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전드 1957-95화 (95/400)

Round 95. 쫄리면 뒈지시든가

‘역시 그건가.’

설마 했던 문제가 들춰졌다.

그것도 자신을 탐탁잖아하는 듯한 인간에 의해서.

준영의 찌푸려진 낯을 본 루스는 의기양양하게 말을 이었다.

“존 Y. 리, 자네 이력 때문에 일전에 체코슬로바키아에서 한바탕 소란이 있었지.”

“맞습니다. 하지만 별 탈 없이 돌아왔죠.”

“그래, 무사히 돌아왔다는 데 의문을 품은 사람들이 나타났지. 정말 문제가 되는 망명자라면 풀어 줬을 리 만무하니까.”

“그야 영국 정부와 외교적 마찰을 일으키고 싶지 않으니…….”

“조용! 내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

루스가 준영에게 버럭 윽박지르자, 지켜보고 있던 던컨이 나서려고 했다.

하지만 버스비 감독의 만류에 일단은 지켜보기로 했다.

“그 문제를 의아하게 여긴 사람들이 영국 내무부 쪽 관계자와 만나 물어봤다고 하더군. 하지만 모르는 일이라는 증언이 나왔어.”

루스도 투서를 받은 후, 이를 확인했다.

사실 내무부에서도 최근까지 큰 관심이 없었다.

그냥 홍콩 시민권을 가지고 본국에서 축구 선수로 뛰는 별난 동양인이 있나 보다 파악한 정도였다.

“뭐, 백번 양보해서 내무부가 모를 수 있겠지. 저 멀리 홍콩 행정부에서 처리한 일일 수도 있으니까.”

“…….”

“그런데 신고자들이 알아본 결과 홍콩 행정부에서도 금시초문이란 반응이었어. 한마디로 한국계 홍콩 시민권자 존 Y. 리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거야!”

회의실 한쪽에 서 있던 기자들의 손놀림이 바빠졌다.

그야말로 대서특필감이다.

현재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대활약 중인 동양인 선수가 출신을 알 수 없는 불법체류자에 부정 등록 선수가 될 판이니까.

이에 대해서 과연 존 Y. 리는 어떤 반박을 할 것인가.

“훗…….”

“웃어? 지금 웃음이 나오나?”

루스의 말이 이어지는 동안 찡그리고 있던 준영이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정도 모르고 오해하고 계신 것 같아서 말입니다.”

“오해라고?”

“네, 1945년 2차 대전이 끝난 직후 홍콩의 인구는 60만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본토에서 국공내전이 치러지는 동안 200만을 돌파하죠.”

몇 년 사이 인구가 3배 넘게 폭증할 정도로 전쟁 난민들이 많이 흘러들어왔다.

그건 영국 입장에서도 곤란한 문제였기에, 신문이나 잡지에도 종종 언급되곤 했다.

당연히 준영도 그 기록들을 봤다.

“그렇게 인구가 폭증하는데 홍콩 행정부에서 누가 망명했는지 일일이 기억한다고요? 그런 인재가 있다면 홍콩에 두지 말고 본국으로 불러다 긴히 써야지요.”

“지, 지금 날 조롱하는 건가?”

“그럴 리가 있습니까. 모르고 계신 것 같아 알려 드렸을 뿐입니다.”

루스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가 얼마 전에 반색을 하며 받아 든 투서는 존 Y. 리의 망명 건에 대해서 정부가 모른다는 게 핵심.

그런데 정말 모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면?

하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아, 그랬구나!’ 하고 물러날 수는 없는 법이다.

“인구 수치 따위로 진실을 감추려 들지 말게! 자네가 불법적으로 신분 증명을 조작했다는 정황은 또 있으니까!”

다시 서류를 펼쳐 든 루스가 준영의 주장을 반박하고 나섰다.

“자네는 허더스필드 타운에 입단하기로 했으면서 계약은 계속 미뤘어. 과연 그 이유가 뭐겠나? 정식 계약에 필요한 신분 증명이 불분명했기 때문이 아닌가!”

루스는 사나운 눈길을 알버트 쪽으로 돌리며 그에게 물음을 건넸다.

“알버트 존 프레드로 남작님, 남작님의 장손녀가 7월에 교통사고를 당했다고 하는데 맞습니까?”

“그렇소.”

“네, 경찰 기록으로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장손녀를 구한 사람이 키 큰 동양인, 저기 존 Y. 리였다고 합니다만?”

“그 역시 사실이오.”

“그 ‘마음의 빚’ 때문인지 몰라도 지금도 남작님께서는 존 Y. 리를 후원하고 계시죠. 빌 섕클리에게 추천을 해 줬을 뿐만 아니라 여러 사업에 지원도 했습니다.”

살짝 말을 끊었던 루스가 눈을 치켜뜨며 추궁했다.

“그의 신분 위조도 도와주신 게 틀림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함부로 속단하지 마시오!”

알버트가 언성을 높였음에도 루스는 물러나지 않았다.

“남작께선 과거에 촉망받는 정치인이셨지요. 독일과의 전쟁에 반대하는 체임벌린 파벌에 밀려 낙향하기 전까지 말입니다.”

루스가 알기로, 알버트는 1938년 당시에 보수당 내에서 처칠과 같은 대독 강경파.

상당히 껄끄러운 인물이다 보니 온건파에서 일대귀족 작위를 주었다고 한다.

일단 작위를 받게 되면 더 이상 하원의원으로 활동할 수 없으니까.

영국 정치의 중심이 하원임을 생각하면, 사실상 정계에서 축출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남작님은 여전히 인맥이 넓고 증명서 정도는 쉽게 손쓸 만한 사람들을 알고 계시죠. 그러니…….”

쿵!

루스의 말이 탁자를 울리는 소음에 뚝 끊겼다.

알버트가 꺼내 놓은 것은 성경이었다.

그는 거기에 손을 얹고서 말했다.

“신에게 맹세코 부끄러울 만한 일을 한 적이 없소! 나는 곤경에 처한 젊은이를 도와줬을 뿐이니까!”

이렇게까지 말하니 루스도 곤란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방금 그 말에도 꼬투리를 잡을 부분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 말은 결국 신분 위조를 도와줬다는 식으로 들립니다만?”

“위조가 아니라 재발급입니다.”

준영이 다시 입을 열었다.

쓸데없는 해석을 못하게 아주 못을 박아야 했으니까.

“전 영국에 입국했을 때 갖고 있던 증명서들을 모두 잃어버렸습니다. 남작님은 재발급을 도와주신 것뿐이고요.”

“결국 원래 자신을 증명할 수 없다는 소리로군.”

“말꼬리 잡지 말고, 증거가 있으면 내놔 보십쇼. 저나 남작님이 위조를 했다는 증거 말입니다.”

있으면 까 봐.

준영의 반박에 루스는 한동안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아직은 정황이나 심증뿐, 확실한 증거를 확보하진 못했으니까.

하지만 자신에게 투서를 날린 자들이 계속 조사를 하고 있다니 증거가 드러나는 것도 시간문제다.

그리고 그들이 아니라도 일해 줄 사람들은 많다.

저기 있는 언론사 기자들.

가십거리를 좋아하는 저들이 알아서 진실을 캐내 올 것이다.

아니, 딱히 진실이 아니라도 상관없다.

어떤 나치 놈의 말대로 1퍼센트의 진실에 99퍼센트의 거짓을 섞어도 어리석은 민중들은 믿게 되니까.

“굳이 증거까지 필요 없지. 지금까지 드러난 것만 봐도 자네가 수상쩍은 행적을 보인 게 사실 아닌가?”

“이런 C8, 지금 증거도 없으면서 생사람을 잡겠다는 겁니까?”

어처구니가 없던 나머지 던컨이 결국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루스의 두툼한 볼이 꿈틀댔다. Seebal이 뭔 뜻인지 몰라도 결코 좋게 들리진 않았으니까.

“그냥 누군가 시기해서 대충 정황만 짜 맞춘 걸 갖고 사람을 죄인으로 취급해요? 그게 협회에서 할 일입니까!”

“당연히 할 일이지! 잘못은 시정하고 문제는 해결하는 게 우리의 일이니까! 거기다 이 일엔 영국 리그의 명예도 달려 있어!”

존 Y. 리가 근본도 알 수 없는 불법체류자에 위조 신분이었다는 게 나중에 탄로 나 봐라.

그럼 얼마나 망신이겠는가.

“안 그래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유러피언 컵에 출전하고 있지. 자칫하면 유럽 전체로부터 비웃음을 받을 수 있어!”

루스의 논리에 준영과 그의 일행은 기가 차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체면 문제 때문에 증거도 없이 선수를 쳐 내겠다는 거 아닌가.

“자네들은 증거가 없다고 하지만, 내무부와 홍콩 행정부 관료의 증언은 허투루 흘릴 수 없어.”

“그게 증거가 안 된다는 건 존이 아까 말했습니다만?”

지금까지 잠자코 있던 버스비 감독도 더는 참을 수 없는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루스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무리 망명자가 많았다지만, 특이한 사례는 기억에 남을 수밖에 없지. 한국계라든가, 자칭 왕족이라든가 등등등.”

“그래서? 정황과 일부의 증언만으로 존에게 징계를 내리겠다는 겁니까?”

버스비는 이 상황이 답답하고 불안했다.

준영이 억울한 처분을 받을 수 있다는 점도 그렇지만, 잘못하면 구단에도 화가 미칠 수 있다.

안 그래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협회와 좋지 않은 사이였으니까.

“아직 징계까지 내릴 계획은 없네. 하지만 조사는 계속해 봐야 하는 일이니……. 확실하게 진실이 밝혀지기 전까진 존 Y. 리의 출전을 금지하겠네.”

“뭐라고요? 아니, 그게 징계가 아니면 뭐란 말입니까!”

“징계가 아니라 배려라 생각하게. 나중에 부정 선수로 알려져 봐! 그럼 자네나 자네 팀이 받을 비난은 결코 적지 않을걸?”

지금도 존 Y. 리에 대해 불만을 가진 팀들이나, 못마땅해하는 축구 팬들이 많다.

지금 당장 논란이 되어도 유나이티드를 비난하는 이들이 무수히 나타나리라.

“총무님, 확실한 증거가 나오면 다시 출전할 수 있는 겁니까?”

준영의 물음에 루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혹시 현재 밝혀진 수상한 정황을 확실하게 반박할 증거가 있나?”

“지금 당장은 없습니다. 하지만 곧 밝혀질 거라 확신합니다.”

자신 있게 장담한 준영은 루스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체격이 남다른 그가 코앞까지 다가오자, 루스는 저도 모르게 긴장한 나머지 진땀을 흘렸다.

“잘못은 시정하는 게 옳지요. 명예를 지키는 것도 중요한 것이고요.”

“그, 그렇고말고.”

“하지만 생사람을 잡았을 경우, 지키려고 했던 명예와 체면은 어떻게 될까요?”

오히려 네가, 협회가 이 일로 망신과 비난을 살 수 있다.

그런 의도로 건넨 준영의 말에 루스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어지간히 자신 있나 보군.”

“그러는 총무님은 어떻습니까? 확실하지 않은 데 승부를 걸다간 자칫 손모가지가 날아갑니다.”

“뭐? 감히 날 협박하는 건가!”

“제가 떳떳하다는 걸 증명하겠다는 겁니다. 총무님이 협회의 명예를 지키려는 만큼이나 저도 제 자신과 소속 팀의 명예를 지킬 겁니다.”

쫄리면 뒈지시든가.

어디 한번 해 보라는 듯한 준영의 태도에 루스는 한동안 볼 살을 부들거리다 쏘아붙였다.

“조사는 오늘부터 당장 진행될 거야. 그러니 자네는 한동안 런던에 남아 있으면서 신문에 성실히 응하도록.”

“그게 무슨……!”

“존을 런던에 잡아 두고 뭘 어쩌려는 겁니까!”

준영에게 내려진 처분에 일행은 격분했다.

준영은 오히려 웃었다.

화가 나면 오히려 웃게 된다는 걸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하, 출전 정지도 모자라서 이젠 구속까지 시키겠다고요?”

“자네도 빨리 진실을 밝히고 싶을 게 아닌가. 협조해 주는 게 좋을 텐데? 그게 아니면… 맨체스터로 가서 급하게 처리할 일이라도 있나?”

조작한 증거가 드러나지 않게 손을 쓰려는 게 아니냐?

이런 속뜻을 담은 루스의 말에 준영은 가늘게 웃음을 지었다.

“그런 일은 없습니다. 요즘 어지간한 건 전화로도 처리가 되니까. 다만 훈련에 차질이 생기는 게 아쉽군요.”

“원한다면 남는 시간에 같이 훈련할 팀을 주선해 주도록 하지. 뭐, 반길 곳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거기까지 말한 루스는 임원들을 데리고 회의실에서 나갔다.

그리고 남겨진 준영 일행에게로 기자들이 벌 떼처럼 달려들었다.

“리 선수, 정말 이 문제에서 결백합니까?”

“이번에야말로 과거를 확실히 밝힐 수 있는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는 어떤 대응을…….”

쏟아지는 질문들을 묵묵히 듣고 있던 준영은 슬쩍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하늘은 흐려졌고, 비바람이 거세게 쏟아지고 있었다.

‘한동안 폭풍이 불겠군.’

그 폭풍의 눈 속에서 한동안 고생할 것은 각오해야 할 것 같았다.

***

전에 말하지 않고 넘어간 게 스탠리 루스 저 양반, FIFA 6대 회장(1961~1974)을 지냈습니다.

이 사람이 회장으로 있는 동안 진짜 FIFA에 문제가 많았습니다.

지나치게 강해진 유럽세, 아파르트헤이트 옹호로 인한 아프리카 국가들의 단체 보이콧.

심지어 피노체트 독재 정권의 비인도적인 학살 범죄 은폐까지 도왔다고 하니 기가 찰 일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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