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전드 1957-96화 (96/400)

Round 96. 역관광

축구협회가 준영에 대한 조사에 들어갔다는 소식은 곧장 알려졌다.

당연히 축구 팬들은 이 이슈를 물고 갑론을박을 벌였다.

“신분 위조라……. 그 유나이티드의 키 큰 원숭이 놈이 사기꾼이었다는 거야?”

“확정 난 건 아니고 조사 중이라는데?”

“어쩐지 좀 수상하다 싶었어! 틀림없이 위조범일걸!”

“그럼 리그에서도 퇴출인가?”

“어디 그뿐이겠어? 공문서 위조 혐의로 감옥에서 공을 차게 될 텐데.”

아직 명확한 증거가 없음에도 대다수 언론에서 자극적인 보도를 하면서 여론은 준영에게 좋지 않았다.

특히 내심 인종 차별 의식을 갖고 있던 이들은 이참에 눈엣가시 같은 황인종 선수가 축출되기를 바랐다.

물론 이 같은 적대적인 여론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개새끼들, 증거도 없으면서 출전 정지를 시켜?”

“이건 완전히 우리 팀을 엿 먹이려는 수작 아니야?”

유나이티드 선수들은 격분 그 자체였다.

그들은 취재하러 온 기자들 앞에서 준영이 절대 위법을 저지를 인물이 아니라고 변호하며, 언론은 물론 협회에도 공동 탄원을 제출했다.

팬들 역시도 반응은 다르지 않았다.

“이것들, 지금 우리 우승 못하게 하려고 발목 잡는 거지?”

“첩자질을 한 것도 아니고 공 좀 찼을 뿐인데, 그게 죄야?”

“나치 같은 자식들!”

맨체스터 밖에도 준영의 편이 있었다.

영국 축구의 영웅인 스탠리 매튜스는 시비를 가리는 게 옳더라도 이번 일은 공정하지 못한 처사라고 쓴소리를 내뱉었다.

“어찌 되었든 그 친구는 뛰어난 선수입니다. 그건 부정할 수 없어요. 그와 다시 필드에서 맞붙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현재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우승 다툼을 벌이는 울버햄프턴의 빌리 라이트 역시 언론에 불쾌한 심기를 드러냈다.

“나는 당당히 이겨서 우승을 하고 싶다고! 협회 덕에 얻어걸린 우승컵을 들 생각은 없어!”

축구인들 중에서 가장 강하게 협회를 질타한 사람은 허더스필드의 빌 섕클리 감독이었다.

“그 녀석이 사기를 칠 이유가 뭐가 있어! 사기를 칠 것 같으면 급료도 짜고 외국인 선수에게 허들이 높은 이딴 섬나라로 오지 않고 스페인이나 이탈리아로 갔겠지!”

이 밖에도 맨체스터 시티의 레스 맥도웰 감독이나 버트 트라우트만, 토트넘의 대니 블란치플라워 등등 여러 선수들이 탄원서를 보냈다.

증거도 없이 의심만으로 출전을 막는 것은 부당한 일이라고.

이러한 탄원은 당장 준영을 축출하라는 요청들과 함께 협회로 날아들었다.

이렇게 축구계가 불타오르는 가운데, 준영을 옹호하는 쪽도, 비난하는 쪽도, 그리고 중도를 표방하는 쪽도 공통점이 있었다.

바로 결론이 날 만한 증거.

모두가 그것을 기다리는 동시에, 협회에서 진행하는 조사에 이목을 집중하였다.

***

“아직인가? 이제 뭔가 밝혀질 때가 되지 않았나?”

루스 총무의 물음에 준영의 신문을 맡은 조사관들이 고개를 저었다.

준영을 웸블리로 출두시킨 후, 벌써 일주일이 훌쩍 지났다.

그동안 조사관들은 계속 신문했지만, 꼬투리를 잡을 만한 것은 없었다.

여러 가지를 물어보았고, 같은 질문도 몇 번씩 했지만 증언은 일관적이었다.

한국 출신이라는 것,

어릴 때 고향을 떠났고, 사고로 부모님을 잃었다는 것,

성인이 되기 직전까지 영국인 신부의 보살핌을 받으며 축구를 배웠다는 것,

국공내전을 피해 홍콩으로 왔고 거기서 시민권을 얻었다는 것 등등.

당연하지만 언론에서 제멋대로 지어낸 이야기들은 전혀 들어가 있지 않았다.

“자칭 왕족이라 하지 않았던가? 부자라면서?”

“물론 그런 이야기도 있긴 했죠. 이번 건이랑 크게 상관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시간 낭비만 했을 뿐…….”

조사관은 한숨을 푹 쉬었다.

솔직히 그놈의 수백 년 된 족보 이야기 듣다가 머리에 쥐가 날 뻔했으니까.

자기 조상 얘기를 한답시고 고국의 문자와 그것을 만든 왕에 대해서 한참 이야기하더니, 그 왕의 다섯 번째 아들로부터 시작한 가문의 이야기가 장황하게 이어졌던 것.

그 순간 조사관들의 머릿속에 ‘Too Much Talker’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그러니까 문제 될 게 없다?”

“말하지 않았습니까. 증언은 일관적이라고요.”

“멍청하긴! 없으면 만들어 내기라도 했어야지!”

뭐 하러 이 난리를 부린단 말인가.

익명의 투고를 핑계로 해서 놈의 위법성을 부각시킨 후, 증거를 찾아내 제명시킬 계획이 아니었던가.

털어서 먼지 안 나오는 놈은 없으니 말이다.

물론 지금처럼 별다른 먼지가 없다면 일부러라도 만들어 내야 한다.

그런데 이 멍청한 조사관 놈들은 일주일 동안 듣고 쓰기만 했다니!

“총무님, 그건 불가능합니다.”

“저희도 시도해 보지 않은 건 아닙니다만, 그놈은 항상 변호사랑 기자들을 대동하고 나타나서…….”

여러 취재원들이 신문 과정을 지켜보고 있는데 수작을 부릴 수 있을 리가.

더구나 놈의 변호사는 마그네토폰(* 구식 자기 테이프 녹음기.)까지 가져와서 녹음하는 치밀함을 보였다.

“이런 멍청한 것들! 우르르 데려왔다고 동참시킬 필요가 뭐가 있어! 내일은 그놈만 단독으로 입장시켜 신문하도록 해!”

“아, 알겠습니다.”

다음 날, 조사관들은 루스의 지시에 충실히 따랐다.

역시나 문제 될 증언은 확보하지 못했지만, 홍콩에서 영국으로 오게 된 사정을 물은 몇 가지 새로운 질문에서 루스가 원하는 대로 ‘창작’을 곁들었다.

“좋아, 이 정도면 다들 녀석이 거짓말을 하는 걸 알겠지!”

만족한 루스는 곧장 친분 있는 신문사에 문제가 되는 새로운 신문 내용을 올렸다.

예상대로 다음 날 한바탕 소란이 일어났다.

“이것 봐. 역시 밀입국 정황이 있었어!”

“위조한 게 분명하다는 거야?”

“당장 퇴출시켜야지!”

준영에게 부정적인 여론이 뜨겁게 불타올랐다.

단 하루 동안만.

***

그 이튿날.

루스나 협회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반격이 나타났다.

“이 신문을 봐. 어제 존 Y. 리에 대한 보도가 사실이 아니래.”

“뭐? 어제 보도된 취조문이 가짜라는 거야?”

“그래, 원본은 따로 있었던 모양이야!”

반박 보도를 낸 언론사에서는 자사 신문에 원본 취조문을 올렸다.

그뿐만 아니라 취조가 녹음된 테이프도 소지하고 있음을 당당히 밝혔다.

이건 다른 의미에서 불타올랐다.

준영이 밀입국을 했냐, 아니냐가 문제가 아니라, 의도적이고 악의성이 짙은 왜곡 기사가 나왔기 때문.

당연히 그 후폭풍은 왜곡 보도를 한 신문사와 축구협회로 날아들었다.

“도대체 어찌 된 거야! 단독 신문이었다고 하지 않았나?”

“예, 틀림없이 그랬습니다.”

“기자와 변호사는 들이지도 않았습니다. 마그네토폰은 물론이고요.”

펄펄 뛰는 루스 앞에서 조사관들은 정말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항변했다.

존 Y. 리 본인도 처음엔 약간 주저하는 듯하다가, 단독 신문을 받아들였으니까.

“설마 외부에서 도청이라도 한 건가?”

“그럴 리가…….”

“하지만 정황이 딱 그렇지 않나!”

협회 내에 누군가 배신자가 있는 걸까?

아니면 도청을 할 정도로 존 Y. 리의 뒷배가 든든한 걸까?

‘설마 처칠 전 총리가……. 아니야. 뒷방 늙은이가 일개 선수 문제로 정보기관을 움직였을 리는 없을 텐데?’

루스와 조사관들이 혼란에 빠져 있는 사이, 문제의 원본 녹음은 라디오 방송까지 타 버렸다.

당연히 사방에서 비난이 쏟아졌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협회에서 제대로 조사를 하고 있긴 한 거야?”

“결국 증거가 없으니 이러는 건가?”

“일 처리 한번 병신같이 하는군. 이럴 거면 솔직하게 유색 인종은 리그에서 축출하고 싶다고 하든가.”

여론은 완전히 뒤집혔다.

존 Y. 리 문제와 관련해 중도를 표방하던 쪽에서도 협회를 질타하고 나섰을 정도.

일이 이렇게 되자, 루스가 건넨 취조문을 올렸던 언론사는 냉큼 꼬리를 말고 정정 보도를 올렸다.

이제 사람들의 시선은 협회 쪽으로 향했다.

아무리 권위적인 축구협회도 이 일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루스가 택한 방법은 간단했다.

“자네가 책임지고 물러나게.”

“예? 저는 총무님이 시킨 대로 했을 뿐인데…….”

“알고 있으니까 일단은 물러나 있으라고! 일이 조용해지면 다시 부를 테니까!”

그렇게 꼬리 자르기로 일단락한 후, 루스는 더 이상 준영에 대한 신문은 하지 않기로 했다.

자칫 괜한 오해를 사게 될 테니까.

대신 그들은 내무부와 홍콩 행정부 쪽으로부터 확실한 증거를 얻는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

주영 한국 대사관 관저.

준영은 현재 이곳에 머물고 있었다.

처음엔 호텔에 머물렀지만, 김용우 대사의 연락을 받고 관저로 거처를 옮겼다.

혹시나 과격한 인종주의자에게 습격을 받을 수 있으니, 치외법권 지대가 안전할 거라는 김 대사의 권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식사도 호텔보다 훨씬 낫고.’

아침 식사로 나온 쇠고기뭇국을 맛있게 먹은 후 모닝커피를 즐기던 준영에게 김용우 대사가 말했다.

“여기 이 신문을 보게. 협회 쪽에서 꼬리를 만 모양이구먼.”

김용우가 건네준 신문에는 이번에 왜곡 취조를 저지른 협회 조사관이 사퇴했다는 기사가 올라와 있었다.

“훗, 이럴 줄 알았습니다.”

“근데 대체 어떻게 한 건가? 기자도, 변호사도 들어가지 못했다면서?”

“3개의 별이 만들어 낸 은하수 조각의 힘을 빌렸죠.”

“응? 그게 대체 무슨 말인가?”

“뭐, 일종의 부적 같은 겁니다.”

“그래? 도청기 같은 거라도 품고 갔던 모양이로군.”

김용우 대사의 짐작은 틀리지 않았다.

준영이 사용한 건 21세기에서 가져온 스마트폰.

조사관들이 모르게 녹음 어플을 켜서 취조 내용을 고스란히 저장했다.

‘구식 녹음기에 다시 옮기는 과정이 좀 번거로웠지만 말이야.’

어쨌거나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이번 역관광으로 축구협회의 위신이 상당히 깎였으니까.

앞으로 그들이 뭘 내놓든, 모두가 의심스럽게 바라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대사님,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요.”

“뭐가 말인가?”

“대사님은 제 신분 문제에 대해서 의심스럽지 않으세요? 만에 하나 제가 정말 속인 거면…….”

“위신만 깎인다 이건가?”

사실 준영은 김용우를 완전히 신뢰하진 않았다.

21세기에도 외교부 철밥통 공무원들의 비리나 무개념한 행태가 교민들은 물론 국내에서도 비판의 대상이었으니까.

실제 김용우의 부하 직원들 중에서도 이번 일에 나서는 걸 꺼리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김 대사는 흔쾌히 준영을 보호하는 데 앞장섰다.

“곡절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해방 전후로 심한 풍파를 겪은 사람이 한둘도 아닌데.”

이유야 어떻든 대한 사람이 곤경을 겪고 있으면 도와야 한다는 게 김용우의 생각이었다.

한국인들이 해외를 떠돌게 된 건 나라가 힘이 없고, 위정자들이 잘못된 통치를 한 책임이 크니까.

“이 군은 걱정 말고 축구나 열심히 하게. 아, 그러고 보니 사업도 하고 있다고 했지? 이번 일로 수익에 문제가 생긴 건 아닌가?”

“전혀요. 오히려 판매량이 늘었다고 합니다.”

그저께 이억관과 통화를 하면서 확인했다.

그만큼 맨체스터 시민들이 자신에게 지지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라면 사업이 올해 목표치를 달성하면 한국에도 공장을 낼 계획입니다. 국민들에게도 값싸고 맛있는 먹거리가 필요하니까요.”

“오! 그렇게 해 준다면 고마운 일이지!”

준영이 김용우와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직원 하나가 다가와 전문을 전했다.

“본국에서 온 겁니까?”

“아냐. 자네 앞으로 온 거야. 처칠 전 총리라는데? 만나게 해 줄 사람이 있다는군.”

처칠은 현재 런던에 머물고 있다.

그래서 여기 있다는 것도 알려 줬는데, 대체 누굴 만나게 해 주려는 걸까.

‘설마 여왕은 아니겠지.’

아무튼 서둘러 준비한 준영은 약속 시간에 맞춰 처칠의 거처로 향했다.

***

김용우 대사는 국방부 장관을 거쳐 초대 주영 대사를 지냈습니다.

이분은 1958년 제네바 국제 해양법 회의에 참석했는데, 당시 독점 어업권 문제로 일본을 두둔하는 미국 대표단과 마찰을 빚었습니다.

당시 한국은 평화선을 그어 놓고 일본과 어업 문제로 다투고 있을 때였거든요.

미국의 외교 압력에, 한국 정부는 김용우 대사에게 미국의 안건에 찬성하라는 긴급 훈령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김용우 대사는 이에 불구하고 반대표를 들었고, 결국 해임 통보를 받았다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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