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99. 믿기지 않는 상황
“그래도 덥석 달려드는 건 좋지 않을 것 같아요.”
준영은 낙관적으로만 보지 않았다.
혹시 아는가.
그 박상구라는 이가 사기꾼일 수도 있고, 기술만 빼내 갈 속셈으로 접근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확실히 경계를 해서 나쁠 건 없지. 그래도 한번 만나 보는 정도는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야.”
그래서 내일 저녁 6시에 런던 그린 파크 부근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고 한다.
일단 안면부터 트고, 상대를 파악한 후에 투자든 협력이든 진행해 볼 생각이라고.
“아 참, 자네도 반드시 만나고 싶댔어. 우리 회사 사장인 데다, 아시아에도 이름이 알려진 스포츠 스타라면서.”
“내일 저녁 6시면 시간도 딱 맞네요.”
내일 아스날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경기가 오후 3시에 시작되기에 만나는 데 문제는 없었다.
“아 참, 이걸 물어본다는 게 잊었군. 그 신분 증명 문제는 아직도 해결이 안 되었나?”
“아, 그거요?”
준영은 아까 루스에게 받았던 홍콩 행정부의 답신을 모두에게 보여 주었다.
“와, 확인 절차가 끝난 거군요!”
“이제 의혹이 풀리겠네.”
“다시 시합에 나갈 수 있는 거야?”
다들 기뻐했다. 안 그래도 계속 걱정하던 차였으니까.
알버트는 준영에게 다가와 나지막하게 말을 건넸다.
“우리가 미리 손을 쓴 걸 협회에서 눈치챈 것 같진 않던가?”
“뭐, 의심하긴 하더군요.”
그래도 따로 조사를 하려 들지 않고 출전 정지를 풀어 준 걸 보면 일을 여기서 마무리 짓고 싶어 하는 듯했다.
“하긴, 언론전에서 입은 타격이 만만찮았을 테니까.”
“확실히 체면을 많이 구겼죠.”
권위적이고 체면이 중시하는 무리일수록 거기에 타격을 입으면 회복이 쉽지 않은 법이다.
그러니 축구협회, 아니 루스 총무도 무리수를 두는 데 부담이 있었을 터.
‘아무튼 폭풍의 눈 속에 있다가 잘 빠져나왔군. 아직 처리할 일이 남아 있지만…….’
이번 사건이 벌어지게 자신을 뒷조사해서 투고한 놈들.
그들에 대한 정리까지 끝내야 후련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
1958년 2월 1일 오후.
준영은 런던 북부 하이버리 스타디움에 도착했다.
“여기가 그 유명한 하이버리 전투가 있었던 그 경기장이군.”
준영은 동행한 프레드로 일가와 이억관을 먼저 관중석으로 보낸 후, 동료들을 만나러 갔다.
“여, 오랜만이야!”
“우와, 리틀 존!”
라커룸에서 출전 준비를 하고 있던 유나이티드 선수들은 준영을 보고 반가워 어쩔 줄 몰라 했다.
“이 자식아,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네 녀석 때문에 술맛이 물맛 같았다고!”
얼싸안거나, 머리를 부비거나, 등을 펑펑 두들기거나.
다들 각자의 방식으로 준영의 귀환을 축하해 주었다.
이미 출전 정지 처분이 해제되었다는 건 어제 준영의 연락을 받아 알고 있었다.
오늘 아침 신문으로 또 한 번 확인했고.
그래도 직접 무탈한 모습을 보니, 기쁨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것은 버스비 감독도 마찬가지였다.
“존, 힘든 시간을 정말 잘 버텨 주었네.”
“아닙니다. 엉뚱한 일로 걱정 끼쳐서 송구할 따름입니다.”
그렇게 오랜만에 회포를 푸는 사이, 출전 시간이 금방 다가왔다.
“자, 오늘 경기, 반드시 이겨서 존의 복귀를 축하해 주자!”
“Aye, Sir!”
주장 로저 바인이 선수들을 이끌고 나가기 직전, 준영은 모두와 하이파이브를 나누었다.
“오늘 출전하진 못하지만 내 기를 나눠 줄게.”
“기(Ki)가 뭔데?”
“어, 일종의 Spirit, 힘이 나게 하는 Energy 같은 거야.”
그 말을 들은 던컨이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나눠 주지 말고 그냥 나한테 통째로 넘기지?”
“이 자식이, 욕심은……!”
욕심 많은 던컨을 위해 준영은 하이파이브를 한 번 더 해 주었다.
적진에서 멋진 승리를 거두기를 기대하면서.
***
준영 일행이 자리 잡은 곳은 귀빈들이 자리한 특석이었다.
노인과 아가씨들과 함께 구경하기에 복잡한 일반석은 위험할 수 있었으니까.
“어서 오게, 존. 기다리고 있었다네.”
“앗, 각하께서도 오셨군요!”
자리에 가 보니 처칠이 알버트의 옆에 자리해 있었다.
원래 그 자리는 아니었지만, 알버트 일행을 알아보고 양해를 얻어 자리를 바꾸었다고 한다.
“자네가 출전하면 더 재밌었을 것 같은데.”
“그래도 충분히 재미있을 겁니다. 제 친구들의 실력도 대단하니까요.”
잠시 담소를 나누는 사이, 선수들이 필드로 들어왔다.
그런데 바로 경기가 시작되지는 않고, 누군가 선수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며 격려를 해 주고 있었다.
“저분은 뉘시죠?”
“에든버러 공작 필립 공이셔.”
“아! 여왕 폐하의 부군이시라는……!”
준영도 여왕이 아스날을 응원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아마 그 때문에 반려인 필립 공이 오늘 경기를 관람하러 온 듯했다.
삐익-!
필립 공의 격려가 있고 난 후, 선수들이 자리를 다 잡자 곧장 경기가 시작되었다.
6만여 명의 함성이 우렁차게 울려 퍼지는 가운데, 원정 팀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초반의 기선을 잡았다.
에디 콜먼에 바비 찰튼, 그리고 토미 테일러에게 이어진 패스가 첫 번째 슈팅으로 연결된 것.
하지만 토미 테일러의 슛은 아깝게 골대 위를 넘어가 버렸다.
‘괜찮아. 저 정도면 확실히 기선을 제압하고도 남으니.’
준영의 기를 받아서인지 몰라도 맨유 선수들의 움직임은 상당히 가벼웠다.
그에 반해 지난번의 역전패를 설욕하겠다는 아스날 선수들은 다소 급한 모습을 보였다.
“이거 필립 공의 격려가 오히려 독이 된 걸지도 모르겠군.”
“독이요? 독을 먹인 거예요?”
카린의 똘망똘망한 눈망울에 처칠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선물받은 사탕이 충치를 만드는 거와 같다고 할까? 높으신 분들의 기대는 아랫사람들에게 부담이 된다네, 꼬마 아가씨.”
“아하!”
아무튼 부담감이 심한 아스날 선수들은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했다.
거기다 토미 테일러나 데니스 바이올렛 등 공격수들의 적극적인 견제에 자기네 진영에서 돌리는 패스도 실수를 저질렀다.
연이은 실수는 불안감을 안겨 주었다.
그리고 그 불안감은 불필요한 파울까지 야기했다.
삐이익-
아스날의 페널티 박스로 공을 몰고 가던 바비 찰튼이 성씨가 같은 스탠 찰튼의 발에 걸려 쓰러졌다.
곧장 프리킥 판정이 내려졌고, 키커로 던컨 에드워즈가 나섰다.
‘위치가 상당히 좋아. 제대로 감아 넣으면…….’
마치 준영과 통하기라도 한 듯, 던컨은 프리킥을 멋지게 감아 차 넣었다.
전반 10분, 원정 팀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리드를 시작했다.
“지면 안 돼, 거너스!”
“겨우 연패 사슬을 끊었는데 또 질 거냐!”
홈팬들의 질책 어린 응원은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마음이 급해진 아스날은 쉽게 공격을 전개하지도, 깔끔하게 수비를 해내지도 못했다.
마치 외줄 타기를 하듯 위태위태한 모습을 보이던 그들은 결국 또 한 방 얻어맞고 말았다.
전반 34분, 두 번째 골의 주인공은 바비 찰튼.
지난주 FA컵 경기에서도 두 골을 넣으며 승리를 견인했던 그는 오늘도 과감한 중앙 돌파로 팀에 중요한 추가 골을 만들어 냈다.
“저 친구는 요즘 완전히 물 만난 것 같구만.”
“맞아요, 아저씨. 크게 화려하진 않지만 팀의 반석이 되고, 중요할 땐 한 방 터트려 주는 대단한 선수죠.”
괜히 영국 축구의 전설이 되는 게 아니다.
이 미래의 레전드는 전반이 끝나 갈 무렵, 토미 테일러의 골까지 어시스트했다.
0 대 3.
하이버리 필드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의해 완전히 점령당했다.
‘훗, 기를 불어넣어 준 보람이 있구나.’
준영이나 그의 일행은 흐뭇하게 경기를 만끽했지만, 대다수 관중들은 그렇지 못했다.
특석의 높으신 분들 중에서도 점잖게 냉정을 유지하지 못하고 흥분하는 이들이 나왔을 정도.
“아니, 도대체 경기를 할 맘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이러다가 볼턴처럼 7골을 먹는 거 아닙니까?”
“불길한 소리 하지 마시오!”
특석 정중앙에 자리 잡고 있었던 필립 공은 보이지 않았다.
처음엔 아스날의 플레이가 실망스러워 귀가했나 싶었더니, 후반전이 시작될 즈음에 돌아와서 다시 관전을 계속했다.
“아스날 선수들을 격려하고 오신 모양이군.”
“격려… 일까요?”
준영의 의문에 처칠도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패배를 그냥 두고 보는 지도자는 없는 법일세. 스포츠라도 마찬가지이지.”
“하긴 무솔리니는 월드컵 때 ‘우승하지 못하면 사형.’이라고 협박했다고 들었습니다.”
미래의 일이지만, 쿠웨이트 왕자는 1982년 월드컵에서 자국 팀이 실점하자 경기장에 난입, 심판에게 항의해서 골을 취소시킨 사례도 있었다.
필립 공이 아스날 라커룸에 갔다면 무슨 말을 했을까?
그 말은 과연 효과를 발휘할 수 있을까?
곧 시작될 후반전도 꽤 기대가 되었다.
***
“정신 차려, 거너스!”
“이 새끼들, 오늘 지기만 해 봐라!”
관중들의 살벌한 응원이 쏟아지는 가운데, 다시 필드로 나온 아스날 선수들.
필립 공의 훈시(?)가 효과가 있었던 건지, 아니면 0 대 3까지 되자 정신이 번쩍 든 건지.
아무튼 그들의 후반전 플레이는 전반과는 사뭇 달랐다.
움직임도 빠르고, 후방에서 전방으로 가는 롱 패스도 정확했다.
거기다 지난 경기에서도 보여 줬던 맹렬한 몸싸움도 다시 보여 주고 있었다.
“이거 점점 밀리는군.”
“점수 차가 있으니 어느 정도 몸 사리는 건 당연합니다만…….”
준영은 불안한 표정으로 경기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때 후방에서 온 롱 패스를 가슴으로 받은 아스날의 공격수 데이비드 허드가 몸을 돌리며 슛을 날렸다.
입을 딱 벌리게 만들 정도로 멋진 터닝슛에 맨유 골키퍼 해리 그랙은 반응도 못하고 꼼짝없이 당했다.
“결국 추격 골을 넣었군.”
“너무 잘 찼어요.”
1 대 3.
만회 골이 터지자 하이버리 스타디움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후반 13분, 제법 이른 시간에 터진 골이라 관중들에게 희망을 품게 해 주었기 때문.
그것은 아스날 선수들도 마찬가지.
해 볼 만하다는 희망을 품은 그들은 더욱 적극적으로 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2분 후, 허드의 패스를 받은 지미 블룸필드가 아스날의 두 번째 골을 터트렸다.
‘완전히 놓쳐 버렸네!’
유나이티드는 실점하고 잠시 마크를 느슨하게 놓고 있다가 제대로 허를 찔리고 말았다.
순식간에 스코어는 2 대 3.
바로 턱밑까지 쫓아온 아스날은 여세를 몰아 맨유를 몰아붙였다.
그들은 킥오프가 되기 무섭게 유나이티드 선수들에게 거칠게 달려들며 인터셉트를 노렸고, 이것은 제대로 통했다!
‘저거 파울 아닌가?’
손을 써서 밀어낸 것 같은데.
쓰러진 던컨도 그리 보고 심판에게 항의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문제는 수비진.
분명히 파울 판정을 받을 거라고 보고 유나이티드 수비수들이 주춤했을 때, 아스날의 공격은 그대로 이어졌다.
로저 바인과 빌 포크스가 황급히 공을 가진 허드에게로 쫓아갔다.
멧돼지같이 돌진하던 허드는 갑자기 뚝 멈춰서 그들의 중심을 흩뜨려 놓고는 달려 들어오는 지미 블룸필드에게 패스를 밀어 주었다.
해리 그렉이 황급히 달려 나왔지만, 블룸필드의 슛은 그의 오른손을 스치며 골대를 흔들었다.
“아니, 이게 무슨!”
겨우 1분.
두 번째 추격 골을 내준 지 겨우 1분 사이에 또다시 골이, 그것도 동점 골이 터졌다.
믿기지 않는 상황에 다들 입을 다물지 못했지만, 환호성은 아스날의 것이었다.
천지를 진동시키는 함성이 하이버리 스타디움을 뒤흔들었다.
***
실제 1958년 2월 1일 아스날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경기는 양 팀의 역대급 명승부로 유명하다고 합니다.
3분 동안 3골을 몰아쳐 동점을 만들었다는 것도 개인적으로 믿어지지 않았는데, 이게 진짜 기록에 남아 있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