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전드 1957-93화 (93/400)

Round 93. 압도적인 힘

‘흥, 수비 대열은 제법 잘 갖췄군.’

준영은 전방에서 부지런히 움직이며 볼턴 수비진을 흔들어 댔다.

버스비 감독은 오늘 그를 토미 테일러를 대신해 최전방에 출전시켰다.

볼턴전의 악연을 씻기 위한 목적도 있지만, 뛰어난 개인기와 득점력을 적극 활용해 보려는 의도가 더 컸다.

공격 카드나 옵션이 다양할수록 여러 상황에 대응하기 좋으니까.

“크로스가 못 오게 막아!”

“쿨리 녀석 마크도 확실히 하고!”

측면 쪽으로 공이 가자, 볼턴 수비수들은 야단법석을 부렸다.

크로스가 날아오면 준영에게 공중전을 압도당할 게 뻔했으니까.

그래서 측면을 악착같이 막고, 사전에 준영이 파고들 공간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 대응은 나쁘지 않아. 하지만 나만 공격할 거란 보장은 없거든.’

준영의 예상대로 볼턴은 허를 제대로 찔렸다.

크로스를 올릴 듯하던 알버트 스캔론이 중앙의 던컨 에드워즈에게로 공을 밀어 주었다.

던컨이 절묘한 높이로 볼턴 진영에 패스를 넣은 순간, 딱 맞춰서 바비 찰튼이 뛰어 들어갔다.

“앗! 저, 저런!”

던컨의 기막힌 침투 패스를 건네받은 바비는 방향만 살짝 돌리는 슈팅으로 볼턴의 골문을 흔들었다.

전반 3분.

예상보다 훨씬 빠른 선제골에 관중석에서 놀람과 기쁨의 함성이 우렁차게 터져 나왔다.

“잘했어, 바비!”

“이 자식, 요즘 완전 물올랐구만!”

의기양양하게 골 셀레브레이션을 펼치는 유나이티드 선수들의 모습과 달리, 볼턴 선수들의 표정은 구겨졌다.

이렇게 이르게 실점을 해 버렸으니 이제 선수비 후역습은 별 의미가 없었다.

“골을 만들어야 해. 여기서 밀리면 진짜 박살이 나고 말 거야.”

데니스 스티븐슨은 나다니엘 로프트하우스의 의견에 동감했다.

안 그래도 경기 시작 전부터 기세 싸움에서 밀렸는데, 스코어까지 뒤지면 진짜 대형 참사가 벌어질 수 있었다.

필드 밖에 있는 윌리엄 리딩 감독도 같은 판단을 했던지 볼턴 선수들에게 전진하라는 사인을 보냈다.

“다들 앞으로 나가! 가서 버스비의 애송이들을 쥐어박아 주자!”

심판 판정 따위로 4 대 0의 스코어를 만든 게 아님을 증명해 주자.

이에 수비진을 풀고 전진한 볼턴 선수들은 미드필드 지역에서 일진일퇴의 공방을 벌였다.

뺏고 빼앗기고, 가로채면 재차 달려들어 빼내고.

태클과 차징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가운데 10분의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힘내, 유나이티드!”

“말 대가리들에게 밀리지 말라고!”

관중들이 쉴 새 없이 응원을 보내는 가운데, 공을 잡은 케니 모건스가 단독 돌파를 시도했다.

“케니, 무리야! 패스를 해!”

준영이 본 대로 케니의 돌파는 도중에 공을 길게 끌면서 커트를 당했다.

공을 끊어 낸 볼턴 수비수는 곧장 최전방의 로프트하우스에게로 롱 패스를 보냈다.

깔끔한 터치로 공을 잡은 로프트하우스.

그는 페인팅 동작으로 자신을 막는 마크 존스를 제쳐 내고는 기막힌 침투 패스를 찔러 넣었다.

그 패스를 넘겨받은 데니스 스티븐슨은 곧바로 맨유 골대로 슈팅을 날렸다.

해리 그렉의 펀칭에 맞은 공은 골대를 맞은 후 그대로 골라인을 통과했다.

“으윽, 동점 골…….”

“아, 뭐야, 갑자기!”

난데없는 동점 골에 관중들은 탄식을 쏟아 냈다.

분명히 지난번 대패의 치욕을 갚아 줄 거라 기대했건만!

혹시 이대로 경기가 꼬여 버리는 건 아닌지?

“나다니엘 로프트하우스, 역시 만만찮구만.”

“괜히 비엔나의 사자라고 불리겠어.”

일격을 당하고도 맨유 선수들은 동요하지 않았다.

“까짓것 한 골 먹었으면 두 골로 갚아 주면 돼.”

“그래, 아직 시간은 충분하고 체력도 충분하니까.”

90분 중 20분이 지났을 뿐이다.

원점으로 돌아오긴 했지만, 진짜 시합은 이제부터.

이제 몸이 풀린 유나이티드 선수들은 볼턴 진영을 향해 돌격을 시작했다.

***

‘이 녀석들, 전혀 주눅이 들지 않았잖아.’

맨유 선수들의 거센 공세에 스티븐슨은 내심 당혹감을 금치 못했다.

보통 동점 골을 얻어맞으면 당황하거나, 신중하게 대응하기 마련.

그런데 맨유 선수들은 거센 공세로 나오고 있었다.

마치 상처 입은 사자가 날뛰는 것처럼.

더구나 후반전에는 어떻게 뛰려고 하는지, 활발한 활동력을 보였다.

심지어 공격수들까지 적극적으로 달려들어 패스를 방해하고 공을 빼앗으려 들었다.

제일 적극적으로 나서는 건 맨유의 5번 존 Y. 리.

녀석은 원래 수비수인 걸 어필하듯, 자신의 활동 반경 내에서 공을 잡은 볼턴 수비수들에게 집요하게 달려들었다.

압박(Press).

21세기 축구에 보편화된 전술을 처음 경험하는 볼턴 수비수들은 연방 허둥댔다.

전방으로 패스를 보내지 못하거나, 패스 미스를 저질렀던 것.

“침착하게 해! 당황하지 말고 가까이 있는 동료에게 패스를 돌리라고!”

볼턴의 윌리엄 리딩 감독은 허둥대는 수비수들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그때 공을 잡은 수비수 로이 하틀이 뒤로 공을 흘렸다.

준영이 압박을 걸어오자, 골키퍼 쪽으로 공을 보내려 했던 것.

그런데 때마침 사각에서 파고들던 바비 찰튼이 냉큼 그 공을 주워서는 골키퍼를 제치고 골문 안으로 공을 밀어 넣었다.

2 대 1.

전반 29분, 맨유는 다시 리드해 나가기 시작했다.

“수비수를 전방에 박아 놓은 이유가 있었구만.”

“그러게. 저렇게 적진에서 마크를 걸어 공을 빼앗는 건 농구에서 볼 만한…….”

“앗! 또 뺏었다!”

바비 찰튼의 골의 여운이 가시기도 전, 준영이 볼턴 선수들의 패스를 잘라 냈다.

그가 곧장 골문으로 돌진해 들어가자, 볼턴 선수들은 허둥지둥 마크에 나섰다.

“막아! 막으라고!”

악을 쓰며 달려드는 볼턴 수비수들을 헛다리 짚기로 농락하던 준영은 반대편 쪽으로 패스를 보냈다.

그 패스를 받은 건 데니스 바이올렛.

자타공인 유나이티드 최고의 명사수는 아주 가볍게 득점에 성공했다.

준영 쪽으로 수비가 쏠려 완전히 노마크였기 때문.

“세상에, 벌써 3 대 1이야?”

“아악! 화장실 다녀온 사이에 2골이나 들어갔네!”

지켜보던 관중들도 얼떨떨한 기분을 금치 못했다.

1분 사이에 또 한 골이 터질 줄이야!

하지만 계속 당황스러운 건 원정을 온 볼턴 팬들의 몫이었고, 홈팬들은 신나게 축제를 벌였다.

“John Young Lee! John Young Lee! John Young Lee!”

“오, 존이 또 뺏었다!”

“좋아, 또 넣어… 아니, 저런 개자식!”

신나는 함성은 분노 섞인 야유로 바뀌었다.

방금 준영이 공을 끊어 내자, 볼턴 수비수가 발바닥이 보이는 태클로 그를 쓰러트렸기 때문.

“우- 퇴장시켜라! 퇴장!”

“그래, 저번에 우리가 퇴장당했으니 저놈들도 당해야지!”

관중들의 원성에도 불구하고, 파울한 선수는 퇴장을 당하지 않았다.

심판에게 구두로 단단히 주의를 들었을 뿐.

“존, 괜찮아? 다친 데 없어?”

걱정스러운 던컨의 물음에 잔뜩 얼굴을 찌푸리고 있던 준영은 손을 내저었다.

태클에 채였을 땐 정말 아팠다.

그래도 움직이는 데는 큰 문제가 없었다. 어딘가 꺾이거나 파열되진 않았던 것.

“다들 조심해. 저놈들, 이제 거칠게 대응할지 몰라.”

준영의 경고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지고 있는 팀이 상황을 인정하지 못하고 거칠게 나오는 일은 흔히 있으니까.

더는 골을 먹지 않겠다고 위협을 할 의도도 있지만, 점수가 벌어지면서 냉정을 잃어버리는 경우도 흔했기 때문.

지금 볼턴의 경우는 양쪽 모두인 듯했다.

1분 사이 연속 골은 그들의 마음을 크게 흔들어 놓기에 충분했다.

“맞대응할 필요 없어. 이제 급한 건 볼턴이니까!”

라인 가까이 온 머피 코치는 선수들에게 차분한 공격을 지시했다.

이에 유나이티드 선수들은 후방으로 공을 돌리며 여유 있게 경기를 진행해 나갔다.

이러니 볼턴 쪽에서도 공수 모두가 전진하며 공을 빼앗으려 했다.

적어도 전반전에 한 골은 더 만회해야 후반전을 기대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만회를 노리는 급한 마음은 경기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쓸데없이 거친 차징으로 파울만 만들거나, 지나친 전진으로 맨유 선수들이 파고들 공간만 만들어 준 것.

“에디, 알 쪽이 비었어!”

“알고 있어!”

에디 콜먼은 측면을 파고든 알버트 스캔론에게 패스를 정확하게 밀어 주었다.

드래그 백으로 수비수를 제쳐 낸 스캔론은 페널티 박스 왼쪽에서 과감하게 슛을 날렸다.

제대로 감긴 슈팅은 멋진 곡선을 그리며 골대 안으로 떨어졌다.

“Wow! That was fantastic!”

“4골 째야! 전반에만 4골이라고!”

망연자실한 볼턴 선수들은 신나게 골 셀레브레이션을 펼치는 유나이티드 선수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맙소사,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꼭 뭔가에 홀린 것 같아.”

어려운 경기가 될 것은 분명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들은 강등권의 하위 팀도 아닌데 이렇게 스코어가 벌어질 줄이야!

더 끔찍한 건 아직 시합이 끝난 것도 아니라는 점.

정말이지 눈앞이 깜깜했다.

***

전반에만 4골을 터트린 유나이티드는 후반에도 그 기세를 멈추지 않았다.

후반 12분, 로저 바인의 긴 롱 패스를 준영이 헤딩으로 떨어트려 주자, 뛰어 들어온 바비 찰튼이 다섯 번째 골에 성공했다.

“우와, 해트트릭이잖아!”

“오늘 맥주는 네가 쏴라, 바비!”

무엄하게도(?) 바비 찰튼 경의 머리를 잡고 쓰다듬던 준영은 점수가 바뀌고 있는 스코어보드를 보았다.

5 대 1.

이 기세라면 7 대 1, 미네이랑 스코어도 가능하지 않을까?

‘물론 이 시대 사람들은 미네이랑 참사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골이 더 들어갈 시간은 충분했고, 선수들의 의욕 또한 넘쳐흘렀다.

하지만 볼턴이라고 마냥 기가 죽어 있던 건 아니었다.

4골 차가 난 상황에서도 로프트하우스와 스티븐슨은 어떻게든 만회를 하려 애썼다.

“지더라도 대패는 면해야지!”

“맞아요. 이대로는 번든 파크로 돌아갈 면목이 없으니까.”

볼턴을 이끄는 이 두 공격수들은 대량 득점으로 방심한 맨유의 빈틈을 정확히 파고들었다.

사촌 동생 던컨 에드워즈를 상대로 돌파에 성공한 스티븐슨은 맨유 골문 앞 중앙으로 뛰어드는 로프트하우스를 향해 크로스를 올렸다.

이에 로프트하우스는 이마로 살짝 공을 돌려놓는 기막힌 헤딩슛으로 만회 골을 넣는 데 성공했다.

“오, 역시 비엔나의 사자!”

“죽어도 그냥 죽진 않는군. 허허!”

넉넉한 점수 차 때문일까.

실점을 했어도 유나이티드 팬들은 딱히 흥분하지 않았다.

물론 일부 스코어 베팅을 한 도박꾼들은 펄펄 뛰긴 했지만.

아무튼 비엔나의 사자가 보여 준 투혼은 아무런 변화를 일으키지 못했다.

볼턴 선수들의 희망이 불타오르기 전, 찬물이 퍼부어졌으니까.

“패스해라! 저놈들에게 발버둥 치는 건 소용없다는 걸 알려 줄 테니!”

킥오프를 하기 무섭게, 전방으로 달려가는 데니스 바이올렛에게로 패스가 연결되었다.

준영에게 훔쳐 배운 헛다리 짚기에 자신의 독특한 페인팅을 섞은 데니스는 수비수 둘을 매달고 다니다, 오른쪽 구석에서 강슛을 날렸다.

거의 각이 없었음에도 상단 구석을 정확하게, 그것도 위력적으로 날아든 슛에 골키퍼가 손쓸 틈은 없었다.

다시 1분 사이에 골.

이번에도 주인공은 데니스 바이올렛이었다.

로프트하우스의 만회 골의 여운이 식기도 전에 터진 여섯 번째 골.

데니스가 단언한 대로 볼턴 선수들로 하여금 발버둥 치는 건 소용없음을 느끼게 만들었다.

“젠장, 경기는 대체 끝나는 거야!”

“이제 그만하고 싶어!”

볼턴 선수들에게 불행하게도 아직 후반전은 25분이나 남아 있었다.

***

나다니엘 로프트하우스는 볼턴에서 선수 생활을 하고 지도자 생활도 볼턴에서, 심지어 이후 구단 임원과 회장직까지 맡은 진정한 원클럽맨입니다.

그가 비엔나의 사자라는 별명을 얻게 된 건 1952년 오스트리아 원정 경기에서 3-2로 승리할 때 중요한 두 번째 골을 넣었기 때문입니다.

그 골을 넣기 직전에 상대 수비의 견제가 너무 심해서 팔꿈치에 얼굴을 맞고, 뒤에선 태클 맞고, 그다음엔 골키퍼와 충돌해서 쓰러졌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다시 일어나 꿋꿋이 뛰어 그런 별명이 붙었다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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