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전드 1957-101화 (101/400)

Round 101. 반역자

“안녕하시오. 박상구라고 하외다.”

준영이나 이억관의 표정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는지, 아니면 신경 쓰지 않는지.

동글동글한 인상의 노인, 박상구는 그들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이쪽이 신문으로 봤던 이준영 선수니까, 그쪽은 나와 전화 통화를 했던 이억관 부사장이시겠군.”

“…….”

준영과 억관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저 약속이나 한 것처럼 박상구와 그의 일행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 적대적인 반응에 박상구의 표정도 변했다.

처진 눈꼬리가 살짝 들어 올려졌을 뿐인데, 인상 좋은 노인에서 야비하고 음흉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허, 이거 반응이 왜 이리 싸늘하신가? 내가 늦어서 그런 거라면 사과하리다. 도중에 들를 곳이 좀 있어서…….”

“그 들른 곳에서 만난 게 저 일본인들입니까?”

준영은 박상구의 말을 잘라 버리며 그의 뒤에 있는 일본인들을 가리켰다.

지난번에 자신을 아시아의 영웅으로 만들어 주겠다며 아시아의 단합 운운하며 대동아공영권 같은 개소리를 지껄인 놈들.

저 글러먹은 놈들과 일행인 걸 보니, 박상구에 대한 신뢰도가 대폭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일본인이라 싫어하는 겁니까? 난 재일교포라 그들과 사업상 어울리고 있는 것이오만…….”

“일본인도 일본인 나름이죠. 이자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알기라도 합니까?”

준영의 질책에도 불구하고 박상구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당연히 알지요. 아시아가 다 같이 단합해서 서구 열강에 맞설 긍지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대범한 젊은이들이지.”

“그거 대동아공영권 아닙니까! 단합시킨다는 핑계로 아시아 전체를 일본의 영향력하에 두려는……!”

“그게 뭐가 나쁜 거지요? 허허, 이거 이준영 선수는 듣던 것보다 훨씬 옹졸한 편견을 갖고 있구려.”

“뭐라고?”

준영이 거칠게 언성을 높이든 말든 박상구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일본은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근대화를 이뤘고, 서양 열강과도 대등하게 맞서 싸웠소. 당연히 일본을 중심으로 아시아가 뭉쳐야 하는 거 아니오? 그래야 평화와 번영이 올 테니까.”

“이런 미친 새끼! 개념은 쌈 싸 먹었냐?”

더 이상 공대와 예의가 남아 있지 않은 준영의 윽박에 박상구의 표정이 더욱 험악하게 변했다.

그가 데려온 일행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분위기가 살벌하다 보니 카페 직원들은 물론 주변 손님들도 수군댔다.

하지만 지금 준영은 주변 분위기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세상에 이런 썩어 빠진 놈을 만나게 될 줄이야!

“나이도 처먹을 만큼 처먹은 놈이 대체 뭘 보고 뭘 들었어? 일제 35년 동안 잠만 처잤냐?”

“진정하게, 준영이.”

“말리지 마세요, 아저씨! 아저씨도 잘 알 거 아닙니까!”

“잘 알지. 그래서 하는 소리야. 이 작자에겐 자네의 호통이 전혀 소용없어. 뼛속까지 더러운 친일 반역자니까.”

역시 친일파였구나.

하지만 해방이 되고도 저런 개소리를 떳떳이 떠벌리고 다니는 놈이 있을 줄은 몰랐다.

하긴 21세기에도 일본 극우파에게 돈을 받고 개소리를 하는 생계형 반역자들이 있긴 하지만.

“허, 친일은 몰라도 반역자라는 말은 삼가게, 이억관 부사장. 나에게 해 준 것도 없는 나라, 망해도 싼 나라와 돌아선 게 반역이 되는가?”

박상구의 뻔뻔한 소리에 이억관의 목소리가 거칠어졌다.

“백번 양보해서 외면은 할 수 있겠지. 하지만 네놈은 달라. 동포들을 짓밟고 피와 땀을 갈취하면서 왜놈들의 개새끼 노릇을 하지 않았나!”

“거참, 날 아주 잘 아는 것처럼 이야기하는구먼?”

“잘 알지. 네놈 면상을 신문에서 질리게 봤으니까. 그래서 본명이 박상구가 아니라 박춘금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박상구, 아니 박춘금.

일본 제국 중의원을 지내고 깡패 짓을 하면서 조선인들을 학대한 정치 깡패.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 색출과 학살에 앞장섰던 인간 백정.

미영격멸, 내선단결을 부르짖으며 조선의 청년들을 일본의 전쟁에 밀어 넣은 민족의 반역자.

원수를 눈앞에 둔 이억관의 눈빛이 벌겋게 타올랐다.

***

‘박춘금? 이놈이?’

준영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박춘금을 바라보았다.

일제 강점기를 다룬 21세기의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들먹여졌던 악질 친일파였을 줄이야!

박춘금은 준영이나 이억관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주 여유 있는 표정을 지었다.

“흐흐흐! 나를 잘 안다니. 이 어르신이 어떤 분인지도 똑똑히 알고 있겠군.”

“친일 반역자 깡패 새끼 아니냐.”

“깡패라……. 그래, 너같이 불령선인 기질을 가진 놈들이 나나 흑룡회(黒龍会)를 그렇게 보곤 했지.”

품에서 꺼낸 담배에 불을 붙인 박춘금은 준영에게로 눈길을 돌리며 말했다.

“이봐라, 이준영이. 이 어르신이 널 왜 찾아온 줄 아느냐?”

“일본 놈들 개소리하는 거 거들러 왔거나 아님 라면 생산 기술이라도 훔쳐 가려고 왔겠지.”

“오, 그래, 둘 다 맞혔구나. 네놈이 워낙 말을 안 들어서 이 어르신께 요청이 왔다. 반항기 가득 찬 젊은 놈 정신 좀 차리게 해 주라고.”

“정신은 네가 차려야 할 것 같은데?”

“하, 이 애새끼… 야 이준영이, 이 어르신이 정신 번쩍 들게 해 주랴?”

담배 연기를 훅 뿜어낸 박춘금이 말문을 이어 갔다.

“네놈은 구린 데가 있더군. 왕족이니 망명자니 하면서 이리저리 사람들을 속여 넘겼지만, 정작 신분이 불확실했지, 아마?”

“…너희가 축구협회에 찌른 거군.”

“그래, 우리가 투고했지. 흰둥이 늙은이가 일 처리를 병신같이 해서 네놈이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갔지만 말이야.”

1월 말에 벌어졌던 신분 증명 파동.

이놈들의 소행이었다.

준영도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고, 또다시 꼬투리를 잡히지 않기 위해 처리할 참이었다.

그런데 놈들이 먼저 접근해 올 줄이야.

“오늘 신문에 네놈의 출전 정지가 해제되었다고 나왔다지? 홍콩 행정부가 시민권 증서를 확인했다고 말이야.”

“…….”

“그런데 그 홍콩에서 확인된 시민권 증서도 사전에 위조해서 금고에 반입된 거더군.”

쿵-!

준영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소리를 들었다.

대체 놈이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았을까?

“이거 조사하는 데 흑룡회 친구들이 애를 많이 먹었다더군. 애쓴 만큼, 증거를 언론에 공개해야 보람 있지 않겠어?”

준영은 이를 악물었다.

그게 알려지면 여론은 순식간에 뒤집히고 축구협회의 루스 총무는 쾌재를 부를 게 틀림없다.

자신의 선수 생명이 끝장인 건 물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도 불똥이 튈 것이다.

어디 그뿐이랴,

지금까지 영국에서 쌓은 모든 것이 모래성처럼 무너지고 말 터이다.

“자, 어떠냐, 새끼야. 이제 좀 정신이 드냐?”

“…….”

“이 어르신도 너그러운 분이고, 흑룡회나 일본의 높으신 분들도 널 요긴하게 쓰고 싶다고 하니까 너무 곤란하게 만들진 않으마. 그 대신, 대가리 꺾고 꿇어라.”

꿇어라.

이 말이 준영의 귀에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벌겋게 얼굴을 붉히고 있던 그를 박춘금이 짜증스러운 기색으로 닦달했다.

“뭐 하고 있냐? 아직도 상황 판단이 안 되냐?”

“상황 판단은 끝났다.”

으르렁대듯이 말을 내뱉은 준영은 박춘금에게 쏘아붙였다.

“너 말고도 나에게 너그러운 분이 있고, 영국의 높으신 분도 날 요긴한 놈으로 보고 계시지. 나도 최후의 카드 정도는 있어. 그러니까 개소리 작작 하고 꺼져.”

***

“허…….”

박춘금은 어이없는 웃음을 지었다.

이 정도면 알아먹고 꿇어앉아 싹싹 빌 거라 봤는데, 오히려 뻣뻣하게 나올 줄이야.

이러면 곤란하다.

먹지 못할 감이라면 남도 먹지 못하게 밟아 버리라는 지시를 받았지만, 박춘금은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일본 제국 중의원까지 지낸 자신이 이런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새끼를 설득 못해서는 체면이 서지 않으니까.

“네가 아직 이 어르신이 어떤 분인지 모르는구나. 젊은 놈에게 인생의 쓴맛을 알려 주는 것도 어른의 책무이니, 오늘 교육 좀 단단히 시켜 줘야겠다.”

매 앞에 장사 없다.

과거 자신에게 대들었던 콧대 높은 불령선인들도 실컷 얻어맞고 꼬리를 말았다.

저 덩치만 큰 애송이라고 별거 있겠나.

“안 그래도 옆에 넓은 공원이 있드만. 거기 한적한 곳에 자리 잡고 심도 있게 교육 좀 해 보자고.”

“GR하고 자빠졌네!”

준영이 벌떡 일어났다.

그때, 그의 등 뒤에 차갑게 닿는 쇳덩이가 있었다.

박춘금과 동행한 흑룡회 조직원이 권총을 들이민 것.

흠칫하며 일어나려던 이억관에게도 권총이 겨눠져 있었다.

“미친놈, 여긴 런던이야.”

“법보다 주먹이 가까운 법이란다, 아가야. 거기다 누렁이들 일에 흰둥이들이 나설 것 같냐?”

박춘금의 말대로 카페 안에 있는 사람들은 아까부터 힐끔힐끔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더구나 흑룡회 조직원들도 교묘하게 권총을 겨누었기에 사람들이 눈치를 채지 못했다.

“천천히 따라와. 몸통에 쓸모없는 구멍 나기 싫으면 말이다.”

박춘금이 비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흑룡회 조직원들도 준영과 이억관에게 따라 움직이라는 듯 등에 댄 총구를 강하게 눌러 댔다.

‘제기랄…….’

분한 마음에 준영은 발걸음이 쉬 떨어지지 않았다.

이대로 끌려 나가 수모를 당해야 하는가!

“뭐 하고 있어? 얼른 가지 않고?”

이억관도 쉽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던 모양.

재촉을 하던 흑룡회 조직원은 그가 엉뚱한 방향을 바라보는 것을 보았다.

“뭘 보는……?”

퍼억-!

번개같이 몸을 돌린 이억관이 팔꿈치로 흑룡회 조직원의 안면을 후려쳤다.

그러고는 잽싸게 그의 손에 들린 권총을 낚아챘다.

“きさま(이 자식)!”

탕!

이억관이 방아쇠를 당기기 무섭게, 준영에게 총을 겨누고 있던 조직원의 머리통이 터져 나갔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하던 준영은 앞쪽에 있던 놈들 중 하나가 품에 손을 집어넣는 것을 보았다.

분명히 총을 꺼내 들 속셈!

그는 앤지가 줬던 달걀을 놈에게 던졌다.

“윽!”

탕! 탕! 탕!

달걀을 정통으로 맞고 주춤하는 녀석의 눈알에 총알이 박혔다.

연이어 터진 분노의 총격은 준영을 설득하러 왔던 두 놈도 지옥으로 직행시켰다.

“꺄아아아악!”

“살인이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카페 주인은 카운터 아래로 몸을 숙였고, 손님들은 비명을 지르며 달아났다.

난데없는 상황에 눈을 휘둥그렇게 떴던 박춘금도 허둥지둥 도망쳤다.

탕! 타앙-!

팔꿈치를 맞고 쓰러진 놈에게 총알을 먹여 준 이억관은 도망치던 박춘금에게도 거침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아아악! 끄아아아악!”

총알이 엉덩이를 뚫고 영 좋지 않은 곳을 맞혔던 걸까.

박춘금이 그곳을 잡고 바닥에 고꾸라졌다.

벌레처럼 꿈틀거리는 놈에게 다가간 이억관은 또다시 방아쇠를 당겼다.

철컥! 철컥!

“쳇!”

총알이 떨어진 권총을 내던진 그는 근처에 뒹굴던 의자를 집어 들고 박춘금에게 체어 샷을 날렸다.

“크악!”

“교육한댔지? 네놈도 교육 한번 받아 봐!”

부서진 의자 다리를 집어 든 억관은 그대로 박춘금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퍽! 퍽! 퍽!

“끄억! 꺽……! 끄에엑!”

“죽어! 개새끼! 반역자 새끼!”

머리가 터지고, 등뼈가 부러지고, 어깨가 으깨지고.

추하게 살아온 몸뚱이가 몸부림칠 때마다 바닥에 더러운 피가 낭자하게 흘렀다.

분노의 응징은 경찰들이 달려오기 전까지 계속되었다.

그리고 준영은 그저 묵묵히 바라보고 있었다.

말릴 수도 없었지만, 말리고 싶지도 않았기에.

***

도중에 알아보신 분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이억관 저분은 인도네시아에 있던 조선인 군속들을 규합하여 고려 독립 청년당을 조직해 일제에 맞섰던 항일 투사입니다.

실제 역사에서는 해방 후 국내 정국에 실망하고 홍콩으로 가셨다가 행방이 묘연해졌다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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