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100. 버프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나?’
지난 1월 18일 맨유에게 당한 볼턴 선수들의 기분이 이랬을까.
어느새 벌떡 일어난 준영은 자리에 앉지 못했다.
“축구가 이렇게 골이 잘 들어가는 스포츠였어?”
앤지의 물음에 준영은 고개를 저었다.
그의 시선은 필드에서 뛰고 있는 동료들에게 향했다.
순식간에 경기가 원점으로 돌아왔기 때문인지, 다들 얼떨떨한 기색이 역력했다.
‘잘못하면 저러다 또 당할 텐데…….’
이럴 때 교체 규정이라도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럼 아스날의 흐름을 잠시 끊을 수 있고, 팀에 활력을 불어넣을 선수, 바로 자신이 투입해 들어갈 수 있다.
하지만 현실은 그저 지켜만 봐야 하는 상황.
힘이 되고 싶어도 그들에게 힘을 줄 방법이 없었다.
‘아냐. 완전히 없진 않아.’
관중석 한편을 바라보던 준영은 모두에게 양해를 구하고 자리를 떴다.
그리고 잠시 후 그가 당도한 곳은 맨유 원정 팬들이 자리 잡은 객석이었다.
전반전까지만 해도 의기양양하던 그들은 믿기지 않는 상황에 선수들만큼이나 넋이 나간 상태였다.
그때, 준영이 신문지를 말아 만든 확성기를 들고 그들의 앞에 섰다.
“뭣들 하고 있습니까! 응원 안 할 겁니까?”
뒤늦게 준영의 출현을 알게 된 맨유 팬들은 깜짝 놀랐다.
“존 Y. 리잖아.”
“그러게. 여기 왔었구나.”
그의 출전 정지가 풀렸다는 이야기는 팬들도 이미 알고 있었다.
무리다 싶지만, 그래도 오늘 경기에 존 Y. 리가 출전했다면 어땠을까?
그래도 방금 전처럼 골을 줄줄이 알사탕처럼 내줬을까?
“여러분! 다들 그냥 구경하러 오셨습니까?”
모두들 고개를 저었다.
준영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지금 다 같이 하이버리에 있습니다! 필드에 나갈 순 없어도, 우리가 다 같이 할 수 있는 게 있죠!”
“맞아, 옳소!”
몇몇 사람들이 박수를 치면서 준영의 말에 동의했다.
“지금 우리 팀을 구할 수 있는 건 여러분의 마음! 여러분의 함성입니다! 여러분의 목소리가 지금 유나이티드를 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다 같이 응원합시다!”
“와아아아아!”
더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며 함성과 박수를 보냈다.
그리고 필드에 있는 선수들에게 힘을 실어 주기 시작했다.
“힘내라, 유나이티드!”
“포기하면 안 돼!”
뭔가 뜨겁게 벌어지는 상황에 맨유 선수들은 물론 아스날 선수들과 관중들까지도 맨유 팬들을, 그들을 진두지휘하는 준영을 바라보고 있었다.
“좋아요, 좋아! 모두 좀 더 힘을 모아 보죠!”
슈트 상의를 벗어 난간에 걸쳐 놓은 준영은 연이어 넥타이를 풀고 셔츠까지 벗어 던졌다.
완전히 웃통을 벗어 던진 그의 모습에 모두들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1월이 지났다곤 하지만 아직은 쌀쌀한 날씨.
그럼에도 존 Y. 리는 추위를 잊어버린 것 같았다.
“햇살도 렌즈로 한 점에 모으면 뜨거운 거 알죠? 그러니까 우리도 이제 목소리를 모아 봅시다! 자, 뜨겁게! 우렁차게!”
준영은 맨체스터 응원 구호를 있는 힘껏 외쳤다.
“오, 맨체스터!”
“Oh, Manchester!”
“이즈 원더풀!”
“Is wonderful!”
준영의 외침에 맞춰 맨유 팬들이 일제히 연호했다.
외침에 맞춰 힘껏 박수를 치면서.
Manchester is Wonderful!
그 우렁찬 구호가 하이버리 스타디움에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리틀 존 저 녀석…….”
응원을 주도하는 게 준영이라는 걸 알아본 맨유 선수들은 황당해하다가 이내 미소를 지었다.
비록 필드에서 뛰진 못하지만, 어떻게든 팀에 힘을 불어넣어 주려고 하고 있음을 안 것이다.
“자, 다들 정신 차리고 다시 시작하자. 우리가 누구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그래, 우리가 최고다! 거너스 새끼들에게 그걸 똑똑히 알려 주자!”
불씨가 되살아난 장작처럼 활활 불타오른 유나이티드 선수들은 더 이상 당황하지도, 밀리지도 않았다.
상대가 거칠게 밀치든, 팔을 쓰든, 머리로 받든.
조금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웠다.
“아니, 이 자식들이…….”
“허둥댈 필요 없어! 저런 건 오래가지 못하니까!”
힘을 내서 몇 차례 슈팅은 날리겠지.
하지만 거기서 끝나면 응원 약발도 끝.
이를 잘 아는 아스날의 주장 데니스 에반스는 맨유의 공격을 꺾어 주리라 마음먹었다.
‘이 자식만 막으면 유나이티드의 공격은 꺾인다!’
자신과 이름이 같은 유나이티드의 간판 공격수.
데니스 바이올렛이 바비 찰튼의 패스를 받아 쇄도해 들어왔다.
끝까지 상대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았던 에반스는 공을 향해 태클을 날렸다.
하지만 오히려 데니스 바이올렛이 에반스의 태클 타이밍을 빼앗았다.
귀신같이 태클을 피해 낸 바이올렛은 이어서 강력한 슈팅으로 아스날 골대를 흔들었다.
“우와아아아!”
목이 터져라 응원하던 준영과 맨유 팬들은 그 자리에서 펄쩍 뛰어올랐다.
3 대 3의 균형을 깨는 골.
명사수 데니스 바이올렛이 전세를 다시 유나이티드 쪽으로 돌려놓았다.
“잘한다, 유나이티드!”
“Manchester is Wonderful!”
흥이 나면 힘도 나는 법.
거기다 뜨거운 열기에 휘말리면 평소 안 하던 짓도 하게 된다.
준영과 같이 응원하던 맨유 팬들 중 몇몇이 웃통을 벗어 던지고 머플러처럼 열심히 휘둘러 댔다.
“저런 못 배워 먹은 놈들!”
“정말 야만스럽기 짝이 없군!”
아스날 팬들은 맨유 쪽 상남자들의 투지 넘치는 맨몸 응원에 눈살을 찌푸리며 혀를 찼다.
하지만 내심 감탄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병신 같은데 멋있군!’
마치 맨몸으로 적과 맞서 싸웠다는 스파르탄과 켈트족 전사, 바이킹처럼 보이지 않는가.
“이겨라, 맨체스터!”
“승리는 우리 것이다!”
추위를 잊은 채 함성을 드높이던 준영과 맨유 팬들.
고래고래 고함을 치며 경기를 지켜보던 그들은 한순간 주먹을 불끈 쥐었다.
전세를 돌려놓은 명사수 데니스 바이올렛이 거침없이 아스날 진형으로 달려 들어가고 있었다.
“좋아! 가라! 가!”
“할 수 있어! 할 수 있다고!”
마치 응원단의 외침에 호응하기라도 한 것처럼, 멋지게 아스날 수비수들을 제친 바이올렛은 중앙으로 쇄도하는 토미 테일러에게 정확하게 패스를 보냈다.
벼락같은 논스톱 발리슛!
골키퍼의 반사적인 선방에 막혔지만, 토미 테일러는 튀어나온 공을 재차 머리로 밀어 넣으며 기어코 다섯 번째 골을 만들어 냈다.
경기장은 또 한 번 발칵 뒤집어졌다.
“3 대 5라고?”
“방금 전까지만 해도 동점이었는데…….”
아스날 팬들은 충격에 사로잡혔다.
다시 리드를 내준 것도 모자라 또다시 2골 차로 격차가 벌어지다니!
하지만 망연자실한 마음은 크지 않았다.
아직 경기 종료까지 시간이 20분 가까이 남았으니까.
3분 동안 3골을 몰아넣었는데, 다시 못할 건 무엇인가!
“힘내라! 힘내! 거너스!”
“역전할 수 있어! 너희는 할 수 있다고!”
저마다 외치던 아스날 팬들은 누가 시키지 않았음에도 점차 목소리를 하나로 모으기 시작했다.
“Come on, Arsenal!”
“Come on, Arsenal!”
경기장을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응원에 아스날 선수들도 심기일전하며 다시 공격에 나섰다.
아직 할 수 있다!
결코 홈에서 질 수 없다!
이러한 마음으로 똘똘 뭉친 그들은 기어코 추격 골을 만들어 냈다.
“허, 지독한 놈들!”
“우리도 지지 말고 목소리를 좀 더 높이자고!”
‘Come on, Arsenal.’ 함성에 잠시 파묻혔던 맨체스터의 응원 구호가 다시 삐죽 튀어 올랐다.
4 대 5.
아스날이 추격해 뒤집느냐, 아니면 맨유가 그대로 승리를 굳히느냐.
시간이 갈수록 경기는 뜨겁게 달아올랐다.
필드뿐만 아니라 관중석에서도.
그 뜨거운 열기는 특석에서 점잖게 경기를 지켜보던 높으신 분들까지 일어나게 만들었다.
“다들 뭐 하고 있습니까? 우리도 힘을 실어 줘야지!”
“예, 옙! 부군 전하!”
필립 공까지 일어나 힘껏 구호를 외치며 아스날 선수들에게 힘을 실어 주었다.
처칠은 경기장에 처음 불씨가 타오른 곳으로 눈길을 돌렸다.
여전히 활활 타오르고 있는 그곳에는 힘차게 함성을 지르고 있는 준영이 있었다.
“확실히 지켜볼 맛이 나는 녀석이란 말이지.”
그것도 그냥 가만히 앉아 바라보는 게 아닌, 쫓아가서 바라보게 만드는 놈.
늙은 몸을 일으킨 처칠은 박수를 치며 응원전에 동참했다.
경기장에 흐르는 뜨겁고 힘찬 활기를 온몸으로 느껴 가면서.
***
마지막까지 치열한 난전을 거듭하던 경기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승리로 끝났다.
경기에 직접 뛰진 않았지만, 나름 팀의 승리를 거들었던 준영.
승리의 뿌듯한 기쁨을 얻은 그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
“준, 괜찮아요?”
“…나아지겠지.”
목소리가 푹 가라앉은 준영은 리즈가 가져온 물을 마시며 쉰 목을 달랬다.
“거참, 너무 무리를 했어. 이래서 이따 박상구 씨를 만났을 때 제대로 이야기나 나누겠나?”
피식 웃으며 나무라는 이억관의 말에 준영은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이거 먹어. 합창단 애들이 그러는데, 목이 쉬었을 땐 날달걀이 좋대.”
앤지가 경기장 근처 가게에서 계란을 사 왔다.
고개를 끄덕이며 고마움을 표현하는 준영에게 알버트가 말했다.
“약속이 6시라고 했지? 슬슬 출발하는 게 좋을 거야. 멀리서 온 손님을 기다리게 해선 예의가 아닐 테니까.”
“알겠습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일행이 호텔로 떠나는 걸 본 후, 준영은 이억관과 함께 그린 파크 쪽으로 이동했다.
지하철을 이용하니 생각보다 빠르게 당도할 수 있었다.
“그린 파크 어디서 만났다고 했죠?”
“그러니까, 근처 무슨 호텔 찻집에서 보자고 했는데…….”
호텔 이름이 잘 생각나지 않았던 억관은 수첩을 꺼내 적어 놓은 주소를 확인했다.
그리고 잠시 후, 그들은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것 같네요.”
카페 안을 둘러봐도 동양인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시계를 보니 6시까지 10분가량 남아 있었다.
곧 도착할 거라 생각하고 자리를 잡았지만, 약속 시간을 넘긴 후에도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왜 안 오죠? 역시 사기꾼인가?”
“런던 지리를 모를 수도 있지 않나. 비행기가 늦는 걸 수도 있고. 뭐, 기다리다 보면 오겠지.”
21세기에 태어난 준영과 달리 이억관은 느긋한 편이었다.
준영은 앤지가 줬던 달걀을 만지작거리며 따분함을 달랬다.
“그 달걀, 먹지 않았나?”
“날달걀이 목에 좋다는 건 낭설이라서요.”
영양분이 풍부하기 때문에 회복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목이 낫는 데 직접적인 효과는 없고, 자칫 살모넬라균 같은 것에 감염되면 고생할 수 있다.
“그래도 사 준 정성이 있으니 나중에 삶아 먹을 겁니다.”
“맨체스터로 돌아가는 기차에서 먹으면 되겠구만.”
이억관과 잡담을 나누는 사이 저녁 7시가 되었다.
슬슬 인내심이 바닥나려 할 때, 중절모를 쓴 동양인 노인이 일행을 데리고 카페 안으로 들어왔다.
‘저 사람이 박상구?’
살짝 처진 눈에 동글동글한 인상을 한 노인.
이억관은 그를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지만, 준영은 그의 일행에 주목했다.
그들 중에 아는 얼굴들이 있었기 때문.
‘아니, 저놈들은……!’
지난번에 자신을 찾아와 개소리를 늘어놓았던 일본인들.
바로 그 녀석들이었다!
***
스포츠 경기의 묘미는 관람이 아니라 응원이라 보는 분들도 계시죠.
가끔씩 그게 너무 지나쳐서 탈이 될 수도 있지만. ^^
참고로 버프(Buff)는 능력치를 올려 주는 지원을 뜻하는 게임 용어로 쓰이지만, 원래 열성팬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영국 속어로 근육질 몸짱을 뜻하기도 하고요. 여러모로 이번 편 준영의 행동을 뜻하는 단어로 딱이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