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전드 1957-86화 (86/400)

Round 86. 나라 잃은 민족

나이는 40대 중반 정도?

체격은 다른 노동자들과 비슷비슷했지만, 발끝으로 공을 다루는 기술은 예사롭지 않았다.

방향이나 속도를 적절히 조절해서 수비를 뚫고 가더니, 임팩트가 정확한 슈팅을 아주 시원하게 날렸다.

‘오!’

준영은 저도 모르게 탄성을 토했다.

필드도 아니고 골대도 없었지만, 그럼에도 마치 경기장에서 골 그물을 흔드는 멋진 슛을 본 것 같았기에.

짝짝짝!

준영이 박수를 치며 다가오자, 다들 행동을 멈췄다.

방금 슈팅을 날린 사내도 마찬가지.

그는 눈앞에 나타난 키 큰 동양인 청년이 누군지 금방 알아봤다.

요즘 축구계에 소문이 자자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5번, 그리고 자신이 일하게 된 이 공장의 사장 존 Y. 리라는 사실을.

“처음 뵙겠습니다, 사장님.”

“예, 안녕하세요.”

간단히 인사를 나눈 준영은 사내가 입고 있는 작업복의 명찰로 눈길을 돌렸다.

“성함이 에드먼드 지…….”

“짐사입니다. 에드먼드 짐사.”

명찰에 적힌 ‘Giemza’라는 철자를 어찌 읽어야 하나 머뭇거리던 준영에게 사내, 아니 에드먼드가 자신의 이름을 알려 주었다.

“짐사… 영국 성씨는 아닌 것 같은데, 외국에서 왔나요?”

“네, 폴란드 출신이죠. 사장님처럼 돌아갈 수 없는 곳에서 왔습니다.”

에드먼드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고국 이야기는 별로 안 좋아하는 것 같아 준영은 냉큼 화제를 돌렸다.

“실력이 좋으시더군요. 선수 출신 맞으시죠?”

“네, 옛날에 공을 좀 찼지요.”

좀 찬 수준이 아닌 것 같은데.

준영의 예상을 뒷받침하듯, 방금 에드먼드가 찬 공을 주워 온 근로자가 끼어들어 말했다.

“좀 찬 수준이 아니잖아. 왕년에 월드컵도 나갔으면서!”

“정말입니까?”

깜짝 놀란 준영의 물음에 노동자는 약간 어눌한 발음으로 이야기를 했다.

“그래요. 이 친구는 폴란드 국가대표였죠. 나치 놈들이 전쟁만 안 일으켰어도 대단한 선수가 되었을 텐데…….”

어쩐지 발놀림이 예사롭지 않더라니.

준영의 감탄 어린 눈길이 부담스러웠던지 에드먼드는 손을 내저었다.

“다 지나간 일입니다. 왕년에 이런저런 사연 없는 사람이 한둘도 아니고.”

과거에 어쨌든 지금은 일개 노동자일 뿐.

그런 신세를 딱히 한탄할 필요는 없었다.

왕년에 공 좀 차다가 몸 쓰는 일을 하는 이들이 어디 한둘이던가.

다만 아쉬운 게 있다면 시기를 잘못 만났다는 것.

한창 축구에 눈을 뜰 즈음에 전쟁이 터져 버렸고, 거기에 휩쓸려 이리저리 떠돌다 보니 고국에서 머나먼 영국까지 와 있었다.

이 나이에 공을 발에서 떼지 못한 것도 그 아쉬움 때문이다.

“짐사 씨는 지금 무슨 일을 하시죠?”

“재료 운송 및 상품 배송을 맡고 있습니다.”

에드먼드는 한쪽에 세워진 트럭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수입은요? 혹시 부족하지 않으세요?”

“많진 않지만, 생활하기에 충분할 정도는 되죠. 근데 그건 왜 물으시는지?”

의아해하는 그에게 준영은 곧장 이유를 밝혔다.

“제가 사는 마을 축구 클럽에 유소년 팀을 만들 계획이 있거든요. 근데 아직 감독을 맡길 사람을 찾지 못했죠.”

그러면서 준영은 충분한 급료와 교통비를 제공해 주겠다고 제의했다.

관심 있어 하던 에드먼드는 이내 곤란한 기색을 보였다.

“감독이라니 고마운 제안이긴 한데, 누굴 가르쳐 본 경험은 없어서…….”

“그리 거창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어요. 그냥 아는 대로 가르쳐 주면 되는 거니까.”

“축구계를 떠난 지 꽤 되었는데도 괜찮습니까?”

“아직 실력은 충분하시던데요. 저는 물론이고, 도와줄 사람들도 있으니까 부담스러워하지 마세요.”

거듭된 준영의 요청에 결국 에드먼드는 수락했다.

그리하여 모즐리 AFC 유소년 팀은 월드컵 출전 경력을 가진 굉장한 경력의 지도자를 맞게 되었다.

***

“유소년 팀 감독을 구했다고? 그것도 폴란드 출신이라…….”

“듣자 하니 1938년 프랑스 월드컵 때 나갔다고 하더군요.”

저녁에 준영으로부터 이야기를 들은 알버트는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선조가 망명한 폴란드인이다 보니, 폴란드 망명자들에 대해 애틋한 감정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일전에 이야기했네만, 이곳 영국엔 폴란드인들이 많이 머물고 있지. 전후에 그들에게 영주권을 지급하는 특별법까지 만들어졌을 정도로.”

“런던에 망명 정부도 있다는 이야기도 하셨죠.”

“그래, 내가 정치인으로 활동할 때 그쪽 사람들과도 많이 만났어.”

지금도 곧잘 연락하고, 종종 런던을 찾아가 살펴보곤 한다고.

그때마다 안타까운 마음을 감추지 못한다고 했다.

“지난 전쟁 때 20만이 넘는 폴란드 병사들이 연합국과 함께 싸웠어. 하지만 전쟁이 끝나고 그들에게 돌아온 건 반동이라는 낙인뿐.”

폴란드 땅에 들어선 공산 정권은 망명 정부나 자유 폴란드군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귀국한 장병들은 심한 핍박을 받고, 타향에 남은 이들도 이방인 취급을 받았다.

“존, 공산 정권이 1990년대에 무너진다고 했었나?”

“아직 한참 남았죠.”

앞으로 약 30여 년 후.

갓난아기가 성인이 될 정도로 긴 시간이다.

그 오랜 시간 동안 망명자들은 영국 사람들에게 곱지 않은 눈길을 받으며 살아야 한다.

멋대로 눌러앉아서 일거리를 빼앗는 불청객이라 비난을 받으면서.

“이 늙은이가 한 가지 부탁을 해도 되겠나?”

“말씀하십쇼.”

무슨 말을 할지 짐작하고 있던 준영의 귀에 알버트의 말이 들려왔다.

“앞으로 자네 사업은 번창할 거고, 직원들도 많이 두겠지. 그러니 되도록 불쌍한 망명자들을 외면하지 말아 주게.”

“걱정 마십쇼. 저도 이 나라에선 이방인인 데다, 한때 나라를 잃었던 민족의 후예인걸요.”

해방된 지 고작 10여 년.

하지만 나라는 동강 났고, 동족 간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겪었다.

어째서 이런 참혹한 운명을 겪어야만 하는가!

이억관은 종종 그 억울한 마음을 토로하곤 했다.

준영도 그 기분을 충분히 공감하고 있었다.

30년 후에 자유를 되찾는 폴란드와 달리, 한국은 70년 후에도 분단을 이어 가고 있었으니까.

‘내가 그 역사를 바꿀 수 있을까?’

잠시 생각해 보던 준영은 이내 쓴웃음을 지었다.

축구 선수 혼자서 국가와 민족의 역사라는 무거운 수레바퀴를 돌리기란 너무 벅차게 느껴졌으니까.

***

새해에 꿀 같은 휴식을 취했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1월 4일 FA컵 3라운드 경기로 다시 시동을 걸었다.

상대는 워킹턴 AFC.

잉글랜드 북서부 캄브리아 워킹턴에 연고를 둔 이 팀은 현재 3부 리그 북부에 속해 있었다.

“리틀 존은 안 나온 건가?”

“에디 콜먼이 대신 나온 것 같아.”

“큰 놈이 있다가 없으니 뭔가 허전해 보이는걸.”

준영이 없는 걸 아쉬워하는 맨유 팬들이 있었지만, 그래도 다들 유나이티드의 낙승을 예상했다.

골키퍼 해리 그렉, 주장 로저 바인, 던컨 에드워즈와 바비 찰튼, 토미 테일러와 데니스 바이올렛 등등.

주전급 선수들이 거의 고스란히 출전했으니까.

그런데 뜻밖에도 선제골은 워킹턴이 가져갔다.

워킹턴의 윙어 클라이브 콜브리치가 기습적으로 날린 중거리 슛이 그대로 구석에 박혀 버린 것.

경기 시작하고 겨우 전반 5분에 벌어진 실점이었다.

“상대가 잘 차기도 했지만, 너무 놔줬군.”

관중석에서 경기를 보던 준영은 혀를 찼다.

골문과 거리가 있다 보니, 다들 패스를 하겠거니 하고 느슨하게 놔뒀는데 그게 화근이 되고 말았던 것.

홈팀인 워킹턴의 팬들은 예상 밖의 상황에 기뻐했지만, 유나이티드 응원단은 달랐다.

“정신 차려, 유나이티드!”

“새해 벽두부터 지려는 건 아니겠지?”

버스비의 아이들은 곧장 반격을 펼쳤다.

그러나 동점 골은 쉽게 터지지 않았다.

럭키 골 하나를 따낸 워킹턴이 극단적인 방어 태세로 나왔기 때문.

21세기식으로 말하자면 골대 앞에 버스 두 대를 세워 둔 수준이라 할 만했다.

이렇게 골문 앞에서 빽빽하게 공간을 점하고 있으니, 슛은 물론이고 패스도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이런 답답한 양상은 전반전 내내 계속되었고, 후반 초반까지 이어졌다.

“설마 여기서 덜미를 잡히진 않겠지?”

준영과 마찬가지로 출전하지 못한 리암 휄란은 조금 불안한 마음으로 경기를 보고 있었다.

“설마가 사람 잡는 법이라곤 하지만, 그래도 지진 않을 것 같아.”

준영이 보기에 워킹턴의 수비는 한계가 있어 보였다.

지나치게 내려앉았고, 양쪽 측면에서 크로스도 너무 자주 올라왔다.

“울버햄프턴 정도면 모를까, 3부 리그 팀 수준으론 우리 팀 공격력을 끝까지 막을 수 없어.”

“그야 그렇지만…….”

“좀 더 침착하게 집중력 있는 공격을 펼치면 경기는 쉽게 풀릴걸.”

“우아아아아!”

대화를 나누는 사이, 던컨 에드워즈가 직접 공을 몰고 상대 페널티 박스로 들어왔다.

워킹턴 수비수들이 던컨에게로 황급히 몰려든 순간, 그들의 빈틈을 뚫은 던컨의 칼날 같은 패스가 데니스 바이올렛에게 연결되었다.

논스톱으로 살짝 방향만 틀어 놓은 데니스의 슛은 골키퍼가 손댈 틈도 없이 골문 안으로 들어갔다.

“드디어 들어갔다!”

“역시 데니스 바이올렛이 해결해 주는구만!”

후반 9분에 터진 동점 골.

이후 분위기를 탄 맨유는 2분 후에 역전 골을 터트렸다.

이번에도 결정을 지은 건 데니스 바이올렛.

그는 여세를 몰아 6분 후, 또 한 골을 추가하며 해트트릭을 기록했다.

“진짜 골 냄새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맡는다니까.”

“정말 스트라이커라는 단어가 딱 어울려.”

경기는 데니스의 대활약을 등에 업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승리로 끝났다.

밤늦게 동료들과 함께 맨체스터로 돌아온 준영은 뒤풀이에 어울리기 위해 클럽을 찾았다.

“여긴 자주 오던 곳이 아니네?”

“최근에 개업한 곳이지. 분위기도 괜찮다고 소문이 자자해.”

아메리칸 스타일의 댄스 홀로 꾸며진 곳에서는 이미 많은 젊은 남녀들이 로큰롤 연주곡에 맞춰 춤을 추고 있었다.

‘분위기가 좋다기보다 물이 좋아 보이는걸.’

두리번거리며 살펴보던 준영은 바로 뒷자리에 있던 이들과 눈길이 마주쳤다.

레이서 차림을 한 이들 속에 낯익은 얼굴이 있었다.

양팔에 미녀들을 끼고 시시덕대고 있는 그 청년은 바로…….

“앙리?”

앙리 드 보그.

일전에 리즈에게 저주(?)의 인형을 선물하려 했던 녀석.

그도 준영을 알아보고는 바로 정색을 했다.

하지만 이내 침착한 모습을 보이려 애썼다.

“여, 이런 곳에서 만날 줄은 몰랐군. 동료들이랑 뒤풀이라도 하러 온 건가?”

“맞아. 그쪽은?”

“나야 서민 문화 체험 및 다양한 인간관계를 맺어 볼 마음에 찾아온 거지.”

향락을 즐기러 왔다는 말을 쓸데없이 길게 하다니.

그만큼 제 발이 저린 모양이다.

심드렁한 준영의 표정에 앙리는 친근하게 어깨를 두들겼다.

“리즈에겐 비밀로 하자고. 풍류와 낭만을 좇아온 건 서로 피차일반 아닌가.”

“누가 피차일반이란 거야.”

“뻔뻔하긴. 자네도 은근히 기대한 게 있으니 여기 온 거…….”

쾅-!

순간, 클럽 문이 거칠게 열리며 고급 정장들이 우르르 몰려 들어왔다.

“저, 저 녀석들은!”

“터너다! 미친개 윌리엄 터너의 패거리들이야!”

앙리와 그 일행의 외침에 준영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성난 늑대같이 인상을 일그러뜨리고 있는 회색 정장의 청년.

보자마자 ‘틀림없이 이 사람이다!’라는 느낌이 딱 들었다.

‘맙소사, 신부님!’

윌리엄 터너.

친할아버지처럼 자신을 보살펴 준 보육원 원장 신부님이 70년 전의 젊은 모습으로 눈앞에 나타났다.

***

에드먼드 짐사는 1930년대 폴란드에서 손꼽히는 실력을 가진 공격수였습니다. 프리킥을 굉장히 잘 찼다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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