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92. 뿌린 대로 거두리
“저번에 만났을 때 섕클리가 그러더군요. 존은 좋은 선수일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재능을 갖고 있다고요.”
“경영 쪽도 그렇다는 거로군.”
절대 팔아선 안 될 선수.
섕클리는 그렇게 말했다. 만약 자신이 허더스필드 구단에서 충분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면 존 Y. 리를 팔지 않았을 거라고.
“참으로 궁금하단 말이야. 과거에 어디서 어떤 교육을 받았는지…….”
“거기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더군요.”
지금까지 선수들이나 그의 주변 인물들에게 들은 과거 행적은 별거 없었다.
그냥 한국 출신이라는 것, 그리고 프랑스에 머물렀다 영국에 왔다는 것 정도다.
안 그래도 그 점을 궁금하게 여기는 기자들이 많다.
엉터리 이야기를 꾸며 대는 작자들도 있지만, 최근에는 구단 사람들을 대상으로 존 Y. 리에 대해서 계속 정보를 모으는 이들도 있는 듯했다.
취재원이랍시고 하드먼을 찾아와서 물어본 자들도 있었다.
“버스비, 자네는 궁금하지 않나? 존의 과거에 대해서 말이야.”
“물론 저도 궁금하죠. 그렇다고 말하길 꺼리는 친구에게 강권하고 싶지는 않아요.”
말하지 않으려 하는 데는 이유가 있을 터.
자신의 호기심 때문에 불편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선수가 최상의 컨디션으로 최고의 실력을 유지할 수 있게 만드는 게 감독의 할 일이니까.
“뭐, 우리 구단에 해가 되지만 않으면 굳이 캐물을 필요는 없겠지.”
“예. 아무튼 베오그라드 원정은 존이 준비한 대로 하겠습니다.”
회장과의 대화를 마친 버스비는 곧바로 다음 경기 대비를 하러 갔다.
베오그라드 원정 전에 국내에서 치러야 하는 경기가 세 시합 남아 있었다.
입스위치 타운과의 FA컵 경기, 아스날 원정 경기, 무엇보다 1월 18일에는 볼턴과의 시합이 있었다.
지난번 원정에서는 4 대 0으로 대패했기에, 이번에는 제대로 갚아 주리라 다짐했다.
***
깡! 깡!
모즐리 남쪽 외곽에 자리한 작은 철공소.
동력 해머가 내리치는 소리가 쉴 새 없이 울려 퍼지는 이곳에서 준영은 방금 생산된 철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세모 모양의 날에 휘어진 슴베, 그리고 나무 자루를 달고 있는 이것은 바로 호미였다.
“어떻습니까, 사장님? 판매는 괜찮습니까?”
준영의 물음에 이곳 철공소 주인인 린든 사장은 활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주문이 계속 늘고 있어. 쓸 만하다는 입소문을 잘 타고 있는 모양이야.”
“그럴 겁니다. 아주 편리한 도구니까요.”
일전에 준영은 모즐리 성요셉 성당의 신부 찰스에게서 린든의 사업을 도와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래서 생각하다 떠올린 게 바로 호미.
한국에선 흔해 빠진 농기구였지만, 해외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21세기에 와서 원예용으로 각광을 받고 온라인 쇼핑몰을 통해 세계 곳곳에 팔려 나간 히트 상품이다.
이 시대 영국에도 작은 정원을 가꾸거나 텃밭을 일구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 이들에게 간단히 땅도 파고, 잡초도 뿌리째 뽑아낼 수 있는 호미는 상당히 유용한 도구가 아닐까?’
그래서 린든 사장에게 추천해 주며 만들어 보도록 했다.
준영이 그려 온 그림을 보고 만들어 본 린든은 크게 만족했다.
제작이 그리 어렵지도 않은 데다, 본인도 집에 정원이 있어 직접 사용해 보니 몹시 편리했기 때문.
호미 하나만 있으면 모종삽이나 괭이 등 다른 자질구레한 도구들은 필요가 없을 정도였으니까.
그래서 린든은 곧장 대량으로 생산, 기발한 신제품이라며 철물상들에게 팔았다.
그리고 상당한 호평을 받으며 판매량이 늘고 있었다.
“근데 베껴서 파는 놈들이 나올 것 같단 말이야. 특허 등록을 했으면 좋겠는데…….”
“힘들 겁니다. 한국에 아주 오래전부터 있었던 전통 농기구니까요.”
같은 이유로 훌라후프도 특허를 따내지 못했다.
수백 년 전에 나무로 비슷하게 만든 장난감이 있었다는 이유 때문.
그래도 충분한 수익을 거뒀고, 인지도도 쌓았기에 준영과 조셉은 만족했다.
“뭐, 호미 가지고 너무 욕심을 내지 마세요. 안전벨트 버클도 만들고 있잖아요.”
“하하, 그야 그렇지.”
린든의 철공소에서는 애S턴 마틴에 납품하는 안전벨트 버클도 생산 중이었다.
그 안전벨트는 21세기에서 사용되는 3점식 방식으로, 준영이 타고 온 DB12에 있던 것을 참고로 만들었다.
데이비드 브라운은 처음에 그것을 특허 신청하려다 포기했다.
안전벨트에 대한 사회적인 인식이 많이 부족해서 판매가 시원찮을 것 같다고 예상되었기 때문.
그래서 ‘이런 안전한 도구는 여러 회사에서 다 같이 쓰며 운전자의 안전을 장려하자.’라는 식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그 결과 큰 수익은 얻지 못했지만 애S턴 마틴의 인지도는 높아졌고, 데이비드 브라운의 인망도 올라갔다.
홍보용으로 톡톡히 한몫을 한 셈이다.
“어이, 신입! 거기 망치 좀 가져와!”
“뭐라고요? 잘 안 들리는데?”
“망치 가져오라고! 망치!”
시끄러운 와중에 들리는 낯익은 목소리.
고개를 돌린 준영의 눈에 반가운 얼굴이 들어왔다.
‘신부님!’
“앗! 어떻게 네가 여기에……?”
신부님, 아니 윌리엄 터너도 준영을 알아보고 깜짝 놀랐다.
준영은 린든에게 양해를 구하고 터너를 조용한 곳으로 데려와 대화를 나누었다.
“신부… 아니, 터너 씨, 여기서 일하고 있었습니까?”
“그저께부터. 근데 댁은 여기 웬일이야?”
“그야 이 마을에 살고 있으니까요.”
“그랬나? 쳇! 날 아는 놈들이 없을 거라고 생각해서 왔더니만!”
투덜대는 터너에게 준영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왜요? 누구에게 쫓기고 있는 겁니까?”
“그래, 짭새랑 보그 가문 똘마니들에게. 지난번에 앙리 녀석 손봐 준 것 때문에 펄펄 뛰는 모양이더군.”
이번에 잡히면 감옥 아니면 군대에 강제 입대하게 될지 모른다고.
아무래도 보그 백작이 단단히 벼르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그래서 터너는 패거리들을 잠시 해산하고 조용해질 때까지 은둔하기로 마음먹었단다.
“그런 점에선 실패군요. 여기 모즐리에는 앙리가 종종 찾아오거든요.”
“젠장, 그 자식, 이 촌구석까지 와서 껄떡대고 다니는 거야?”
터너가 더 멀리 도망치지 못한 건 맨체스터 이외에는 아는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적당히 변두리 마을로 피해 있었는데, 여기도 앙리가 돌아다닌다니!
“뭐, 마주치지만 않으면 괜찮다고 봐요. 괜찮다면 트래퍼드 파크에 있는 내 공장에서 일해 볼래요? 숙식이 제공되고, 경찰이 찾아올 일도 없는데.”
준영의 제안에 터너는 혹하는 기색을 보이다 이내 의심스러운 눈길을 보냈다.
“내가 댁을 어떻게 믿고? 앙리랑 아는 사이 아냐? 그 자식한테 신고하려는 거지?”
“그런 짓은 안 해요. 터너 씨가 원치 않는 처지에 놓이는 건 바라지 않으니까. 물론 뒷골목에서 건달 짓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터너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오늘까지 겨우 두 번 만나 봤을 뿐이다.
그런데 왜 이리 친근하고 살갑게 대하는 건지?
이미지 관리 차원일까?
신문에서 존 Y. 리가 맨체스터의 걸식자들에게 식사도 제공하고, 학생들에게 장학금도 제공한다는 얘기도 보았다.
하지만 생판 남인 자신에게까지 신경을 써 줄 이유는 없지 않은가.
“도대체 이유가 뭐야? 내가 유나이티드 팬이라고 그러는 건 아닐 테고?”
“그게… 터너 씨는 내가 아는 분이랑 많이 닮아서요.”
“혹시 신부님이라고 하는?”
“맞아요. 그분에게 정말 많은 것을 배우고 보살핌을 받았죠.”
준영의 말에 터너는 어이없는 표정을 짓다가 실소를 토했다.
“바보 아냐. 닮았다고 덥석 도와줘? 내가 어떤 사람인 줄도 모르고? 그러다 된통 당하는 수가 있어.”
“모르고 도와주는 건 아닙니다. 터너 씨에 대해선 들을 만큼 들었으니까요.”
“쳇, 앙리 그 자식이 쓸데없이 혀를 놀렸나 보군!”
미래의 터너 신부님을 잘 아는 준영이었기에 그가 뼛속까지 악인은 아닐 거라 믿었다.
그렇지 않다면 방금 전에 그랬던 것처럼 사람을 함부로 믿지 말라는 충고를 하진 않았을 것이다.
“자, 어쩔 겁니까? 제 공장에서 일해 보겠어요?”
“흠…….”
잠시 고민에 잠겼던 터너는 결국 수락했다.
살면서 이렇게 자신에게 선뜻 손을 내밀어 준 사람은 거의 없었으니까.
“그렇게 요청하니 한번 해 보지, 뭐. 하지만 맘에 안 들면 바로 때려치울 테니 그리 알라고.”
“네, 잘 생각했어요.”
준영은 린든 사장에게 양해를 구한 뒤 터너를 데려갔다.
앞으로 그가 어떤 길을 가게 될지, 자신이 알고 있는 것처럼 성직의 길로 갈지는 알 수 없었지만, 곁에서 보살펴 줄 생각이었다.
신부님이 자신에게 그렇게 베풀었던 것처럼.
***
1958년 1월의 세 번째 토요일.
올드 트래퍼드에 모인 4만의 관중들은 경기가 시작되기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후, 필드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볼턴 원더러스 선수들이 입장했다.
그러자 유나이티드에 대한 환호 섞인 응원과 볼턴에 대한 야유가 뒤섞여 울려 퍼졌다.
“이겨라, 유나이티드!”
“번든 파크에서 당한 수모를 갚아 줘!”
“이 말 대가리(* The Trotters. 볼턴 원더러스의 별명.) 새끼들아! 관짝에 들어갈 준비는 됐냐?”
하얀 상의에 군청색 하의의 유니폼을 입은 볼턴 선수들은 관중들의 격한 반응에 당혹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 우리더러 그러는 거야?”
“그 경기가 그리된 건 심판 탓인데…….”
9월의 그 경기에서 준영의 결백을 증명했던 볼턴의 공격수 데니스 스티븐슨은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그에게 사촌 동생 던컨 에드워즈가 유감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어쨌거나 형네 팀이 득을 본 건 사실이잖아. 득점도 아주 푸짐하게 넣으셨고 말이지.”
“그거야…….”
“그날 형도 골을 넣었지.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야.”
판정 혜택을 누려 놓고 이제 와서 억울함을 호소해도 통하지 않는다.
던컨에 이어 그날 가장 큰 피해자였던 준영이 엄포를 놓았다.
“최소 4골은 먹을 거 각오하쇼.”
“으윽…….”
“그리고 나 오늘 전진 배치되니까 긴장 타시고.”
대놓고 공격 일변으로 간다는 준영의 포고에 볼턴 선수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다른 팀에서는 저 괴물딱지 동양인을 막을 선수를 구한다고 난리였다.
하지만 볼턴은 이렇다 할 영입도, 마땅한 대비책도 세우지 못했다.
그 상태로 성난 악마들의 소굴에 던져진 것이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그래요. 어떻게든 해 보죠.”
일단은 최선을 다해 보자.
그리 결심한 볼턴 선수들은 각자 위치로 이동했다.
삐익-!
심판의 휘슬과 함께 27라운드 경기가 시작되었다.
“수비! 일단 수비에 집중해!”
“섣불리 공간을 내주다간 우리가 당한다!”
볼턴의 작전은 선수비 후역습.
잔뜩 독이 오른 맨유의 맹공을 막아 내다 양 주포 나다니엘 로프트하우스와 데니스 스티븐슨을 이용해 득점을 노릴 생각이었다.
그렇게 내려앉아 수비진을 구축한 볼턴 선수들 앞으로 거인이 성큼성큼 접근해 왔다.
‘젠장, 마치 공성탑 같군.’
중세 전쟁터에서 성벽을 공격하기 위해 사용한 거대 전투 병기.
볼턴 선수들의 눈엔 준영이 그리 보였다.
***
외갓집이 시골이라 어릴 때 농사짓는 거 구경하고 그랬는데, 밭에 일하러 갈 때 다른 건 몰라도 호미는 항상 챙겨 가시더군요. 진정한 올라운드 농기구이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