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전드 1957-94화 (94/400)

Round 94. 출두 통보

축구 경기는 대량 득점이 흔치 않다.

상대 팀의 수준이 낮거나 문제가 있을 때 많은 골이 터지지만, 그래도 많아야 3골 정도이고 5골 이상은 드물다.

그렇기에 3골 이상 격차가 나면 경기를 뒤집기 정말 힘들다고 보곤 했다.

관중들뿐만 아니라 필드에서 뛰는 선수들도 마찬가지.

그렇기에 대량 실점을 당하면 사기가 저하되고, 그만큼 경기에 집중하지 못한다.

현재 6 대 2의 스코어로 뒤지고 있는 볼턴 선수들이 딱 그랬다.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만회 골을 넣으려 애썼지만, 맨유 선수들의 완강한 수비에 막혀 공격이 무산되곤 했다.

“젠장, 저 자식들은 지치지도 않나?”

“아주 펄펄 날아다니잖아.”

떨어진 사기만큼이나 피로가 누적된 볼턴 선수들과 달리, 유나이티드 선수들은 아주 팔팔했다.

단지 대량 득점으로 경기를 신나게 이기고 있는 중이라 그런 것은 아니다.

“오늘 경기를 위해 일주일 동안 금주를 했다고!”

“난 담배도 끊었어!”

준영이 항상 해롭다고 잔소리했던 음주와 흡연.

이 시대 대다수 선수들은 당연한 듯이 즐겼고, 이는 맨유 선수들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그런 그들이 오늘 경기를 위해 준영의 권유를 들었다.

과감하게 술과 담배를 멀리하며, 준영이 추천하는 식단으로 삼시 세 끼를 먹었다.

여기에 피로 회복 훈련도 열심히 하는 한편, 안마나 얼음찜질 등 조금이라도 회복에 도움이 되는 것은 다 했다.

심지어 기혼자들은 아내와의 잠자리까지 삼갔다.

이렇게 내공을 모은 건 모두 지난번 번든 파크에서의 4 대 0 대패를 갚아 주기 위함이었다!

“평소에도 그렇게 좀 하라고!”

준영은 쓴소리를 안 할 수 없었다.

정말 이번처럼 몸 관리에 신경 썼다면 매년 우승은 물론, 유러피언 컵도 진즉에 들어 올렸을지 모른다.

‘그나저나 이제 정규 시간도 다 됐구나.’

화끈하게 골 폭죽을 터트리던 경기도 이제 3분 정도 남았다.

여섯 번째 골 이후에도 날카로운 공격과 슈팅들이 있었지만, 아깝게 빗나가거나 골키퍼의 선방에 막혔다.

‘그래도 아직 한 골은 더 가능하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하는 건 준영만이 아닌 듯했다.

현재 공을 갖고 있는 던컨도 호시탐탐 볼턴 수비의 허점을 노리고 있었다.

그렇게 살피며 몰고 올라가다가 빈 공간으로 빠지는 데니스 바이올렛에게로 패스를 내줬다.

살짝 뜬 패스를 어깨로 툭 쳐서 돌려놓은 데니스는 곧바로 중앙으로 빠른 크로스를 올렸다.

그리고 거기에 딱 맞춰서 준영이 쇄도해 들어갔다.

퉁-!

준영의 머리에 닿기 직전, 공이 수비수의 선방에 막혔다.

그리고 관중석에서 큰 함성이 터졌다.

너무나 기가 막힌 선방이었기 때문이다.

“핸드볼이다!”

“저 3번 놈, 손으로 공을 쳐 냈어!”

준영을 마크하던 수비수가 공중전에서 상대가 안 되자 엉겁결에 손을 들어 올린 것.

신의 손으로 넘어가기엔 너무도 노골적이라, 심판은 곧장 페널티킥을 선언했다.

“농구장에 온 줄 알았네.”

“시끄러워! 비겁하게 키는 커 가지고!”

준영에게 무안을 당한 볼턴 3번은 울상을 지었다.

한 골이라도 만회해도 시원찮을 판에 페널티킥이라니!

“이건 넣지 말아 줘!”

“여섯 골이면 충분하잖아!”

볼턴 선수들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키커로 나온 던컨 에드워즈는 깔끔하게 슛을 성공시켰다.

이미 멸망한 상황에서 떨어진 무자비한 폭격은 볼턴 선수들을 대략 멍한 지경으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아, 우린 이제 돌아가면 죽었다.”

침통한 표정을 짓고 있는 볼턴 선수들은 길게 탄식을 내뱉었다.

끔찍한 악몽이 끝나 가고 있지만, 오늘의 충격과 상처는 정말 오래갈 것 같았다.

***

최종 스코어 7 대 2.

볼턴 원더러스를 통쾌하게 박살 낸 후.

유나이티드 선수들은 단골 클럽에서 신나게 뒤풀이를 즐겼다.

“다 같이 건배! 승리를 위하여!”

“우승을 위하여!”

“유나이티드를 위하여!”

다들 잔을 높이 들며 환호성을 질렀다. 클럽 안에 모인 다른 손님들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위해 건배를 보냈다.

그리고 이어지는 부어라 마셔라.

일주일간 금욕을 해 왔던 선수들은 오랜만에 쭉쭉 들어가는 달콤한 술맛에 빠져들었다.

“어휴, 저러다 다음 경기 망치면 어쩌려고.”

“걱정할 필요 없잖아. 다음 경기는 일주일 후니까. 시간은 충분히 있다고.”

준영의 말에 대꾸하던 숀 코너리는 위스키를 살짝 홀짝이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선수도 충분히 있지.”

“하하, 숀, 한동안 출전 못했더니 근질근질한가 봐요?”

씩 웃음을 지은 숀은 술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지난번에 연극배우들 모임에 갔다가 대스타 비비안 리를 만났지.”

“비비안 리?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스칼렛 오하라요?”

“그래. 그 사람이 내가 축구도 하고 있다니까 이런 말을 하더군. 스포츠도 각본 없는 드라마니까 열심히 하라고.”

“하하, 확실히 그런 말이 있죠.”

“대선배에게 그 말을 들으니까 앞으로 정말 열심히 해야겠단 의욕이 솟구쳐 오르더라고. 연극뿐만 아니라 축구도 말이야.”

작년에 연극 크리스마스 캐럴의 주연으로 열연을 펼쳤던 숀은 호평을 받으며 이후 새로운 연극의 주연을 맡았다.

최근에는 그라나다 TV에서 방영 중인 시트콤 제작진에게서도 오퍼를 받았다고 했다.

“맨체스터에서 촬영하기 때문에 훈련에 큰 무리가 없을 것 같아.”

“잘됐네요.”

이렇게 숀과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얼굴이 불콰하게 물든 바비 찰튼이 다가와서 준영에게 매달렸다.

“뭐 해요, 존. 구석에서 구시렁거리지 말고 한 곡 뽑으라고요.”

“여, 바비 찰튼 경, 취하셨군요.”

“당연히 취했죠! 오늘처럼 멋진 경기를 했는데 안 취할 수 있나요?”

“하긴 그것도 그렇지.”

“자자, 얼른 무대로!”

바비뿐만 아니라 다른 동료들도, 그리고 클럽의 손님들도 준영이 한 곡 불러 주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가 부르는 노래는 상당히 신비하면서도 근사했으니까.

“좋아, 오늘같이 신나게 이긴 날에 어울리는 곡이 있지.”

무대에 올라 밴드에게 전자 기타를 넘겨받은 준영은 곧장 반주에 들어갔다.

요란하지만 귀에 익은 신나는 반주에 다들 환호와 박수를 보냈다.

이미 몇 번 들어 봤지만, 질리지는 않는 곡이었으므로.

“Oh, oh! Oh oh oh! Oh oh oh! Oh, Oh oh! For our victory∼ Oh, oh! Oh oh oh! Oh oh oh! Oh, Oh oh! I will go with you∼”

대한민국 대표팀 월드컵 응원가 ‘승리를 위하여’.

영어로 가사를 바꿔서 열창하자 클럽 안은 금세 열광의 분위기가 되었다.

“Ole Ole∼ Ole Ole∼ 대- 한민국!”

“Man- chester!”

한참 흥이 올라 여기저기 떼창을 하는 가운데, 클럽 안으로 지미 머피 코치가 들어왔다.

그는 선수들이 권하는 술잔도 마다하고, 열창하고 있는 준영에게 내려오라는 손짓을 보냈다.

‘무슨 일이지?’

표정을 보니 뭔가 심각해 보였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걸까.

준영은 적당히 마무리하고 무대에서 내려왔다.

그러자 머피 코치가 곧장 다가와 찾아온 이유를 밝혔다.

“방금 협회에서 연락이 왔는데, 너에게 월요일 오전까지 런던에 있는 협회 본부로 출두하라는 통보를 내렸어.”

“예? 갑자기 왜……?”

“나도 몰라. 혹시 짐작 가는 거 있나?”

아직 시즌 중이다.

협회로부터 뭔가 포상을 받을 만한 일도 한 적이 없다.

‘설마.’

딱 하나 짐작 가는 게 있었던 준영은 낯빛이 딱딱하게 변했다.

“일단 오라니 가 봐야겠군요.”

“왜? 문제 될 게 있는 거야?”

주변에서 이야기를 들은 선수들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그런 그들에게 준영은 미리 언질을 해 두었다.

“우려하는 게 맞는다면, 일이 좀 복잡하게 될지도 몰라.”

“뭐?”

“잘되면 쉽게 끝날 일이고.”

어느 쪽으로 결정 날지 아직 모른다.

그래서 준영은 지나친 기대도, 지나친 낙담도 하지 않기로 했다.

***

월요일 새벽.

일찍 집을 나선 준영은 맨체스터역에서 런던행 기차에 올라탔다.

“너까지 따라올 필요는 없는데…….”

“뭔 소리야? 기차도 못 타는 주제에.”

“이젠 괜찮거든!”

오늘 준영과 동행하는 사람은 알버트와 맷 버스비, 그리고 던컨이었다.

앞의 두 사람은 준영의 후견인, 그리고 팀의 감독이라 동행을 자처했지만, 던컨은 따라올 이유가 전혀 없었다.

“내 감이 그래. 촉이 딱 왔다고. 이건 심상치 않은 일이라고 말이지.”

“그러냐.”

“뭘 그리 못 미더운 표정을 짓는 거야! 난 현직 잉글랜드 대표 선수라고! 어느 정도는 도움이 될 거야!”

이리저리 떠드는 사이, 어느새 기차는 런던에 도착했다.

거기서 택시를 탄 일행은 축구협회 본부가 있는 웸블리에 당도했다.

‘벌써 웸블리에 올 줄은 몰랐는데 말이지.’

준영은 마치 고대 유적처럼 생긴 웸블리 스타디움을 바라보았다.

잉글랜드 대표팀의 고향이자, FA컵 결승전이 열리는 이 웅장한 경기장에 축구협회 본부가 자리하고 있었다.

“존 Y. 리입니다. 협회 출두 통보를 받고 왔습니다.”

사무처에 말을 전하고 얼마 후, 준영 일행은 테이블이 놓인 회의실로 안내되었다.

그곳에는 협회 총무인 스탠리 루스를 비롯해 협회의 몇몇 임원들, 그리고 언론사 기자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자네가 존 Y. 리인가?”

“처음 뵙겠습니다.”

준영은 루스 총무에게 인사를 건넸다.

루스가 준영을 보는 눈길만큼이나, 준영이 그를 보는 눈길도 곱지는 않았다.

이미 어떤 사람인지 처칠에게서 전해 들었으니까.

‘일정 변경을 완강히 거부했다는 꼰대가 이 콧수염 돼지라 이거지? 이놈 때문에 나중에 뮌헨에서……!’

‘젠장할, 원숭이 놈, 사람을 감히 올려다보게 만들다니!’

지금은 예의상 악수를 나눴지만, 여기서 나가면 당장 손을 씻으리라.

이렇게 준영에게 적대적인 루스도 맷 버스비나 던컨에게는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이네, 맷. 여! 빅 던, 자네도 와 줬구먼.”

“안녕하셨습니까, 총무님. 대체 무슨 일로 존을 출두시킨 겁니까?”

“그건 이제 천천히 알게 될 걸세. 안 그래도 관련자인 프레드로 남작께서도 함께 오셨으니…….”

약간 빈정거리는 기색을 보였던 루스는 알버트와도 짧게 인사를 나누었다.

그 태도는 준영을 대하는 것만큼이나 쌀쌀맞았다.

‘역시, 그 일 때문이로군.’

거의 확실한 느낌에 알버트의 표정이 굳어졌다.

“자, 그럼 당사자가 왔으니 이야기를 시작해 봐야겠군요.”

준영 일행이 자리에 앉자, 루스는 미리 자신의 자리에 놓여 있던 서류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굳은 표정을 짓고 있는 준영에게 물음을 건넸다.

“존 Y. 리, 한국계 홍콩 시민권자로 작년 7월에 영국에 왔다고 했나?”

“그렇습니다.”

“허더스필드 타운에서 뛰다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 갔지. 뭐, 여기까지는 잘 알려진 내용이고…….”

슬쩍 뜸을 들이던 루스가 서류를 넘겨 가며 말을 이었다.

“맨체스터 가디언의 도니 데이비스 기자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자네는 이전에 어디에서도 활동한 적이 없는 선수라고 나왔지.”

“그건 제가 돌아갈 수 없는 곳에서 왔기에…….”

“그래, 망명자 출신이라 이거지? 자네 후원자인 프레드로 남작의 선조처럼 말이야. 19세기 초에 폴란드인들이 망명한 기록은 찾아보면 허다하게 많지.”

자리에서 일어난 루스는 준영의 앞으로 다가와 싸늘하게 쏘아붙였다.

“그런데 자네가 망명자라는 기록은 왜 찾아볼 수 없는 건가?”

***

다음 편 준영의 반격이 시작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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