 안 되니까.
“그래, 포기하지 않겠네. 아무렴 그럴 수야 없지. 적어도 모두가 배불리 먹고 행복하게 웃을 수 있는 그날을 보기 전까지는…….”
“네, 미래를 보셔야죠. 지금보다 훨씬 빛나는 미래를!”
새로이 각오를 다지는 억관의 모습에 준영은 다시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절대 포기하지 마세요. 제가 가진 카드를 다 써서라도 아저씨를 구해 드릴 테니까.”
이억관에게 약속을 한 준영은 면회를 마친 후 유치장을 나왔다.
어디로 갈지 결정을 했기에 발걸음에 망설임은 없었다.
***
일본의 민족 차별은 참 야비하고 치졸한 수준에 속합니다.
만주국의 예를 들자면, 같은 군대에서 일본인들은 쌀밥에 보리 좀 섞어서 주고, 조선인이나 중국인 등 다른 민족은 잡곡에 고구마를 줬습니다.
다시 말해 졸병이라도 일본인이면 쌀밥 먹고, 장교라도 조선인이면 고구마 섞인 잡곡밥을 먹어야 했다는 겁니다.
저렇게 치사하게 구니 만주군의 조선인 장교들 사이에서 불만과 반감이 공공연히 나올 수밖에요.
심지어 술자리에서 대놓고 독립군가를 불러 젖히는 상황까지 벌어졌다니, 얼마나 콩가루 수준인지 알 만하다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