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98. 반가운 재회
화이트 하트 레인.
짧게 레인이라고 불리는 이 경기장은 토트넘 핫스퍼 FC의 홈구장이다.
2017년 새로운 홈구장이 생기면서 사라진 역사적인 유적(?).
준영은 지금 그 필드에 서 있었다.
‘여기서 나중에 이형표 선배랑 손웅민 선배가 뛰는 건가?’
아직은 먼 훗날의 이야기.
어린 시절 자신을 설레게 했던 대선배들의 플레이를 떠올리며 감상에 젖어 있을 때, 누군가 친근하게 말을 건네 왔다.
“어이, 존. 뭘 그리 둘러보고 있는 거야?”
고개를 돌린 준영의 눈에 토트넘의 주장 대니 블란치플라워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게… 잠시 먼 미래의 일을 생각하고 있었어요.”
“미래? 오! 혹시 우리 팀으로 이적해 올 생각이 있는 거야?”
“어, 그게…….”
“하긴 맨체스터 깡촌보다 런던이 훨씬 낫지. 하하하!”
당황한 준영은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혹시 기자가 이걸 보고 ‘존 Y. 리, 토트넘 이적?’ 혹은 ‘존 Y. 리, ‘맨체스터는 깡촌.’ 폭언에 동조’라는 제목의 기사라도 올리면 큰일이니까.
다행히 기자는 없고, 자신을 매의 눈으로 감시하는 협회 직원들만 있을 뿐이다.
“이적 같은 건 생각해 본 적 없어요.”
“하긴, 아직 신분 위조 누명을 벗지 못했으니까.”
며칠 전 언론전에서 된통 당한 축구협회는 더 이상 준영을 신문하지 않고 감시만 하고 있었다.
그것도 거처 밖으로 돌아다닐 때만 그랬기에 딱히 거북할 것은 없었다.
이에 준영은 그동안 개인 훈련만 하던 것에 그치지 않고, 협회에서 소개해 준 팀들에 끼여 감각을 다시 올려 나갔다.
오늘 그가 방문한 팀은 토트넘 핫스퍼.
그동안 소개받은 팀들이 대개 아마추어나 2, 3부 리그 팀인 걸 생각하면 이번엔 상당히 수준 높은 팀을 소개받았다고 할 수 있었다.
거기다 자신에게도 꽤 호의적인 편이었다.
주장인 대니 블란치플라워는 동생과 같은 팀에서 뛰는 그를 살갑게 대해 주었다.
대니뿐만 아니라 빌 니콜슨 수석 코치도 무척 반겼다.
“정말이지 이렇게 반겨 줄 거라곤 생각도 못했어요.”
“당연히 반기지. 네 녀석의 기량을 확실히 파악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인걸.”
“흐흐흐, 뼛속까지 파악해서 다음 홈경기에서는 콧대를 납작하게 눌러 줄 거니까.”
설마 그런 의도가 있었을 줄이야!
아무튼 팀의 실세인 그들이 이렇게 반기다 보니 다른 선수들도 그렇게 거부감이나 적대감을 보이지는 않았다.
덕분에 자체 연습 시합이긴 했지만, 간만에 마음껏 필드를 달리며 공을 찰 수 있었다.
“막아! 막으라고!”
“좀 더 바싹 붙어 마크하라고!”
B팀의 센터백을 맡은 준영은 대니를 비롯한 A팀의 주전 공격수들을 연달아 막아 냈다.
패스를 잡으면 돌아서지 못하게 하고, 슈팅이나 패스 타이밍을 뺏어 공격을 지연시키고.
그 효율적인 움직임이나 대처를 니콜슨 코치는 눈빛을 반짝이며 살펴보았다.
“분석할 거라고 했는데, 그렇게 보여 줘도 돼?”
“이 정도야 뭐……. 알아도 못 뚫게 할 거니까 상관없습니다.”
“쳇! 건방진 녀석.”
“자, 주장 나리, 어디 이 건방진 놈을 뚫어 보시죠!”
준영의 도발에 패스를 넘겨받은 대니 블란치플라워는 공을 굴리며 가다가 슈팅 포즈를 취했다.
이에 준영이 잽싸게 슛 방향을 읽고 대처하자, 갑자기 슈팅하려던 발로 공의 방향을 바꾸며 돌아섰다.
“어라, 그건…….”
“이게 네 녀석 장기라지? 스트레인지 룰렛인지 뭔지!”
현재 스트레인지 룰렛으로 알려진 그 기술은 크루이프 턴.
준영을 깔끔하게 벗겨 낸 대니는 곧장 슈팅을 날렸다.
하지만 턴을 하는 과정에서 자세가 좀 나빴던지 슛은 골대가 아닌 엉뚱한 방향으로 날아갔다.
“아, 이거 좀 더 연습해야겠구만.”
“조심해서 연습해요. 그거 잘못하면 무릎 인대 나갈 수 있으니까.”
주거니 받거니.
이후로도 A팀과 B팀의 공방은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 종료를 알리는 휘슬이 울렸을 즈음, 간만에 시원하게 땀을 흘린 준영은 상쾌한 미소를 지었다.
“오늘 감사했습니다.”
“아냐. 이쪽이 고맙지.”
“내일 경기가 셰필드 웬즈데이 원정이랬죠? 꼭 승리하길 바라요.”
대니에게 건투를 빌어 준 준영은 화이트 하트 레인을 나왔다.
그런데 한국대사관 관저로 돌아가려던 그의 앞을 협회 직원들이 막아섰다.
“무슨 일이죠?”
“총무님이 리 선수를 데려오라 하셨습니다.”
“왜? 신문은 이제 끝난 게 아니었습니까?”
“저희도 모릅니다. 데려오라는 지시만 받았습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일까.
혹시나 하는 기대감을 부풀린 준영은 그들을 따라 웸블리로 향했다.
***
“왔나?”
준영은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맞는 루스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살이 좀 빠지신 것 같네요.”
“다 자네 덕이지.”
으르렁대듯이 대꾸한 루스는 손에 들고 있는 편지를 준영에게 던져 보냈다.
“뭡니까, 이건?”
“홍콩 행정부에서 보낸 거야. 지난번에 요청한 건에 대한 답신을 줬더군.”
협회에서 요청했던 것.
그것은 바로 존 Y. 리의 신분 증명 내역이었다.
“우리 요청을 받고 홍콩 행정부는 문서고에 보관된 시민권 증서들을 확인했다는군. 확인 과정에서 발급 기록 리스트에 오류가 있었던 것 같다나?”
“그래서, 제 경우에는 어떻습니까?”
“거기 적혀 있는 대로지.”
말해 주기 귀찮은 걸까.
준영은 방금 루스가 건넨 편지를 살펴보았다.
홍콩 행정부 직인이 찍힌 편지에는 꽤 공손하게 글이 적혀 있었는데, 매우 간단히 요약하자면 이랬다.
“제 시민권 증서가 문서고에서 확인되었다고 하네요.”
“그래, 자네 말대로 모르고 넘어갔던 모양이더군.”
언론전에서 당한 후, 루스는 내무부나 홍콩 행정부로부터 기대할 만한 답변이 오기를 빌었다.
하지만 그런 기대는 완전히 배신당했다.
“자네가 무고하다는 게 확인이 되었으니 출전 정지를 해제하겠네.”
루스는 못마땅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사실 이 서신을 숨겨 버리거나 왜곡해서 보도할까 싶은 생각도 없진 않았다.
하지만 이미 한차례 언론전에서 된통 당한 적이 있고, 축구협회장도 이번 문제를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에 루스는 수작을 부리는 걸 포기했다.
아무리 협회장이 바지 사장이고, 실권은 자신이 쥐고 있다 해도 또다시 논란을 일으켰다간 뒷일이 좋지 않을 건 뻔하니까.
“그런데 일이 이렇게 끝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는 표정이로군.”
“당연한 거 아닙니까. 시민권이 있는 게 확실하니까요.”
“그런가? 워낙 뻔뻔한 표정이기에 중간에 슬쩍 집어넣었을 줄 알았지.”
“쓸데없는 오해를 하셨군요. 그럴 틈이 어디 있습니까? 계속 런던에 잡혀 있었는데요.”
사실은 루스의 추정이 맞았다.
빌 섕클리나 데이비드 브라운에게 누군가 탐정을 고용해 뒷조사를 하고 있단 이야기를 듣고 서둘러 손을 썼으니까.
아마 조치가 조금만 늦었더라도 홍콩 행정부 문서고에서 자신의 시민권 증서가 발견되는 일은 없었으리라.
‘남작 어르신께 감사를 드려야겠군.’
알버트의 인맥이 없었다면 이번 조치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준영의 귀에 루스의 말이 들려왔다.
“앞으로 주의하도록. 이번 일이야 이렇게 마무리되었지만, 자네 언행이 선을 넘는다면 분명히 문제 삼는 이들이 나올 테니까.”
“제 스스로 오프사이드를 저지른 일은 없습니다만?”
“자네가 보기엔 그렇겠지. 하지만 남들이 볼 땐 그렇지 않을걸.”
“하긴 이상한 심판을 만나면 판정이 터무니없이 나오기도 하죠.”
루스는 찔끔한 기분을 느꼈다.
사실 준영의 말은 ‘이상한 심판=루스’를 뜻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번든 파크에서 심판 배정과 판정에 슬쩍 손을 썼던 루스는 찔릴 수밖에 없었던 것.
‘설마 이놈이 그때 일을 알아낸 건가? 그럼 대체 어느 틈에 조사를……?’
당황한 마음을 감춘 루스는 손을 휘휘 내저으며 축객령을 내렸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얼른 맨체스터로 돌아가!”
“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군요. 내일 우리 팀 경기가 런던에서 있으니까.”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아스날 원정 경기가 바로 내일이다.
출전 정지가 일찍 풀렸으면 뛸 수 있었을 텐데.
루스를 날카롭게 째려본 준영은 거처로 발걸음을 돌렸다.
***
한국대사관 관저로 돌아온 준영은 반가운 얼굴들을 보았다.
“준, 저희들 왔어요.”
“우와, 리즈! 앤지랑 카린도 왔구나!”
알버트가 손녀들과 함께 찾아왔다.
그동안 알버트는 곧잘 런던을 찾아와 만났지만, 리즈는 그러지 못했다.
입시 공부가 워낙 바빴기 때문.
어떻게든 시간을 내서 런던에 와 보려 했지만 준영은 오히려 만류하고 나섰다.
자칫 하이에나 같은 취재원들의 표적이 될지 모르니까.
“잘 지냈어? 공부는 잘되고 있고?”
“아뇨. 집중이 잘 안 되더라고요. 준이 잘 지내고 있는지 걱정도 되고…….”
“거참, 걱정하지 말라고 했는데도!”
준영은 그동안 리즈와 전화와 편지로만 안부를 주고받았다.
21세기라면 SNS 메신저를 썼을 텐데.
그래도 손 편지를 주고받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경험이었다.
모즐리로 돌아간 후에도 계속 손 편지를 주고받을까 생각할 정도로.
“오빠야가 없어서 카린이 얼마나 심심했다고!”
“하하, 그랬냐?”
준영은 자신에게 껌딱지처럼 붙은 카린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얼마나 심심했던지 밤에 이불에 지도를 그릴 정도였어.”
“우이씨, 작은언니 나빠!”
카린은 자신의 흑역사를 들춰낸 앤지에게 달려들어 투닥댔다.
그 모습을 보며 준영이 웃고 있을 때, 이억관이 다가와 어깨를 쳤다.
“이봐, 준영이. 난 보이지도 않나?”
“하하, 아저씨도 반가워요. 런던까지 오실 건 생각도 못했는데…….”
준영은 그동안 이억관과 계속 연락을 주고받았다.
주로 사업 진행 상황을 알리기 위해서였지만, 준영이 걱정스러웠던 억관은 틈틈이 전화를 걸곤 했다.
“준영이 자네가 어찌 지내고 있는지 궁금하기도 했지만, 따로 볼일이 있어서 런던에 들렀네.”
“볼일이요?”
“비즈니스 말이야. 얼마 전에 우리 공장에 전화가 왔어.”
연락을 한 사람은 박상구라는 재일교포 사업가.
그는 인스턴트 라면이 영국에서 개발되어 대호평을 받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연락을 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 양반이 말하는데, 일본에서도 중화 요리, 특히 라멘이 요즘 한창 인기 있는 먹거리라 하더군.”
“예, 맞아요. 직장인들에게 한 끼 식사라고 하니까.”
실제로 인스턴트 라면이 먼저 개발된 곳도 일본이다.
그러니 관심을 가지는 건 당연할 터.
“그래서 자기도 투자를 하고 싶다는군. 가능하면 한국과 일본에 공장을 세워서 라면을 생산하고 싶다고 했어.”
“확실히 솔깃한 제안이네요.”
김용우 대사에게도 말했지만, 준영은 라면 사업이 어느 궤도에 달하면 한국에도 공장을 세울 생각이었다.
보릿고개에 허덕이는 이들에게 값싼 먹거리를 제공함은 물론, 한국을 거점으로 아시아 시장을 공략하기 위해서.
그런데 여기에 동참하고 싶다고, 투자를 하겠다고 하는 사람이 나타나다니!
잘하면 계획을 이르게 진행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
화이트 하트 레인은 1899년에 지어져 수차례 리모델링을 거듭하다 결국 2017년 철거되었습니다.
그리고 새로 세워진 경기장이 현재의 토트넘 핫스퍼 스타디움.
이곳의 개장 골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선수가 넣었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