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전드 1957-97화 (97/400)

Round 97. 쓸 만한 사기꾼

“여, 어서 오게, 존.”

“잘 지내셨습니까, 각하.”

준영이 당도하자, 처칠은 두 손을 활짝 펴며 그를 반겼다.

“최근에 벌어진 보도 전쟁을 지켜봤지. 어지간한 영화보다 흥미진진하더구만.”

“반전의 묘미란 그런 거니까요. 그런데 저기 저분이 저에게 소개해 줄 분입니까?”

준영은 먼저 응접실에 와서 자리하고 있는 장년의 신사를 바라보았다.

척 봐도 고위층 인사로 여겨질 정도로 위엄이 넘쳤다.

“인사드리게. 글로스터 공작 전하야.”

“아, 그럼 이분이…….”

“잉글랜드 축구협회 협회장이시지. 자네에게 있어 까마득하게 높은 주군이나 마찬가지겠군.”

글로스터 공작 헨리 윌리엄 프레더릭 알버트.

그는 조지 5세의 3남으로, 현재 영국을 통치 중인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숙부였다.

이미 그의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있었던 준영은 깍듯이 예를 올렸다.

“처음 뵙습니다, 전하. 존 Y. 리라고 합니다.”

“후후, 자네가 내 책상 위에 산더미처럼 편지를 쌓이게 한 장본인이군.”

“예? 편지 더미라니요?”

준영의 어리둥절한 기색에 글로스터 공작은 쓴웃음을 지었다.

“자네와 관련한 탄원서들 말이야.”

준영의 신분 증명 문제를 거론한 사람은 스탠리 루스 총무.

하지만 정작 탄원에 시달리는 사람은 그가 아니라 의장인 아서 드루리, 그리고 협회장인 글로스터 공작 헨리였다.

“송구합니다, 전하. 본의 아니게 피해를 드렸군요.”

“뭐 어쩌겠나. 밑의 사람들이 일을 저지르면 책임지는 건 윗사람인걸.”

준영에게 자리를 권한 글로스터 공작은 내심 한숨을 쉬었다.

잉글랜드 축구협회장 자리는 사실상 명예직이다.

그래서 영국 왕실의 어른인 그가 맡게 된 것.

분명히 실권은 총무에게 있지만, 그럼에도 협회 업무에 대한 전반적인 책임을 져야 했다.

마치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 왕좌의 주인처럼.

“자네가 처칠 경과 친분이 있는 줄 몰랐군. 이렇게 되면 루스는 헛다리를 짚은 격인데…….”

“그런 친분만으로 절 신뢰하시는 겁니까?”

“자네를 신뢰하기보다 처칠 경을 믿는 거지.”

처칠 같은 거물이 사기꾼과 친분을 맺고 있겠는가.

현직에서 물러났다고 하지만 처칠의 발은 넓었다.

그러니 이 동양인 선수의 정체나 행보에 대해서도 파악하고 있을 터이다.

이러한 글로스터 공작의 판단에 처칠은 가늘게 웃음을 지었다.

“공작 전하, 저도 아직 이 친구에 대해서 자세하게 모릅니다.”

“뭐라고요? 그럼 신분 증명이 거짓이란 소리입니까?”

처칠은 고개를 저었다.

“중요한 건 종이 쪼가리에 적힌 것이 아니죠. 전하께서도 우리 시대의 평화가 적힌 종잇조각이 얼마나 허튼 것인지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뮌헨 협정을 말하는 겁니까.”

체임벌린 총리가 체코슬로바키아를 버리고 나치 독일과 맺었던 조약.

나치는 그걸 반년도 안 되어 휴지 조각으로 만들었다.

글로스터 공작이 알 만하다는 기색을 보인 가운데, 처칠은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전하께서도 존 Y. 리의 활약에 대해서 들어 보셨을 겁니다. 이 나라 축구계에 상당한 쇼크를 주고 있지요.”

그 충격을 신선하게 여기는 이들도 있지만, 마뜩잖게 보는 이들도 있다.

이번 일이 논란이 된 것도 그 때문.

처칠이 보기에 준영의 결백이 밝혀진다 하더라도 이후로도 그에 대한 비판 여론은 쉽게 지워지지 않을 것 같았다.

역사적으로 이단아나 이방인이라 취급되는 부류들은 다들 그랬으니까.

“저는 존이 현재의 축구계를 바꿀 만한 인물이 될 거라 보고 있습니다. 저보다 축구에 오랜 관심을 갖고 지켜보신 전하가 보시기엔 어떻습니까?”

“달라지고 있긴 하더군요.”

이 이방인 선수를 막겠다고 여러 팀들이 새로운 전술과 작전을 궁리하고, 쓸 만한 인재 영입에 나서고 있다.

심지어 해외에서 뛰어난 선수를 영입해 오려고 시도하는 팀들도 있고.

물론 해외 선수 영입은 대부분 실패했다.

쓴맛을 본 이들은 주급 제한을 비롯해 현재 해외 선수 영입에 방해가 되는 제한을 풀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아직까지 크게 눈에 띌 만한 변화는 없지만, 뭔가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달라지고 있지만, 그게 어떤 결과로 이어지게 될지는 아직 알 수 없죠.”

장밋빛 미래일지, 아니면 잡음이 가득한 혼돈의 세계일지?

공작은 준영을 바라보며 물었다.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자네로 인해 달라지고 있는 이 상황에 대해서 말이야.”

“글쎄요. 처칠 경께서 좋게 봐주고 계시지만, 저 때문에 달라지는 건 아니라고 봅니다.”

“자네가 원인은 아니다?”

“제 스스로 뭔가 크게 바꿔 보자 나선 건 아니니까요. 저라는 존재는 그냥 계기일 뿐, 변화는 예전부터 그것을 원하던 사람들이 만들어 가고 있다고 봅니다.”

딱히 겸손을 부리는 건 아니다.

실제로도 맷 버스비나 빌 섕클리, 브라이언 클러프 같은 이들의 노력으로 영국 축구는 성장하고 변화해 갔으니까.

“과연 그렇군.”

고개를 끄덕이던 공작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준영을 바라보며 물었다.

“자네가 볼 때 이 나라 축구가 어떻게 될 것 같나? 축구 종가답게 국제 무대를 호령하는 때가 올 것으로 보이나?”

“그게… 일개 선수가 답을 하기엔 좀 부담스러운 물음 같습니다.”

준영은 일부러 답을 피했다.

미래에 대해 알고 있다고 해서 티를 낼 필요는 없으니까.

하지만 글로스터 공작은 쉬 물러나지 않았다.

“괜찮으니 말해 보게. 일개 선수의 생각을 들어 보는 것도 중요하니까.”

단지 그것만은 아니다.

준영같이 뛰어난 기량을 가진, 그리고 처칠도 호평할 만한 인물이라면 분명히 귀담아들을 만한 이야기를 할 거란 기대가 있었다.

이에 준영도 조심스럽게 대답을 했다.

“지금 변화를 이끌어 가는 분들의 노력이라면 언젠가 월드컵이나 유러피언 컵 우승도 가능할 거라 봅니다. 다만…….”

“뭐가 문제인가?”

“지도자나 선수들이 축구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게 중요하다고 봅니다. 예를 들자면 부담 없는 경기 일정이라든가요.”

“협회의 행정 지원이 중요하다 이건가? 좀 의외로구만.”

“의외라뇨?”

“주급 상한을 폐지해 달라고 할 줄 알았거든.”

“하하핫! 네, 그것도 중요합니다. 저야 괜찮지만, 대다수 선수들에겐 절실한 문제죠.”

그러면서 준영은 21세기 사람의 시각에서 볼 수 있는 문제 몇 가지를 더 이야기해 주었다.

이에 글로스터 공작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루스가 지금 자네 이야기를 듣는다면 더욱 못마땅해하겠군.”

“굉장히 보수적인 사람으로 보이긴 했습니다.”

“그래. 미리 말하지만 난 이번 일에 관여하지 않을 걸세. 현재 루스가 진행 중인 조사를 중지할 마음도, 그렇다고 그를 편들지도 않을 거야.”

준영은 그의 결정에 서운해하지 않았다.

사실상 명예직이라도 축구협회장은 한 나라 축구인들을 통솔하고 있는 자리.

함부로 누구를 편들거나 독단을 부리게 되면 반발이 나올 수밖에 없다.

거기다 이번 일도 도중에 흐지부지되기보다 확실히 결말을 보는 게 나았다.

“약속이 있으니 이만 가 봐야겠군. 존 자네에게 행운이 있기를. 다시 필드에서 볼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대하겠네.”

“분명히 그렇게 될 겁니다.”

준영은 자신에게 악수를 건네는 글로스터 공작의 손을 굳게 잡았다.

***

글로스터 공작이 떠난 후.

시가에 불을 붙인 처칠이 준영에게 말했다.

“자네가 진짜 사기를 치고 있다는 걸 알면 공작이 과연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알고 계셨습니까?”

움찔한 준영의 물음에 처칠은 가늘게 웃음을 지었다.

“나이를 먹은 만큼, 직책이 높았던 만큼 쌓인 건 인맥과 친분뿐이라서 말이야. 거기다 아직도 늙은이에게 기대고 싶어 하는 녀석들도 많고.”

준영의 이마에 진땀이 맺혔다.

처칠은 과연 얼마나 알고 있는 걸까?

혹시 자신이 미래에서 온 사실도 파악하고 있을까?

“허허, 그리 긴장한 걸 보니 진짜 정체가 탄로 나면 곤란하긴 한 모양이군.”

“글쎄요. 어쩌면 너무 터무니없다고 여겨서 안 믿을지도요.”

“얼마나 터무니없기에? 혹시 화성에서 온 외계인이라도 되나? 어디 비행접시라도 숨겨 놓았어?”

처칠의 물음에 준영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왜 그러나? 내 농담이 너무 엉뚱한가?”

“그게… 각하같이 저명하신 분께서 어린애와 비슷한 말을 할 거라곤 생각 못해서요.”

준영을 외계인이라 믿었던 카린.

상상력이 풍부한 이 꼬마 아가씨는 여전히 21세기의 기술을 외계인이 몰래 전파해 준 것으로 믿고 있었다.

“흠, 어이없어하는 걸 보니 외계인은 아닌 모양이구먼.”

“외계인(Alien)은 아니지만, 외국인(Resident Alien)인 건 사실이죠. 각하께선 저에 대해서 어느 정도까지 알고 계신 겁니까?”

“언론에서 떠들어 댄 건 죄다 가짜라는 건 알지. 앞서 말했지만, 신분 증명을 속였다는 것도 말이야.”

미래에서 왔다는 건 모르고 있는 걸까?

아직 거기까지 파악하지 못한 건 분명해 보였다.

알고 있다면 당장 미래와 관련한 일을 듣기 위해 떠봤을 테니까.

“제가 부정을 저지른 걸 알고 계셨으면서 어째서……?”

“아까 못 들었나? 중요한 건 종이 쪼가리에 적힌 게 아니라고.”

MI6의 제이미 번즈가 곤란하게 여기는 녀석.

처칠이 그동안 지켜본 바에 따르면 준영은 득이 되면 되었지, 남에게 해를 끼칠 녀석으로 보이지 않았다.

‘이 녀석은 쓸 만한 사기꾼이니 말이야.’

축구 말고도 이런저런 사업을 하는 걸 보면 욕심이 꽤 많아 보였지만, 남들에게 베푸는 미덕도 있다.

물론 그것도 자신의 입지를 위한 행동으로 보이지만, 딱히 비난할 거리도 아니다.

사실 알버트가 후견을 해 주고 있다는 것만 봐도 대략 어떤 녀석인지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아직 확실한 정체는 모르지만, 이 쓸 만한 사기꾼을 믿어 볼 참이었다.

“이봐, 존. 속일 거면 확실히! 끝까지 속여야 하는 법이야.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알고 있지?”

“네, 안 그래도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이미 협회 조사관들로부터 받았던 신문만 해도 끝까지 속여 넘겼다.

지난번 체코슬로바키아 보안국 요원에게 증언한 것을 바탕으로, 자신의 삶을 실제 1934~1958년 역사 상황에 끼워 맞춰 재가공했던 것.

그러면서 한 가지를 확실히 주의했다.

바로 반복되거나 관련 있는 질문의 답은 항상 일치하게끔 한 것.

그래야 트집 잡힐 빌미를 주지 않으니까.

“혹시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이야기해. 힘닿는 데까지 도와주지.”

“감사합니다, 각하. 하지만 호의는 다음번으로 미루겠습니다. 이번 일은 길게 가지 않을 테니까요.”

“그래? 확실한 카드를 미리 마련해 놓은 모양이군.”

“조짐은 있었거든요. 주변에서 경고도 들었고.”

그래서 이번 일이 터지기 전에 알버트나 런던에 있는 변호사 마거릿 대처와 상의를 해서 미리 손을 썼다.

그렇게 손을 쓴 게 이제 공개될 때가 되었다.

과연 그때 루스나 축구협회에선 어떤 반응을 보일까?

‘한 가지 신경 쓰이는 건 그들에게 내 신분 증명 문제를 들추게 부추긴 놈들이야.’

이미 누군지 대강 짐작은 하고 있었다.

이에 일단 놈들의 덜미를 잡아 증거를 확보하려 애쓰고 있었다.

‘그냥 내버려 두면 앞으로도 또 귀찮게 굴 게 뻔해.’

그러니 이참에 제대로 뿌리를 뽑아야 한다.

다시는 쓸데없는 견제와 훼방 때문에 선수 활동에 방해를 받지 않도록.

***

글로스터 공작 헨리는 왕위 계승과는 거리가 있었고, 어린 시절부터 스포츠에 관심이 많았다고 하네요.

크리켓과 축구를 무척 좋아해서, 어머니에게 보내는 안부 편지에도 축구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축구협회장 자리도 단지 왕실의 일원이라 맡았다기보다, 본인도 관심이 있어서 했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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